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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2

april_m 2013. 11. 20. 23:28











-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야! 손호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큰 화면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호준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난다 
씩씩거리면서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듯한 성균이 어리둥절한 표정의 호준을 보고 간신히 심호흡을 몇번 하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무실 문을 닫는다 
그리고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당장이라도 구겨버리고 싶지만 참는다.라는 듯 부르르 떨면서 내민다 


"이거 뭐야" 


문 열고 들어오면서 외친 호칭이 평상시의 김대표,가 아니라 손호준,일 때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감한 호준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성균이 들이민 종이에 딱 멈춘다 


"어?" 
"이게 뭐냐고, 갑자기 이 많은 돈은 어디다 쓴건데? 회사 돈이 니 돈이야?" 


성균이 손에 들고 바르르 떨고 있는 건 인터넷 쇼핑몰 거래 명세서다 
호준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소심하게 오른손을 들어 성균이 등지고 있는 쪽을 가리킨다 


"...저거?" 


성균이 못마땅하게 돌아보고는 충격받은 듯 멈춘다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걸 보고 호준은 살금살금 책상으로 다가가 자켓과 지갑을 챙긴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살그머니 사무실 문쪽으로 다가간다 


".... 저걸 다 샀다고?" 


겨우 성균의 뒤쪽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뒤에도 눈이 달린 건지 딱 걸린다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돌아보는 성균에게 배시시 웃어보인다 


"아니, 게임이 뭐가 인기 있는 건지, 요즘 뭐가 재미있는지 알아야할 거 같아서" 


성균이 들고 있는 인터넷 쇼핑몰 명세서의 내역들은 모두 최신의 게임기와 게임팩, 온라인 게임 정품팩을 사는데 썼다 
대체 인터넷이 뭔지, 쇼핑몰은 뭔지, 주문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시간이 한참 걸렸다 
직원들과는 말도 하면 안된다고 했으니 물어볼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성균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서 혼자 찾아내서 들어간 쇼핑몰 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인기있어보이고 좋아보이는 게임 팩과 
엑스 박스, 플레이스테이션을 망라한 게임기, 그리고 요즘 대세라는 온라인 게임들까지 몽땅 쓸어담아서 
결제를 하라길래 회사 앞으로 청구하라고 했는데 그게 아마 오늘 도착한 모양이다 


얼마였더라...... 회사에 돈 많은 거 같아서 확인 안했는데 으음.... 


살 때는 이건 다 회사 일에 도움이 되는거야! 라고 쓸어담았는데 
지금 부리부리한 성균의 눈을 보니 자제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약간 된다 
아니 그래도 그 덕분에 요즘 대체 무슨 게임이 유행하는지 그런 거 배웠... 다고 해도 안 통하겠지.. 

호준의 말을 듣고서야 발견한 듯 TV 아래 쌓여있는 게임 타이틀들을 하나하나 뒤적여보던 성균이 한숨을 푹 쉰다 


"야 이새끼야 이거 절반 넘게 회사에 다 있는거야, 물어보면 갖다줬을거잖아" 
"... 말 걸지 말랬잖여" 
"... 사투리로 말을 하지 말랬지 누가 쓸데없는데 돈쓰라 그랬어! 게임 타이틀로만 5백만원이 뭐냐 대체! 너 이거 다 하긴 한거야?" 
"... 어" 


호준의 대답에 성균의 얼굴이 벙찐다 


"... 저걸 다 해봤다고?" 
"... 다는 아니고.. 한 90% 정도? 아, 하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그만둔 것도 꽤 있긴 한디" 
"......" 
"... 한 일이주일 걸리던디? 근디 재미있는 건 몇 개 안 되야, 추천평을 너무 믿었는갑서" 


대표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가끔 올라오는 결재 서류나 검토하고 성균이 대부분을 이끄는 회의에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면 되는 거라서 
그 남는 시간 내내 사무실 큰 TV로 연결해서 게임만 했더니 금새 할 만 하던데.... 

할 말을 잃은 듯 게임 타이틀과 저를 번갈아보는 성균의 눈치를 힐끔 살핀다 


"다-아 사업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허자 친구," 


슬금 다가가 넉살좋게 어깨를 툭툭 치며 싱긋 웃고는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간다 


"아야, 그럼 나는 병원 좀 다녀올텐게" 
"... 어?! 야! 손호준! 야! 오늘 회의는!" 
"나가 뭘 안디? 니가 알아서 혀 낼 보자고 친구" 
"야!" 


