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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주 - 겨울밤(feat. 이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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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come to me in Bright Defile," he said, "where Judgment Day is not a thing that can be delayed for over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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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경쾌한 컷 소리와 함께 숨죽이고 있던 현장에 활기가 돌아온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의 마지막 컷, 그리고 일주일 넘게 걸린 촬영의 마지막 컷이다
덕분에 큰 소리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촬영 장비들을 챙기는 스태프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해방감이 감돈다
"크랭크업 기념으로 감독님이 회식 쏘신답니다! 갹출도 아니고 제작비도 아닌 감독님 사비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문자로 보내드린 장소로 와주세요!"
방금까지 촬영이 진행된 현장 중앙에 선 앳된 연출부 스태프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큰 목소리로 공지한다
"메뉴는 뭔데?"
"고기이긴 한거지?"
"분식이면 안간다?"
"공지문자 확인하시라니까요"
"뭐야? 대패삼겹살? 이걸 누구 코에 붙여?"
등등의 시끌벅적한 대화가 오가는 현장은
그래도 크랭크업 회식 소식에 기운을 얻었는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리된다
"우감독"
카메라 줄을 정리하고 있는 효신에게 다가온 용재가 효신의 또 다른 이름을 부른다
"아, 네"
"갈거지?"
자신을 이 현장에 투입시켜 준 용재의 말에 효신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린다
"뭐야, 오늘도 안돼?"
"...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없는데"
제법 큰 덩치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용재는 난처한 듯 정리되지 않은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생각이 복잡할 때 등장하는 버릇인 탓에 용재의 머리는 언제나 자다 금새 일어난 사람처럼 머리가 반쯤 뒤엉켜있었다
"우감독"
"네 선배님"
다 감아올린 카메라줄을 한 손에 건 채 쳐다보는 효신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던 용재는
영 내키지않는다는 듯 시선을 슬쩍 회피하면서 퉁명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이상하게 듣지 말고"
"....?"
"저 감독 녀석, 집안 돈으로 영화 찍는다고 거들먹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바닥서는 꽤 유명해"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미 이 자리를 소개할 때부터 낄낄거리면서 저에게 했던 말을
저렇게 심각하게 되풀이하나 싶어 효신은 의아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인사라도 해두면 좋다는거지.. 한국서 영화할거면 사람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할 거잖아
보아하니 저 녀석처럼 집안 돈으로 찍을 형편 같아 보이진 않고...
인사라도 해두면 나중에 인맥 소개 받기도 좋고, 저래뵈도 주요 스태프들 꽉 잡고 있다고"
"... 아..."
효신은 난처한 듯이 대답을 얼버무린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잇던 용재는 효신의 반응에 다시 한번 뒷머리를 헤집어놓는다
"감독이 잘 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전번에 자네, 전에 뭐하던 사람이냐고 묻더라고
부탁받은 게 있어서 자네가 무슨 작품 했고 이런 거 말은 안했는데..."
"...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효신의 인사에 용재는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어쨌든 한국서 영화할 거면 저런 사람 알아둬도 나쁘진 않다는거야
내가 말을 안 한 건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 밝히고 친분을 쌓는 게 나을 거 같아서고"
"...."
"그러니까 좀 있다 와, 와서 인사라도 하라고"
효신은 대답 대신 안타깝다는 듯 저를 보고 있는 용재를 한번 바라본다
유학 시절 건너건너 알게 된 몇 안되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효신은 촬영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닥치는 대로 해도 모자랄 판에, 계약을 해야하는 정식 스태프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고
이력서도 포트폴리오도 보여줄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조건을 고집했고
이런 효신을 받아들여준 용재는 자신이 참여하는 현장에 팀으로 계약한 보조로 데려가거나
때로 자신이 가지 못하는 현장에 급하게 사람이 필요할 경우 효신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정작 서른 중반을 앞둔 본인은 상업 영화 촬영 감독으로 입봉할 길이 요원한데도
재능있는 후배의 앞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순한 사람이었다
효신의 재능을 아꼈기 때문에 효신의 말도 안되는 조건도 묻지 않고 받아들여주었고
때때로 효신을 알아보려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최대한 본인이 차단해주었다
덕분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힌 채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극소수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러는 편이 일을 시키기 더 쉬워서인지
어지간해서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 용재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저를 걱정해서란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이력을 밝히고
그리고 나면
원하지 않아도 소문이 나는 건 한순간 이겠지.
효신은 속으로 생각한다
"... 죄송합니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효신의 대답에 용재는 깊이 한숨을 쉰다
"... 한가지만 물어보자,"
"네"
"한국에서 장편 데뷔할 생각은 있는 거지?"
"... 예, 가능하면요"
"
순순히 대답하자 용재는 더 복잡해진 얼굴로 다시 한번 머리를 긁는다
"혹시.."
"예?"
"... 사람 통해서 일하고 이런 거, 아부라던가 더럽다던가 예술이 아니다 그런 생각"
"아니예요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조심스런 용재의 질문에 효신은 강하게 부정한다
짧게 한숨을 쉰 효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보는 용재에게 저도 모르게 나직이 설명한다
"... 좋은 기회인 것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말씀 감사하죠 저도 그러고 싶은데..."
