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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8

april_m 2013. 12. 7. 02:09









'2008년 연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동창회 송년회' 


꽤나 넓어보이는 식당 앞에 내걸린 현수막을 보고 움찔한다 
입구에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되돌렸다를 반복한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나 다름없었고 사실 식당 앞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약간 흥분도 되었는데 
막상 앞에 서고 보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자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왔나 싶어서 더 망설여진다 


"어! 손호준! 너 호준이 맞지?!" 


결심을 하고 드디어 한 발 내딛는데 큰 소리로 뒤에서 부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조금 살집이 있는 남자가 싱글거리면서 다가온다 


"맞네, 손호준, 오랜만이다" 


성큼성큼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호준은 얼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한다 


"어쩐 일이냐, 매번 바쁘다고 안 나오더니만" 
"... 아... 이번엔 시간이 나서" 


대체 저를 보고 반가워하는 이 남자는 누구일까 당황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통에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볼 틈을 놓친다 
어색하게 손을 쥐고 있는 호준을 한번 살피더니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 기억 안나? 김기태, 1학년 과대" 
".. 아.. 아아.. 응 그래" 
"내가 많이 변하긴 했지? 결혼하니까 어쩔 수 없더라야, 넌? 결혼은?" 
".. 아... 난 아직" 


애초에 기태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스스로 많이 변했지? 라고 반문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생각한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하자 어깨를 툭툭 치며 팔을 잡고 이끈다 


"들어가자, 너 왔다고 하면 다들 반가워하겠다" 
"... 나도 반갑지이..." 


얼버무리면서 기태를 따라 들어간다 


"어이!" 
"왔냐" 
"오랜만이다"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들이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한다 
먼저 훅훅 걸어간 기태가 빈 자리에 앉더니 아직 쭈뼛거리고 선 호준에게 손짓한다 


"뭐해, 얼른 와" 


호준은 머뭇거리다가 가서 끝자리에 앉는다 


"기억나지? 손호준"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야, 그러고 보니가 뭐냐, 그대로구만 어떻게 넌 하나도 안 변했냐" 


정신없이 쏟아지는 인사세례에 호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다 말다 하면서 겨우 인사한다 


"어떻게 사냐?" 


반대편 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안주를 집어먹다 말고 묻는다 
호준은 순간 당황한다 


"어떻게 살겠냐, 얘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냐 여기?" 
"... 에?" 


씩 웃으며 하는 기태의 말에 오히려 호준이 어리둥절한다 
그래 하긴 그렇다,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태를 본다 


"뭔 소리여, 나가 어떻게 사는지 느그들이 어찌 안대" 
"어? 사투리는 여전하네? 인터뷰 땐 사투리 안 쓰더니?" 
".. 인터뷰?" 
"뭐야, 새삼스럽게 겸손은? 우리 과에서 젤 성공한 놈을 누가 모르냐?" 


씩 웃으면서 맥주잔을 건네주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얼결에 맥주잔을 받았다가 내려놓는다 


"어? 안 마셔?" 
"아.. 나 요즘 약 먹어서" 


사고 이후 몸 상태와 약 때문에 계속해서 금주해왔다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긴 뭣해서 얼버무린다 
기태는 하여간 독한 놈 하는 식으로 고개를 절레 흔든다 


"몸 생각도 엄청 하는구만, 괜히 잘나가는 대표가 아니야" 
"아.. 뭐 그런 건 아닌데..." 


어설프게 변명하는 호준의 등을 툭, 치더니 기태는 테이블을 쭉 돌아보고 동의를 구한다 


"야, 손호준이 이렇게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냐? 1학년 때는 맨날 락카페나 다니고 그랬는데" 
".. 락카페?" 
"뭐야 기억 안 나? 나랑도 같이 갔잖아, 너 1학년 때 완전 거기 죽돌이였잖아 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호준은 억지로 기억이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야 우리 그때 재미있었는데, 너랑 그 누구냐, 어 그래 성균이, 걔랑 맨날 같이 다녔잖어 
 그러고 보니 성균이는 왜 안 왔냐? 니네 동업하지 않어?" 


성균,의 이름이 등장한다 
친했으리라 생각한 짐작이 맞았다 


"성균이는 오늘 바빠서, 나만 왔어" 
"하기사 바쁘긴 하겠다, 어떻게 너는 시간이 됐네" 
"어 뭐.. 그렇지" 
"하여간 반갑다,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 


기태의 말에 호준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글게 말이다, 옛날에 재미있었지이" 


슬쩍 낚시대를 던져본다 


"그 뭐냐... 연고전 때" 
"어! 기억나냐? 그때 우리 져서 열받는다고 고대 부수러 가자고" 
"맞다맞다 농구 지고 열 받아서 기차놀이하러 갔다가" 
"어 그래 그랬지" 


시끌벅적하게 그 시절의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호준은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끼어들어 웃는다 


"야아, 너 진짜 그대로다, 어떻게 스무살 때 같냐, 말투까지 똑같네" 
"사람이 뭐 그렇게 쉽게 바뀐대?" 
"나 봐라, 쉽게 바뀌더라" 


기태가 톡톡 튀어나온 배를 두드린다 
호준은 익살스런 동작에 피식 웃는다 


"다들 잘 지내냐?" 