성균이 정신을 미처 차리기 전에 사무실을 뛰쳐나와 문을 닫아버린다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무실 밖 비서에게 여유롭게 웃어준다 


"대표님?" 
"수고해요" 


차마 사무실 밖에서는 소리를 지르지 못할게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스피드! 









껌껌하게 불이 꺼진 가게의 잠긴 문을 괜히 한번 흔들어본다 
그런다고 닫힌 문이 열릴 리는 없다 


『 금일 오후 휴무 』 


간결한 글씨로 쓰여진 쪽지가 문 앞에 붙어 있는데도 어쩐지 아쉬움에 유리문에 손을 대고 안쪽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있는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둠 뿐이다 


에이.. 


성균을 피해 나오느라 병원 예약 시간보다 무려 한시간 반이나 일찍 나와버리는 바람에 
핑계 대고 여기서 좀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날이 도와주질 않는다 

불꺼진 유리 너머의 공간은 낯설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더 고요한 평소의 저 안 쪽은 
노르스름한 할로겐 등이 쇼케이스 안 꽃들을 위한 푸르스름한 빛의 차가움을 상쇄시키고 
가득한 풀과 꽃이 내뿜는 초록빛 향기 때문에 어쩐지 문 밖보다 습기차고 따스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여자처럼.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아직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통원치료를 하고 있던 봄의 초입이었다 
아직까지는 긴 외출이나 사람들 많은 공간에서의 정보 처리가 버거워서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마당에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정도가 전부였던 그 때, 
혼자서 병원을 갔던 건 갑작스럽게 며칠 째 계속 되었던 기억나지 않는 악몽 때문이었다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게 될까봐 어머니께는 그저 잠깐 밖에도 슬슬 나가볼까 싶다고,만 말씀드리고 
예약되지 않은 병원을 찾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대기실에서 그 여자를 봤다 


쾅! 


하고 문이 부서질 것처럼 큰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자그마한 여자가 상담실에서 뛰쳐나왔다 
대기실 구석에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되도록 주변 대화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멍하니 앉아 있던 자신마저 놀라서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기세였다 
막상 뛰쳐나온 여자는 제가 언제 그러기라도 했냐는 듯 살며시 상담실 문을 닫았다 

여자의 돌발 행동 같은 건 종종 있는 일이기라도 한 듯 잠깐 조용해졌던 대기실은 이내 웅성거리는 평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준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던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텅빈 눈은 지금 제가 마주하고 있는 이 깜깜한 어둠 같았다 
잔뜩 지친 듯이 늘어진 팔, 간신히 매달려있는 손 안의 가방, 언제든지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던 무표정. 
한참을 서 있던 여자는 휘적,하고 마치 꼭두각시 줄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대기실을 지나 복도로 향했다 


"조윤진님! 처방 받아가셔야죠!" 


저에게도 날카롭게 들리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반짝,하고 여자의 꺼진 눈에 불이 들어왔다 
불.이었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분노. 
좀전까지 휘청거리던 무기력은 간데없이 잔뜩 바늘을 곤두세운 여자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먹으면, 나아진대요?" 
"선생님께서 처방하셨으니까 드셔야 호전이" 
"그러니까 그걸 먹으면 괜찮아지는 게 맞냐고 묻지 않소 나가" 


전라도 억양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어조에 호준은 왜인지 약간, 웃었다 
어버버하고 당황한 간호사 앞에 성큼성큼 다가온 윤진은 수납대 위에 올려져있던 처방전을 낚아채고는 
또각거리는 구둣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 여자를 다시 본 건 한 달 전 회사 앞에서였다 
정확하게는 회사 앞, [화원] 이라는 간판만 단 작은 꽃집을 지나치면서였다 

아아, 엄니 꽃이라도 사다드릴까, 
요즘 저 때문인지 한숨이 더 깊은 것 같은 어머니 생각에 힐끗 들여다본 꽃집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지나쳤던 윤진을 발견했다 
유리 문 안에서 손님에게 보여줄 쇼케이스 안 꽃을 꺼내는 여자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은 것 같아서 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수상쩍게 안쪽을 들여다보고서야 병원에서 봤던 윤진이란 걸 깨달았다 
그때의 까칠한 얼굴, 잔뜩 지친 듯한 날선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윤진은 상냥한 분위기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묘한 갭,에 이끌려 꽃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서오세요' 


