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ly - h&y/forget me not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7

april_m 2013. 12. 4. 21:18











똑딱똑딱하는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린다 
정작 공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 그래서 짐 싸들고 왔다구요?" 


소파에 앉아 있던 윤진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당한 목소리로 묻는다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다시피하고 앉은 호준이 슬쩍 윤진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한다 

하아. 

호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호준과 호준 옆에 놓인 짐가방을 번갈아가며 본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인지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윤진의 심기를 살피던 호준은 당장 나가라고 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일단 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기어들어가는 불쌍한 목소리로 말한다 


"엄니께서 만날 집에도 안 들어오구 그럴거믄 나가 살으라고..." 


... 서울 어머니가 그러셨을 리 없다 
오히려 집을 나가겠다고 하니 대체 이 엄동설한에 어디에 가서 어떻게 지내려는 거냐고 
어디에서 지낼 건지 같이 가서 확인이라도 해보자고 나서시는 바람에 
어디서든 잘 지낼거고 연락도 꼬박꼬박 드릴테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설득하느라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런 사정은 모두 감추고 풀죽은 표정으로 바닥에 동그라미를 뱅글뱅글 그리며 
머뭇머뭇 집에서 쫓겨났다고 고백한 호준은 살짝 눈동자만 굴려 소파 위에서 고민하는 듯 내려다보는 윤진을 살핀다 
과년한 아들이 집에 안 들어오는 게 마음에 안 드셔서 내쫓았다 라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거짓말인게 들통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나리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는게 제 한계이긴 하지만 
의외로 윤진은 그 변명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조금 용기를 내서 골똘히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윤진을 향해 불쌍하게 말한다 


"집을 나오기는 혔는데 갈 데도 없구... 아는 데도 없구... 회사에서 지내기도 그렇구..." 
"......" 
"생각해본게... 이 집에 방도 남기도 하고 혀서" 


드디어 이 집에 들어온지 삼십분만에 본론으로 진입했다 
다짜고짜 큰 짐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이닥친 호준을 보고 당황한 윤진을 안심시키고 난 뒤 
얼른 집에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빌라고 하는 걸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거에 안 흔들리신다고 
그냥 잘 살아 있다고 전해드리는게 맞다고 내가 나이가 몇이냐고, 설득해서 
윤진이 이제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하기까지 삼십분이 걸렸다 

긴장해서인지 입이 바짝 말라오는 것 같다 
중요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호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적신다 


"이 집에 하숙생 하나 받아요" 
"...예?" 


그때까지 호준이 하는 말이 그저 듣고만 있던 윤진이 마지막 말에 화들짝 놀란다 
이미 말을 꺼내버렸으니 어쩌랴 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호준은 다시 말한다 


"그냥 딱 들어와 살기만 헐게요, 저 빈 방, 놀리믄 뭐해요 하숙생 한 명 받는다 생각허고 
 나가 하숙비도 섭섭찮게 드릴테니, 식사는 해줘도 좋고 안 해줘도 좋고"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윤진은 잠시 후 고개를 흔든다 


"집에 전화드려요, 얼른, 그래도 어머니도 계시고 방도 있는데 좀 혼나서 섭섭하다고 이러는 거 아녜요" 


... 혼나서 그러는 거 전혀 아닌데, 


심각하게 아예 전화기를 들고 저에게 내미는 윤진을 보다 호준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 젓는다 


"얼른요" 


단호하게 내민 채 기다리고 있는 전화기를 내키지 않는 태도로 일단 받아든다 
난감하게 손에 쥔 전화기를 내려다보다 결국 그냥 옆에 내려놓는다 
전화를 거는 걸 확인하겠다는 듯 보고 있던 윤진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호준씨," 
"... 나가 집에서 쫓겨나기만 혀서 여그서 살아야겠다, 하는 건 아니여라" 


다시 한번 전화를 걸라고 말을 하려는 윤진을 심각하게 올려다본다 


"나가 요새 왜 집에 늦게 들어갔어요? 외박은 또 뭐하다가 했대요?" 


