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ly - h&y/strawberry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6

april_m 2013. 11. 16. 19:55




(H's side) 








9시 59분 



49초 

... 

55초 

56... 
57... 
58... 
59... 


10시! 



정확하게 12 숫자판에 닿는 초침을 확인하고 왼쪽 창가자리를 홱,하고 고개 돌려 바라본다 
기둥에 가려 반쯤만 보이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자리 주인이 
마치 무슨 작동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기계적인 태도로 착착착,하고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덮기 시작한다 


하이고, 칼이구만 칼이여.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자신도 책상 위에 펼쳐뒀던 노트와 책을 접는다 
하루종일 저 왼쪽 자리를 신경쓰느라 제대로 페이지도 넘겨보지 못한 책을 
아침에 들고나온 그대로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돌아보니 이미 열람실을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차피 행선지는 정해져있는 거고 놓칠 일은 없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10초정도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부터 통 얼굴을 마주치기 어려웠던 윤진을 
처음엔 그냥 궁금해하다가 그 다음엔 넌지시 수소문 하다가 
결국 대체 뭘 하길래 하루종일 틀어박혀있다는 증언만 나오는지 알 수 없는 도서관으로 찾아온게 벌써 닷새째다. 


누가 지독하게 정확한 조윤진 아니랄까봐 
마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람실 문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안쪽의 창가 자리에 
늘 약간 웅크리고 앉아서 제 머리보다 클 것 같은 책과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기둥 뒤쪽 사각지대의 자리에 앉으면 딱,하고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매번 자리를 바꿔가면서 앉기라도 했으면 사각지대를 계산해서 찾아내느라 귀찮았을텐데 
감사하게도 - 딱히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닌 습관이겠지만 - 늘 자리를 정해놓고 앉는 덕에 
전망 좋은(?) 자리를 확보해서 놓칠 걱정 없이 틈틈이 관찰할 수 있었다 


윤진이 칼같이 지키는 건 자리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시간 같은 것. 
그러니까 점심 식사는 식당이 붐비기 전 11시 30분쯤에 도서관을 나서서 먹고 들어오고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는 두시간 간격으로 어김없이 매점으로 쉬러 나간다는 것 
수업이 있을 경우에는 딱 10분 전에 강의실로 출발하고 
저녁 시간은 역시나 붐비지 않은 5시 반, 
그리고 열시엔 짐을 싸고 열시 오분이 되면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딱히 시간을 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저러는 건지 신기해 죽겠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서 어디 갔나 하고 찾기도 했는데 
몇번인가 정확하게 움직이는 윤진을 확인하고부터는 아아 이시간 쯤엔 어디 있겠군, 하고 짐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어제 오후에는 우연히 마주친 척하고 드디어 말을 걸어보기도 했는데, 
그때 이후로는 어째 쉬러나가지도 않고 식사를 하러 갈 때도 잔뜩 경계하는 듯 주변을 살피고 다녀서 
제가 뭘 어쨌다고 저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영 신경이 안 쓰이진 않나보네, 싶기도 하다 
이왕이면 제가 신경쓰는 것 만큼 신경을 써주면 좋을텐데. 


도서관 입구를 빠져나가 총총총 하는 걸음으로 백양로를 걷고 있는 윤진의 뒷모습을 찾아낸다 
제법 날씨가 쌀쌀해진데다 시험 기간이 곧인 탓에 인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백양로는 한산하다 
어두운 밤인데다 사람도 안 다니는 이 길이 언뜻 보면 국민학생으로도 보이는 저 처자는 무섭지도 않은가보다 
한번 돌아볼 생각도 않고 마치 습관처럼 일정한 속도로 걸어간다 
덕분에 마음 놓고 열걸음쯤 뒤에서 걸을 수 있는 거지만. 


사실 평소의 윤진은 인간처럼 보이는 로보트인 건 아닐까. 


