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4
(H's side)
=
[1994년 10월]
"안녕히 주무셨어라"
"오이야, 얼른 앉아라 아침 무야제"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면서 나정의 건너편, 빙그레 옆의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
이미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은 삼천포가 똑바른 자세로 앉아 숟가락으로 국을 뜨고 있다
먼저 일어나서 씻고 내려올 정신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을 깨우지 않은 건지 못마땅해서
괜히 건너편의 삼천포의 국그릇을 툭 하고 건드린다
"와?"
"좀 깨우지 니 혼자 내려가불냐"
"내가 니를 깨운다고 니가 일나나"
퉁명스런 대꾸에 하기사 것도 그렇지, 하고 순순히 수긍한다
"아나, 많이 무라 우리 해태"
"감사합니다"
숫제 냉면그릇에 가까운 제 앞에 놓이는 국그릇을 보자 눈이 번쩍 떠진다
다시 한번 압도되어 잠깐 숟가락을 들다말고 멈춘다
하이고.. 엄니, 이라믄 하숙집 적자 아니당가요
벌써 몇번이나 물어봤던
그때마다 뭐하러 네가 그런 걱정을 하냐며
먹는 게 남는 건데 그런 말 말고 얼른 먹기나 하라며
타박들었던 그 질문이 또다시 떠오르고 만다
"뭐하노, 얼른 무라, 낙지 볶은 거 별로가? 딴 반찬으로 주까?"
식구들 식사를 살피던 어머니의 걱정스런 말에 부르르 정신을 차리고 얼른 수저를 든다
여기서 더 반찬이 등장하다니 그것만은 막아야한다
"이것만도 많은디, 뭘 더 꺼내신대요,"
"그래도 모자라믄 말 하그레이, 금새 한다 안하나"
금시 많이 하시것지요
해태는 밥을 가득 푼 수저를 입으로 집어넣으면서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퍽퍽 소리가 날 듯이 전투적으로 먹는 걸 확인한 어머니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돌아선다
힐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먹고 있던 속도를 줄인다
이걸 언제 다 먹냐... 음식 남기믄 아까운디...
식탁 가득한 음식들을 확인하니 벌써 답답하다
신기한 건 식사 때마다 이렇게 음식이 나오는데 어떻게든 다 먹어치웠다는 거지만
자신이 생각보다 많이 먹는 건지
아니면 같이 사는 친구들의 먹성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병아리 모이만큼도 안 먹는 녀석까지 있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비로소 아침 식탁에 윤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엄니, 윤진이는 어디 갔대요?"
해태의 질문에 냉장고 문을 열고 뭔가 찾고 있던 어머니가
허리를 펴지 않고 그대로 대답한다
"윤진이? 아침 일찍 묵고 나갔는데? 학교 간다 카드라"
학교?
잠깐 날짜와 요일을 계산해본다
수요일, 오후에 전공 필수 - 컴퓨터 언어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오전에 수업 없을텐데.
"아침에 수업 없을 틴디... 무슨 일 있대요?"
"도서관 간다 카드라, 느그 시험기간이람서?"
그러고 보니 윤진의 얼굴을 본 지 한참 되었다 싶다
아침 식탁에서 마주친지는 거의 일주일쯤 되었나보다
정기전 기간 내내 술마시고 고대 애들이랑 어울리느라
이후에 이틀쯤은 술병으로 끙끙 앓느라 아침을 걸렀고
그 다음엔 뭐 이런 저런 뒤풀이를 빙자한 술자리 때문에 내내 외유했었고
자신이 바빠서 마주칠 일이 없는가보다 했는데
아직 일주일도 더 남은 시험 공부라니.
".... 별난 가시내,"
저도 모르게 중얼한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반쯤 접은 불편한 자세로 해태의 앞에서 밥을 먹고 있던 나정이
그 말에 수상쩍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뜬다
"해태 니, 수상하다"
"뭐가 말이냐"
뭔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서 퉁명스레 대꾸하고 도로 밥공기에 집중한다
그런 해태를 한쪽 눈살을 찌푸리고 뭔가 캐내듯 살피던 나정은
아예 쥐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해태에게 불쑥 들이댄다
"니 갑자기 윤진이는 와 찾는데?"
