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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Forget Me Not. 9

april_m 2013. 12. 8. 15:31








[ 2시, 신촌 성나정 ] 



수첩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한숨을 쉰다 


나정의 연락처를 묻는 문자를 보낸 다음날, 기태는 나정이 한국에 없어서 전화번호는 모르고 
아직도 쓰는지 모르겠지만 이메일은 알고 있다면서 이메일 주소를 첨부한 짧은 답장을 보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메일을 보냈다 

자신은 연세대 컴공과 동창인 손호준이며,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한번 만나고 싶다. 라는 내용의 
대체 지금 나정과 자신이 어떤 사이이며 과거에 어느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는지 짐작할 수 없어서 
친근한 것도 아니고 존칭도 아닌 애매한 어조로 쓴 메일이었다 

의외로 나정의 답장은 빨리 도착했다 
안 그래도 한국에 들어갈 일이 있으니 그때 만나는 것으로 하자,라고 
네가 물어볼 일이란 게 뻔하지, 라는 친근하다 못해 하대하는 어조의 메일이었다 
호준이 갑자기 연락한 것에 대해서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이정도 메일은 주고 받고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나보다,하는 확인에 
자신이 제대로 된 실마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는 소망이 생겼다 

'귀국하면 편한 시간에 집으로 와' 

라는 메세지에는 그러나 조금 당황했다 
자연스럽게 집으로 오갈 수 있는 정도의 사이였던 걸까 
그렇지만 나정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정의 집에 있을 다른 식구들까지 마주하고 태연하게 행동할 자신은 없었다 
아니면 혹시나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더 깊은 관계였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호준은 나정에게 굳이 집이 아닌 밖에서 만나자고 정중하게 요청했고 
나정은 뭔가 의아해하는 듯, 그러면서도 이내 알겠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귀국하자마자 보자고 한 건 나정이었다 

'신촌으로 와, 집 앞에서 보면 되겠네, 밥은 니가 살거지?' 

나정과 그렇게 정한 약속 시간이 오늘 2시. 
대체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서 뭘 물어봐야할지 
그리고 나정은 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해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기를, 생각하면서 수첩을 접어 간단히 자켓 주머니에 넣는다 

현관에 걸린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단정한 검정 원피스 차림의 윤진이 방에서 나온다 
안 그래도 날씬한 윤진이 일자로 떨어지는 몸에 붙는 원피스를 입으니 군살 없는 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두운 색 때문인지 평소보다 창백해보이는 윤진은 훅,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냘프다 


"어디 가요?" 


평소와 다른 차림에 호준이 묻는다 
윤진은 멈칫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갈 데가 좀 있어서요" 
"출근은요?" 
"오늘 쉬어요" 


윤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호준은 정작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이 없었단 걸 깨닫는다 
어디를 가느냐,고 다시 한번 물으려는데 윤진이 한 발 빨랐다 


"오늘 저녁에 바빠요?" 
"아뇨" 


나정과의 약속은 2시니까 늦어도 4시 전에는 끝날 것이다 
혹시나 길어진다고 해도 그땐 나정의 말대로 다시 약속을 잡으면 된다 
고개를 가로로 흔들자 윤진이 망설이는 듯 쳐다보며 입술을 한 번 깨문다 
꼭 다문 저 입매를 건드려 풀어주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걸 참는다 
한참 간절하게 호준을 바라본다 
호준은 무슨 일이길래 저러나 싶어 고개만 갸우뚱하고 기다린다 


"... 일찍 들어올 수 있어요?" 


윤진은 조금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럼 일찍 와서 저녁 같이 먹어요"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제 쪽에서 언제든 먼저 그러고 싶은 걸 굳이 어렵게 말을 꺼내는 윤진이 안쓰럽다 
호준은 결국 손을 들어 윤진의 머리칼을 괜히 한번 넘겨준다 
손길에 물끄러미 올려다본 윤진의 눈이 물기 젖은 듯 일렁인다 
그 파동에 함께 흔들린 호준은 저절로 짧게 입맞춘다 


"그래요" 


경쾌한 호준의 대답에 윤진은 간절하게 호준의 얼굴을 구석구석 눈에 담는다 
꽤나 길게 눈을 떼지 않는 윤진에게 호준이 질문하듯 갸우뚱 하자 고개를 살랑 흔든다 
그리고 최대한 건조하게 덧붙인다 


"할 말이 있어요, 오늘" 











쪼옥. 