윤진은 순간 입을 딱 다문다 

야구장의 그날 이후 호준은 거의 매일 아예 퇴근을 윤진의 집으로 하다시피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떠들다가 윤진이 잠드는 것까지 보고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가끔은 그렇게 윤진이 잠들기를 기다리다가 호준도 곁에서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 
호준이 지금 말하는 최근의 늦은 귀가와 몇번의 외박의 원인. 

자신이 지금 이 문제의 원인제공자인가,하는 생각에 윤진은 심각해진다 


"윤진씨 탓을 하는 게 아녀라" 


윤진의 기색이 변하는 걸 알아채고 호준이 고개를 젓는다 


"나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생각지 못한 말에 윤진의 심장이 덜컹한다 
호준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다 


"내가 손 안 잡아주면 못 자잖아요" 
"......" 
"내가 안 오면 아무것도 안 먹는 것도 다반사고" 
"......" 
"집에 가도 그쪽 걱정이 되서 인자는 내가 못 살 것어요. 자다 깨진 않았나, 깨서 다시 잠 못드는 건 아닌가, 
 일어는 났나, 밥은 먹었나 별일은 없나 하루종일 그쪽만 신경이 쓰잉께, 차라리 들어와 사는 것이 낫지 않것어라?" 
"......" 
"... 그쪽은 나가 없어도 괜찮어요?" 
"......" 
"나는 안되겠던데" 


호준의 말에 윤진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한다 
설렌 듯 붉어졌다가 울컥 하고 올랐다가 스르륵 가라앉는다 
윤진의 대답을 기다리던 호준이 슬쩍 덧붙인다 


"진짜로, 딱 살기만 할텐게, 뭔 일이 나믄 나를 당장 내쫓아도 좋고" 


딱딱하게 굳어서 물끄러미 호준을 보기만 하던 윤진은 마지막 말에 풋,하고 웃어버린다 


"무슨 일을 내려구요" 
"그거야 하믄 쫓겨나니께, 미리 말 못 하지요" 


웃음기 역력한 목소리에 허락의 기미를 읽은 호준은 살짝 눈치를 보고 스윽,하고 윤진의 옆자리에 올라앉는다 


"... 그라믄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거지요?" 
"... 집에는 걱정마시라고 전화드려요, 그래도" 
"고마워요, 고맙네요" 
"... 제 쪽이 더 고맙죠..." 


제 허락에 두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며 머리를 숙이는 호준에게 
윤진이 깊은 곳에서 올라온 듯 단단히 뭉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고마워요 진짜" 


다시 한번 눈을 맞추면서 인사하는 윤진을 빨려들어갈 듯이 보던 호준은 
사라락 눈을 감는 윤진에게 중력에 끌린 듯 다가가 입을 맞춘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윤진의 머릿 속이 하얗게 사라진다 
긴장하고 있던 호준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진다 

손을 잡은 채 사다리처럼 입술만 맞대고 서로에게 살며시 의지한 채 
서로의 세계가 혼돈 속에 섞이고 폭발하는 걸 느끼는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다 


하아, 

상대의 세계에 거의 삼켜질 뻔하다가 겨우 떨어진 윤진은 숨을 몰아쉰다 
호준은 사랑스럽다는 듯 윤진을 보면서 가만히 뺨을 쓰다듬는다 
조금 전의 빅뱅으로부터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 맞닿은 손만 만지작,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 아직은 뭔 일 난 거 아니지요?" 


침묵을 깨는 장난기어린 호준의 질문에 윤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만다 


"거짓말," 
"예?" 


새침한 윤진의 대답에 호준이 순간 긴장한다 


"스무살까지만 기억난다는 거 거짓말 아녀요? 너무 능숙하잖어,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솔직히 말혀요, 선수지요?" 
"... 운이 좋아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어라," 


윤진의 말을 알아들은 호준은 씩, 웃으면서 윤진에게 다시 다가간다 
장난 치듯 윤진은 몸을 슬쩍 뒤로 뺀다 
호준은 한 손에도 들어올 것 같은 윤진의 허리를 한 쪽 팔로 감싸안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슬며시 몸을 기울이는 호준을 따라 천천히 넘어간 윤진의 등이 소파에 걸쳐뒀던 붉은 체크 무늬 담요에 닿는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보드라운 담요 끝자락을 잡는다 
그윽하게 윤진을 내려다보던 호준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난다 
한쪽 팔로 몸을 버티면서 천천히 고개만 떨군 호준은 윤진의 귀에 속삭인다 


"선생님, 어째, 실력 더 보여드려요?" 