"...하아. 친구야 얼굴은 좀 시간과 장소를 가려감서 들이대라, 아침부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글고 우리가 같이 산지가 얼만디 아침에 안 보이면 안부도 못 묻냐"
갑자기 들이닥친 나정의 얼굴에 깜짝 놀란 듯 해태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대답한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수저가 파르르 떨린다
매의 눈으로 떨리는 손을 캐치한 나정이 더더욱 수상하다는 듯 추궁한다
"아닌데? 니 윤진이 찾는 이유, 따로 있제?"
"... 뭐...뭔 소리여.. 따로 이유가 있을 게 뭐가 있당가"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나정이 저러니 마치 무슨 이유가 있어야할 것만 같다
대체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건지
압박하는 나정의 날카로운 눈빛에 해태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만다
".... 니 솔직히 말해라 얼른"
"아니, 그랑게 무슨 딴 이유가 있단 말여 나가"
흡사 취조에 가까운 대화에 밥을 먹던 삼천포와 빙그레마저 숟가락을 놓고 해태를 수상하게 바라본다
대체 뭐가 짐작이라도 가면 나정에게 대답을 하겠는데
내가 뭐,
그럼,
보고 싶어서 찾기라도 했는 건가.
갑갑한 마음에 혼자 중얼거리다가 덜컹,한다
순간 얼굴빛이 바뀌는 걸 본 나정이 훗,하고 검지손가락을 해태 앞에 두고 흔든다
"윤진이 노트는 내가 벌써 찜했다, 중간에서 새치기할 생각 하지 말그레이"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벙찐 얼굴이 되고 만다
그걸 보고 나정은 그럼 그렇지 라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니 윤진이 컴퓨터 언어 C+ 노트 빌릴라고 그라는거 아이가?
그거 내가 일주일 전에 빌리기로 벌써 말해놨다 내 차례가 먼저라고"
"..... 그려 니가 먼저 봐야"
왜인지 맥이 탁 풀린다
힘없이 숟가락을 다시 드는 해태가 실망한 것처럼 보였던지
나정이 금새 안쓰럽다는 듯 말한다
"근데, 니 진짜 윤진이 노트 빌릴라믄 빨리 말해야하긴 하겠더라,
우리 과에 빌릴라고 윤진이 노리는 아들 많데이"
"....그 정도여?"
대체 어느 정도의 노트길래 과 전체가 노리고 있다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빌리려고 했다는 거냐 라는 듯 나정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니 윤진이 노트 몬봤나? 봐서 빌릴라 캔거 아이가?
어지간한 참고서보다 낫다, 누고, 가, 어, 기태도 빌리 볼기라 카든데"
"... 그냐"
"윤진이 가가 쫌 사람 가리기는 해도 의리는 있다 아이가
기태는 몰라도 니는 빨리 얘기 하믄 안 빌리주겠나?
그래도 내가 먼저 데이, 알제?"
나정의 확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젓가락을 집어들어 반찬을 훑는데
아마도 윤진이 앉아 있어야 했을 식탁 끝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노린단 말이제.
나정의 말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빈자리에 겹쳐 신경이 쓰인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면.
확인해봐야 쓰것구먼.
노트도.
그리고.
=
"아이고 성님 그건 아니지라"
"뭐가 아이고"
"암만 그래도 순천이 전라도 제 2도시여라, 어째 군이랑 비교를 하신대요"
"니 지금 우리 집 무시허냐, 야 우리도 있을 건 다 있어야"
오랜만에 부모님께서 저녁 외식으로 외출을 하신 뒤
1층 거실에서 저녁을 빙자한 통닭파티가 벌어졌다
양주에 한번만 더 손을 대면 그게 누구든, 심지어 그게 칠봉이어도
손모가지를 따버리겠다는 아버지의 으름장이 통했던 건 전혀 아니지만
추후의 사태를 위해서라도 자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통닭 잔뜩과 맥주를 비롯한 술을 역시나 잔뜩을 사다가 쌓아놓고 마시는 중이었다
"그만해 좀, 어느 쪽이면 어떠냐?"