앞에 놓인 오렌지주스를 빨대로 빨아마신다 
괜히 초조한 마음에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고 주스잔을 만지작거린다 

약속 장소인 카페는 학교 앞이라 그런지 듬성듬성 어린 연인들만 보인다 
덕분에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긴 하지만 호준은 어쩐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조금 전부터 계속 약속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스무살, 

진짜 그 나이인 저들에게 저는 어떻게 보일까 
기억은 스무살까지뿐, 몸과 주변은 이미 서른 넷인 자신은 
스물도 서른넷도 아닌 어중간한 어딘가.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에 결국 빨대를 빼고 주스를 벌컥 마신다 


"잘 지냈나?" 


쭉 들이킨 주스잔을 내려놓자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자 만삭에 가까운 여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는 앞자리에 조심성없이 털썩 앉는다 


"저기..." 


배는 남산만 하게 불렀는데 팔과 다리, 얼굴은 호리호리한, 
아마도 지금 임신 중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미인이라고 불렸을 여자가 
머뭇거리는 호준의 반응에 불만스럽게 갈색 눈동자를 들어 바라본다 


"성나정씨...?" 
"... 언제부터 그리 내외했다고, 그라믄 내가 누구겠노, 자슥이 새삼스럽게" 


위협하는 듯 험상궃은 목소리에 호준은 움찔한다 
주고받은 메일 상으로는 그래도 꽤나 가까운 사이일거라고 짐작했는데 
가깝긴 했지만 역시 뭔가 원한이 있는 관계였던 걸까 


"너거는 우예 둘 다 연락이 그래 안되노, 니야 원래 연락 안했다마는" 


둘 다,에 자신 말고 누가 포함이 되는 건가 어버버하다가 겨우 성균 또한 나정과 친했다던 말을 떠올린다 


"둘 다 바쁘니께," 
"바쁘기는 무슨, 바쁜 놈 얼굴이 이래 좋나, 니 말고 아는 잘 있나?" 


그렇게 얼굴이 좋아졌나, 싶어 저도 모르게 뺨을 쓰다듬다가 나정의 질문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저를 삐딱하게 쳐다보던 나정이 퉁명스럽게 묻는다 


"무슨 일이고?" 
"에... 그게" 


막상 저렇게 물으니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정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사정을 설명하고 했던 계획이 하얗게 날아가버렸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호준을 보다 나정이 고개를 절레 흔든다 


"말도 제대로 몬하는 놈이 무슨 대표고 사장이라는긴지 모르겠다, 때리치라 문디 자슥아" 


저도 제가 어째서 대표고 사장인지 모르겠으니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상당한 폭언임에 분명한데도 대답 없이 머뭇거리는 호준을 보던 나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니, 무슨 일 있나?" 


조금 전까진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 거리더니 갑자기 걱정하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에 
호준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몰라 당황한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호준을 보다 나정이 중얼거린다 


"하기사, 니가 어쩐 일로 내한테 연락을 다 했나 했다. 급한 일이믄 전화하지, 집으로 하든가" 


제가 나정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 이메일 주소도 겨우 받아냈건만 
걱정스런 나정의 눈빛에 호준은 움찔한다 


"일부러 보자칸거 보믄 큰 일이가? 무슨 일인데?" 


나정의 질문에 잠깐 망설인 호준은 어렵게 입을 뗀다 


"나가, 궁금헌 게 좀 있는디" 
"... 어쩐 일이고 니가 사투리를 다 쓰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말을 잘라먹히고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나정이 미안하다는 듯 손짓 한다 


"미안, 미안타, 말해라, 무슨 일이라고?" 
"나가 궁금헌 게 좀 있는디, 나정.. 니가 좀 아는 게 있을랑가 하고" 


조심스런 호준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우뚱 한 나정은 이내 사정을 이해했다는 듯 아아, 하고 끄덕인다 


"나한테 연락한 거 보믄 결심했는갑네, 잘 생각했다, 그기 순리대로 가는기다" 


산처럼 부풀어오른 배 위에 손을 올린 채 나정이 호탕하게 말한다 
나정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호준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가... 순리대로 뭘 결심했다는 거여?" 
"와이카노, 부끄러버하기는, 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새삼스럽게, 지금이라도 생각했으니 잘됐다," 


알 수 없는 말만 늘어 놓던 나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호준을 보고 멈칫 한다 


"아이가...?" 
".... 뭔지는 몰러도 그건 아닌 거 같은디" 
"... 맞나... 내는 니가..." 


