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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2

april_m 2013. 11. 6. 16:39



(H's side) 






[1994년 9월 29일, 연대 컴공 vs. 고대 컴공 間 체육대회] 



헷취. 


체육대회가 한참이던 낮에는 아직은 따가운 햇볕에 여름인양 덥더니만 저녁이 되니 제법 공기가 쌀쌀하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고 옆에 놓아뒀던 잠바를 집어든다 
대강 잠바를 걸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 반. 

체육대회를 마친 뒤 시작된 뒤풀이가 어느새 3시간째 접어들고 있다 
통닭이랑 술을 사와서 운동장 스탠드 옆에 있는 잔디밭에서 마시고 있는거라 
이동 시간이나 자리 정리 시간 같은 건 없었고 그러니 이미 마실만큼 마시고 먹을 만큼 먹은 것 같은데 
자리가 파할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정기전을 생각하면 슬슬 마무리 해야할텐데 
10시 방향에 앉아서 고대 과대표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기태 녀석은 
도통 정리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내일 새벽부터 야구장 응원 자리 맡으러 가야하는 선발대인데다 
칠봉의 선발 등판 전에 응원하러 들려야한다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해야 초행길인 야구장까지 찾아가서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것인데 

조금 마음이 급해진 해태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기태에게 귀뜸을 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킨다 


"잘 지냈는가, 오랫만이네" 


일어나려는 해태의 어깨를 짚으면서 누군가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꽤나 묵직한 무게에 도로 자리에 주저 앉으면서 쳐다본다 


"어, 동훈이 아녀, 잘 지냈냐" 
"이렇게도 만나는구만," 


3월에 있었던 재경 순천고 총동문회에서 만나고 처음 얼굴을 보는 순천고 동창이다 
학교 다닐 때 친하게 지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드넓은 서울에 올라온 동문이라 
동문회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고 다짐했건만 
학기가 시작되고 신촌 생활에 적응하면서 안암에 있는 동훈의 안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아마 동훈도 비슷한 상황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내려놨던 술잔을 내밀어 건배를 한다 
일단은 한모금만 마시고 내려놓는다 
잔디밭에 늘어놓은, 이제는 거의 부스러기 밖에 남지 않은 과자 봉지를 끌어당겨 
조각을 털어먹던 동훈이 피식 웃으며 해태를 본다 


"아따, 니 춤 잘 추드라잉," 
"나가 좀 허지? 괜찮었냐" 
"아야, 아까 우리 과 가시내들까지 소리지르는 거 못 봤냐, 니가 그리 잘하는 줄 몰랐당게 
 니 아예 그 뭐냐, 스페이스 가서 사는갑서, 느그 엄니 아시믄 기절하시겄더라" 
"무신 소리여, 스페이스야 가끔 추러 댕기는 것이제, 나야 본디 타고난 것잉게" 

좀전 체육대회 중간 응원전에서 했던 무대를 보고 하는 얘기다 
약간 쑥쓰럽긴 하지만 한껏 으쓱하면서 잘난 척을 한다 
어쨌든 그때 가장 많은 환호를 받았던 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이걸 꼭 해야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쭈뼛거리고 망설였지만 
막상 앞에 나서서 박자에 맞춰 치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을 듣자 
그런 망설임 같은 건 다 사라져버리고 암만해도 자신이 나서길 잘했단 생각만 남았다 


"연습 겁나 했겠쓰야, 둘이 엄청 잘 맞던디" 
"얼마 안했구만 그게 뭐 연습할만한 춤이기나 한가?" 


말하고 나니 약간 찔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은 나흘을 자투리 시간을 쪼개 꼬박 연습했고, 윤진과 맞춰본 건 하루. 
연습이나 할만한 춤인가, 는 윤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지난주 금요일 맞춰달라는 부탁을 승낙한 윤진은 
연희동으로 가는 평소의 스케줄을 취소하고 하숙집에 돌아와 
깊숙한 장을 뒤지더니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영문도 모르고 일단 따라들어온 해태에게 별다른 설명도 없이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간 윤진은 
1층 거실에 놓인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고 한참 뭔가를 찾아 앞뒤로 돌리다 마침내 8월 출연한 투투의 영상을 찾아냈다 