해태는 순간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저 혼자 푸숙 웃어버린다 


하여간 그렇게 안 생겨서는 간만 크다니까, 정대만. 
그렇게 안 생겨서는 과격하기도 하고 
그렇게 안 생겨서는 독하기도 하고 
그렇게 행동 안하면서 사실은 귀엽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걷고 있는 윤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생각한다 
어쩐지 순간 딱 열걸음 앞에 걷고 있는 윤진과 저 사이의 공기가 느릿해지면서 
제 발걸음도 러닝머신 위를 걷는 듯 느려진 것 같다 

천천히 골목을 접어들어 약국 앞을 지난다 


아아, 여기. 


해태는 문득 아픈 기억에 얼굴을 찌푸린다 
그때 윤진에게 들키는 바람에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중에 성적표를 들이밀면서 진짜로 나 수업 때문에 산거라고 반박하다가 
괜히 학점만 오픈 되는 바람에 - 1학기는 학사경고에 가까운 저공비행을 했다 - 
윤진도 윤진이지만 생각보다 학점이 좋았던 나정에, 언제 공부를 했는지 니 성적이 그게 뭐고, 라고 
저를 새침하게 내려다보던 삼천포까지, 하숙집 식구 전체에게 비웃음을 당했더랬다 


금새 털어버리는 제 성격 상 그렇게 당했다고 해서 오래 담아두진 않았고 
날마다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1학년 생활 속에 그 사건도 지나가버렸지만 
그때까진 설마 윤진이 귀엽게도 보이는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어제 벤치에서 정말 기억이 안나냐며 추궁하자 순간 너무 막막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윤진이 떠오른다 
평소였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헛소리 하지 말라고 오히려 버럭하거나 
아니면 사람 놀리냐고 욕을 먹거나 쥐어박히거나.... 목이 졸렸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리 제가 짓궂게 놀려도 성격대로 못하고 멈칫,하기만 했다 


'너 술 그렇게 먹고 기억 못할 줄 알았다' 


그냥 그렇게 말해버렸어도 그만인, 별 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까맣고 큰 눈으로 당황해서 저를 올려다 보는 걸 보다 보니 절대로 말하지 않고 싶어졌다 
계속 그렇게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걸 보고 싶어서, 
적어도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평소의 얼굴과 다른, 
언젠가처럼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저 때문에 흔들리는 감정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조윤진'을 보고 싶어서 
자꾸만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이것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제 생각이 유치하단 생각에 긁적하고 뒷머리를 긁는다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지금은 그 얼굴이 보고 싶은 걸. 


똑. 



차가운 것이 이마에 떨어진다 
응? 하고 멈춰선다 
이마를 만져보니 물방울이다 
순간 또다른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비 소식이 있었던가. 
어제도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들고 나왔다가 결국 안와서 오늘은 그냥 두고 나왔는데. 


낭패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를 느꼈는지 윤진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혹시나 돌아볼까봐 순간 당황해서 
어디로 몸을 숨겨야하나, 아니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가운 척을 해야하나 하고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윤진은 그저 뒤로 맨 커다란 배낭을 뒤적뒤적하더니 우산을 꺼내든다 
아마도 보통의 크기겠지만 윤진에게는 꽤나 커보이는 빨간 우산을 펼쳐들더니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들키지 않았으니 안도해야하고 
윤진에게는 우산이 있으니 안심해야하는데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먼저 든다 

가만히 빨간 우산이 움직이는 걸 보다가 
좀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한번 올려다 보고 
잠깐 망설이다가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빨간 우산 속으로 뛰어든다 


갑자기 훅,하고 누군가 나타나서는 휙,하고 위로 올려진 우산에 딸려 제 손이 올라가는 통에 
놀라 윤진이 멈칫, 서서는 옆을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같이 좀 쓰자, 우산." 


못마땅한 표정인 윤진에게 배시시 웃어보인다 
뭔가 한마디 할 것처럼 입술이 달싹일 듯 말듯 하던 윤진은 
끝까지 웃고 있는 해태를 한참 보더니 포기한 듯이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를 놓는다 

제 손에 온전히 쥐어진 우산을 통,하고 고쳐잡고는 조심스럽게 윤진 쪽으로 기울인다 
제가 신경쓰는 건 아는 건지 힐끔 바라본 윤진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다 
빗소리에 섞여서 쾅쾅 거리는 드럼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이어폰으로 두 귀를 막고 
말 걸지마! 란 분위기를 팍팍 풍기면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는 윤진이 약간 원망스럽다 


가시내.. 