실망한 듯 중얼거린 나정은 한숨을 살짝 쉬더니 다시 묻는다 


"미안타, 니 궁금한 거 있다캤제, 뭐가 궁금한데?" 
"... 누가 그러던디, 니가 나랑 사귀었다고" 


나정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럽지만 일단 궁금한 걸 묻는다 
호준의 질문을 들은 나정이 미간을 심하게 찌푸린다 


"어떤 미친 놈이 그라더노" 
".... 아니여?" 
"정신 나갔나, 니랑 내랑 어째 그런 사이가 된단 말이고, 그라고 그 말 우리 남편 들으믄 기절한다 
 니 재준이 모리나, 가 요즘도 그때가 어쨌니 하고 삐치서 돌아삐겠구만 
 사람이, 우째 같이 살아도 그래 뒷 끝이 긴가 모르겠다, 남자는 원래 그라나? 
 하기사 니도 아직도 이카고 있는 거 보믄 참 뒷 끝 길다" 


다다다 쏘아붙이더니 혼자 납득한 듯 고개까지 주억인다 
호준은 나정의 말들이 이해되지 않아 얼른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만 든다 


"누고? 그런 미친 소리 한 놈이, 확 입을 잡아 째뿔라 마" 


무심하게 묻는 나정에게서 살기를 느낀 호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리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태의 생명 또한 소중한 것이니 나정에게서 지켜야겠다 

나정은 한심한 듯 칫,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 말겉지도 않은 소리가 궁금해가 일부러 내를 불렀나?" 
".... 그게...." 


시작점부터 끊겨버리니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망설이던 호준은 운을 떼고 자시고 하지 말고 그냥 말해버려야겠다 결심한다 



"나정아" 
"어" 
"... 나가 기억이 안나야" 
"어?" 


호준의 고백에 나정이 어리둥절한다 


"나가 사실은 기억이 하나도 안난당게, 니도, 니가 방금 말헌.. 니 남편도 기억이 안나야" 
"...장난 치지 말고" 
"장난 아니여, 나가 올해 초에 사고를 당혔는디 기억을 싹 다 잃어버렸당게, 
 암만혀도 기억이 돌아오질 않는디, 누가 그라더라고 니가 내 첫사랑일 거라고, 
 그랴서 연락해본 것이여, 혹시 니가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게 있는가 허고" 
"... 진짜?...진짜가, 니 농담하는 거 아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나정에게 호준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 언제부터 기억 안 나는데? 니 하나도 기억 안 나나, 내도 기억 안 나고 칠봉이도 기억 안 난다 카믄 
 니 삼천포는 기억나나? 어데까지 기억 나는데?" 
"... 94년 1월" 
"......" 
"서울 올라오기 전부터 기억이 안나야, 나가 니랑 친혔다고 하던디, 뭐 기억나는 거 있으믄 말 좀 해주라" 


호준의 말에 나정은 충격받은 듯 굳어진다 
너무 성급하게 말해버렸나 하고 호준은 조금 후회한다 

잠깐 멍하니 허공을 보고 굳어있던 나정은 천천히 스스로의 기억을 복기하듯 묻는다 


"... 94년 1월이라고?" 
"어," 
"...기억이 하나도 안난단 말이가 그 이후로는" 
"그렇당게..." 


호준의 대답에도 멍하니 뭔가 퍼즐을 맞춰보듯 큰 눈을 굴리면서 허공을 바라보기만 한다 
나정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가만히 기다리던 호준은 깊이 한숨을 내쉰다 


"혹시 그거라도 알 수 있겄냐? 니가 아니믄 내 첫사랑이 누구여?" 
"... 애정이 말이가?" 


멍하게 대답하는 나정의 말에 아아 그런 이름이 있었지,하고 떠올린다 
애정의 이름을 알 정도면 확실히 가깝게 지냈던 사이가 맞는가보다 


"아니, 대학 와서 나가 만난 사람 말이여, 그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 혹시 모르냐?" 