"어, 너 지금 서울 사람이라고 우리가 자존심 걸고 싸우는 게 우습다 이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어느 쪽이든 다 고향이면 서로 중요하다는 거지, 어느 쪽이 낫고 말게 뭐 있냐?"
차분한 칠봉의 설득에 괜히 머쓱해져서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자신의 말에 갑자기 정적이 흐르는 상황에 당황한 칠봉이 눈치를 보다가 벌떡 일어선다
"야, 그냥 게임이나 하자, 형님, 게임 하시죠 괜찮죠?"
"그라까, 얼른 가서 젓가락 가져온나"
칠봉의 의도를 알아채고 얼른 동의한 쓰레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칠봉이 재빠르게 부엌으로 사라진다
달캉.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는데 문소리가 들리고
어딜 다녀왔는지 조금 지친 기색의 윤진이 현관으로 들어서다가
모여 있는 하숙생들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걸 발견하고 멈칫 한다
"어, 윤진이 왔나?"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냥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걸 쓰레기가 불러세운다
"니 저녁 뭇나? 아이믄 와서 좀 무라 오늘 밥 없다"
".. 아녀라 지는"
"언능, 와서 앉아라"
쓰레기의 말에도 지나가려고 하던 윤진은 나정이 권하는 말에 잠깐 망설이다 무리 쪽으로 다가온다
윤진이 오는 걸 보고 해태가 자연스럽게 빙그레쪽으로 몸을 반발짝쯤 옮겨서 자리를 만든다
성인 남자가 앉기에야 좁겠지만 윤진 정도라면 충분히 끼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고
이리 와서 앉으라고 고개를 까딱 신호를 보냈는데 윤진은 시선을 비껴서는 정반대 쪽 삼천포 옆에 앉아 버린다
가시내, 뭐가 또 뒤틀린겨.
아무도, 심지어 윤진이 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은 신호를 보낸 게 괜히 민망해져서
슬쩍 도로 제자리로 움찔움찔 돌아가며 속으로 궁시렁 거린다
그런 해태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윤진은 앞에 놓인 치킨을 집어들어 오물오물 씹기 시작한다
"자아~ 펜 어딨냐 펜"
젓가락 일곱개를 가지고 돌아온 칠봉이 신난 목소리로 싸인펜을 찾는다
"또 왕게임이가, 지겹지도 않나"
"왜에? 나는 이게 젤 재밌더라"
"야구부도 왕게임 같은 거 하나?"
"선배들이랑 하면 재미없지만 동기들끼리는 가끔 하지?"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막상 숫자를 적어넣은 컵을 휙, 돌리자 일곱명의 눈이 긴장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시작하기 전에 건배하까"
쓰레기의 제안에 재빠르게 앞에 놓여있던 각자의 술잔이 빠르게 비워진다
"자, 시이...작!"
눈에 띄지 않게 젓가락들이 사라진다
갑작스런 긴장감이 넘치고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본다
"왕, 누구냐?"
"난디."
빙그레가 싱긋 웃는다
"오오, 왕, 얼른 말해라"
"음...... 1번, 5번 포옹!"
빙그레의 말이 떨어지자 전원 싱겁다는 듯이 젓가락을 놓아버린다
"그게 뭐냐, 약해도 너무 약하잖어"
"니 다음에도 그런 거 하면 벌주 니보고 마시라칸다, 알긋나?"
"하여간 1번, 5번 누구야?"
씨익 웃으면서 삼천포와 나정이 손을 든다
또다시 나머지의 얼굴이 구겨진다
"이리 온나 천포야, 누나가 안아주께"
나정이 서슴없이 삼천포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하는 걸 보던 해태가 중얼거린다
"아무한테나 헤드락도 거는 가시내헌티 포옹이 뭐가 문제당가...."
조금 표정이 굳어진 칠봉이 바닥에 늘어놓은 젓가락을 주워서 컵 안에 넣는다
"이번엔 잘해라이"
"하나, 둘, 셋"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몇번인가 더 젓가락이 돈다
벌주를 담은 그릇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 아침마다 국이 담겨 등장하는 냉면그릇에 도달했을 무렵
이미 거나하게 모두 취한 정도에서 다시 젓가락 통이 돈다
얼른 눈에 띈 젓가락을 집어든 해태가
뒤로 빠져서 슬며시 가렸던 손을 내려 젓가락 끝에 쓰여진 문자를 확인한다
'왕'
훗.