의식하고 들으면 여전히 전라도 억양이 느껴지는 어조 
딸랑,하는 문소리에 저를 발견한 윤진은, 그후로도 매번 찾아갈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그랬듯, 잠시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더랬다 

그후로 종종 어머니께 드릴 꽃을 핑계로 꽃집에 찾아가 이것저것 말을 걸어보았지만 윤진은 대개 무시하거나 성의없는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꾸만 꽃집을 향했던 건 


꽃집에 들어서기 전에 들여다보면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윤진의 편안한 분위기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긴 했지만 마치 꽃집 안의 따스한 공기에 폭 싸인 듯이 평소와 달리 조금 느슨한 기운 
가끔은 제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순식간에 딱딱해져버리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 공간을 침입하고 들어가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 슬쩍 지나가는 공허한 눈 
지금 닫혀있는 이 문처럼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어둠 

궁금했다 
어째서인지 
어째서 닫혀있는 건지 

왜 그렇게 잠겨있는 얼굴인지.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됐그만요" 
"예약 환자분 진료중이시니까, 끝나는대로 접수 넣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평일 오후라 그런지 평소보다 환자가 듬성듬성 앉아 있는 것이 한산하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지만 이내 들어갈 수 있을 거란 말에 호준은 대기실 구석 소파에 몸을 묻는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번, 이제는 2주에 한번 있는 정기 검진이다 
외형상으로는 그런 큰 사고가 있었다고 보기엔 회복이 거의 다 되었고 아무 이상도 없어 보이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기억에 그정도로 큰 사고 이후엔 남게 된다는 정신적인 후유증에 대한 상담은 꾸준히 해오고 있다 
초반에는 정기 검진 외에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증세가 있거나 하면 바로 병원에 왔어야했으니 
어찌보면 지금 지내고 있는 제 방이나 회사 사무실 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이다 


잡지 좀 바꿔놓으라고 해야겠네.. 아니면 게임기를 기증해야하나.. 


이미 외워버릴 정도로 읽어버린 지난해 잡지를 뒤적뒤적하다가 내려놓는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옆에 꽂혀있는, 역시나 외우기 직전인 안내 팜플렛을 집어든다 


환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구만... 


종합병원이니 트렌드에 빠른 개인병원처럼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주 와서 오래 기다려야하는 경우엔 이런 사소한 것에도 지루하고 아쉽다 


"손호준님" 
"네!.... 에?" 


눈을 감고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두드리면서 맥박 뛰는 횟수를 재고 있다가 제 이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다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말에 부스스 몸을 일으켜 익숙한 상담실로 들어가려다 막 수납대에서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고 멈칫한다 


"손호준씨!" 
"잠깐만요!" 


갑자기 진찰실로 향하다 말고 몸을 돌리는 저에게 외치는 간호사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고 뛰어나간다 
방금 본 그 뒷모습이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사람 가득한 복도에 서서 양쪽을 두리번거린다 
제가 따라나오기까지 1분 남짓,일 뿐이다 
멀리 가진 못했을테다 

막 복도 오른쪽 중간 쯤에 있는 계단으로 접어드는 옆모습을 발견한다 
단숨에 뛰어간 호준은 계단 아래에서 그 뒷모습을 따라잡는다 


"저기요" 


갑자기 호준에게 팔이 붙들려 뒤돌려세워진 여자가 놀라 올려다본다 
처음에는 갑작스런 부름에 그리고 그것이 호준인 것을 알고 큰 눈이 더욱 커진다 


"윤진씨, 맞죠" 


호준은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하듯 씩 웃어보인다 
놀란 듯 올려다보던 윤진의 얼굴이 정작 그 미소를 앞에 두고 막막해진다 
멍하니 호준을 보던 윤진은 대답없이 조심스럽게 호준의 손을 제 팔에서 풀어낸다 


"저도 오늘 진료 받으러 왔는데, 윤진씨도? 우리 지난번에 여기서 만난 거예요. 제가 말했던" 


윤진의 반응에 머쓱해진 호준이 윤진의 팔에서 떼어낸 손을 괜히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는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을 멈추지는 않는 호준의 태도에 윤진은 발을 떼려는 듯 멈칫거린다 


"윤진씨" 


그런 윤진을 내려다보던 호준이 꽤나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우리 알던 사이여요?" 