기태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들?" 
"니 패밀리들 말이야, 맨날 몰려다니더니" 
"... 패밀리?" 


알 수 없는 단어에 그때까지 그나마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호준의 얼굴이 무너진다 
어리둥절한 표정에 기태가 오히려 호준을 한대 툭 친다 


"뭐야, 기억 안 나? 성균이랑, 
"아아.. 성균이야 뭐 만날 회사에 매달려 살지" 
"아니, 딴 과 애들도 있었는데, 아 맞다" 
"?" 
"성나정은 잘 지내냐?" 
"성나정....?" 


낯선 이름에 설핏 더듬는다 
기태는 고개를 끄덕인다 


"컴공 여신, 파트라슈, 성나정, 설마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 


기억을 해야하는 이름인 걸까, 
호준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한다 
호준의 대답을 기다리던 기태가 실망한 듯 갸웃한다 


"니네 사귀는 거 아니었냐 그때? 하도 맨날 붙어다녀서, 우린 다 니네 사귀는 줄 알았어" 
"... 그렸냐?" 
"나정이 술버릇도 니가 다 받아주고" 
"... 술버릇?" 


기태가 고개를 끄덕한다 


"술버릇 때문에라도 잊을 수가 없다 야, 세상에 사람 무는 술버릇은 진짜, 다시 만나본적이 없다니까" 
"문다고...?" 
"제일 많이 물렸던 놈이 왜 그래? 너 나중엔 아예 팔 대주고 그랬잖어, 우리가 다 징하다 그랬다 아무리 사귄다고 해도" 


대체 술을 먹으면 사람을 무는 여성은, 어떠한 여성인가... 
호준은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저와 사귀었을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니, 
스무살의 저는 여성 취향이 으음... 남달랐던가 


"걔 술도 엄청 잘 마시고, 승부욕 장난 아니어서, 으아 나 아직도 기억난다 첫 엠티 때" 
"엠티?" 
"게임해서 술 먹기 하다가 막판에 나랑 나정이랑 남았는데, 결국 내가 졌거든 
 그 한강물 마냥 가득한 맥주가 아직도 생생하다야 그거 다 먹나 끝까지 확인까지 하더라니까" 


질렸다는 듯 기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호준은 어색하게 허허, 하고 웃는다 


"근데 너 진짜 나정이랑은 연락 안해?" 
".. 어? 응" 
"흐음. 그렇구나, 니네 진짜 사귄 거 아니었어? 아 사귄 거라서 연락 안 하고 지내는 건가? 시간도 그만큼이나 지났는데 뭐 어떠냐" 
"...아... 나... 사귀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 사실을 대답하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이도 저도 아닌 대답에 기태가 툭 친다 


"자식, 진짜 잊어버렸나부네, 야 그래도 어떻게 첫사랑을 잊냐" 
"... 에... 뭐... 첫사랑이 아니었나보지" 


첫사랑, 
자신의 기억 속에는 현재 한 사람 뿐인데. 
작고 파리한 그녀가 문득 그리워진다 


"하기사 우리가 그때 한 여자한테 정착하기엔 너~무 바빴지" 


씩 웃은 기태가 술잔을 들이댄다 
제 앞의 술잔을 집으려다 어설프게 방황하자 술잔으로 물잔을 툭 친다 


"너 몸 챙기는 거 알겠으니까 드는 시늉이라도 해라," 
"아, 미안허다," 
"하여간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 자주 좀 나와" 
"그려" 
"너까지 보니까 옛날 생각 진짜 많이 난다, 그거 기억 나냐? 1학기때" 


호준이 들고 있는 물잔에 술잔을 부딪히면서 기태가 문득 생각난 듯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호준은 기억 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귀를 쫑긋 세운다 


"그때 왜 체육 대회 한다고 의대랑 축구 시합 붙은 날...." 










