[응답하라1994] 전산학개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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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이와 해태와 삼천포가 등장하지만,
아직은 어느 쪽으로도 커플링을 할 수는 없는, 1994년 5월 어느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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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공 vs. 의예 축구 시합날, 밤]
훌쩍.
흡.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온다
고인 눈물을 대강 손등으로 슥슥 닦고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꼬깔콘을 집어들어
복슬복슬하게 구겨진 종이조각들이 깔린 상자 안에
경건히 하나씩 가지런히 놓는다
오빠가 주신 걸... 세 개나 못 지키다니.. 나가 무슨 팬이당가... 나가 죽자 죽어...
상자 안에 줄을 맞춰 놓인 꼬깔콘의 개수를 눈으로 세자니
방금 미처 말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3개의 꼬깔콘이 생각나서
바보같이 먹고 있는 걸 보고만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로
다시 한번 눈물이 울컥 솟는다
혹시라도 물기가 꼬깔콘 위에 떨어지기라도 할까봐
급히 눈물을 닦고 상자 뚜껑을 살짝 눌러 덮는다
다시는 누가 건드리지 못하게 어디에 보관해둬야 할텐데
좀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자기 방인데도 불안하다
잠깐 방안을 둘러보며 망설이다가
흰 종이 한장을 꺼내서 상자 크기에 맞춰 자른다
그리고 필통에서 빨간색 싸인펜을 꺼내서 큼지막하게 쓴다
【 DON'T TOUCH! 건드리면 죽음! 】
제법 위협적으로 보이는 메모를 상자 위에 꽂아넣고
몇마디 더 써놔야할까 고민하는데
조심스런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똑.
반사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한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
제 방을 두드릴 사람이 누군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제게 목이 졸려서 컥컥 거리며 버둥거리던 삼천포를
밖에서 동향을 살피고 있던 해태가 놀라서 방에 들어와 제게서 떼어내 끌고 나갔으니
설마 이제와 또 삼천포가 오진 않았을게고
2층에서 나는 큰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올라온 나정이
꼬깔콘의 의미와 삼천포가 그걸 먹어버렸다는 상황을 확인한 뒤에
오빠가 준 귀한 물건을 그럴 수는 없다며 제가 더 흥분해서
미친 거 아이가, 저 자슥 내가 죽이주까. 하고 펄펄 뛰는 바람에
겨우 괜찮다며 달래서 내려보냈으니까 나정도 아닐거고
그렇다면 하숙집 아주머니신가,
아니 혹시 집에서 전화라도 온 건가,
싶어서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번의 노크 이후 조용해진 문을 열자
스탠드만 빼고 불을 끈 어둑한 거실 쪽으로 주춤 멀어지려던
제법 큰 사람 그림자가 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본다
"... 아즉 안 잤냐"
바스락 소리를 내며 쭈뼛쭈뼛 다가온 해태가
웅얼거리는 작은 소리로 묻는다
"뭔일이다냐"
꽤나 목을 치켜올려야 얼굴에 닿는 탓에
한 발 물러서려고 하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가슴께쯤을 보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마주치지 않은 시선이 슬쩍 훑고 지나가는게 느껴진다
모르는 척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조금 전부터 뒷짐지고 있던 손을 저에게 쓱,하고 내민다
바스작바스작하는 까만 비닐 봉지가 달랑거리고 있다
"....나정이한테 들었어야"
나정에게 무슨 말을 들었다는 건지,
그게 대체 이 비닐봉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고개를 갸우뚱하기만 할 뿐 대답도 미동도 하지 않는 윤진을
한참 기다리던 해태가 이내 성급하게 윤진의 손에 비닐봉지를 쥐어준다
제법 묵직한 느낌에 바스작거리는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면서 그제야 확하고 고개를 든다
"이게 뭐냐"
사람한테 이게 뭔 장난질이냐,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에 걱정이 역력해서 마음이 좀 약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역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놀리는게 아니라면,
비닐봉지를 확 펼쳐 꼬깔콘 박스를 꺼낸다
왜 하필 꼬깔콘인지.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힘껏 올려다보자
앙칼진 시선에 움찔한 해태가 천천히 대답한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나정이한테 듣고서 알았구만..
삼천포 갸도 몰라서 그랬응게.. 지금 엄청 반성하고 있어야
긍께.. 기분 풀어라잉.. 같은 건 아니지만서도..."
쓸데없는 짓이다 정말.
어차피 '진짜' 꼬깔콘 중 3개는 이미 삼천포의 뱃 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도로 뱉은 하나는 목을 조르면서 억지로 먹였다 차라리 목에 걸려서 죽어버려!)
겨우 꼬깔콘 한 박스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란 말이다
"나 이거 안 좋아하는디,"
"...그게 삼천포라고 생각하고 오독오독 씹어먹어야,
갸가 심성은 착한디 눈치가 쪼까 없어서 그런디,
그랴도 진짜 아를 씹어먹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면 니 속상해서 되간"
뭐래.
말도 안되는 소린데 피식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여전히 대답은 없지만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이 느슨해진 게
좀전보다 기분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던지 해태는 그제야 방문에서 한발짝 물러선다
"그럼 푹 자야, 속 너무 상해하지 말고"
속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그냥 고개를 끄덕한다
그런 윤진을 본 해태가 잠깐 망설이다가 막 문을 닫으려는 윤진을 부른다
"글고, 말이다"
"?"