곡명만 던졌을 뿐이지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던 해태는 
마치 본인이 이 모든 계획의 주도인 것처럼 당연하게 움직이는 윤진의 행동력에 놀라 
그저 뒤쪽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 니 좀 대단허다" 
"조용히 혀라 헷갈링게" 


계속해서 영상을 앞뒤로 돌렸다가 멈췄다가 다시 재생하기를 반복하면서 
탁자에 펼쳐놓은 종이에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양 같은 걸 적어나가던 윤진은 
약 1시간 정도 20번 가량 같은 영상을 반복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기록한 종이를 보면서 몇번인가 이렇게 저렇게 팔을 움직이고 스텝을 밟아보더니만 순식간에 안무를 완성해버렸다 
처음 대강 움직여보는데서부터 안무를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삼십여분. 

처음부터 끝까지 비디오로 재생되는 영상과 동일한 동작을 
물 흐르듯이 소화해내는 모세의 기적 같은 현장을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기만 하던 해태에게 
마지막으로 안무를 점검한 윤진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그 기괴한 도형으로 가득한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뭔디" 
"안무 정리 한거여, 이게 팔을 펴고, 이게 접고, 이건 오른팔, 이건 왼쪽, 여기 숫자가 박자 
 이거슨 같이 하는 거고, 여기는 니 꺼, 이게 내 거시고" 


의미를 알고 보면 대강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도 이걸 단번에 그려내는 윤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으면 저 테이프도 빌려줄테니 보고 연습혀, 나는 다 됐응게, 니 동작 다 되믄 한 번 맞춰보면 되것네" 
".... 저걸 다 외웠다고?" 
"별 거 아니구만, 우리 태지 오빠 안무에 대면 저건 율동이여 율동" 


.... 그 정체는 서태지 팬이었다 골수팬. 


'팬'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고 지랄맞아질 수 있는지 
같이 사는 나정이와 윤진을 보면서 서울 오고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그런 능력이 이럴 때도 사용될 수 있는 건지는 미처 몰랐더랬다 
제가 겨우겨우 안무 외우고 연습해서 오늘 아침에 한번 맞춰보고 선 무대에서 
윤진의 안무는 정확하게 포인트를 짚어내고 완벽해서 
자신의 어설픈 실수조차 커버하고 넘어갈 정도였으니 
어쩌면 오늘의 환호는 윤진의 것인지도 모르지만. 

뭐 잘 끝났으니까.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목이 타는 듯 맥주잔을 집어드는 해태에게 
옆에 앉아 있던 동훈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근디, 어찌 느그 과에 저래 이쁜 아가 있다고 말을 안 혔냐 
 아따 연대 가시내들은 예쁘다 소문만 들었지 진짠 줄은 몰랐당게" 


이뻐? 누가? 


시큰둥하게 동훈을 바라본다 
잔뜩 기대에 찬 얼굴이 농담은 아닌 것 같고 
대체 누굴더러 예쁘단 건가 자신의 동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다가 한숨을 푹 쉰다 


"...나정이 그 가시내는 포기혀라... 나가 암만 경상도 가시내는 처음 봤어도 
 갸처럼 입이 걸은 가시내는 경상도 전체를 홀딱 다 뒤져도 없을 것이여." 
"나정이?... 나정이가 누구대? 경상도 아는 아닌 거 같던디?" 


그렇다면 누구...? 
얘 취향 혹시 진주였나...? 

대체 짐작을 못하겠다는 듯 멍하게 바라보자 답답했는지 동훈이 억지로 이름을 떠올려본다 


"갸 있잖여... 아까 니랑 같이 춤춘, 이름이 뭐더라... 에... 윤" 
"윤진이?" 
"맞네, 갸 말여, 윤진이 맞네" 


고개를 끄덕이는 동훈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허삐 이쁘드만, 니랑 친허냐?" 
"...친하믄?" 
"소개 좀 시켜주라, 남자친구 없제?" 


예쁘다면서 남자친구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건 대체 무슨 인지부조화냐 
혼자 속으로 궁시렁 거려본다 


"안돼" 
"왜, 남자친구 있는겨?" 
"... 갸 감당하는 사람, 우리 과에 남녀 통틀어서 하나도 없당게, 
 원샷 올킬, 모르냐? 일단 걸리면 그대로 죽는겨 
 아까 말한 나정이 가시내도 갸한테는 못 당혀, 포기혀라 목숨 아까우면" 


그래도 어쩌고 하면서 궁시렁대는 걸 두고 
눈으로 막 화제에 올라왔던 윤진을 찾는다 


가시내... 또... 