'1994년 3월 연대 컴공 입학' 


'1994년 9월 연고전 - 김기태, 과대였다고 함, 친했다고 함' 


'1995년 2월 입대' 





'2000년 창업' 






'2008년 1월 사고' 





거실의 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트에 순서대로 적어나가다가 순간 너무 많은 여백에 한심해져 펜을 멈춘다 
일부러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동창회에까지 나갔는데, 정작 얻어온 정보는 거의 없다 
'기억나지?'로 시작되는 그 시절의 에피소드들은 듣기엔 재미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그 이야기의 어디쯤에 위치해있는 건지 모르니 제대로 반응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야하는지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의 자신을 자세히 알려줄만한 인물을 새로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보자마자 아는 척을 한 기태,는 분명 그 시절에 친했던 것 같기는 한데 
기태의 기억 속 자신은 쾌활하고 술 잘 먹고 의리있는 동기에 불과했다 


... 물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자신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은 안심이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긁적하며 동창회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던 호준은 놓칠 뻔 했던 이름을 떠올리고 급하게 적는다 


'성나정 - 첫사랑?????' 


물음표를 다섯 개나 그려넣고 펜 끝으로 톡톡 뺨을 건드린다 
그 당시에 친했던 사람,이라고 하면 지금도 곁에 있는 성균과 그리고 이 낯선 세 음절의 이름 - 성나정. 


'니네 사귀는 거 아니었냐? 맨날 붙어다니고 그랬는데,' 


기태의 말을 떠올리고 잠시 고민한다 
어쩌면 나정,이라는 이 이름의 소유자는 자신의 당시에 대해서 더 자세히 기억할런지도 모른다 
남학생들은 군대에 다녀오느라 몰랐다는 자신의 복학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사귀었다면 더더욱이나, 사귀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면 좀더 자세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호준은 생각을 정리하고 소파 위에 접어 걸쳐놓은 자켓을 끌어당겨 휴대폰을 꺼낸다 
전화를 걸려고 하다가 열한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하고 대신 전화번호부를 검색해 메세지 창을 연다 


[ 기태야, 나 호준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혹시 성나정 연락처 좀 받을 수 있을까 ] 


좀 더 설명을 덧붙여야할까 생각하다가, 설명이 필요하다면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해서 말하면 되겠지 생각한다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덮어놓고 다시 여백이 더 많은 노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혹시나 뭔가 떠오르는게 있지 않을까 ‘성나정’이라는 이름 옆에 별표를 치면서 각도를 바꿔 고개를 갸우뚱 해보지만 
아무리 해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어휴.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노트 위로 쓰러져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 마구 쥐어뜯는다 
막상 기억을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나서 며칠이나 지났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는 게 슬슬 초조해진다 
헛수고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든다 


"뭐.. 해요?" 


의아한 목소리에 노트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 비비고 있던 고개를 든다 
부엌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선 윤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좀전에 잔다고 방에 들어갔던 윤진은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큰 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손에는 제 얼굴의 반만한 큰 머그를 들고 있다 


"안 자고 왜 나왔어요" 
”.. 물 마시러요” 


윤진 몰래 기억을 찾아서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들킨 것 같아 멋쩍어진다 
어색하게 말을 돌리는 호준에게 윤진도 어색하게 물컵을 가리킨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호준을 한번 보고 부엌에서 물을 따른 윤진이 컵을 들고 다가와 옆에 앉는다 


"뭐하고 있었어요?" 


슬쩍 넘겨다보는 윤진에게서 얼른 노트를 가린다 
혹시나 ‘성나정’이란 이름을 보고 무슨 오해라도 할까봐 그런 건데 후다닥 덮어버리는 걸 보고 오히려 더 의구심만 키운 듯 눈을 가늘게 뜬다 


"뭔데요, 뭘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당황해요" 
"... 아니... 그게...." 


한쪽 팔로 가리고 있는 노트를 계속 넘겨다본다 
급기야 빼앗아보려는 듯 손을 뻗는 걸 겨우 노트를 몸 뒤로 감춰버린다 


"... 비밀이예요?" 


조금 섭섭하다는 듯한 어조에 호준은 당황한다 
당장 대답을 못하고 어버버하던 호준은 마침내 어설프게 입을 뗀다 


"... 타임라인, 그리고 있었어요" 
"타임라인이요?" 
"... 기억나는 걸 순서대로 써보는 거요. 해윤성님이 기억 찾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하셔서" 


호준의 대답을 들은 윤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딱딱해진 무표정에 당황한 호준이 애써 변명한다 


"... 뭐가 있어서 안 보여드릴라는 게 아니고.. 너무 듬성듬성 비어있어서.. 봐도 별 거 없기도 하고.. 음.. 그리고.. " 


멍하니 호준이 뒤로 감추고 있는 노트를 바라보다 윤진이 천천히 묻는다 


"... 기억... 찾고 싶어요?" 
"... 이제 슬슬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인자 생활에도 적응도 되었고" 

슬며시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돌려 윤진의 손을 잡는다 

"윤진씨도 옆에 있으니께" 