"엄청시리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 좀 전해주라'
"응?"
갑작스런 말에 윤진이 큰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하더니 괜히 윤진의 어깨즈음의 허공 어딘가를 쳐다본다
"나가 간장게장 귀신이라, 그래도 그게 보통 귀허냐 순천 집에서도 일년에 몇번 못 먹는 건데
오늘 소원 풀이 했당게, 게다가 그간 먹어본 게장 중에 오늘 먹은 게 젤로 실하더라
니 아니고, 너거 어무이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맛난 게장 먹어나 봤겠는가"
괜찮아진줄 알았던 눈시울이 또다시 뜨거워지려고 해서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대답 없이 비닐봉지만 더 꼭 그러쥐고 있는 윤진의 기색을 힐끔 살핀 해태가
침을 꼴깍 삼킨 정도 쉬었다가 어색하게 손가락을 잡아당긴다
"... 그랑게, 꼭 감사하다고 전해드려야,"
윤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라고..."
해태는 초조하게 손을 바지자락에 쓱쓱 닦더니 쯧,하고 작게 소리낸다
"... 아까 나도 미안했으.. 그래 맛나게 먹고는 나가 못할 짓 혔다 니한테"
"... 됐어야, 다 잊어부렸당게"
고개를 푹 숙인 채 괜찮다는 대답만 하는 윤진의 기색을 살피려
몇번인가 고개를 갸우뚱해서 늘어진 머리 아래의 얼굴을 찾던 해태가 그저 물러선다
"그랴,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고, 친구"
고개를 끄덕인 윤진은 해태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 방문을 닫는다
손에 들고 있는 꼬깔콘 박스를 바라보자니 피식 웃음이 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친구.
어쩌면.
이 낯선 곳에서의 첫번째 친구.
+
"...어데 갔다 왔나?"
자리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던 삼천포가
방에 들어서자 고개를 반만 베개에 걸친 묘한 자세로 뒤틀어 올려다보며 해태에게 묻는다
"잠깐, 요 앞에 수퍼"
"아직 문 열었더나"
"이제 닫을라 하시데"
조금 지친 표정으로 주섬주섬 잠바를 벗은 해태는
부스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몸을 돌려 누워있는 삼천포를 바라본다
"안 자냐"
".... 내 무섭다"
입 꼬리를 축 내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해태를 바라보고 있던 삼천포가
해태의 질문에 그제야 말을 허락받은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린다
"뭐가 무서워야,"
"... 자가 진짜 내 죽일라카드라.. 니 그때 안왔으면 내 죽었을 수도 있다"
뭘 봤는지 사시나무 떨듯 무서워하던 삼천포가
급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무릎을 꿇고
불안하게 엄지손가락을 튕기며 중얼중얼 토로한다
"... 니가 잘못 했다잖어, 아까 나정이 설명 듣고도 모르겠냐"
".... 내 솔직히 모르겠다.. 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고 나니까 더 무섭다, 내 뱃 속에 자가 아끼는 물건이 있다는 거 아이가"
저 커다란 덩치에 쓰레기 형님이 맨날 니는 사람 죽인 살인마 맹키로 생겨가지고 하는 얼굴로 불안해하는 걸 보니
좀전에 자기가 만나고 온 조그맣고 톡 튀기면 통 튕겨나갈 것 같은 윤진의 모습이 대비되어 떠올라서
약간 웃음이 비직 새어나오려고 한다
웃음을 감추려고 아무 말 없이 컴퓨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안한 삼천포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따라붙는다
"... 니가 가 눈을 못 봐서 그란다, 진짜 내 죽을 수도 있다... 해태야 내 너무 무섭다"
"... 밤새 뭔 일이 있간디, 내일 아침 되면 다 잊어버릴 것이여 걱정말어"
애써 침착한 해태의 대답에도 불안하게 떨던 삼천포는 덥석 해태의 팔을 붙든다
"뭐여"
"해태야, 니 오늘 딴 데 가서 자지마라, 알겠제? 내 두고 가믄 안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약간 웃고 만다
제 팔을 간절하게 붙들고 원망스럽게 저를 올려다보는
삼천포의 깜빡깜빡 거리는 눈을 보다 피식 웃으며 삼천포의 팔을 토닥여 떼어낸다
"나가 여 말고 딴데 어디가서 잔다냐, 걱정 말어"
"진짜제? 진짜? 니 꼭 이 방서 자야된다 알겠제?"
"알았당게, 고만 맘놓고 자야,"
몇번이나 해태의 다짐을 받은 삼천포가
내키지 않는 듯 밍기적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 뒤
작게 고개를 흔들며 컴퓨터 전원을 켜고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새액하는 낮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불안해서 못 자겠다는 사람 어디 갔는지
새근새근 잠든 삼천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야, 잘 자라.
내일은 새 날잉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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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제목이 왜 전산학개론이냐면,
제목을 또 생각해내기가 힘들어서; 그냥 해태-윤진 & etc가 등장하는 현실 에피소드의 뒷이야기 또는 등장하지 않은 감정의 상플은 같은 제목 - 전산학개론 - 으로 써나가기로 했어 앞으로도 종종 그렇게 올려보려고
오늘 6화가 방송되면 이것도 지나간 이야기가 될 테니까 부랴부랴 올려봐~
읽어주는 냔들, 댓글 달아준 냔들 고마워 늘, 재미있어 했으면 좋겠다 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