멀지 않은 곳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윤진을 발견한다 
낯은 익은데 이름은 모르겠는, 그러니까 저희 과가 아니라 고대생이 분명한 
남자 대여섯 사이에 폭하고 박혀있는 윤진은 
주변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같은 건 모르겠다는 듯 술잔만 기울이고 있다 

간간이 뭔가 윤진이 퉁명스런 표정으로 한마디를 하면 와 하고 웃음소리가 터진다 
저희들끼리 화기애애한 남자애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윤진이 술잔을 들고 옆에 부딪히면서 원샷한다 

지난주 예비 모임에서 1:5 전설로 등극한 윤진은 
그동안 분명 특히나 고대 남자애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이었을텐데 
오늘 갑자기 왜 저렇게 왁자하게 모여있느냐 하면, 

그래 인정하기는 내키지 않지만 역시나 제가 끌어들인 그놈의 장기자랑 때문이다 

아니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을 장기자랑에서 한다는 말이 나정의 귀에 들어간게 가장 큰 문제일까 
암거나 있는 거 입고 하면 되지, 라고 시큰둥해 하는 윤진의 등짝을 
이 가시나 가잖은 소리 한다! 라고 후려 갈긴 나정은 (아, 그런 걸 보면 나정이 윤진보다 쎈건가) 
질질 끌고 윤진의 방에 틀어박혀 옷을 고르고 고른 뒤 자신의 옷장까지 발칵 뒤집었다 

'암거나 입어야, 뭘 입는다고 글케 달라지진 않을틴디' 

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나정의 눈이 쏘는 레이저에 심장이 멎을 뻔 한 뒤로 
뭘 하든 늬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내버려두었는데 

과연 옷이 날개라더니, 

하늘색 셔츠 블라우스에 체크 스커트를 입고, 늘 내려와있던 머리를 넘겨서 베레모를 쓰고 옅은 화장까지 한 윤진이 
나정에게 며칠 전 질질 끌려가서 산 새로 산 구두가 불편했는지 비틀거리면서 운동장에 나타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언제나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뚱한 얼굴인데 저런 차림으로 있으니 
무표정한 인형처럼도 보이고, 꼭 TV 화면에서 봤던 황혜영처럼 컨셉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니 뭐 
남자애들이 저렇게 모여있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꼬깔콘 하나 먹었다가 가위로 목을 따일뻔 해봐야 저 가시내 성깔머리를 알랑가. 


괜히 좀 심기가 불편해져서 윤진을 둘러싸고 싱글거리고 있는 고대 녀석들을 노려본다 

대체 저 앞에 놓인 빈 술병이 몇 개인지 
저 가시내는 오늘 또 얼마나 마셔서 사람 고생시킬 예정인건지 

속으로 투덜투덜거리면서 눈으로 윤진의 입으로 넘어가는 소주잔을 세자니 
어째 윤진의 움직임이 조금 전부터 이상하다 

짧은 치마 때문인지 다리를 가지런히 옆으로 모으고 앉은 윤진은 
버릇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려고 다리를 펴려다 움찔하고 도로 다리를 모았다가 
다시 무릎을 아예 꿇고 앉았다가 하는 식으로 움찔움찔 대다가 
순간 한기가 들었는지 팔짱을 끼면서 소리내지 않고 작게 얼굴로만 재채기 한다 


가시내, 저래 얇게 입고 왔으니 안 춥고 배긴당가 


반팔에 짧은 치마 차림인게 거슬린다 
대체 애 옷을 저렇게 입힌 장본인인 나정은 
담요나 잠바 하나 안 챙겨주고 뭐했나 싶다 


지가 입혀놨으면 책임을 져야할거 아녀 


괜히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나정을 휙 하고 찾는다 
윤진이 앉은 자리를 지나 저 끝에 앉아 있는 나정을 발견한다 


헉.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하는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거야 
나정의 평소를 생각하면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인거지만 

해태는 재빨리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삼천포의 무릎을 친다 

"천포야" 
"왜?" 