"윤진씨, 여기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호준이 작게 저를 부르면서 손을 흔든다 
윤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을 하고 잡고 있던 문을 놓고 걸어들어간다 


"미안해요, 갑자기 손님이 와서" 
"점심 시간이니 문 닫고 오라고 한 게 무리였는디요 뭘, 괜찮어요" 


묘하게 들뜬 것처럼 보이는 호준에 윤진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차피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보는 사이인데, 굳이 오늘은 꼭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불러냈다 
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건가 하고 즉시 대답하지 않고 빤히 바라봤지만 말을 않고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그렇게 먼 곳도 아니고 호준의 회사 옆 건물 지하의 식당, 
그리고 점심시간이면 바쁜 윤진을 위해 점심시간이 지난 2시에 만나자고까지 하니 
윤진은 그저 애써 가벼운 마음으로 호준의 초대에 응했다 

그런데 계속 저렇게 힐끔거리면서 싱글거리니 다시 약간 불안해진다 


"뭐, 시켰어요? 얼른 먹고 들어가야되지요?" 
"아직이요, 아 조금만 있다가요" 


메뉴판을 집어들려는 윤진을 제지한다 
의아하게 보는 윤진에게 싱긋 웃더니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믄 같이 시켜요" 
"... 누가 또 와요?" 
"소개 시켜줄 사람이 있어요, 아니 윤진씨를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 


순간 윤진의 표정이 굳는다 
호준은 문 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젓는다 


"겁나게 바쁜 녀석이라 이 시간도 겨우 뺐어요," 
"... 누군데요?" 


윤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호준은 긴장하지 말라는 듯 상냥히 웃어보인다 


"제 유일한 친구요, 딴 사람은 몰라도 윤진씨는 꼭 보여주고 싶어서, 
 애가 좀 까칠허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께, 긴장 안 혀도 되요" 


긴장하는 윤진의 손을 토닥토닥한 호준은 막 입구에 들어서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여기야" 


호준의 손짓에 당장 내리라는 듯 귀찮은 표정으로 끄덕하고 걸어오다 
호준 옆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윤진을 발견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앉어야" 
".... 뭐고 지금 이 상황은" 


성균은 호준이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는 대신 심상찮은 목소리로 묻는다 


"뭐긴 뭐여, 니 형수씨 될 사람 소개하는 거제, 긴장허지 말고 앉아야, 
 윤진씨도 긴장 풀어요 쟈가 저래 사람 셋은 한 손에 죽일 것처럼 생겼어도 맘은 고우니께" 


호준이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던진 말에도 둘다 반응하지 않는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는 윤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균은 말없이 휙 돌아선다 


"성균아! 김성균! 야 김이사!" 


성큼성큼 나가버리는 성균을 호준이 급하게 따라나간다 


"야, 아야 니 그라고 가버리믄 어짜냐" 


겨우 뛰어와 저만치 가버렸던 성균을 붙잡는다 
저를 도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붙든 호준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성균이 천천히 손을 풀어낸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허자" 
"... 아이다 내 지금 회사 들어가야하니까, 나중에 회사서 얘기하자" 


호준의 어깨를 툭툭 치고 걸어가버리는 뒷모습을 붙잡지 못하고 멍하니 보다가 힘없이 식당 안 윤진에게로 돌아온다 


"미안혀요, 자가 저런 아가 아닌디,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허네요" 
".... 괜찮아요" 


진공 상태에 갖힌 것처럼 멍하게 그저 멀리 보고 있던 윤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건조하게 대답한다 
잔뜩 미안해진 호준은 슬쩍 윤진의 옆에 앉아 눈치를 본다 


"이랄라고 그런게 아닌디... 자가 눈치가 쪼까 없어요, 원체 일이라믄 자다가도 일어날 놈이라" 
"... 진짜 괜찮아요, 바쁘면.. 당연히 그 쪽이 먼저죠" 


가만히 숨을 길게 내쉰 윤진은 나직이 말한다 
안절부절 못하고 풀 죽은 호준을 발견하고 겨우 희미하게 웃어본다 


"나 같아도 그랬을텐데요 뭘.." 