해태는 속으로 삐죽 입술을 내밀고는 빈 손으로 윤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뭐여?' 라고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같은 불만스런 눈빛으로 해태를 올려다본다 
괜히 건드렸나 싶은 마음에 움찔하면서도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태연하게 귀를 톡톡 두드려 가리킨다 
빤히 바라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다시한번 귀를 가리키자 싫은 티를 내면서 윤진이 이어폰을 뺀다 


"같이 가는디, 말이나 허고 가자고" 
".... 뭔 말이 허고 싶은디"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이어폰 까지 빼라고 한거냐 하는 잔뜩 짜증난 눈으로 올려다보는데도 
해태가 눈을 피하지않고 눈치없는 듯 배시시 웃자 윤진은 폭,하고 한숨을 내쉬고 포기한 듯 대꾸한다 


"에.... 만날 이래 늦게 다니는 거여? 서울이 얼매나 무서운 곳이디, 뭔 일이라도 생기믄 어쩔라고" 


잠깐 망설이던 해태가 윤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인 소리를 늘어놓는다 
매일 이시간에 다녔어도 문제가 생긴 적은 한번도 없었고 이제는 제 손바닥 보듯 빤하게 다 아는 동네다 
아니 그보다 지금까지 제가 몇시에 들어오는지도 몰랐을 녀석이 
갑자기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구는 양이 황당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아니 매일 스페이스 서 죽치고 술이나 먹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본인의 생활을 생각해야지 어디다 대고 나한테! 


".... 무서운 일은 한번도 없었네. 귀찮은 일은 생길랑가 몰라도" 


노골적으로 니가 매우 나를 지금 귀찮게 하고 있다.라는 의미를 담아 쳐다본다 


"아이고, 섭섭하게 그게 무슨 소리당가,가시내 말 참 못됐게도 허네잉" 


윤진의 말에 총이라도 맞은 듯이 윽,하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엄살 피운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불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해태가 진심으로 상처 받았다는 듯이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쩔 것이여?" 
"?" 


우산 괜히 씌워줬다. 생각한다 
그동안 안 마주쳐서 그나마 괜찮아졌나 싶었다가 
어제 다시 우연히 만나 이상한 이야기까지 듣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불편해죽겠는데 
대체 무슨 딴지를 걸려고 또 이러나 모르겠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굳이 맞고 오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해서 같이 쓰고 가자는 말에 동의해준게 잘못이었다 


"어쩔 것이냥게?" 
"뭘 말이여" 


대답없이 빤히 보기만 하는 윤진에게 다시 한번 해태가 대답을 재촉한다 
약간 짜증이 섞여나오는 윤진의 퉁명스런 대답에 이젠 아예 울 기세다 


"니 땀시 마음의 상처를 겁나게 입어버렸구먼, 한번도 아니고 이번이 몇번째당가" 


마음의 상처 같은 소리. 
정말 진실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머시매 같으니 

코웃음을 치며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린다는 듯 앞만 보고 무시하는 윤진을 힐끔 보더니 
이번엔 살살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니 아직도 기억 안나제?... 하아... 그려... 나가 니헌티 뭘 그래 중요한 인물이겄냐... 
 잊혀져도 그만인 약속인거였구만... 나는 농락을 당해부렸어... 친구헌티 버림받고 세상 살아 뭣하겄냐..." 


으악, 진짜!!!!! 