마지막 남아 있던 오징어를 징걸징걸 씹던 삼천포가 
의아한 표정으로 멀리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버린 해태를 바라본다 

"나정이 가시내, 윙크 시작 혔다" 
"헉" 

오징어를 씹고 있던 상태로 멈춘 삼천포의 등을 툭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자, 저 가시내 사람 물기 전에" 


투덜투덜거리면서 급히 나정 쪽으로 가는 삼천포 뒤를 따라가다 
문득 나정에게 가는 길목의 윤진이 눈에 걸린다 


쯧. 


급하게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윤진을 지나치며 툭,하고 떨어트린다 
갑자기 제 어깨에 떨어진 잠바를 보고 어리둥절해 올려다보는 윤진에게 짧게 속삭인다 


"니 시방 얼어 디지기 직전 같이 보여야," 


미처 대답을 듣기 전에 나정을 붙들고 낑낑대던 삼천포가 고개를 미친듯이 끄덕여 부르는 통에 냉큼 뛰어간다 
다행히 오늘은 사람을 무는 버릇이 튀어나오기 전에 끌어내긴 했는데 
그 대신 방금 전까지 술잔을 집어던질 기세로 마셔대던 사람 어딜 갔는지 완전히 인사불성으로 늘어져버렸다 
삼천포가 나정을 끙끙대며 업고 해태가 나정과 삼천포의 가방을 챙겨 들고 일단 빠져나온다 


"괜찮냐," 
".. 하악... 나정이.. 야... 요즘... 따로.. 보약 먹나.." 
"무겁고만.." 
"... 말.. 걸지.. 마라" 


겨우 백양로를 빠져나와 정문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린다 


"천포야, 암만해도 나 다시 갔다와야 쓰것다, 먼저 가라" 
"어데 가는데" 
"뭐 좀 두고 온 게 있어서" 
"내일 갖다 달라캐라" 
"윤진이도 데려와야 쓰것고" 

나정을 업고 헉헉거리고 있던 삼천포가 윤진의 이름이 나오자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한다 

"정대만이는 와, 아까 멀쩡하던데?" 
"곧 한계지 싶응게, 아니믄 니가 데려올텨?" 

해태의 말에 잠시 자신이 업고 있는 나정과 
윤진이 있는 술자리 쪽을 번갈아 보던 삼천포는 
약간 흘러내린 나정을 끙차, 하고 고쳐멘다 

"그라믄 얼른 온나" 
"그랴, 먼저 가고 있으야" 

삼천포가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하는 걸 확인하고 후다닥 뛰어 술자리로 돌아온다 
먼저 여전히 좀 전 그 자리에 앉아 술잔을 부딪히고 있는 윤진을 확인한다 
제가 아까 던져주고 간 잠바가 너무 컸는지 거의 싸여있다시피 하게 걸치고 
무표정하게 무심히 건배를 하고 원샷하는 자세가 지나치게 꼿꼿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일단 반대쪽에서 아직까지 고대 과대표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는 기태에게 다가간다 

"기태야, 나 이제 가야 쓰겄다" 
"어! 아까 나정이 데리고 나가더니?" 
"나정이 가시내는 윙크 시작허길래 빼부렸다, 천포가 데리고 가고 있응게" 
"아... 잘 했어" 

나정의 술버릇을 익히 알고 있는 기태가 소리 죽여 대답한다 


"낼 아침에 칠봉이 경기도 있고 자리도 맡아야항게, 먼저 갈게, 미안허다" 
"아냐, 이제 곧 정리할 건데 뭐, 먼저 들어가" 

미안한 듯 기태의 어깨를 툭툭 치고 돌아선 해태는 저벅저벅 걸어가 윤진의 옆에 털썩 앉는다 
인기척에 돌아본 윤진이 힐끔 바라보자 작게 말한다 

"가자" 

제 말을 듣고도 잠시 멍한 듯 돌아본 눈빛이 
이미 지난 학기부터 여러 번 봤던, 연대 컴공 94학번 에이스 조윤진이가 맛 가기 직전의 그것이다 
....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질 않는다 
해태는 한숨을 폭 쉰다 

그런 해태를 물끄러미 보다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짧게 흔든 윤진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해태의 무릎을 한손으로 짚고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갑자기 벌떡 일어선 윤진에 놀란 주변 학생들이 올려다본다 

"가게?" 
".. 나는 이만 가야쓰것다, 내일들 볼 수 있으믄 보고" 