조용히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호준에게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를 내민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거참, 이상허네....' 



성균이 그렇게 가버린 뒤에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히 식사를 마친 윤진은 
집에서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말을 하고 웃기도 했지만 순간 순간 드러나는 떨림이 묘하게 거슬렸다 

아니 


성균이 식당에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 도로 나가버릴 때까지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 

그땐 그저 둘이 어색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설마. 


혹시 윤진의 전 남편이 성균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바로 자신이 신랑 들러리에 사회를 본 성균의 결혼식이 몇년 전이었다고 들은 걸 기억해낸다 
성균이나 윤진의 나이를 생각할 때 성균이 설마 재혼일리는 없으니, 
윤진과 성균이 부부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대체 성균은 왜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윤진을 노려봤고 윤진은 왜 긴장해서 파르르 떨었을까 
그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답이 안 나오는 질문에 호준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푼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대답한다 
문이 열리고 심각한 표정의 성균이 들어온다 
좀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게 설마 전달된건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일은 잘 봤냐" 


핑계였던 건 알지만 그래도 한번 물어본다 
호준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성균은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잠깐 망설이던 성균이 조심스럽게 부른다 


"니 아까 그 말 진심이가?" 
".... 뭐가 말여?" 


의아하게 묻자 또 망설이다 입을 연다 


"형수씨,라고 했던 말" 
"아아, 응" 


호준은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면서 방긋 웃는다 


"이쁘지? 니도 막상 만나보믄 맘에 들 것이여" 


윤진의 이야기를 꺼내자 연신 싱글거리는 호준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균의 얼굴이 험상궃어진다 


"니 제정신이가" 
"어?" 


버럭하는 성균의 말에 웃고 있던 호준이 당황한다 


"한번 결혼했던 여자랑 또 뭘 한다는 거고? 진짜 결혼이라도 할라고?" 
"... 니가 그걸 어찌 아냐?" 
"내가 와 모르노, 그라고 지금 그기 중요한 게 아이다, 니 우얄라고 이라노" 


대체 저가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을,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친구에게라도 소개하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님도 다른 지인도 없으니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단 한사람에게라도 소개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아무리 윤진이 한번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헤어진 상태라고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는 윤진이 좋으니까, 
그러면 좀 축하해주면 안되나 싶어서 호준은 성균에게 섭섭해진다 


"... 어째 아는 건지 모르지만, 니가 알고 있다믄 차라리 잘되었구만," 
"니는 그걸 아는데도 지금 이라는 거가?" 
"외로운 사람이여, 윤진씨" 


진지한 목소리에 성균은 멈칫한다 


"지난 사람한테 상처가 많더라,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도 나랑 닮았고. 어째 그래 약한 사람이 이 힘든 세상 살았나 싶어야, 대견하고," 
".... 지난 사람...?" 


되묻는 성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려, 지난번 결혼했을 때 그 사람. 혹시 니가 아는 사람이여?" 


성균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긍정하는 성균을 보고 역시, 짐작한 대로라는 듯 호준이 한숨을 쉰다 


"뭐하는 사람인지 몰러도, 참 나쁘더라, 그 작은 사람 상처 줄 데가 어딨다고, 온통 아픈데 투성이여" 
".... 그렇게 아픈 사람 데리고 니는 뭐할라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성균이 영혼없이 묻는다 
호준은 잠깐 숨을 멈췄다가 흩어지는 숨을 끌어모으듯 힘주어 말한다 


"암만혀도 혼자 못 두겄어" 
"......" 
"나가 잘 보듬고 아껴주다보믄 괜찮아지지 않겄냐, 외롭지 않게 옆에 있음서" 


막막한 표정으로 호준의 대답을 듣던 성균은 울컥, 핀잔을 준다 


"... 그쪽이 좋다 하드나, 니 혼자 삽질하는 거 아이고?" 
"... 안되믄 되게 하믄 되지. 근성으로 들이대믄 언젠가는 안되겠나" 


안 그래도 통 어느 선 이상은 넘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 최근의 윤진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저 녀석은 어떻게 그걸 알고 용케 넘겨짚는지 모르겠다 
조금 침울해진 호준을 먹먹하게 보던 성균은 결심한 듯 호준의 목울대를 탁,하고 때린다 