씩 웃어보이는 호준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생기 없는 윤진의 눈이 순간 겁먹은 듯 흔들린다 
윤진의 손을 만지작하고 있던 호준은 그런 윤진을 발견하고 안심하라는 듯 짧게 쪽, 하고 입맞춘다 


"... 그래서... 생각은 좀 나요?" 
"푸후.. 전혀요, 이게 다 어디로 가버렸나 싶다니까요 분명 이 머리 어딘가에 있을텐데" 


오른손으로 제 머리를 톡톡 가리키며 투덜거리던 호준은 고개를 갸웃 흔든다 
복잡한 표정으로 윤진은 살며시 호준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런 윤진을 돌아본 호준은 슬쩍 웃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손으로 윤진을 달싹 들어서 제 위에 올려놓고는 윤진의 손과 깍지낀 손을 바닥에 단단히 붙이고는 갑자기 윗몸일으키기를 시작한다 
팔이 붙잡힌 채 엉거주춤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는 윤진에게 몸을 일으킬 때마다 살짝 입맞춤을 하고 도로 바닥으로 내려간다 


"... 뭐, 뭐예요" 
"말... 시키지 말아요... 헉.. 힘드니까.. 열다섯.." 


중얼중얼 횟수를 세면서도 기어코 윤진에게 닿아야만 도로 내려가기를 반복하던 호준은 
마침내 백,을 세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눕는다 


"... 힘들어요?" 


누워서 헉헉거리고 있는 호준을 내려다보며 윤진이 웃고 만다 
잔뜩 지쳐서 겨우 눈만 들어 윤진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힘든 걸 왜 했어요" 
"...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죠, 운동이라도 해서" 


호준의 말에 미묘한 표정이 되어버린 윤진은 울 듯 말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손을 내민다 


"일어나요" 


윤진의 손을 잡은 호준은 일어나는 대신 반대로 끌어당겨 누운 채로 윤진을 안아버린다 


"샴푸 뭐 써요..? 냄새 엄청 좋네.." 


호준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가슴팍에 닿은 윤진의 귀에 미친 듯이 뛰는 빠른 심장 고동 소리가 두근두근하고 들린다 
천천히 윤진의 머리를 쓰다듬던 호준이 중얼거린다 


"좀 더 건강해지면, 기억도 돌아오지 않것어요, 조금씩이라도"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직도 숨이 가쁜지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는 몸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품에 안긴 채로 심장 소리를 듣고 있던 윤진은 눈물이 날 것 같아진다 


'말... 해야겠어. 이제 그만' 


망설이던 윤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인다 


"... 호준씨" 


가냘프게 윤진이 겨우 부른다 
목소리의 끝이 떨리다 흩어진다 


"네?" 
"저기.... 나...." 


윤진은 호준의 어깨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킨다 
올려다보는 호준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천진한 얼굴을 보자 차마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윤진은 멈칫한다 


"왜요?" 
"... 저기..." 


말을 하려다 말고 막막해졌는지 숨을 저도 모르게 크게 들이마신다 
호준은 윤진을 기다리면서 제 어깨를 짚고 있는 손을 가만히 끌어다 할짝, 핥는다 
화들짝 놀라는 윤진의 허리를 반대쪽 팔로 감아 당기면서 몸을 일으킨다 


"... 뭔.. 데요" 


쥐고 있는 손을 할짝이다가 서서히 팔을 따라 올라오면서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묻는다 
셔츠 위로 깊게 간지럽히는 느낌만으로도 움찔거리고 신경이 몰린다 
목 안이 간질거려 갸르릉,하는 소리가 섞이고 만다 


"나.. 할.. 말.." 
”.. 응, 말해요..” 


목덜미 즈음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살며시 허리께를 파고 들어 간지럽히는 손길에 헉, 하고 숨이 멎는다 
윤진의 반응에 어느새 귓가에 닿은 숨 많이 섞인 키득,하는 소리가 들린다 


"듣고 있으니까," 


정작은 말하는 사람조차 흥분한 듯 목소리 끝이 흩어진다 
다시 천천히 내려온 입술은 이제 흐트러진 셔츠 위가 아니라 살짝 드러난 연약한 살갗을 괴롭힌다 
책임감이 아주 강한 청지기라도 된 양 자물쇠처럼 윤진을 가둔 채 움직이지 않는 몸과 달리 
눈송이처럼 살며시 내려앉던 열기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감춰진 하얀 어깨에 강렬한 열꽃을 남긴다 

하악, 

따끔한 아픔에 가쁜 숨을 내뱉은 윤진은 간신히 혼돈 속에 이성의 끈을 잡아낸다 


”... 나 진짜 할 말 있어요” 