뒷걸음질치려던 윤진이 순간 멈춘다 
가방을 쥐고 있던 두 손이 바르르 떨린다 
잠깐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이고 있던 윤진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나직한 대답에 호준이 안심한 듯 싱긋 웃는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 뭐가 다행이예요?" 


참고 있던 질문이 터져나와버린다 
울컥하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에 호준은 갸우뚱한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뒷목을 긁적하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저, 사고를 당해서 기억이 없거든요. 그래서 병원도 다니는 거구요." 


담담한 말에 막막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진을 향해 덧붙인다 


"윤진씨가 어쩐지 저를 피하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예전에 그쪽을 괴롭혔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윤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면서 고개를 몇번 젓는다 
호준은 상반신을 기울여 스윽하고 윤진의 얼굴을 살핀다 
몸을 잔뜩 수그린 이상한 자세로 제 얼굴을 보는 호준에 놀라 윤진이 한 발 물러서버린다 


"저 무서워요?" 
"... 아뇨" 
"근데 왜 도망간대요?" 
"... 언제요" 
"지금요" 
"아닌데요" 
"그럼 저 무서운 거 아니죠?" 
"네" 
"제가 싫은 것도 아니구요" 
"... 싫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고 호준이 씩 웃는다 
그리고는 원래대로 몸을 일으켜세운다 


"그럼, 같이 저녁 먹을래요?" 
"... 네?" 


갑작스런 말에 번쩍하고 윤진이 고개를 든다 
그런 윤진을 호준이 싱글거리면서 내려다본다 


"저 싫어하지도 무섭지도 않다면서요, 그럼 저녁 정도는 먹을 수 있잖아요"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인 건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생각하느라 
급하게 큰 눈을 깜빡거리던 윤진은 한참 후에야 겨우 차분해진다 

또다시 텅빈 눈. 

웃고 있던 호준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는다 
가끔 이 여자가 보여주는 이 눈이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싫은데요" 
"왜요?" 


단호한 윤진의 대답에 호준이 묻는다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아니 우리 모르지 않..." 


호준이 더 붙잡기 전에 차분히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윤진은 찬바람 쌩, 불듯이 돌아서서 또각거리며 걸어가버린다 
타이밍을 놓친 호준은 낭패본 표정으로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을 잘근 씹다가 문득 생각난 듯 천천히 좀 전에 뛰쳐나왔던 상담실로 돌아간다 


"들어가세요, 기다리고 계세요" 


되돌아온 호준을 본 간호사가 상담실 문을 가리킨다 


"죄송합니다." 


똑똑, 두번 노크한 문을 스윽 열고 들어서면서 멋쩍게 웃는다 


"들어오세요" 


《 의학박사 김해윤 》 


명패가 놓인 차트를 넘기고 있던 남자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여부른다 
남자의 앞에 다가가 앉자 그제야 차트를 덮고 묻는다 


"잘 지냈어요? 별일은 없었고?" 
"아따, 성님. 말씀 놓으셔요 그만치 말씀 드렸는디 이라시믄 지 섭섭혀요" 


애교스런 호준의 말에 해윤은 그저 허허, 하고 웃는다 


"지 다 들었는디, 전에 같이 살기도 했다면서요. 엄니가 그러시던데" 
".. 어무이가 또 무슨 말씀하시더노" 
"성님 별명이 쓰레" 
".. 야야 그게 언제적 일인데, 다 어릴 때 철 없을 때" 
".. 하여간에 그라니께 말씀 놓으시랑게요," 


넉살좋게 앵겨오는 호준을 보는 해윤의 눈에 슬쩍 안쓰러운 기운이 지나간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는다 


"그라까, 약은 잘 묵고 있나" 
"암요, 아이고 말도 마세요 엄니가 아침 저녁으로 약 갯수까지 확인하신당게요 까먹고 싶어도 까먹을 수도 없어야" 
"밥이야 잘 묵고 있을기고" 
"하이고 성님도 잘 아시지요? 그때도 이러셨대요? 엄니 손이 얼매나 크신지 식사 때마다 놀란다니까요" 
"흐흐 그래 내가 있을 때도 그랬니라, 요즘도 여전하시제" 
"손 크신 건 타고 나셨는가봐요. 아무리 그만하셔도 될거 같다고 말씀드려도 도무지 양이 줄어들질 않는다니께요. 거기다 또 요리는 얼매나 잘하시는지.. 요즘 자꾸 살이 쪄서 걱정이여요 제가" 
"좀 더 쪄도 된다, 대신에 운동 규칙적으로 하고." 