저도 모르게 손이 확-하고 올라간다 
우산을 들고 있는지 어쩐지, 제 손을 다 뻗어도 해태의 목에 가 닿을지 어쩐지 
뭐 그런 건 하나도 생각이 안나고 일단 저 목을 비틀어버려야지! 하는 충동이 먼저다 
순식간에 제 목을 덮쳐오는 손을 발견하고 해태가 중얼중얼하다 말고 놀라 쑥하고 몸을 뒤로 뺀다 
간발의 차이로 해태의 목을 놓쳐버린 윤진이 씩씩거리면서 해태를 올려다본다 
윤진의 손을 피해 우산 밖으로 도망친 해태가 멈칫,하고 선다 

꽤나 많이 내리기 시작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해태가 
겁을 먹은 건지 아무 말도 없이 씩씩거리고 있는 윤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당장 우산 내놓으라고 해서 이걸 확 쫓아버릴까 하고 입술을 꼭 깨물던 윤진은 
문득 좀전까지 저를 괴롭혀서 즐거워보이던 해태가 조금 서글퍼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제 눈이 이상한건가 잠깐 생각한다 
내내 잔뜩 놀리기만 했으면서 어째서 저렇게 문득 진지한 눈으로 보는 건지 
마치 정말 상처를 입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정말 제 대답이 제일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제 대답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비를 맞아서 그런가. 


왜 저렇게 청승맞아보이나 생각하다가 중얼. 한다 
뭐,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니까. 
그정도야 괜찮겠지. 


윤진은 그때껏 들고 있던 손을 내린다 


"비 맞는다, 우산 써야" 


퉁명스런 윤진의 말에 조심스럽게 우산 안으로 들어온다 
힐끔 보니 여전히 몸의 절반쯤은 아직도 우산 밖에 있는 채다 
어쩐지 굳어있는 얼굴이 조금 전에 본 눈빛에 겹쳐서 마음에 걸린다 

나가 저를 잡아먹기라도 한다냐 

쯧,하고 불만스럽게 윤진이 혀를 찬다 
모른 척 하고 딴 쪽을 바라보고 걸어보지만 
아까는 말을 하자고 굳이 이어폰까지 빼게 하더니만 이제와 아무 말도 없는 채 제 속도에 맞춰 걷기만 하는게 영 불편하다 


"... 마음 상혔으면 미안허다. 근디 진짜 기억이 안나야, 뭔디 대체" 


중얼,하고 혼잣말하듯 하는 윤진의 말이 빗소리에 섞여 간신히 들린다 


"됐어야... 뭐가 중요하것냐... 니가 기억을 못하는디" 


힘없이 대답하면서도 해태는 속으로 씩하고 웃는다 


조윤진.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다. 도 추가.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잔뜩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까지 외로 꼰 채 시선을 피하고 터벅터벅 걷기만 하는 걸 
그냥 한 대 패서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듯 부글부글 끓는 시선으로 보던 윤진이 간신히 화를 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묻는다 


"... 기억을 못하는 거는... 참말로 미안허구만.. 근디.... 니가 그냥 말을 혀주면... 모든 문제가 깨끗허게... 해결이 될 거 같지 않냐?" 
"그라믄 나가 너무 억울허제" 


억울?! 
니가 뭐가 억울해! 
나보다 억울해?!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윤진을 보고 해태가 배시시 웃는다 


"참말로 니 나헌티 미안허냐?" 


전.혀. 미안하지 않다. 
기억도 안나는 걸 가지고 저렇게 갈궈대는 것 따위 조.금.도. 미안하지 않지만 
아후 근데 왜 미안해야할 것만 같은 걸까 


불만스럽게 해태를 올려다보던 윤진이 천천히 고개를 두번 끄덕인다 


"나가 그냥 말해줘도 그만인디" 


그래! 말하라고! 말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말을 못하겄네잉" 


다시 꼭 쥔 윤진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이게 뭐라고 제가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걸 그냥 확 죽여버리고 경찰서 갈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 무렵 
고개를 갸우뚱하고 가만히 윤진을 보던 해태가 말한다 


"아야, 친구야, 부탁하나 들어줄랑가" 
"...." 