힘없이 밀어내는 윤진의 몸짓에 호준은 겨우 떨어진다 
가만히 제 기색을 살피는 호준을 윤진은 어렵게 바라본다 

윤진의 눈동자는 겁먹은 듯 흔들리고 
호준의 눈을 끝을 알 수 없게 깊어진다 

어려운 말에 소리 내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하는 입술이 의미있는 단어를 만들어내길 한참 기다리던 호준은 
결국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저 제 입술로 그 틈을 막아버린다 
무기력하게 저를 내준 윤진은 숨과 함께 말을 삼킨다 
윤진의 숨을 빼앗은 호준은 몸을 기울인다 
살며시 바닥에 눕힌 신대륙의 빈 틈을 찾아 탐색하듯 훑는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세계가 꿈틀,하고 흔들린다 


”.. 꼭 지금 말해야 해요?” 


여전히 얼굴을 맞댄 채로 입술만 겨우 살짝 떼고 호준이 중얼거린다 
'아니라고 말해,'라고 열망에 불타는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윤진은 또다른 긴장감에 바르르 떤다 


"지금은 나만 봐요" 


대답하지 않는 윤진에게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요구한다 
성급한 손길은 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보드라운 속살에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탐색자의 부드러운 노크에 굳게 잠겨있던 문이 살며시 틈을 보이고 만다 
꽁꽁 싸맨 옷자락 안에 감춰져있던 텅 빈 가슴이 드러난다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서늘한 공기가 싸아-하고 지나간다 

몇번이나, 

멈췄던 그 사선에서 
두려움에 결국 돌아섰던 윤진은 

강한 바람을 홀로 맞는다 


".. 사랑, 해요" 


온 몸을 차갑게 얼려버린 바람에 섞여 
구조 신호처럼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저도 모르게 그 달콤한 신호를 향해 간절하게 팔을 뻗는다 


녹여줘 이 얼어버린 마음을. 


호준은 가만히 윤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까이 다가가 제 목을 내어준다 
간절하게 목에 팔을 감자 뜨거운 불덩이에 닿은 듯 차가워졌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윤진의 반응에 더 뜨거워진 열망이 참지 못하고 결국 넘실거리며 덮쳐온다 
불꽃이 훑고 지나간 살결에 예민한 흔적이 남는다 


흑, 


의미있는 말 대신 뜨거운 숨이 먼저 튀어나온다 
어느새 흐느끼는 신음소리가 새어나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대신 소리를 들은 호준은 살짝 고개를 들어 흔들리고 있는 윤진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 응?" 


겨우 숨을 억누르는 듯 역시나 감탄사에 가까운 무의미한 질문을 다시 한번 굳이 속삭인다 
이미 열기에 취해버린 윤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자 마치 그때까지 충분히 참아왔다는 듯 불길이 야생마처럼 거칠어진다 
그에 응답하듯 어디에 잠들어있었는지 모를 불꽃이 윤진의 안에서 화륵, 타오른다 
두 개의 불꽃이 닿는 순간 수천개의 꽃봉오리가 동시에 터지는 것처럼 폭발한다 
머릿 속을 가득 채운 향기에 텅빈 가슴 끝에 매달려있던 말을 잃어버린다 




내일,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또다른 하루를 유예한다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되지 않을까 
내일은, 내일은, 꼭, 말하겠다고 


지금 이 순간을 놓을 수 없어서, 
내일로 도망친다 





등에 닿은 카펫은 거칠고 
날 안는 당신의 손길은 부드럽고 
어깨에 닿은 공기는 차고 
날 간지럽히는 당신의 입술은 뜨거우니 


날 안아줘, 


지금, 
오직 당신과 나만이. 
유의미한 순간. 























 

========== 
어제 지난주 방송 다시 보다가 본편에서 안드로메다 만큼은 떨어진 이 세계를 어째야하나; 
게다가 이런 love scene이라니 아직 애기나 다름없는 도희양에게 약간 미안해졌지만 
네, 저는 서로 눈길 한 번 오가지 않았던 지훈-하경(학교2013~)으로도 팬픽을 썼던 몸이니까요 뭐, 그냥. 쓰는거지. 음.ㅋ ^-^;; 
딱히 나냔이 현재 욕구불만이어서만은 아니야(나도 알고 냔이도 아는 약간의 ㅇㄹㅁㄱ의 영향이 아니라고도 못하겠지만서도)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도 가까워지는 것, 그리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거칠게 말해서 양면. 전쟁 중의 사랑은 더 뜨겁고. 
그러니 다시 한번 온전히 마음을 주었다고 해야할까. 아마도. 8화에 이르러서야.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어. 그렇게 봐줘.
지금까지 없던 약간의 수위에 당황한 냔들 있다면 미안. 어린이들 미안. ㅋ... 지금의 평화를. 둘의 세계에 갖히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줘. 