사투리를 쓰지말라는 성균의 엄명 때문에 회사에 있는 대부분은 말을 하지 못하는데다가 퇴근 후에도 사투리 신경쓰느라 참아왔던 말에, 
집에서도 할 수 없는 말들이 있어서 쌓였던 호준은 쉴새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성균이 얼마나 고약하게 구는지, 회사 일이 괜찮았다가 또 금새 다신 못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도, 
잠은 잘 자고 있지만 가끔 기억나지 않는 꿈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것도. 
해윤은 한마디를 물으면 열마디를 대답할 기세인 호준의 말을 웃으며 몇가지는 차트에 흘림 글씨로 받아쓴다 

한참을 말을 쏟아내던 호준이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아 성님, 근디" 
"어?" 
"저... 부모님 묘소에 찾아가볼까 싶은디요" 
"......" 
"엄니가 성님께 꼭 허락받아오라고, 성님이 괜찮다고 하셔야 가르쳐주겠다고 하시는디" 


호준의 말에 해윤은 잠시 침묵한다 
불안하게 손가락을 튕기면서 해윤의 대답을 기다린다 
고민하는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몇번 쓱 문지른 해윤이 진지한 목소리로 호준을 부른다 


"준아" 
"예에 성님" 
"니 기억은 좀 돌아왔나" 
".... 아니요" 


꼭 꾸중들은 어린애처럼 주눅이 든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움츠린 호준을 찬찬히 보던 해윤이 차분하게 설명한다 


"준이 니가 마음 급한거 내 안다. 아는데. 너무 급하게 질러갈라고 하면 탈날 수도 있다." 
"...." 
"니 지금 기억 하나도 안난다 캤제, 근데 갑자기 충격받거나 하면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 그래도 부모님 묘소에 한번을 안 찾아가고 이런 불효가..." 
"... 안다 니 마음 내가 다 안다. 근데 너거 부모님도 니가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길 바라실기지, 
 왔다가 괜히 심해지고 혹시나 그런거 안 바라실기다. 
 그러니까 쪼매만 미루자, 니 기억 조금만 더 돌아오고 괜찮아 지믄 그때 가는 걸로 하자, 알겠제?"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갑자기 막막해진다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부모님의 죽음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을테고 
그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저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만약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는 영원히 그분들을 찾아뵐 수 없게 되는 걸까. 

내내 긍정적이었던 기운이 쭉, 빠져나간다 
풀죽은 듯 입을 내밀고 구깃구깃해진 호준의 어깨를 해윤이 가볍게 두드린다 


"그래 기운 빠질 필요 없다, 니 원래 긍정적이다 아이가. 니는 심리적인 문제니까, 그것만 극복하면 금새 괜찮아질기다." 
"......" 
"마음 편하게 묵고 혹시 뭐 생각나거나 떠오르는 거 있으믄 표로 정리해봐라" 
"표요?" 
"타임라인,이라고 부르는긴데... 연도별로 쭉 생각나는 순서대로 기록해보는기다. 중간에 빈 건 그냥 두고 기억 나는 것만. 
 그라다보면 양쪽 기억 때문에 중간에 빠진 기억이 메꿔지기도 하고 그라거든" 
 당장 다 그리는 거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함 해봐라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기억 나믄 쓰고 말면 두고" 
"예...." 


힘없이 대답하는 호준을 힘내라는 듯 한번 더 툭, 치고는 밝은 목소리로 묻는다 


"좋은 일은 없었나? 느그 회사에 예쁜 아가씨 없더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데 예쁜 아가씨가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안대요" 

불퉁한 목소리로 아까 성균이 저를 얼마나 못살게 구는지 토로했던 말을 되풀이 하던 호준이 뭔가 생각난 듯 반짝 한다 


"참, 성님" 
"응?" 
"조윤진, 이라고 아셔라? 여그 환잔거 같던디" 
".... 조윤진?" 
"예에, 지가 아까도 여그서 봤는디" 


해윤의 눈이 순간적으로 격렬히 흔들린다 
당황한 듯 잠시 굳은 얼굴이 눈을 반짝이며 제 대답을 기다리는 호준의 기색을 살핀다 


".... 니가 가를 우예 아노" 