호준의 말에 나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제야 호준을 쳐다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나정을 보고 호준은 뭔가 해서는 안되는 질문을 했나 하고 
저도 모르게 뒤로 약간 물러 앉고 만다 


"니.... 사고가 언제 났다 캤노?" 
"... 올해 1월" 
"사고 크게 났나? ... 왜 아무도 말을 안했지...." 
"... 크게 났다대, 나야 기억이 안나니께" 


호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정은 엉뚱한 질문을 한다 
이건 왜 묻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답을 하자 중얼중얼 하면서 손가락을 꼽아본다 


"이상하네, 그럴 수가 없을긴데" 
"... 뭐가 말이여?" 


호준이 묻는데도 나정은 혼자서 중얼중얼 다시 뭔가를 맞춰보더니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흔든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호준은 들썩인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이 상황을 피하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을 때 
나정이 머리를 쥐어뜯을듯이 으아아아, 하고 혼자 소리를 지르더니 탁. 하고 테이블을 내리친다 
깜짝 놀란 호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린다 


"니" 
"... 뭐...왜..그라냐" 
"그라믄 윤진이랑 저녁은 우예 문기고?" 


나정의 말에 호준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멍해진다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 니가... 그 사람을 어찌 아냐" 
"... 내가 가를 왜 모르노, 대답해라 니 윤진이랑 밥 문 거 맞나? 5월달쯤에" 


5월, 
저가 윤진을 처음 만났을 무렵. 
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던 때 

호준은 뭔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호준의 반응을 본 나정의 얼굴이 더 아리송해진다 


"그기 말이 되나, 니 94년 1월부터 기억이 안 난다매, 내도 기억 안 나고 칠봉이도 모른다매. 
 근데 우예 윤진이랑은 밥을 묵노" 


나정의 말이 가지는 의미가 번개처럼 제 머리를 내리친다 
호준은 순간적으로 넋을 잃는다 
너무 많은 질문이 동시에 떠오른다 
입 속에서 서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말들이 온통 뒤엉킨다 


"... 니가 말하는 윤진이... 조윤진... 맞냐?" 


황당한 소리 한다는 듯 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 작고.. 마르고.. 하얗고.. 전라도 말 쓰고..." 
"무슨 소리고, 그라믄 내가 윤진이가 누군지도 모를까봐" 


테이블 아래 있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호준은 멍하니 손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 불안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본다 
오른손으로는 딱딱 떨리는 입을 막고 왼 손으로 머리를 고통스럽게 짚는다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쥐어뜯다 못해 손가락을 잘근거리며 씹어버릴 것 같은 호준을 보고 기겁한 나정이 
팔을 뻗어 탁, 하고 호준의 손을 쳐낸다 


"준아, 괘얂나? 정신차리라, 무슨 일이고" 


멍하니 바닥을 노려보고 있던 호준이 고개를 든다 
붉게 충혈된 눈이 여전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정을 노려본다 


".... 니 방금 말했던... 사람.. 말이다" 


저절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처럼 딱딱하게 열린 입술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확실한 거여? 조윤진.. 이 확실혀?"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길, 나정이 자신의 발언을 번복해주길 바라면서 간절하게 묻는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정은 당황해서 호준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호준의 눈이 나정의 대답을 확인하고 순식간에 절망과 혼돈에 휩싸인다 


"... 조윤진이.. 누군데" 


덜덜 떨면서 한참 숨을 고르던 호준이 겨우 묻는다 
당황해서 멈칫거리던 나정이 쭈뼛거리며 대답한다 


"... 기억 안 나나, 윤진이.. 니 부인, 니가 물었던 니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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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다시 말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상처와 비슷한 이유로 괴로운 분들께 이 글이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래요. 
냔들의 댓글에 언제나 감사. 이 글이 혹, 마음을 어렵게 하더라도 즐거움이 되길. 고마워. 조금 더 남았어 아직. 






+
 






12월 치고는 하늘이 너무 파랗게 개인 날이었다
예전의 말로 하자면 아침부터 까치가 울었다,라고 할 만한.


아침 식사의 설겆이를 마치고 간단히 빨래를 정리하다가 
아무래도 우습지 않은 아침 방송을 꺼버리고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신호가 몇번인가 가다가 뚝,하고 끊기더니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바빠?"


부스럭거리는 소리,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 무슨 일 있어?
"아니이.. 심심해서"
- 사모님.. 저 일하는 중인데요
"아무 때나 전화해도 된다면서"
- ... 그렇긴 한데... 