속으로 환호한 해태가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젓가락을 뒤집어 놓는다
"누구야? 누가 왕이냐?"
"난디,"
슬그머니 손을 들고 씨익 하고 웃자 사악한 미소에 나정이 짜증을 버럭 낸다
"얼른 말해라이, 뜸들이지 말고"
가시내, 술만 들어가면 성격이 파트라슈가 따로 없구만
어쨌든 본인이 왕이란 사실에 싱글싱글 신이 나서
긴장해서 제 입만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을 쭉 둘러본다
"음..... 2번,"
저를 보고 있던 삼천포의 얼굴이 확,하고 구겨진다
해태는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모른 척 한다
아야, 나가 니 좋아한게로 이러는겨, 알제?
"음...그리고..."
뜸들이는 해태의 말이 늘어지자 옆에 앉아 있던 쓰레기가 톡하고 머리를 후려갈긴다
"얼능해라 얼른, 그게 뭐라고 그래 뜸을 들이고 해쌌노"
"야, 그리고 이번에 약한 건 안된다? 알지?"
칠봉이 옆에서 거드는 말을 듣고 해태가 다시 씩 웃는다
나가, 또 심심허게는 안허지. 할라믄 확실허게잉.
"2번..."
"그건 아까 했다 아이가!"
삼천포가 짜증을 부리는 걸 모르는 척 하고 바로 이어 소리친다
"3번, 키스! 딥키스!"
삼천포의 얼굴이 깜깜해지는 동시에
나머지가 자신의 숫자를 확인하느라 다시 눈을 내려까는 걸 보면서
속으로 낄낄거리고 웃는다
"누구여, 2번이랑 3번? 키스여 딥키스, 뽀뽀 아니다잉"
사악 그자체인 신난 해태의 목소리가
잠잠한 전원의 머리 위로 퍼져나간다
"잔인한 새끼"
쓰레기가 젓가락 끝으로 톡, 하고 해태의 머리를 내려친다
"어? 성님?"
"미안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5번"
세게 맞진 않았지만 맞은 자리를 긁적이며 쓰레기를 보니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5라는 숫자가 쓰여진 젓가락을 들어보인다
"그럼? 그레 니는?"
"나는 4번이여"
"나는 6번"
칠봉이 젓가락을 들어보인다
"그라믄 누고, 얼른 키스를 하든가, 술을 묵든가,
누가 남았노, 나증이 니가?"
쓰레기의 질문에 나정이 고개를 절레 흔든다
"내는 1번, 윤진아 니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젓가락 끝을 꼭 쥐고 있던 윤진이
조심스럽게 바닥에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3'
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삼천포와 해태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진다
"어, 그럼 2번은? 삼천포야?"
흙빛이 된 삼천포를 옆에 앉아 있던 윤진이 올려다본다
무덤덤한 윤진과 달리 젓가락을 꼭 쥐고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삼천포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우얄기고, 마실래 할래? 근데 윤진이 니 이거 다 마실수 있겠나?"
걱정하는 건지 재촉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나정이 묻는다
아닌 게 아니라 왕게임도 꽤나 막바지에 접어든 탓에
지금 저 앞에 놓인 냉면 그릇의 벌주는 맥주와 소주를 정확히 1:1 비율로 섞은,
어지간한 상황에서라면 감히 마시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물건이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대접을 바라보던 윤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삼천포를 한번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대접을 바라본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평소와 같이 윤진의 얼굴은 무표정한데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모은 두 손이 긴장한 듯 깍지를 쥐었다 풀었다 한다
살짝 떠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저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이미 취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겁을 먹어서인지 모르겠다
건너편에서 그걸 보고 있던 해태는 문득 차라리 아까 빙그레처럼 포옹 같은 걸 말할 걸 하고 후회한다
아무리 윤진이라도 저 벌주를 다 마실 수 있을지...
그렇다고. 키스, 딥키스, 삼천포와.