조금 떨리는 목소리. 
호준은 단서를 찾았다는 생각에 그 떨림을 흘려버린다 


"회사 앞 꽃집 주인인디, 여그서 또 만나서, 겁나 반갑더만요" 
"... 맞나" 
"근디 병원은 왜 다닌대요? 지처럼 사고라도 당한거래요?" 
"... 그건 알아서 뭐할라고?" 
"도통 틈을 안 준당게요, 지가 꽃집을 며칠에 한번씩 드나드는디, 이름도 한달만에 겨우 알아내쓰니께 
 성님이 정보 좀 주셔요, 어디 아프대요? 아니믄 집에 환자가 있는 거대요?" 


물끄러미 떼쓰듯 저에게 윤진에 대해 묻는 호준을 보다가 해윤은 천천히 책상 앞에 놓여있던 차트를 들어 
세로로 정확하게 호준의 이마를 내려찍는다 


"아! 성님!" 
"환자 정보는 비밀이다, 이 새끼야, 니는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의료 윤리도 안 지킬 놈으로 보이나" 
"아니 뭐 지가 대단한 게 궁금한 것도 아니고 그냥" 
"됐다, 꼬롬하구로 의사한테 환자 정보나 빼낼라카고 이자슥 안되겠네.. 관심 있으면 니가 알아서 하고, 
 언능 드가라 어무이 니 내한테 무슨 소리 들었나 궁금해하고 계실긴데" 


훠이훠이 손을 내젓는 해윤을 삐죽하게 보다 호준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안녕히 계셔요," 
"그래, 드가라, 약 챙기 묵고 다음 주에 보자" 
"다다음주요 성님, 지 요즘 한 주 걸러 온당게요" 
"안다, 예약 잡고 가라, 그라고 니 운동도 좀 하고" 
"예에 계셔라" 


귀찮다는 듯 차트만 도로 넘기고 있는 해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간다 
호준이 문을 닫고 나간 후에야 차트에서 눈을 뗀 해윤은 
똑같이 말없이 문을 닫고 사라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언젠가만큼이나 길게, 닫힌 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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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에게 멜로를, 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시작했던거라.... 그냥 되게 뻔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복잡하고 낯설게 느꼈던거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그래도 일단 기승전결의 기,는 쓴 거 같;; 월루짓을 하면서 쓰고 있기도 하고 조금씩 구조를 구체화하느라 시간이 걸리기도 해서, 속도가 느려진 건 혹시나 기다린 냔이 있으면 미안; 

복잡할 것처럼 시작해서 뒤로 가면 실망을 줄까봐 무서운 -_- 나냔의 해태야_멜로하자_욕망폭발글,을 읽어주는냔들, 고마워;; 열심히 쓸게;; 

[현재까지의 설정 설명 간단히!] 
2008년이 메인 시즌. 1994년 여름으로부터 고정, 따라서 윤진-천포는 되지 않았음. 윤진이 어머니 청각장애 설정도 등장하지 않음. 
해태의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이 될거고 등장 인물의 이름은 해태 - 손호준(현재 게임회사 대표), 쓰레기 - 김해윤(현재 의사), 삼천포 - 김성균(게임회사 CFO), 칠봉이 - 김재준(일본 진출, 야구선수, 네 저는 사이다를 처음부터 좋아했으니까요 칠봉아 누나가 좋아해 니가 나정이 가져 ㅠ_ㅠ), 빙그레는 아직 미정으로 진행중.. 




+
 

(진행에는 안 읽어도 크게 무리는 안되지만, 그래도 살짝 넣고 싶었던 대화)






"잘 지내나?"


애교섞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윤진은 담담하게 평소보다 한 톤 높여 대답한다


"여그야 뭐 만날 그렇지 니는? 일본은 별일 없냐?"
"여기도 만날 똑같지 뭐, 니 요새 밥은 챙기묵나? 더 마른 거 아이제?"
"아녀, 가시내 쓸데없는 걱정헌다 또"
"밥 해묵기 귀찮고 그라몬 우리집에 가서 무라, 우리집이야 묵을 기 넘친다 아이가"
".... 그려 걱정 말어야 나가 언제 밥 거르는 거 봤냐 적게 먹기는 혀도"


나정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아는 윤진은 
걱정섞인 핀잔에 평소마냥 또다른 핀잔을 주고 만다


"칠봉이는, 잘허냐? 객지서 고생이 많어야 니도"
"뭐 이제 시즌 시작이니까, 올해는 작년보다 잘 하겠지"
"아이고 남의 일처럼 말허냐 니 남편인디"


칠봉이 일본에 진출한 건 지난해, 
기대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탓에 나정이 얼마나 함께 마음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두고 가야하는 저를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했던 것도,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안부 전화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참, 아야 축하헌다, 나가 꼭 신문 보고 알어야것냐 나 섭섭허다잉"
".... 아.... 미안...."