허구로 쓰고 있는 거지만 혹시나 비슷한 경험이나 감정 때문에, 혹시나 나냔이 이해없이 써서 힘든/힘들 냔들, 뒤늦게/미리 미안해. 
그리고 늘, 그렇지만, 기다려주는 냔들 고마워. 길고 짧은 댓글들도, 때때로 글이 막히면 다시 읽어보곤 해. 
모든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이 결론을 마음에 들어해줄지 모르겠지만, 되도록이면 그럴 수 있다면 좋을텐데. 
이제, 달릴 일만 남았네. 마침 주말이고. 우왕 ^0^ (은 괜히 민망해서 붙여보는 '애교') 








+
 







"여보! 자기야! 야! 손호준!"


꼭 이름을 불러야만 그 자리에 멈춘다
이미 저만큼 가버린 호준을 향해 급한 걸음으로 다가간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이미 알 수 있다

밖에서는 그렇게 냉정하고 무섭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데 
제가 보기엔 아직도 소심하고 말랑한 소년 같은 그는 
이런 때면 언제나 저렇게 혼난 것처럼 화난 표정이다


"화났어?"
"... 그래서 난 안 온다고 했잖아..."
"그럼 나 혼자 와?"


늘어뜨리고 있는 손을 잡고 만지작 하면서 일부러 불쌍하게 올려다본다
호준은 그 눈에 진 듯 난감한 표정이 된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또 이렇게 되니까.. 그리고 왔다간지도 얼마 안됐잖아"


지난 주가 추석이었으니 서울 부모님 댁에 다녀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당일에, 그것도 평일인 오늘 굳이 가야겠다고 우긴 건 윤진이다
호준은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다고, 꼭 가야하느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억지로 저녁에 와주었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아 했던 걸 알고 있는 윤진은 쥐고 있는 호준의 손을 가볍게 흔들, 한다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닌 거 알잖아.."
".. 뭐야 너 아버지 편드냐?"


얼마 전 인터뷰 기사도 났던 차가운 표정의 사업가님이 지금 제 앞에서 '편드냐'고 투덜거리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 우리 똑똑한 남편이 오늘 왜 이러실까요오..? 섭섭해? 내가 편든 거 아닌 거 알면서"
".. 아버지가 잘 몰라서 저러시는 거라고, 사업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니까"


윤진의 달래는 말에 호준은 그제야 억울했던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응, 응 나도 알지, 울 남편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데, 내가 젤로 잘 알지"


윤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호준은 할말이 없어졌는지 휙 먼 산을 본다


"근데.. 비난하시는 거 아니야, 걱정하시는 거지..."
"....."


이 쉽고도 다루기 어려운 남자의 손을 붙들고 저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쉰다
모든 걸 다 져줄 것처럼 하면서도 고집쟁이인 호준이 갑자기 뛰쳐나온 건 
저녁을 먹고 담소를 나누던 자리에서 아버지가 본인 딴에는 걱정한다고 말씀을 꺼내신 게 발단이었다


"다음 달이 느그 엄니 기일 아니냐?"


처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관심과 배려였다


"예에"
"올해로 벌써로 몇해냐 칠주긴가?"
"... 아마요"


호준은 불편한 듯 억지로 대답했다
옆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던 윤진은 불길한 예감에 신경이 살짝 곤두섰다


"그나저나 느그 아부지는 아직도 연락 없으시냐 자식이 이리 성공혔는디 어디서 뭘 하고 기신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버지의 혼잣말에 윤진은 움찔했다


".. 저 아버지 없습니다"


그 말에 대한 호준의 반응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윤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따, 암만 그려도 부모는 부모여. 그르케 말 허믄 안 되제, 살만 허다고 부모 안 찾는 불효가 어딨당가"


아버지의 반응도 이미 알고 있다
벌써 몇번이나 오간 언쟁이다
그때마다 매번..


힐끔 바라본 호준은 이미 꾹꾹 눌러참고 있는 듯 보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윤진이 보았던 '큰아버지'라는 분과 다른 채무자들의 빚을 변제한 호준은
다시는 순천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고, 그 누구와도 연락을 잇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섭섭함은 윤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감정이었다
호준은 그날 장례식장을 찾아왔던 '지인'뿐 아니라 그 상황에 자신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도피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기어코 풀지않았다

자신은 혈혈단신, 세상의 고아라고.
아무런 방패막도 없는 자신에게 와줄 수 있겠느냐고,
윤진에게 청혼을 하던 그 순간에도 철저하게 아버지의 존재는 배제했다
윤진은 기꺼이 그런 호준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호준에게는 부를 친척도 가족도 없었던지라 결국 윤진의 부모님은 끝까지 반대하는 가운데,
바깥에 거의 알리지 않은 채 식사 정도로 결혼식을 대체해야만 했다