"이 새끼야, 그 근성으로 니 정신이나 찾고 말해라, 지가 누군지도 모르믄서 남 챙기기는 참이나 잘 하것다 무슨," 


기습 공격에 숨이 턱 막혀서 컥컥거리고 있는 호준을 뚱한 표정으로 본다 


".. 아야, ... 그게 무슨 상관당가" 
"와 상관이 없노, 시끄럽다 마, 이 얘기는 니 기억 찾고 나서, 그때 다시 하자"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성균은 문을 쾅 닫고 후다닥 나가버린다 
호준은 여전히 아픈 목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려 풀어주면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몇번인가 뒤늦게 성균을 부르려다 포기한다 


저 자식은, 이상한 소리나 하고.. 감정이랑 기억이랑 뭔 상관이 있다고.. 

중얼중얼거리면서 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직 윤진에게도 하지 못한 고백을 진심을 담아 성균에게 먼저 한 건데 
그걸 저렇게 묵살해버리니 또 조금 섭섭해진다 
그동안 친해졌다고 느꼈던, 그래서 아마도 기억을 잃기전에도 친했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인가 싶다 


하아. 


답답해져서 결국 셔츠 단추를 하나 푼다 
약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있는 서류와 우편물들을 건성으로 넘겨본다 



모르겠고, 


모르겠고, 


이건 나중에 다시, 


모르겠고, 



훅훅 넘기다가 순간 멈칫,한다 



'연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동문회'라고 궁서체로 쓰여진 송년회 초대장이다 
부디 널리 참석해주시기 바란다는 상투적인 문구 끝에 94학번 동창회장 김기태,라는 이름을 확인한다 


물론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어쩌면 김기태라는 이 이름의 소유자도, 호준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들고 고민하다가 인터폰 버튼을 누른다 


  삐이 - 


"네, 대표님" 
"12월 12일 저녁에 일정 있나요?" 
"... 아니요, 비어있습니다" 
"그럼 일정 좀 잡아주세요, 개인 석식으로" 
"예, 반영하겠습니다" 


비서의 대답을 듣고 인터폰 통화를 종료한다 


호준은 다시 한 번 초대장을 바라본다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만 
만약 제 사라진 기억이 성균이 제 마음을 의심하게 하는 이유이고 
혹시나 윤진을 망설이게 하는 원인이라면 

그렇다면, 기억을 찾으면 된다 사라진 그 처음부터 깨어난 순간까지의 기억을 
지금의 자신은 그 기억 없이도 자신이며, 기억을 되찾는다해도 이 모습 그대로일거라는 걸, 보여주면 된다 

호준은 펜을 들어 달력에 표시를 한다 


12월 12일. 


사라진 기억의 실마리를 찾는 날. 
































 

=============== 
나냔에게 멜로란, 어둑하고 애절하고 힘든 것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쓰기 시작한거지만. 
(애들 love scene을 필요보다 길게 쓴 건 애들에게 미안해서 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매번 짠내가 난다는 댓글만 달리는 걸 보고 에혀라..이거 좀 밝게 썼어야 했나 하고 후회도 되지만. 
드디어 해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진이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이 아이들이 움직여주는대로 조금 더 써볼 예정이야. 

결코 밝지 않은데다 (사실 쓰는 나도 힘들어서 여러 번 읽고 손질하지 않는지라) 거칠거칠한 글, 
그래도 기다린다고 ㅠㅠ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그래서 좀더 잘쓰고 싶지만.. 에고. 하여간. 그저. 고마워. 



+
 






딸랑,



종소리에 멍하니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윤진은 힘없이 고개를 돌린다


"... 왔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뿐 아무 말도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선 성균에게 하아,하는 한숨 소리처럼 가늘게 아는 척을 한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윤진을 보다가 결심한 듯 성균이 카운터 쪽으로 다가온다


"얘기 좀 하자"
"... 말혀"


건조하게 윤진이 대답한다
성균은 그런 윤진을 바라보다 울화가 터지는 듯 꾹 눌러참는다


"니 우짤기고, 호준이, 니랑 결혼한다 카드라"
".....!"
"니 외로버 보이가 안되겠단다, 니 옆에서 니 지키줄기라고 하더라, 어데서 마이 듣던 소리 안 같나?"
"....."
"내는 니가 다 얘기한 줄 알았다, 근데 하나도 모르고 있더라, 모리면서도 그라대 니랑 같이 갈거라고"


성균의 말에 꼭 다문 윤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니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제? 내 생각도 같다, 우얄기고 인자"
".... 그런 일은 없을 거여.. 나가 그리 안되게 할 것인게.."