누군가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한 윤진이 손짓으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선다 
말도 없이 일어나 걸어가버린 윤진의 뒤를 후다닥 좇아가자 
나란히 서게된 후에야 뒤쪽에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해태, 니 술 많이 먹었냐" 
"별로, 왜" 
"... 똑바로 걸어라, 나는 니가 걷는 기준으로 걸을랑게" 


무슨 말인가 싶어 주춤거리고 걸으며 기색을 살핀다 
아주 약하게지만 윤진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오른쪽 발을 살짝 절면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잡아주까?" 
"그라믄, 나 취한 거 티나잖어, 안되야, 그냥 똑바로 걷기나혀" 

차라리 제가 잡거나 아니면 저를 잡기라도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끝까지 꼿꼿하게 서서 제가 걷는 그대로 따라 똑바로 걷고 있는 양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건 대체 무슨 쓸데없는 승부욕인지 모르겠다 
절룩거리는 티가 거의 나지 않게 제 옆에 5cm 정도 간격을 두고 똑바로 따라 걸으면서 
운동장과 잔디밭의 시야를 벗어나서도 한참이나 더 걸어가서야 윤진이 휘청하고 크게 흔들린다 
놀란 해태가 얼른 팔을 뻗어 부축하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부축한 팔을 천천히 치우고 절룩거리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는다 


"괜찮냐" 

조심스럽게 다가와 묻는 해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윤진은 그저 낑낑거리면서 제가 신고 있는 구두를 벗으려고 애쓴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내려다보던 해태는 
윤진이 구두의 스트랩을 풀지 않고 구두를 잡아당기기만 한단 걸 발견한다 


"있어봐"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윤진의 발에서 스트랩을 풀고 구두를 벗겨낸다 


"... 이랄때까지 신고 있었던겨?" 


대체 왜 이러나 싶었더니만 구두를 벗겨낸 윤진의 발이 상처투성이다 
분명 스타킹을 신고 있는데도 오른쪽 뒤꿈치는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기를 반복했는지 
아예 빨갛게 살갗이 벗겨져있는 정도고 놀라 살펴보니 다른 발도 군데군데 물집이 잔뜩이다 


"그라믄, 그걸 어케 벗고 있당가, 하는 동안은 신고 있어야제" 


쓰라린 티도 내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게 
독한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체 그놈의 장기자랑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구두를 벗고 나자 조금 기분이 가벼워졌는지 벤치에 앉은 윤진이 발을 까딱까딱 흔든다 
고민스런 표정으로 그런 윤진을 올려다보던 해태가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니, 이거 다시 신고 갈 수 있겄냐" 
"... 아니," 
"그럼 어찌 갈랑가 집까지" 
"... 그냥 가면 되지, 두 다리, 두 발 멀쩡헌디 뭐가 문제당가" 


맨발이나 다름 없는 발로 집까지 걸어가겠단 말이 
윤진이 진심인지 아니면 취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정은 윙크를 시작하면 취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언제나 무표정이 기본 상태인 윤진은 지금 취한 건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뻗었으면 그냥 아까 나정처럼 업고가면 그만이겠는데 
섣불리 업겠다고 나섰다가는 한 대 쥐어박힐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그냥 맨발로 걸어가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걸 다시 신으라고 할 수도 없고 


"업어주랴?" 
"미쳤냐, 니가 나를 왜 업어" 
".... 별로 무겁지도 않더만" 


슬쩍 꺼낸 말에 펄쩍 뛴다 
에휴 대체 어쩌란 건지 
니 멋대로 해라 싶어서 해태도 그냥 윤진 옆에 올라와 앉아버린다 

가만히 앉아 멀리 보이는 반달을 본다 
좀전까지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술자리에 있었단 게 믿기지 않게 캠퍼스는 그저 고요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길가 벤치에 앉아 있자니 
제법 서늘해진 가을 공기에 후득, 한기가 든다 

아침에 들고 나왔던 잠바 생각이 나서 짐 쪽을 더듬거리다 좀전에 자신이 윤진에게 벗어준 기억이 난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해태의 잠바를 입은 윤진이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멍하니 미묘한 각도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윤진에게는 커도 너무 큰 옷이라 손은 소매 안에 감춰져 보이질 않고 목까지 지퍼를 올려채운 옷은 허벅지까지 덮고 있다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뭔가 리듬이라도 맞추듯이 까딱까딱 한다 
박자에 맞춰 흔들리는 작은 발을 보자니 좀전에 본 상처가 떠올라서 쯧,하고 또 혀를 차고 만다 

신은 못 신겠고 
업히기는 싫고 
맨발로 가게도 못하겠고 

그러면 뭐. 