"..."
"제가 아직 나서지 못할 사정이..."
효신의 말을 듣던 용재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효신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젓는다
"그놈의 사정 타령, 알겠어, 알겠다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내가 자네 상황 모른 것도 아닌데, 괜히 내 마음이 급해서 말 꺼내본거야 신경쓰지 마"
"예..."
효신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그때껏 쥐고있던 카메라선을 가방에 구겨넣는다
카메라 가방에 든 장비를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지퍼를 닫는 효신을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용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젓더니 여상스럽게 효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시나리오는, 쓰고 있나?"
"예? 아, 네"
"다 쓰면 보여줘, 괜찮으면 나도 조인할까 싶으니까"
"아.."
미처 효신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휙 돌아선 용재는 휘적휘적 반대쪽으로 걸어가버린다
쑥쓰러운 듯 평소 느릿한 걸음이 몇배나 빠르다
운없이 눈에 띈 막내 스태프의 야물지 못한 손끝을 지적하며 버럭하는 용재를 멍하니 보다가 피식 웃는다
이효신이란 이름의 인생이 우감독,의 것으로 바뀌는 전환점의 시작이었던 군입대 당시,
효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숨을 쉰다는 생리적인 현상뿐이었다
이대로 세계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것이 아닌가,
효신은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이 세상에 '이효신'이 존재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살아있어도 좋다는 걸 인정받을 것 같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이전의 세계에서 '이효신'이라는 이름은 이미 너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효신'은 곧 자신의 배경이었고 학생회장이라는 또는 전교 일등 이라는 타이틀이었으며
서울대 로스쿨이라는 결정된 미래였고 타고난 머리와 정치력,이라는 특권이었다
그 이름 아래에서 효신은 자신이 진정으로 얻어낸 것과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지면 자신은 가치없는 존재인 것인가,
이것을 모두 제외하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효신은 고뇌했다
'살아보려고'
언젠가 했던 그 말은 조금도 농담이 아닌 처절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어느새 목표가 되었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도저히 이 세계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도달했고
그러나 언젠가처럼 스스로를 버리는 대신 효신은 세계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세계를 버리고 스스로를 지키기로.
어떻게든
살고 싶어졌으니까.
영화는 처음에는 '반항'이었고 이내 '돌파구'가 되었다
누구도 효신에게 '영화'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는 효신에게 모든 수식어를 제외하고 자신의 이름만으로 평가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영역이었다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세계,
효신이 세계를 떠나 영화로 건너가기로 결정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Director Woo, 우감독.이라는 이름은 처음엔 그저 우스개소리처럼 시작된 것이었다
'효신'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지나치게 어려웠던 것이 발단이었다
효신은 농담 반, 자학 반의 의미로 Woo, 라는 이름을 첫 학기 첫 단편영화의 크레딧에 올렸다
굳이 우,라는 글자를 고른 것은 愚, 어리석다 라는 의미의 조소였는데
영어로는 Woo,라는 섹스어필한 감탄사가 존재했고, 그 이미지와 반듯한 효신 간의 괴리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효신 보다는 우,가 발음하기 편했기 때문인지
Woo, 또는 이후로는 몇몇 작품이 상을 받기 시작하자 질시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 Director Woo
(크레딧상 Director Woo라고 표기되는 것을 따와서)라고 불리는 것이 정착되었고
새로운 정체성에 익숙해진 효신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효신도 거의 부르는 사람 없는 '효신'이라는 이름 대신 '우감독' 이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졌다
세상에는 참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과 자신이 대단히 폐쇄적이고 한정된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군대에서 그리고 빈 손이다시피한 상태로 유학을 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킬 것이 아주 많은, 그래서 그 지킬 것들 때문에 서서히 무너져가는 제국고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지킬 것을 가진 사람들과 아예 지킬 것이 없는 사람들과, 지킬 것을 놓아버리기를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효신은 일종의 문화 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필요도 조종도 아닌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 인생을 지속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댓가를 지불하거나 갚을 능력이 없는 자신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효신은 때때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방금의 '용재'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효신은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안착하지 못하고 세계의 사이에서 떠돌다가
그대로 서서히 침몰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 용재의 뒷모습을 보다가 효신은 그저 눈 앞에 놓인 카메라 가방을 양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에 각각 다른 장비를 챙겨들고 약간 뒤뚱거리며 촬영장 바깥을 향한다
주차장에 가까이 주차된 밴 트렁크를 열고 장비를 우겨넣는다
아직 남은 장비를 실을 공간을 확인하고 트렁크를 잠기지는 않게 살짝만 닫아놓는다
거의 정리를 마치고 서서히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현장에 돌아온 효신은