나직한 윤진의 대답에 성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니가 허락할 때까지 들이댄다 카드라, 니 가 모리나, 지금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
"우얄래? 그냥 있을거가? 내가 그동안 니 부탁 때문에 가만히 있었는데 더는 안되겠다
일 커지기 전에 빨리 말해라, 니가 몬한다 카믄 내가 말할기다"


금새라도 터질 것처럼 겨우 흥분을 누르고 성균은 으름장을 놓는다

벌써 몇달째인가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을 회사 일을 하느라 허덕이는 호준을 그저 내버려둔 것이
갑자기 지나친 자극을 주면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는 해윤의 진단 때문이기도 했고
제발 저와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의 호준인 채로 있게 해달라는 윤진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 힘들어하는 호준을 보면 그저 다 말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게 호준을 위한 길이라고, 싱글싱글 잘 웃고 행복해보이는 호준을 보면서 설득당했다


그렇지만


한번 결혼했던 여자와 또다시 결혼 결심.
그러나 한번 결혼 했던 상대가 자신이라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이건 아무래도 호준을 기만하는 일이다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다


"성균아"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성균을 간절하게 보며 소리를 내지 못하는 헛된 말을 끔뻑거리던 윤진은 겨우 문장 하나를 느리게 완성 한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라"
"... 조금이라니 더 얼마나 기다리야 되는데"
"... 곧, 그날이여, 그날까지만.. 내가 더 안 바란다..응?"


윤진의 말을 들은 성균이 화를 내다 말고 멈칫한다


"그날만 지나믄"
"... 그날 지나면 니 진짜 말할기제"


안쓰럽게 윤진을 보다 성균이 다짐한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다


"윤진아"
"......"
"내가 니보고 얼른 말하라고 하는 거는, 호준이 가가 지금 진심이라서다, 가 진짜 니랑 살 생각이다"
"... 알어"
"가 기억 돌아온다고 마음 바꾸고 안 그랄기다, 니 알제? 가 마음 좀 알아주라"


몇번이나 다짐하는 말에 윤진은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끄덕인다
막막하게 윤진을 보던 성균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저 도로 다문다


"... 갑자기 내 할 말만 하고 가가 미안타, 쉬라.."
"... 아니여.. 들어가"


성균은 카운터 너머의 멍한 윤진을 걱정스럽게 보고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간다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그때까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던 윤진은 스륵 무너진다


성균이 누구보다 호준과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몇번이나 호준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던 성균은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호준을 배신한 적이 없다
호준이 무너지려고 할 때조차 저 원칙과 깐깐함으로 호준을 지지했다
호준의 한 축이 자신이라면 다른 한 축은 아마도 성균일게다

그러니 좀 전의 그 말은, 성균의 진심.

윤진은 성균의 말을 입 속에서 중얼,해본다
성균이 말해준 호준의 말을.



'지켜준다 카드라'
'외로워 보여서 안되겠단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제 빈손을 들어본다


'어데서 마이 듣던 말 아이가'


굳이 성균이 짚어주지 않았어도 듣는 순간 알았다



그날 밤,
호준이 주머니 속에 끌어넣고 있던 제 손을 더 꼭 쥐면서 했던 말들.




스물 여덟, 곧 스물 아홉이 되는 겨울.
딱 이맘때 즈음, 12월의 어느 날.
성균과 호준이 함께 차린 게임 회사의 첫 게임이 대박을 터트린지 겨우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온갖 시행착오와 자금난과 조직 내의 다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영양실조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 부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신경성 위염이 일상이 되었던 그때.