잠깐 뺨을 긁적한 해태가 주섬주섬 제 운동화를 벗는다 
그리고 까딱거리고 있는 윤진의 발에 운동화를 걸쳐놓는다 


"뭐여 이건?" 


갑자기 무거운 운동화를 신은 탓에 툭 다리를 벤치 아래로 떨어트린 윤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다 


"맨발로 갈 순 없잖여, 그거라도 신고 가" 
"니는" 
"나야 양말 두꺼운 거 신었응게, 니보다야 낫겄지. 빨래하실라믄 엄니께 죄송허다만" 
"..." 


제 발 끝에 걸린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벗을까 말까 고민한다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게다가 저 때문에 벗어준 사람은 신발 없이 가야하는 건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신을 벗으려고 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던 해태가 귀찮다는 듯 퉁박준다 


"신어야, 니 그러다 크게 다친당게, 나중에 나헌티 나땜시 다쳤니 어쨌니 소리 할까봐 그란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가시내가 겁도 없니 어쩌니 중얼중얼 하고 있는 걸 듣자니 
어째 벗어주는게 더 민폐인 것만 같아서 도로 가만히 신을 신은 채 발을 땅 위에 내려놓는다 


"너무 커야" 
"잘 끌고 가봐, 집이 코 앞인디," 
"... 글키는 헌디.." 


바닥에 해태의 신을 앞뒤로 쓱쓱 끌어본다 
아무래도 제 발에는 너무 큰 신이라 잘 신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해태가 멋쩍은 듯 시선을 돌린다 


"오늘 고생혔다, 덕분에 잘 끝났네잉" 
"...." 


윤진은 쓱쓱 천천히 운동화를 끌었다 당기기만 반복한다 
힐끔 눈치를 보고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한다 


"근디, 소원이 뭐냐, 이제 끝났응게, 말을 혀봐" 


소원이라는 말에 반응한 듯 고개를 든 윤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난다 
좀전과는 다른 눈빛에 덜컥 겁이 난다 


"... 대체 뭔데.." 
".. 약속 틀림 없제?" 


다시 확인하는 목소리가 평소 착 가라앉아 있던 상태에서 한 다섯배쯤, 상당히 들뜬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가을 공기 때문인지 바르르 몸이 떨리는 것 같다 


"말이나 하랑게, 나가 약속 혔잖어, 나가 한 입으로 두 말할 인물이당가" 


애써 태연한 척 귀찮은 듯 대답한다 
탐색하려는 것처럼 갸우뚱 갸우뚱 하던 윤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소원은 말여" 


대체 무슨 대단한 거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아니 애초에 뭘 얘기할거였길래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생전 안입던 옷도 입고 무대에서 춤까지 췄는지 
지금 이순간 윤진이 말할 그 소원을 위해서 그동안 윤진이 해온 일을 차곡히 떠올린 해태는 
도무지 윤진이 뭘 바랄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속으로 잔뜩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런 해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하다 말고 윤진이 배시시 웃는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지나간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니 저 가시내는 참으로 요상한 재주를 지녔다 

해맑게 웃은 윤진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해서 해태를 제 쪽으로 부른다 
멈칫 멈칫 거리면서 가까이 다가가자 살며시 귀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니 말이다" 


꼴깍. 

침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혼자 화들짝 놀란다 
바들 떨리는 걸 의식하지 않은 채 윤진이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산 CDP 있잖어" 
"응?" 
"그거 나 주라" 


생각지 못한 말에 반사적으로 훅하고 뒤로 몸을 뺀다 
놀라는 제 반응을 예상한 건지 윤진은 태연하다 


"니가 약속혔잖어, 주는 거여, 알았는가?" 


마침내 말해버린게 기뻤는지 
곧 손에 쥐게 될 CDP가 좋은 건지 

지난 반년 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생글생글 연신 웃는 얼굴로 
신이 났는지 발목에 걸고 있던 신을 까딱까딱 흔든다 


"알았지?" 