난감한 목소리에 치이,하고 입술을 삐죽인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달래듯 목소리가 한껏 낮아진다


- 이상하게 성균이랑 있을 때만 니가 전화한다니까, 덕분에 성균이가 아주 요즘 나 놀리느라 난리야
"그래서 싫어?"
- 아니이 싫다는 게 아니라,


쩔쩔매는 목소리를 기어코 듣고서야 핏,하고 웃는다


- 아침은 먹었어?
"응, 좀 전에"
- 좀 쉬어 아무 것도 하지말고
"... 아무 것도 안하면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


임신 초기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태반에 유산 위기를 겨우 넘긴 뒤
호준은 아예 윤진이 집 밖에 외출하거나 무거운 걸 들기만 해도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벌벌 떨었다
제가 없이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것까진 참았는데 
두 사람만 사는, 대부분은 윤진 혼자 있는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르는게 어떻겠느냐,란 말을 꺼냈을 때는
급기야 남편이 지나치게 애처가인데 돈을 너무 잘 벌어서 괴롭다, 라고 고민을 하는 건 죄겠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마디 해서 그 제안은 철회했지만 그러고도 뭐만 하려고 하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그냥 가만히 집에 누워있기만 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윤진은 슬슬 짜증이 나려는 참이었다


- 집에서 맨날 게임만 하고 있지 말고
"흐응, 언제는 쉬기만 하라더니"
- 쉬라고 그랬지 언제 게임하라 그랬어? 흥분하면 안 좋다니까, 애기가 뭘 보고 배우겠냐?
"그게 게임회사 대표가 할 말이야? 그리고 야구 게임이 어디가 어때서,"
- 하여간 하지 마. 너 요즘 실력 너무 늘었어


볼멘 대꾸에 윤진은 피식, 웃는다
둘 다 야구팬인데 시즌이 없을 땐 대신 이거라도 하자,고 호준이 들고온 게임이라 처음엔 호준이 일방적으로 이겼지만
요즘은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게임만 하고 있는 윤진의 승률이 더 높아졌다
쓸데없는 승부욕을 불태우다 윤진에게 넘겨준 주도권이 꽤나 되니 분이 나기도 할 것이다
지금 통화하고 있는 '아무때나 전화해도 돼'도 지난 주말에 윤진이 이겨서 따낸 권리였다


"그냥 맨날 지는 게 싫다고 하지?"
- 그래, 그것도 싫고 너 게임하느라 신경쓰는 것도 싫어, 게임 그만하고, 제발 운동 좀 하고, 밥도 챙겨 먹고
"아, 몰라몰라 잔소리 진짜, 집에나 빨리 와. 소망이가 아빠 보고 싶어 한단 말이야"


그럴거면 집에 일찍 들어오기나 하든가.
호준은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 일부러인지 우연히인지 알 수 없게 더 바빠졌다
부쩍 잠이 많아진 윤진이 혹시라도 깰까봐 새벽에 살그머니 들어와 쪽잠을 자고는 아침엔 윤진을 깨우지 않고 사라졌다
일어나서야 남겨진 쪽지와 바닥에 깔린 이불의 흐트러진 흔적으로만 호준이 다녀간 걸 확인하는 때가 늘었고
종종 일주일 내내 호준을 보는 시간을 다 합쳐도 하루 24시간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혼자 집에 갖혀있다시피 한 게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일부러 아이 핑계까지 대면서 칭얼거리자 호준이 한숨을 푹 쉰다


- 나 출근한지 두 시간 밖에 안 지났거든? 그리고 오늘 늦을 것 같다니까
".. 오늘만이 아니고 맨날 늦으면서... 우리 소망이 보다 일이 더 중요해? 아빠 보고 싶어요 하잖아, 응?"
- 아빠도 보고 싶어요, 근데 아빠는 일해야해요 소망이 예쁜 옷 사주고 엄마 맛있는 거 사주려면


끄떡도 하지 않는 대답에 윤진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처진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너무 딱 잘라서 이러니까 섭섭해진다
아이를 갖고부터는 섭섭한 게 늘었다


"치이.."
- 심심하면 나정이라도 불러서 놀아, 태교 해야하니까 말은 좀 곱게 하라고 그러고
"... 다음 시즌에 재준이 일본 가는 거 때문에 나정이 짐싸느라 정신없단 말이야"
- 우리 부인 심심하겠네 어쩌냐
"그러니까 얼른 집에 와, 응?"