이제는 니 부탁은 뭐든지 안들어줄란다! 라고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제법 진지하게 저를 보고는 싱긋 웃는 통에 마음이 좀 약해진다 


"들어주믄" 
"니가 뭘 말해야혔는지, 다시는 안 꺼낼랑게" 


솔직히 이제는 제가 뭘 말했어야하는 건지 조금 궁금하기까지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이 뭔디, 들어보고" 









"그랴서 여그서 명령어를 이래 쓰는 것인디" 
"아아 모르겠다. 한번만, 한번만 더 설명해도" 


거실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윤진이 노트에 써내려가는 명령어를 따라가던 나정이 짜증을 버럭내며 소파에 기대버린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대강 눈으로만 글씨를 따라가고 있던 해태는 말없이 불만스럽게 나정을 본다 


아니.. 말은 꺼낸 거이 나인디 워째 니가 짜증이냐 친구야. 


모레 있는 C+ 언어 시험 공부를 도와달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서 기껏 마루에 둘이 앉았는데 
지나가다 보던 나정이 자기도 대체 컴퓨터 언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둘 사이에 끼어앉아버렸다 


굉장한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전.혀. 뭘 기대하고 부탁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슬쩍 뭔가 말이라도 건네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나정아 어디까지나 니가 끼어든거란 말이다 
저 예민한 가시내가 니 땀시 접고 올라가버린다고 하믄 니가 책임질라냐 


둘이 있어야겠으니 들어가란 소리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제가 올라가버리자니 그건 그것대로 아깝고, 
아까부터 그런 딜레마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사실 컴퓨터 언어 같은 게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을 리가 없다 
순천 1호 컴퓨터학원 수강생이었던 자신은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기본적인 프로그래밍은 했었다 
가끔 수업을 들어도 다 아는 내용 뿐이었다 

나정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가며 듣고 있는 윤진의 목소리를 그저 배경음악삼아 
노트 위를 달리고 있는 윤진의 펜 끝이 아니라 열심히 설명에 몰두하고 있는 윤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집중하느라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이 언젠가는 웃기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말을 하느라 오물오물하는 입술이 싸악,하고 위로 올라갔던 순간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체 어디에 그런 모습이 숨겨져있는 걸까 
멍하니 보고 있는 해태의 시선을 알아차린 윤진이 노트를 보느라 내리 깔았던 속눈썹 긴 눈을 순간 확,하고 위로 치켜든다 


"알긋냐?" 
"...." 


딴 생각에 잠겨있던 해태의 그제야 정신을 차린 표정과 
대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멍한 나정의 눈빛을 보고 
윤진은 한심하다는 듯 폭,하고 한숨을 쉰다 


"느그들은 대체... 수업시간에 뭘 한겨... 이거 다 강의한 내용 아녀" 
"나야...잤제" 


홱하고 째려보는 눈빛에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고개를 금새 나정 쪽으로 돌려버린다 


"나정이 니는?" 
"나는 암만 봐도 모르겠더라. 그때도 모르겠더니 지금 니가 말해줘도 모르겠다. 이해가 안된다 내 반핀갑다" 


풀죽은 나정의 대답에 윤진이 잠깐 생각하더니 그래도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단 그냥 외워야, 이해는 그 담에 해도 늦지 않어. 
 글고 실제로 프로그램을 짜보는 거시 젤 좋은디. 암만해도 글로 보는 거랑은 다르니께" 


윤진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던 나정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다 

"해태야 내 니 컴 좀 빌리쓰도 되나? 니 컴이 우리 집에서 젤 좋다 아이가" 
"망가트리지만 말어야, 근디 지금 천포가 쓰고 있을 틴디?" 


삼천포쯤 문제도 안 된다는 듯 해태의 말을 흘려들은 나정이 단번에 계단을 올라가버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새 윤진은 묵묵히 펼쳐놓은 노트를 차곡히 모아 정리한다 


"끝난거여?" 


분명 불러온 건 저인데 나정이 올라갔다고 저렇게 접어버리나 싶어서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묻자 황당한 표정으로 해태를 본다 


"... 노트 끝까지 다 설명해줬잖여, 또 뭣이 궁금헌디?" 