윤진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생각지도 못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긴장했어야했나 싶을 정도로 싱거운 소원에 
잔뜩 얼어있던 자신이 우스워서 헛웃음이 난다 
해태는 뚫어지게 제 대답을 기다리는 윤진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려," 


순순히 대답하자 이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까딱까딱 움직이는 양이 작고 예쁘장한 인형처럼 보이는 걸 보면 
분명 다 깬 줄 알았던 술에 아직도 한참 취해있는게 분명하다 


"그렇게 좋으냐?" 
"암만" 
"뭐가 그리 좋당가" 
"이제 태지 오빠 노래 CD로 들을 수 있는 거 잖어, 테이프 늘어날까봐 얼매나 아껴 들었는디 
 글고 CD로는 일일이 되감기 안해도 된담서? 한번에 듣고 싶은 노래 찾아갈 수 있다던디?" 


CDP의 장점을 쭉 늘어놓다 들떠하는 모습을 보자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따, 가시내 웃으니께 이쁘구마는. 


저렇게 웃으면서 좋아하는데 
저에게 몇번이나 주는 거냐고 다짐하는데 

까짓 거 하나 사줘도 그만이다 
제가 쓰던 게 아니라 새로 산다고 해도 아마 며칠 술값만 모으면 될테다 



좋아? 



나는 좋은 거 같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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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또 겁내 길다-_- 사투리는 겁내 어렵고.... 
아하하 다 쓰고 나니까 진짜 별 거 아닌걸 한참 쓴거 같네;; 뭔가 기대했을 냔들이 이거 읽고 허탈해하지 않았음 좋겠는디 ㅋ ㅠㅠ 
지금은 별 거 아니지만, 그때 CDP는 엄청 귀했던 물건이었던 기억이.. 
읽어준 냔들, 댓글 달아주는 냔들 늘 고마워~ 




[9월 22일, 정기전 예비모임]






아고고 삭신이야


찌릿찌릿한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 팔을 휙휙 돌려 근육을 풀면서 천천히 걸어온다



"어이!"



좀전에 제가 빠져나갔던 술집 바깥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태가

저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천천히 다가가자 자신에게 담배를 내민다

기운없이 손을 휘 저어 거절하고 벽에 자연스레 기댄다



"안은, 끝났냐?"

"아직, 잠깐 정신차리려고 나왔지"

"그래서, 정신은 차렸고?"

"뭐 그럭저럭? 근데 고대애들도 이제 슬슬 끝물인거 같아 곧 끝나지 싶다"



기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지친 듯 기댄 해태를 보던 기태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묻는다



"그러고 보니 나정이는? 잘 들어갔냐?"



해태는 말없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난 왼 손을 들어보여준다

상황을 짐작한 기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그저 조용히 해태의 어깨를 두드린다



"고생했다"

"... 윙크를 딱 시작헐때 끌고 나갔어야 했는디, 나가 술을 먹느라 정신이 팔려서..."

"... 그땐 누구라도 그랬을거야... 많이 다쳤냐?"



귀찮다는 듯 해태가 왼쪽 눈을 찌푸린다



"나정이 가시내가 더 문제지 일단 집에 데려다 눕혀는 놨응게, 낼 되보면 알 것제"

"하긴.. 꽤 크게 넘어졌지? 허리 안 다쳤나 모르겠다"



신나게 마시던 나정이 윙크하는 걸 발견했을 때는 이미 파트라슈 병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안그래도 자신들도 휘몰아치는 고대 애들 술버릇에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는데

고대생들을 첫날부터 나정이 물어버리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억지로 끌어내려고 하다가

버티던 나정이 그대로 가게 앞에 철퍼덕 넘어져버렸고 

허리를 다쳤네 어쨌네 징징거리는 걸 삼천포와 해태가 업고 지고 겨우 하숙집까지 데려다놓았다

그길에 부축하던 해태의 손을 한번, 업고 있던 삼천포의 귀를 한번 물어뜯어서

삼천포는 지금 하숙집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중이었다



이빨자국이 선명한, 그나마 피는 안 난 게 다행인 왼손을 한번 보고 탈탈 턴다

오늘 암만해도 일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어? 윤진이 아냐?"



옆에 섰던 기태가 놀란 듯 윤진을 부른다

손을 내리고 시선을 돌리자 기태와 저 앞으로 꼭 몽유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걸어 지나가고 있는 윤진이 보인다



"윤진아!"

"어이, 정대만이!"