해태는 불과 몇분 전 신나서 외쳤던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우얄래? 얼른 묵든가"
지친 듯이 쓰레기가 재촉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삼천포가 어마어마한 양의 술 대접을 보고 다시 움찔 굳어버린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흡, 하고 숨을 들이쉰 윤진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결심한 듯이 팔을 뻗는다
윤진의 손이 향하는 방향을 본 삼천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해태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이야, 역시 컴공 94학번 에이스 답다"
"너 진짜 그거 다 마실 수 있겠어?"
감탄과 걱정이 섞인 말들을 뒤로 하고 윤진은 앞에 놓인 대접을 집어든다
두손으로 들어도 버거운, 제 얼굴보다 더 큰 냉면 그릇 가득 찰랑거리고 있는 술을 멈칫, 하고 보다가 천천히 입가로 가져간다
찰랑,
술 몇 방울이 흔들려 바닥에 떨어진다
방금까지 가득히 술대접을 들고 있던 윤진의 두 손이 텅 비었다
........?
대신 건너편에서 불편한 표정으로 내내 윤진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해태가
확, 하고 그릇을 가로채 말릴 틈도 없이 마시기 시작한다
지금 일어난 이 상황이 뭔 일인지,
사실은 윤진이 아니라 해태가 마실 차례였던 건지
자신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건지 아니면,
헷갈리기 시작한 5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황당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꿀꺽꿀꺽 한번도 쉬지 않고 그릇의 술을 마셔버린 해태가 훅, 하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서 그릇을 내려놓는다
"....니....뭔데?"
태연하게 그릇을 내려놓고는 앞에 놓인 치킨 조각을 뒤적여 살코기를 집어 먹는 해태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숙생들 중에서 제일 궁금한 걸 못 참는 나정이 무릎 위에 턱을 괴면서 묻는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있던 하숙생들이 나정의 질문에 속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해태를 바라본다
"뭐가?"
닭을 먹다말고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다
"니가 그 술을 와 묵냐고"
"... 먹을 수도 있지 아무나 마시면 되는 거 아녀"
"그니까, 니가 왜 윤진이 흑기사를 하냐고"
내내 아무 말도 없이 그릇을 뺏긴 그 상태로 굳어 있던 윤진의 얼굴이 아주 살짝 어두워진다
힐끔 그 표정을 캐치한 해태는 섣부른 짓을 했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금 어두워지지만 태연하게 대답한다
"흑기사는 무슨, 저 가시내 술 많이 먹으면 어찌 되는지 아냐, 나가 느그들 다 구해준 줄이나 알어"
집에서 종종 친구들끼리 술을 먹다가 술이 많이 들어가면 조용히 잠드는 윤진은 봤지만
어떤 술주정을 한다던가 술버릇이 있는 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니 애초에 취하는 일 자체가 별로 일어나지 않는
자타공인 컴공 94학번 에이스 조윤진이 어떤 술버릇이 있길래 저가 나서서 술까지 대신 마셔야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해태의 말이 오히려 더 미궁으로 밀어넣는 바람에
다섯명의 표정은 아까의 의아함을 넘어 이제는 아예 아리송해진다
스스로 술버릇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다가 그게 대신 저 술을 마셔서 술 취하는 것까지 방지해야할 정도란 말에 윤진도
저도 모르게 해태를 빤히 바라본다
"뭐야? 어떻게 되는데?"
"윤진아, 니 뭐 있나?"
물어본들 스스로도 모르는 술버릇을 대답해줄 수 있을리가 없다
뭐긴 뭐냐...
폴짝거리고 댕기다 노래 한곡 하다 떼 쓰고 뭐 그런거지 평소의 조윤진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해태가 별 게 다 궁금하다는 듯 툭 끊는다
"그런 게 있어야, 나정이 니 윙크에는 댈 것도 아니란 것만 알아두라"
"... 근데 니는 그걸 우예 아는데?"