윤진은 회사에서는 중견 사원의 위치에 올라 업무량이 많아졌고
이미 나이가 찼는데 어째서 시집을 가지 않느냐고 집안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몇 배의 일과 스트레스를 처리해내고 있는 호준에게 
차마 한마디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묵묵히 기다리는 것만 할 뿐이었던 

그 어느 날의 저녁.



눈이 내렸다


첫눈은 아니었지만, 펑펑 쏟아지는 눈은 그해 처음이었다


'나와, 회사 앞이야'


야근 중이다가 도착한 문자를 받고 뛰어나갔을 때
호준은 추운지 발갛게 된 볼을 하고 손을 부비며 가로등 아래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데, 어디 들어가있지. 아님 내가 가도 되는데"


안쓰러워하며 차가워진 제 손을 부비는 윤진을 보다 호준이 웃었다


"그날 같지 않냐?"
"응?"
"우리 처음 만나기로 한 날"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하는 말에 윤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까만 하늘에 가로등 불빛, 그리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그날,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눈오는 날은 밖에 있네"
"근데?"
"달라진 게 없어서, 시간은 이만큼 지났는데"
"... 난 좋은데 그대로라서"


씁쓸한 어조에 마음이 따끔해져서 괜히 어리광 피우듯 호준의 팔에 매달렸다
그런 윤진을 내려다보던 호준이 안심한 듯 싱긋 웃었다


"그래도, 달라진 건 하나 있어"
"응?"
"... 나 오늘 신용 회복 했어"


갑작스런 말에 눈을 깜빡깜빡하고 올려다보자 호준이 톡,하고 이마를 건드렸다


"나, 빚 다 갚았다고. 급한 것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이제 신용 불량자는 아니야"
".... 우와."


윤진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잘됐다, 축하해, 정말 다행이다, 잘됐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을 들은 양 폴짝폴짝 뛰면서 몇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라도 할 것처럼 기뻐하는 윤진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던 호준은 한참 흥분해서 뛰던 윤진이 마침내 지쳐서 헉헉거리자
그때서야 윤진의 손을 잡아 제 주머니에 끌어넣었다


"윤진아"
"응?"
"좋아?"
"... 당연하지, 잘 된 일이잖아, 그거 때문에 너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윤진을 물끄러미 보던 호준은 순간 제 주머니 속 윤진의 손을 꼭 쥐었다


"결혼하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찌릿하고 온 몸에 전류가 관통했다
필라멘트가 터져버린 전구처럼 순간 멍해진 윤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믿을 수가 없어서 안개라도 낀 것 처럼 초점이 흐린 눈을 들자
윤진을 찬찬히 보고 있던 호준이 조금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차분하게 웃었다


"... 계속 힘들거야, 나 아직 빚도 남아 있고, 사업도 지금처럼 계속 잘되지 않을지도 몰라
또 괴로워질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떤 상황에 널 끌어들이게 될지 나 지금은 몰라"


눈물이 날 것 같아 차마 호준의 눈을 볼 수가 없어서 그 뒤로 쏟아지고 있는 눈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보라에 자꾸만 자꾸만 눈이 시렸다


"그래도, 윤진아"


저를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에 결국 그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마음을 주고 받은 그날로부터 단 한순간도 촉촉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윤진아,하고 저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정말로 그렇게 화낼거야? 하는 듯 애절한 눈빛을 쏘면
아무리 짜증내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그저 고개를 끄덕 해버렸다

장난기가 절반이긴 했어도
단 한번도 기만한 적은 없었던 눈이

기억하는 한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내가 널 지켜줄게, 세상으로부터.
절대 외롭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 나랑 같이 가줘"


오히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음절 하나하나를 꼭꼭 눌러 말했다
호준의 주머니 속 제 손은 이미 녹아버릴 듯 흐물흐물해졌더랬다
그때, 울었던 것 같다. 아마 울었으리라. 


마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겠다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말하지 않은 윤진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호준은 윤진을 간절히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조윤진, 나랑 결혼하자"



그 눈 속에서.


















=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숨김글의 이유 중 하나는(물론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호준=해태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새로운 사건이 윤진에게는 새로운 사건이 아니란 거야
그걸 성향이라고 불러야할지 운명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인연을 믿고 있어
결국 만나야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고, 결국 같은 이유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그게 아무리 먼 길을 돌아서,이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