기태가 다시 이름을, 제가 윤진이 펄쩍 뛰는 별명을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다

무슨 일 있나 하고 생각하며 골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창문으로 술집 안을 들여다본 기태가 히익, 하고 기겁한다



"야, 대체 몇 병을 마신거냐 쟤네? 아주 이 집 술 다 마셨겠네"



그제야 술집 안을 들여다본다

나정을 데리고 술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윤진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 텅 비어있다

분명 고대 남자애들 대여섯명이랑 미친 듯한 속도로 부어마시고 있었는데

지금은 윤진도, 그 남자애들도 앉아있질 않다

대신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대체 한눈에 몇 병인지 세어지지도 않을만큼 그득하다



"역시 우리과 에이스 답다. 저걸 어떻게 다 마셨대?"



감탄한 듯 박수를 두 번 탁탁 치는 기태의 말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난다



멍한 눈동자

제 앞을 지나가면서도 아는 척도 않고

무엇보다 정대만,이라는 말에도 무시하다니.




"... 기태야, 나 먼저 갈랑게, 뭔 일 있으면 삐삐쳐라"



해태가 급하게 술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가방을 들쳐메고 나온다



"야! 아직 우리 얘기 다 안 끝났어 체육대회 멤버랑 그리고.."

"알아서 정혀, 니가 대표 아니냐 나야 암거나 상관없응게"



급하게 잡아세우는 기태에게 대강 대답을 한다



"야! 진짜지?! 진짜 내가 알아서 한다?!"



뒤로 따라붙는 기태의 말에 귀찮은 듯 뒤로 손을 들어 흔들어보이고

좀전에 윤진이 빠져나간 골목을 향해 뛴다

한참을 뛰었는데도 윤진이 보이질 않는다


술집이 있던 골목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자 휑하게 빈 큰 거리만 보인다



어디?



그새 어디론가 사라졌을리가 없는데 

그렇게나 빨리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급하게 이리저리 둘러보며 일단 하숙집 쪽으로 걸어가본다



하아.



독수리 다방 건물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윤진을 발견한다

안그래도 작은데 밤, 건물의 그늘에 까만 옷을 입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덕에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아야, 일어나봐야, 여기서 자면 안된당게"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완전히 잠든 윤진을 앞에 놓고 어째야 하나 고민한다



사실 결론은 아까부터 나와있다

.... 오늘은 어째 하루종일 누굴 업어야하는 날인가보다




겁도 없다 가시내, 

길가에서 잠이나 들고...



해태는 한숨을 푹 쉬고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고쳐멘 뒤

궁시렁거리면서 윤진을 업는다



아따, 가볍기도 허네, 하기사 만날 그리 콩알맨치 먹어싸니 살이 찔리가 있나



축 늘어진 윤진을 업고 조용히 하숙집에 들어선다

좀전에 업고 들어왔을 때까지 아프다며 생 난리를 치면 나정도 

나정에게 물린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다며 징징거리던 삼천포도 잠들었는지 

스탠드만 켜진 거실이 고요하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와서 윤진을 방에 데려다 눕힌다

그리고 제가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소리 내지 않게 뒷걸음질로 방문을 닫고 나온다



하이고 가시내.. 

이럴거면 그렇게 멀쩡한 척을 하고 마시지를 말 것이지



삐질삐질 난 땀을 닦으면서 제 가방을 2층 소파위에 던져놓고

1층 부엌으로 내려와 물을 마신다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그제야 아까 윤진을 업고 올때부터 요란하게 메세지 도착을 알리던 삐삐를 뒷주머니에서 꺼내본다

별다른 회신 번호는 찍혀있지 않은 메세지 한 통, 그리고 8282 호출



아따, 어떤 놈이여 이 밤중에.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거실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삐삐 음성사서함을 확인한다



[1개의 새로운 메세지가 있습니다. 메세지 청취는 1]


- 삑



[첫번째 메세지 입니다]



'어, 나 기탠데,'



집에서 온 연락인가 싶어서 무심히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다가

기태의 발랄하고 사악한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다



설마!



'니 말대로 알아서 정했다

축하한다 너 장기자랑 당첨이다

이거 선배들까지 다 오는 거 알지? 고대한테 밀리면 절대 안돼?

여자 파트너는 알아서 섭외하고, 뭐할 건지 정해지면 말해주고.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데 이거 제비뽑기로 정했어 정말이야, 

억울하면 먼저 가지 말았어야지, 하여간 너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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