다시 한번 묻자 호준은 곤란한 듯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 외롭단 말이야"


처연하게 가라앉는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호준의 숨소리만 한참 들렸다


"... 저녁 먹으러 갈게, 아마 7시쯤, 일정 확인해보고 다시 말해줄게"


자신없는 대답이지만 윤진은 금새 배시시 웃어버렸다
순식간에 호준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일정이 오가고 조정한 건지 알 수 있다
겨우 몇시간이겠지만, 그게 어디냐 싶어서 호준이 볼 수 없는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거 해놓을게"
"아냐, 무리하지마, 암것도 하지마 집에 있는 걸로 먹어. 알았지?"


혹시라도 장보러 나가겠다고 할까봐 얼른 만류한다
윤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럼,"
"좀 있다 봐, 전화할게"
"응,"


통화를 끝내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겨우 조금 나오기 시작한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아빠가, 오늘 집에 오신대'


아직 태동은 느껴지지 않지만 얼마전 산부인과에서 확인한 초음파 사진으로는 뱃 속의 아가가 건강하다고 했다
조금 작고 움직임이 얌전한 걸 보면 어머니를 닮았나봐요 하는 말에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서 조금 웃고 말았다

아침에 먹은 것이 약간 버거웠는지 아랫배가 사르르 아파왔다
불안한 때는 거의 지났다고 들었는데 지난번 산부인과 검진을 다녀온 후에 가끔 아랫배가 아릿해오곤 했다
처음엔 배가 아프기만 해도 바로 병원에 달려가곤 했는데 한번인가를 빼고는 큰 위험은 없었고 
이즈음에는 원래 아기가 크면서 아프기도 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서 그저 가만히 배를 쓰다듬는다

소파에 앉아서 배를 쓰다듬고 있자니 일어나서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또 잠이 왔다
저녁 준비도 하고 아마도 저녁만 먹고 또 회사로 돌아갈 호준을 만나려면
지금 조금 자두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시계를 한번 보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약간 따끔거리는 배를 어루만지면서 스륵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찢어질 듯한 고통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칼을 꽂아넣은 듯 숨이 탁 멎는 아픔에 눈을 뜬 윤진은
덮쳐오는 고통을 버텨내느라 겨우 숨만 쉬고 이불을 찢을 듯 쥐고 있다가
잠깐 고통이 잠잠해진 틈을 타고 침대 옆에 놓아뒀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뚜우, 뚜우, 뚜우,


수화기 너머의 주인과는 연결을 할 수 없다는 메세지만 흘러나왔다
급하게 다시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헉,


다시 찾아온 통증에 윤진은 배를 감싸고 저도 모르게 몸을 수그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대체 왜 지금 호준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인지 
윤진은 다시 한번 겨우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통화를 연결할 수 없어....


냉정한 기계목소리를 듣자 저절로 휴대폰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이 상황이 무섭고 무서웠다
호준의 말대로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쓸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보다



대체 넌 어디에



바쁜 일이 있는 거겠지,
오늘 저녁에 만나러 오려고 모든 일정을 쪼개넣느라 바쁜 거겠지


윤진은 그 와중에도 겨우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래도 받아주길 바라면서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누르고
이번엔 아예 꺼져버린 전화기를 확인하고 툭, 떨어져버렸다


나... 무서워, 나 죽을 거 같아.


처음보다 좀더 빨라진 고통의 주기에 몸을 웅크린 채 아파하던 윤진은
놓쳐버렸던 휴대폰에서 겨우 다른 이름을 찾아냈다


- 어, 무슨 일이고


몇번의 통화음 끝에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진은 까무라칠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애원했다


"... 나정아.. 나.. "
- 윤진아, 왜! 무슨 일이고! 무슨 일 있나?!
"... 나 좀 와주라.... 나가...."


윤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통화가 끊어졌다
끊어진 휴대폰을 쥐고 몸을 웅크린 채 얼마나 고통을 견뎠을까
미친 듯한 초인종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진아! 니 안에 있나! 윤진아!"


윤진은 겨우 기다시피 현관으로 나가 힘없이 문을 열었다


"윤진아!"