들은 게 없으니 알 리가 없다 
대답없이 어물쩡하는 해태를 보고 한심한 듯 고개를 절레 저은 윤진은 
도로 나정이 두고 올라간 윤진의 노트 복사본과 책을 탁탁 쳐서 모아 따로 모아놓고 
거의 아무것도 쓰지않은 해태의 노트를 힐끔 보고는 손가락 끝으로 슬쩍 밀고는 
소파 옆에 내려놓은 가방에 제 짐을 도로 넣기 시작한다 

해태는 싱글거리면서 그러는 윤진의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한다 
윤진이 별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난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는데 나정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꾹 참았다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는 것도 
저렇게 학생같은 선생님이 어딨냐 싶어서 우습고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어를 적어나가는 얼굴을 봐도 
사실은 웃기도 하는데, 늘 저런 얼굴만은 아닌데 싶어서 웃음이 나고 
제 손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손으로 재빠르게 짐을 챙기는 걸 보자니 
다람쥐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 도토리 같은 걸 모으는 것처럼 보여서 귀엽고 

하여간 그냥 보고 있으면 자꾸 웃게 된다 


물끄러미 저를 보고 있는 해태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가방을 챙기던 윤진이 
마침내 못 견디겠다는 듯 홱,하고 해태를 본다 
실실거리고 웃고 있는 얼굴이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뭘 보냐" 
"너." 


당연하다는 듯 담백한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다 
당황해서 평소보다 더 커진 눈으로 몇번인가 깜빡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해태는 그저 배시시 하고 웃고 만다 
저를 뚫어지게 보는 시선을 피해 잠깐 눈을 굴리던 윤진은 그저 꿀꺽하고 침을 삼키고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쓸데없는 짓 허지 말고 노트나 한 번 더 봐야, 두 번은 설명 안해줄랑게"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후다닥 사라진다 
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버리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해태는 
윤진이 밀어놓고 간 제 노트를 접고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집어들다가 피식 웃는다 

좀전에 윤진이 가방을 내려뒀던 소파 약간 안쪽으로 
윤진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워크맨이 살짝 숨겨진 것처럼 놓여있다 
이걸 잊고 들어가다니 겉으로 티는 거의 안 냈지만 엄청나게 당황하긴 한 모양이다 
소파 아래 남겨진 워크맨을 집어들고 잠깐 고민한다 

갖다줘야하나 어쩌나. 


이걸 놓고 갈 정도로 좀전에 당황한 거면 지금 방에서 다시 가지러 내려와야하는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윤진을 당황하게 한 장본인인 제가 아직 여기 있을지도 모르니까 

..... 고민하고 있을까? 


한번도 본적 없는 고민하는 윤진의 얼굴을 한번 상상해보고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 저 때문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피식 웃고는 부스스 어깨에 노트를 넣은 가방을 메고 워크맨을 손에 들고 일어선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2층 거실을 지나서 맨 안 쪽에 있는 윤진의 방 앞에 선다 
잠깐 망설이다가 큼, 하고 헛기침 소리를 낸 후에 조심스레 워크맨을 방문 앞에 내려놓는다 

소리를 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문 너머를 향해 
똑,하고 한번 노크를 한 후에 안에서 들리도록 약간 큰 목소리로 말한다 


"워크맨 여그 갖다놨응게, 갖고 들어가야" 


혹시나 답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숨죽이고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고요한 문 너머를 한번 더 보고 물러선다 
어쩌면 저 문 너머에서 자신의 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윤진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피식 하고 웃는다 


아따 아가 나가 니를 잡아먹기라도 한다냐, 


아무래도 미쳐버렸나보다 
자꾸만 생각나고 
자꾸만 괴롭히고 싶고 
그러면서 
이젠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어쩌냐, 


나 점점 네가 좋아지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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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본편에서 해태는 그저 우정꾼, 의리의 사나이... 쓸데없이 질질 흘리고 댕긴 멜로눈깔, 케미 낭비이오만... 
그런 해태도 충분히 나냔은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일단 딸기우유에서는 그것과 상관없이 - 
연애! 하자! 해태야! 그래! 너도! 연애하면 되지!!! 하면 된다!! ㅠㅠ .... 는 이걸 쓰고 있던 나냔의 의식의 흐름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다려주고 읽어준 냔들 고마워~ 나가 냔들 덕분에 계속 글을 쓴당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