몇번인가는 윤진이 먼저 아버지를 찾는 것에 대해 말을 꺼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호준은 지금처럼 파르르 하고 예민해졌다
암묵적인 금기어가 된 그 말을 꺼내는 건 서울 아버지 뿐이다
그리고 한번은 좀 넘어가드려도 되련만 호준은 그때마다 저렇게 꼭 한마디를 덧붙여 사단을 내고 만다


"니는 전에는 안 글드만 요즘은 어째 그래 사람이 차졌냐 사람이 그라는거 아녀"


아아, 등장해버렸다

윤진은 한숨을 쉬다가 불안하게 쳐다보는 어머니께 생긋 웃어드렸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조금 달래기 귀찮겠지만


"니 말이여, 사람이 인정머리도 좀 있고 그래야제, 어 뭐냐 돈만 좇다가 홀랑 털리는 수가 있어, 
밖에서 그라고 못되게 하고 다니다가 니 나중에 그 원망 다 어찌 감당할라고 그라냐, 사람이 사람답게 말여, 다른 사람도 좀 챙기고..."


가만히 듣고 있는 것 같던 호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니 시방 나가 싫은 소리 혔다고 그라냐? 어? 자식 같어서 어른이 한소리혔더만"
"그렇게 사업 하면 당장 말아먹습니다 제가 이 집에 드나들지도 못한다구요! 저 망하는 거 보고 싶으세요?!"
"어매 어매 저 자슥 말하는 것 좀 보소! 야 이놈아!"


벌떡 일어나 호준은 나가버리고
옆에서 불안하게 눈치보고 있던 준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임자, 자 말하는 것 좀 보소잉"
"당신이 잘못했는데 뭘 그라노, 와 아 한테 싫은 소리를 자꾸 하노"
"아니, 애비가 자식 잘못 되는 거 꾸중도 못하는가, 나는 지는 내 자식처럼 생각허는데"


섭섭함을 토로하는 아버지의 푸념을 구박하며 받아주던 어머니가 얼른 가보라는 눈짓을 하는 걸 보고 뛰어나온 길이었다


.. 지나치다, 그러지 마라, 하시는 아버지의 말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호준이 왜 그러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윤진으로서는 호준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막상 간소한 결혼식을 치르고 결혼을 한 후에도 호준의 사업 역경을 계속 되었다
차라리 벤처 거품이 꺼져서 투자 받기가 힘들었던 것은 약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호준을 바꿔놓은 사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만두고 나가 회사를 차린 전 직원들이 개발 중이던 게임을 조금만 손질해서 먼저 출시했던 일.
결국 개발 중이던 게임은 접어야만 했고 투자 손실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보다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으로 지금도 호준은 중요한 정보를 성균 외에는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마침 저 사건을 발생했을 즈음에 또다른 기업으로부터 적대적 M&A를 당할 뻔 했던 일이었다
안그래도 자금난에 신작 스케줄이 꼬여 안팎으로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자금난을 노려, 심지어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업이 호준의 회사를 인수하려는 일이 벌어졌고
집에서는 통 회사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호준조차 그때는 위험해보일정도로 흔들리는 티가 났더랬다
일단 삼천포에 있던 성균의 집에서 배를 팔았다고 했다
그 즈음 등장한 모바일 게임의 출시가 대박으로 이어지면서 겨우 위기는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이후 호준의 사업 방식은 철저하게 사람이 아닌 돈,에 맞춰져 돌아갔다

바로 자신이 당할 뻔했던 - IP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먼저 인수해서 경쟁자를 없애고 시장을 선점하는 방식은
기막힌 호준의 촉과 당장 현금으로 통장에 인수 대금을 선입금 해주기도 하는 과감한 베팅,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의 삼박자가 갖춰져 추진력을 얻었고
이 과정에서 나올만한 잡음을 성균의 꼼꼼함과 세심함이 보완하면서 순식간에 회사의 몸집을 불렸다

윤진이 살고 있던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한때 신촌 하숙에 하숙비도 못 내고 얹혀살정도로 밀려났던 신혼 살림은
지금 번듯한 집에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해졌지만,
남부럽지 않게,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호준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고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가끔은 윤진은 호준이 그렇게 일에 매달리지 않을 때가 좋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 아버지의 말이 호준을 불편하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번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굳이 말리지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호준의 팔을 잡고 올려다본다


"들어가서 죄송하다고 그럴거지?"
".... 밖에서 기다릴게, 있다 나와"
"진짜 그냥 갈거야?"
"지금 들어가서 뭘 어쩌게.. 그냥 밖에 있을게"


아무리 싫은 소리를 들어도 잘만 엉기던 예전의 넉살 좋은 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차가운 표정으로 서울말에 더 익숙해진 그가 부드러운 얼굴을 보여주는 건 저와 있을 때뿐이다
가끔은 이전의 호준이 그리워진다


"진짜 너무 헌다.."