문이 열리고 등장한 나정의 품으로 그대로 쓰러졌다
윤진의 발목에 흘러내린 붉은 기 도는 액체를 확인한 나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절한 듯 쓰러진 윤진을 안고 부들부들 떨던 나정은 최대한 침착하게 구급차를 불렀다
윤진은 멀리서 들리는 나정의 계속된 부름에 겨우 나정의 손을 희미하게 잡는 것으로 대답하면서 병원,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조산.


19주.


세상에 나오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던 아기는
윤진이 깨어날 때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저, 그때까지는.

마치 자신의 존재를 엄마,가 확인해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얀 방
하얀 벽

납작해진 배



자꾸만 추웠다
덜덜 떨고 있는 자신에게 나정이 벌써 몇개째 담요를 덮어주고
간호사실에 말해서 온수를 넣은 핫팩까지 구해다 안겨주었는데도
마치 거친 겨울 벌판에 알몸으로 서있는 것처럼 찬 바람이 저를 흔들고 지나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까지 가득차있던 세상이
불과 하루만에 텅 비어버렸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다가 
이 비어버린 손이 낯설어서
가만히 허공의 무언가를 잡으려 휘휘 저었다


저를 포함한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시간만큼 세상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꿈 속인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울고 있는 서울 어머니도
불안한 듯 서서 아무 말도 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나정도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걸까
가만히 제 입으로 죽을 떠먹여주는 나정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뭔가를 먹고 있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싫은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윤진을 바라보던 나정은 아무 말 없이 윤진을 안았다


"무라, 무야 된다"
"......"
"니 벌써 몇끼짼 줄 아나, 이래 안 무믄 니까지 큰일난다"
"....."
"윤진아, 쫌"


간절하게 제 이름을 부른 나정의 팔이 떨렸다
멍하니 안겨있는 윤진의 어깨가 축축하고 뜨거워졌다


"아이고, 이놈아 어디갔다 이제 오노,"


드륵, 하고 병실 문이 열렸다
실루엣으로 서있는 사람을 본 어머니가 울먹이며 그의 팔을 잡고 속상한 듯 두들겼다


"야 이 새끼야 니 미칫나, 와 연락이 안되노, 얼른 안 들어오나"


마음을 졸이고 있던 나정의 폭언에도, 답답한 어머니의 말에도 반응 없이
어머니가 때리는 대로 다 맞으면서 반동에 따라 흔들리고 있는 그 얼굴은 언젠가 윤진이 보았던 그 텅빈 표정 그대로였다
윤진은 공허한 그의 눈과 마주치고서야 주룩, 눈물을 흘렸다


'잡아줘'


윤진은 멍하니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 손을 잡고 싶었다

그 손을 잡으면 자신을 끝없이 외롭게 흔드는 이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고 말해줘,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향해 내뻗은 윤진의 손을 본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공포에 휩싸인 것처럼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뒤로 감췄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에 윤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니 죽었는 줄 알았다,는 나정의 원망이 시끄럽게 병실을 가득 채우고 
그래도 이제라도 왔으니 됐다,며 안심하는 어머니의 말이 들리는 순간에도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 듯 고요하게 그 자리에 서서 윤진을 바라보던 호준은 멈칫,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홀로 그 뒷걸음을 알아차린 윤진의 눈동자에 탁,하고 불빛이 꺼졌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윤진은 결국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듯이 호준은 다시 한 발 물러섰다

툭, 호준을 향해 뻗고 있던 윤진의 손이 침대 위에 떨어졌다


"준아, 니 어데가노! 준아!"


다급한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이 탁,하고 닫혔다


그 방에 
윤진을 남겨놓은 채로.




++



또각거리며 조심스럽게 걷는 구둣소리만 들린다
작은 플루트와 현악의 음악이 나머지 조용한 공간을 채운다
문득 경쾌한 이 음악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추모관의 복도를 찬찬히 걸어가던 윤진은 
중간 즈음, 창 밖으로 정원이 보이는, 햇살이 들어오는 구역에 들어선다


눈높이 보다 조금 높이 있는 안치실들을 창을 통해 찬찬히 살핀다
그들이 바뀌었을리는 없는데, 여전히 이름은 낯설다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 처럼

처음 보는 세계인 양 낯선 이름을 나직이 몇번이나 되뇌어본다
안치된 이름마다 몇 분씩 그렇게 느릿하게 나아가던 걸음이 
억지로 유예했던 보람도 없이 결국 멈추고 만다