아침 스포츠 뉴스 단신 코너에 짧게 지나갔던 "김재준 선수 2세"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까지 발랄하던 나정의 목소리가 흐려진다


"미안헐기 뭐있당가, 축하할 일이제, 아들이여 딸이여, 언제 나온다냐"
"... 아직 모른다, 겨울이나 되야한다니까 가을에나 알리줄라는지"
"일본도 병원은 괜찮제? 지금 조심해야하는 때인디 한국 안 들어오냐"
".... 시즌 초반이라... 들가기는 쪼매 어렵다... 조심... 해야지...."


자꾸만 흐려지는 나정의 목소리가 맘에 걸린다


"나정아"
"응?"
"하지말어야, 니 이라믄 나가 다시는 니랑 통화 못혀"
".... 니 힘든 거 내가 다 아는데...."


전라도엔 조윤진, 경상도에는 성나정이 있다고 하숙집 머시매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입이 걸고 털털하기로는 뒤지지 않았던 나정은 사실은 마음이 아주 여리고 눈물도 많았다
윤진이 위태로운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틸 때 저 대신 저를 껴안고 가장 많이 욕하고 울었던 것도 나정이었다
지금도 아마 수화기 너머로 훌쩍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니 우냐?"
"... 어데, 내가 울긴 와 우노"
"... 나 아직 재준이헌티 죽기 싫다잉, 나 아즉 세상 살믄서 하고 싶은거 많응게 언능 눈물 그쳐야. 그노무 팔불출 니 운거 알믄 현해탄 건너서 강속구 던질 놈이여"


핀잔 섞인 농담을 던지자 그제야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 한번 온나"
"아야, 나가 암만 사장이어도, 사업장 함부로 문 닫고 못 그랴, 어데 시간이 나야 말이제"
"그래도 시간 내봐라, 니도 바람도 좀 쐬고"


괜한 어리광 부리던 나정이, 잠깐 침묵한 뒤 어렵게 말을 꺼낸다


"... 해태 그 새끼는 요즘도 그라나?"



요즘도.


윤진은 잠깐 생각한다


나정에게 요즘,은 언제였을까
자신은 어느 때의 요즘,을 기준으로 대답해야하는 걸까



"... 니는 태교해야하는 가시내가 말허는 것 좀 봐라, 곱게 못허냐"
"... 니가 우리 남편이가?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데 왜 니까지 내 말투 뭐라 하고 지랄이고"
"아따 느그 아가 태어남서부터 욕허겄다 엄니란 것이 이렇게 말을 함부로 허니"
"아... 씨... 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괜히 딴지를 걸고 놀려보자 역시나 성나정은 금새 파르르 해버린다
아아 이 순진하고 착한 친구 같으니.
서른 넷이나 먹어서도 여전히 신혼처럼 살고 있는 순딩이 부부를 떠올리고 윤진은 사르르 웃는다


"호준이는 요즘 어떠냐고"


좀전까지 미안해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재촉하는 나정의 말에 생각한다


요즘.
그는.


"... 나더러 저녁 먹잔다"
"어?"
"... 일단 저녁 같이 먹자드라"
"... 헐 새끼, 정신 좀 차렸는갑네"


안심한 듯 핀잔 주는 나정의 말에 피식 웃는다


"그래서?"
"어?"
"그래서 저녁 같이 뭇나?"
".... 아니"
"야, 이 가스나야 그걸 거절하면 우야노! 그 자슥이 그 말 할 때까지 얼마나 걸린긴데!"


버럭하는 목소리에 윤진은 또다시 웃어버린다

아아 나의 친구, 나정아.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일단 무라. 묵자 할 때 일단 묵고 생각해라"
"그르까잉... 저녁 정도는 먹어도 되겠제?"


그래도 되겠지, 
그정도는 되겠지 나정아.
그정도는 -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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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힌트는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