깔끔하게, 의혹을 약간만 남기고 지나갈수 있겠다 했는데
역시나 생각보다 훨씬 예리한 나정이 꼬리를 문다
"... 뭐 어쩌다 보니"
얼버무리면서 저에게 계속해서 따갑게 꽂히는 시선을 모르는 척 하고
천천히 앞에 놓인 젓가락을 주섬주섬 모은다
젓가락을 집어들어 컵에 넣으려고 하다보니
아직까지 술이 가득 찰랑이고 있는 또다른 그릇이 눈에 띈다
"삼천포, 니는 안 마시냐아"
"... 내도 마셔도"
-ㅅ- 표정으로 뚱하게 앉아 있던 삼천포가 말한다
"지랄, 니 취하면 나가 2층까지 니 끌고 올라가야한께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마셔라아?"
해태가 냉정하게 거절하자 푸핫, 하고 칠봉과 쓰레기가 웃어버린다
삐진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고는 내키지 않는 듯 냉면그릇을 집어든 삼천포가
애원하는 눈으로 해태를 한번 더 보고는 외면하고 있는 해태를 확인하고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표정으로 마시기 시작한다
"자, 다음 판 가야제, 뽑아라"
해태가 젓가락을 컵에 집어 넣고 탈탈 흔들어 섞은 뒤
한 손으로 컵을 반쯤 가려 번호가 보이지 않게 하고는 내민다
"잠깐만"
나정이 해태의 손을 저지한다
"니 흑기사 하면 원래 소원 말해야한다 아이가"
"소원?"
그게 뭐냐, 하고 의아하게 묻자 나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몰랐나? 소원 들어주는거"
"그래 맞아, 윤진이가 니 소원 들어줘야하잖아"
칠봉의 맞장구에 아까부터 부루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괜히 손가락으로 마룻바닥에 그림 그리듯 만지작 하고 있던 윤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한 듯 굳어버린다
딱히 뭘 바라고 한 건 아닌데....
"니 소원 뭔데? 말해봐라"
늘어진 검은 머리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윤진의 표정 변화를
물끄러미 보던 해태가 싱긋, 하고 웃는다
"나중에."
제 할말은 다 했다는 듯 다시금 괜히 컵을 탈탈 흔드는 해태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나정이 끈질기게 묻는다
"뭔데? 뭔데 말을 안하노?"
나중에,라는 말이 떨어지자 마자
놀란 듯이 번쩍하고 든 윤진의 시선이 저를 살짝 살피는 것을 느끼면서
해태는 모르는 척 손을 들어 저에게 덤빌 듯이 추궁하는 나정의 이마를 꾹 눌러 자리에 도로 앉힌다
"나중에 말할랑게, 글고 니가 궁금해할게 뭐냐 니 소원도 아닌데"
"그래도"
"어여 집기나 혀, 다음판 가야제"
더이상의 질문은 없다, 라는 듯 강경하게 컵을 내민다
"선착순이여"
기습적으로 말한 해태가 쏙 하고 젓가락을 뽑자마자 망설이던 손들이 순식간에 젓가락을 뽑아간다
생각에 잠겼던 듯 조금 늦게 다가온 윤진의 손이 젓가락을 집어 빼려고 하는 걸
해태가 순간 컵을 덮고 있던 손으로 젓가락을 콕, 잡아버린다
젓가락이 빠지지 않자 윤진이 그제야 컵을 막고 있는 손의 주인, 해태를 바라본다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어주자 윤진의 얼굴이 당황한 듯 싸늘하게 굳는다
나의 소원은 말이다,
눈을 바라보면서 속으로만 생각한 뒤 컵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뺀다
내내 당황한 표정의 윤진이 젓가락을 뽑아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소원은,
"누구냐 왕?"
말하면 들어줄거제?
==================================
온갖 낚시질과 스포와 망상 끝에 멘붕에 빠졌다가...... 결심...
방송국 놈들! 니네가 뭔 결론을 내든 낚시질을 하든 간에! 나는 이 케미를 못 놓겠으니!
평행 우주가 되든 어쨌든 간에 얘들이 서로 좋아하는 걸 꼭 봐야쓰겄다! ㅠ_ㅠ
흑.... 오늘 대체 어떻게 될지 너무너무 걱정 + 기대,되지만 일단 딸기우유는 본편과 상관없이 계속 됨...
변덕부리면서 쓰고 있지만서도 - 늘 기대하고 읽어주고 재미있었다고 댓글 달아주는 상냥한 냔들 고마워 ㅠㅠ
나가 기운내서 한번 열심히 써볼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