윤진은 가만히 손을 들어 유리창을 쓰다듬는다


[ 2006年 12月 21日 金希珠 ]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이름을 얻은 나의 딸.
한번 안아주지도, 이름을 들려주지도 못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뭉근하게 아팠다 


그때 왜 병원을 가지 않았을까
왜 그때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여겼을까
징조였는데, 불길한 징조였는데

세상에 태어나 몇시간이라도 숨을 쉬었으니, 그냥 사라지게 둘 수 없다고
없었던 일처럼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윤진은 절규하는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
이러는 거 아니라고, 보내줄 줄도 알아야한다고 어른들께 한 소리 들었지만
끝내 추모관 안치를 고집하는 윤진의 청을 호준은 아무 말 없이 들어주었다


한참을 차가운 유리 너머 더 차가운 도자기 안 아이를 바라보다 윤진은 한발짝 더 걸음을 옮긴다


[ 1952年 3月 8日 ~ 1998年 11月 17日 宋順禮 ]
[ 1947年 8月 29日 ~ 2006年 12月 20日 金成澤 ]


나란히 안치된 두 함을 바라보고 윤진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잘 지내셨어요, 어머님, 아버님'


이곳에 '희주'를 데리고 와서야 알았다
이전 호준의 어머니를 안치해놓았던 자리에 '희주'를 데려다놓고
바로 옆 부부를 함께 모시는 안치단으로 옮겨진 어머니 옆에 모신 새로운 함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갑자기 어떻게 빈 안치단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

어째서 그날 연락이 닿지 않았고
어째서 그날밤 돌아오지 않았고
어째서 이곳에 끝내 함께 오려고 하지 않았는가를.


그날 그는 두 개의 가족을 잃었다는 걸.


나중에야 성균을 통해서 들었다


그날,
행려병자 수용 병원에서 온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호준이 갔을 땐 이미 아버지는 숨을 거둔 후였다는 걸
아니 숨을 거둔 후에야 내내 감추고 있던 소지품에서 호준의 연락처를 발견하고 연락을 해왔던 거였다고.
아무에게도,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연고가 있는지 알리지 않아서
그저 IMF 때 많이들 그랬듯 사업에 실패하고 집을 떠나 떠도는 노숙자 중 하나인 줄 알았다고
이렇게 번듯하게 잘 살고 있는 아드님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왜 연락처가 있는데도 연락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자꾸만 호준을 훑어보면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고.



윤진은 떨리는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고개 숙인다


'도와주세요'


성균에게 약속한 그날,
희주가 떠나고 두번째 기일

더이상은 미룰 수가 없다

윤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스무살에, 스물 다섯에, 서른에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때처럼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결국 기억을 찾는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을 기억해낼거라면



차라리 제 손으로 모든 걸 매듭지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가 마음을 믿어도'


성균의 말이 슬쩍 스치고 지나간다
그 말을 자꾸 믿고 싶어져서 윤진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흔든다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바라건대

그에게 이 모든 진실이 고통이 아니기만을
아니 이미 한번 지나간 고통이니 다시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만을


그날처럼 파란 하늘에 햇살이 반짝,하고 들어온다


'도와주세요'


윤진은 다시 한번 간절히 읊조린다


당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나의 사랑하는 그를 지켜주세요.











=
1) 나정은 2007년 일본으로 출국했습니다. 
일본에서 적응해야하는 둘을 위해 아무도 나정과 칠봉에게는 이 상황을 알리지 않았어요
두번째 글의 숨김글을 보면 나정은 이 상황을 모르고 있고, 윤진에게 드디어 호준이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카페에서의 대화도 내내 나정은 윤진을 놓고 말하고 있어요 호준이 뭔가 윤진과의 문제로 연락한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리고 나정이 자신의 임신 소식을 윤진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 미안해했던 이유는.. 숨김글의 그것..
호준이 신촌하숙을 나왔어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정이 출산을 위해 돌아와야했기 때문이구요 
만약 계속 그곳에 있었다면 호준이 나정의 존재를 모를 수 없었을테니까.
사이다 로 진행했던 이유도 어느정도는.. 나정은 그동안 한국에 없고 이상황을 몰라야 해서..
빙그레가 결국 등장하지 못한 이유도 비슷.. 칠봉에게도 전달되지 않도록

2) 어머니가 그토록 호준이 추모관을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유도 함께.
저 세 개의 유골함을 보는 순간, 그리고 사망일자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던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