윤진이 과장되게 한숨을 쉰다


"나는 일부러 우리 집에다도 안 알리고 니 있는 자리서 인자 처음 얘기하려고 그랬는데.. 나 축하받을 기회도 안주는 거야?"
"응?"


윤진의 말에 호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나 다같이 축하받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니는 맘 상했다고 이러구 가버리구 나 너무 속상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시늉을 하면서 입을 삐죽이는 윤진의 말을 곱씹어보던 호준의 표정이 살짝 변한다


"너 설마.."


대체 그 설마가 어떤 설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 막 잘라먹고 말해도 회사에선 알아들어요 대표님?

윤진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살짝 웃는다
아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겠지만.


"응, 맞아"
"진짜? 진짜래?"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묻는 호준에게 고개 끄덕여준다


"응,"
"하...."


윤진의 대답에 호준은 멍한 표정이 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허, 허, 하기만 하는 호준에게 다시 말한다


"8주 됐대, 아까 병원가서 확인했어"
"....."


아무 대답이 없는 호준에 윤진은 살짝 불안해진다
설마 자신만 기쁘고 호준은 원하지 않았던 걸까


".. 안 기뻐..?"


결국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묻고 만다
윤진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호준이 황당하다는듯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럴리가 없잖아"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안 믿겨서 그래, 믿을 수가 없어서"
".. 이런 걸로 거짓말 할까봐 설마...."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안 왔으니까 너무 안 와줬으니까.. 갑자기 와준 게 고마워서"


윤진은 호준의 말에 살짝 울컥한다
결혼하고도 4년째, 딱히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정에, 두 아들의 아빠인 성균까지 주변은 아이가 참으로 잘 생기던데도
이상하게도 영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찾아와주지 않았다

그걸 딱히, 급하게 여기거나 왜 안 생길까 하며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지만,
사실은 호준이 오래 바라고 있었구나, 하는 걸 깨닫고 윤진은 조금 안도하며 뭉클해진다


신기한 듯이 바라보던 호준은 윤진의 배 위에 손을 올린다


"여기에 있다고? 우리 아기가?"


임신한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도 나오지 않은 배를 살짝 어루만진다 
윤진은 피식 웃는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느껴져"
"아냐, 아냐, 뭔가 움직이는 거 같아"


심각한 표정으로 아예 귀를 갖다대려고 하는 호준의 머리를 가볍게 민다


"아저씨 오바 그만 하세요, 지금은 그냥 덩어리라니까"
"아기 들어, 상처 받을라, 덩어리라니"


조심조심 숨죽여 말하는 호준에 윤진은 또다시 웃어버린다
찬찬히 윤진을 살피던 호준은 고개를 갸우뚱 한다


"대체 여기 어디에 아기가 숨어있다는거야, 이렇게 작은데"
"... 뭐래, 작아도 있을 건 다 있거든? 작으면 애도 못 낳는대?"


오늘 같은 날 왜 또 작은 건 걸고 넘어지나 싶어 토라진다
호준은 그런 말에도 벅차게 웃더니 윤진을 끌어안는다


"너 고생할까봐 그러지, 어떻게 낳니 이렇게 작은 니가 그 큰 아기를"


우리 신랑은, 말도 잘하지 몸도 좋지 아후

폭, 안긴 채 배시시 웃고 만다
한참 그저 윤진을 안고 있던 호준이 감격한 듯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윤진아"
"... 그렇게 좋아...? 근데 왜 그동안 아기 가지자고 말 안했어..."
"... 그땐 너만 있으면 됐으니까"
"... 지금은?"
"... 가족이 늘어난 거잖아"
"......"
"... 고마워 가족을 만들어줘서,"


스스로 고아라고 말할만큼, 오래 외로웠을, 아마도 그래서 저만 바라봤을 호준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눈에 분명 맺혀있을 눈물을 떠올리니 윤진도 호준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이 떨리고 만다
호준의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고 있던 윤진은 잠깐 숨을 고르고는 짐짓 장난기 어린 눈으로 정색을 하고 올려다 본다


"고맙지?"
".. 응? 응 당연하지"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안 그럼 나 확 도망간다?"


윤진의 말에 호준도 웃고 만다


"잘할게, 진짜 잘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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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뜬금없지만, 준이가 호준을 슬금슬금 피했던 이유가 나오네요 여기..
만날 와서 화내고 즈그 아부지랑 싸우던 사람이 갑자기 싱글거리며 잘해주니 얼마나 무서웠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