구석에 놓인 배낭을 둘러메고 반대쪽에 서서 이야기 중인 용재를 찾아 고개를 꾸벅 눈인사만 한 뒤
조용히 촬영장을 빠져나온다
곧 3월, 봄이라는데 아직도 저녁 공기는 동장군의 위세가 등등하다
찬 공기가 폐에 쑥하고 들어가자 속이 얼얼해지는 느낌이다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는다
찾고 있던 담배 대신 손에 걸린 물건에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효신은 야상 잠바의 큰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여 있는 박하사탕을 꺼낸다
얼마 전 역시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홧김에 편의점에 사온 박하사탕 한봉지를 매일 아침 방에서 나설 때마다 한주먹씩 집어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니면서 담배 대용으로 먹기 시작한 것도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순간적으로 담배가 훅,하고 생각날 때가 있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손톱만한 박하사탕을 물끄러미 보던 효신은
이내 무표정하게 비닐을 까서 입 속에 사탕을 쏙,하고 집어넣는다
화아 하고 찬 기운이 입 속에 가득찬다
사탕을 우드득, 씹는 대신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면서
끝까지 지퍼를 올린 야상잠바 안으로 목을 쑤욱 집어넣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어둑해진 거리를 걸어간다
차를 얻어타고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회식장소로 직행이다
외진 곳에 위치한 촬영장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는
건물도 거의 없는 2차선 도로로 10분 정도 걸어내려가야한다
갑자기 한기가 드는 것 같아서 부르르 몸을 떤 효신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한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촬영 준비 때문에 거의 챙겨먹지 못했다
얼른 돌아가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어야겠다, 생각한다
가로등 아래 표지판만 서있는 버스 정류장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는 언제쯤 오려나싶어서 무심코 뒤쪽을 돌아본 효신은 빠르게 놀리고 있던 걸음을 멈춘다
방금 전 촬영장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는 보지 못한 검은 세단 한 대가 천천히 효신 쪽으로 오고 있다
어두워진 탓인지 선팅을 그렇게 강하게 한건지 운전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이런 시골길에 어울리지 않는,지나치게 세련된 차다
효신은 순식간에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차의 종류를 찾아낸다
.... 벤틀리.
적어도. 저런 차를.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에.
저도 모르게 슬금 뒷걸음질친다
머릿 속으로는 이미 도망칠 곳 따위는 없어,라고 계산이 끝났는데
몸은 본능적으로 조금이라도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움직인다
지나치게 느린 속도로 검은 차가 다가온다
사람도, 건물도 없이 탁 트인 길에 그대로 굳은 채로 효신은 그저 제발 저를 스쳐서 지나가는 차 이기만을 기도한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도 소용없이 속도를 줄이면서 서서히 다가온 차는 그대로 효신 옆에 멈춰선다
효신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만다
어떻게든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마지막일 줄은.
몇달만, 6개월 아니 적어도 3개월만 버텼으면 됐는데.
눈을 감고 고개 숙인 효신은 절망의 긴 숨을 토해낸다
"뭐해요"
높고 차가운 목소리가 낮은 엔진 소리만 들리던 정적을 깬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효신은 천천히 감고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든다
효신 옆에 선 차의 조수석 차창이 내려가 있고
운전석에 앉은 라헬이 황당한 표정으로 효신을 바라보고 있다
라헬의 모습을 확인한 효신은 당황한 듯 몇번 눈을 끔벅거린다
몇초 간 라헬을 멍하니 바라보던 효신의 얼굴에 서서히 어이없어 하는 미소가 번진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왜 왔겠어요 내가 여길"
설마, 나? 라는 듯이 과장되게 스스로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효신의 하는 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라헬은 미간을 찌푸린다
"타요"
"응?"
"타라구요 당장"
차가운 라헬의 지시에 효신은 가만히 차창 너머의 라헬을 바라본다
눈을 피하지 않는 라헬과 잠시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차분하게 바라보던 효신은 이내 싱긋 웃고는 라헬이 말한대로 차에 올라탄다
"잘 지냈.."
안전벨트를 손으로 끌어당기면서 효신이 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라헬은 아주 세게 악셀레이터를 밟는다
그때껏 소리죽이고 있던 엔진이 그르렁하는 소리를 내면서 세차게 회전하고
외진 이차선 도로에 어울리지 않게 자동차가 성난 표범처럼 튕기듯 달려나간다
갑작스런 속도에 놀라 채 채우지 못한 안전벨트를 손에 쥔 채 놀란 표정으로 탁 트인 길을 살피던 효신은
천천히 고개 돌려 운전 중인 라헬을 바라본다
어둑해진 길의 간간이 비쳐드는 가로등 불빛에 라헬의 옆모습은 깎아놓은 듯이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입술은 굳게 잠근 듯이 꼭 다문 채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효신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말없이 달리기만 하는 라헬을
가만히 보던 효신은 마침내 약간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운을 뗀다
"이건 무슨 장르야? 나 이제 치정, 별로 안 좋아하는데."
"... 걱정말아요 선배가 좋아하는 장르일테니까"
낮은 라헬의 대답에 효신의 한쪽 눈썹이 쑥,하고 치켜올라간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뭔데"
"... 스릴러, 범죄 스릴러 좋아하잖아요 선배"
범죄... 스릴러?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만 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라헬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가만히 바라보는 효신을 태우기는 했으나 존재는 없다는 듯 한참 달리던 라헬은
마침내 서울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하늘을 가린 높은 건물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조금 전 효신을 태운 장소만큼이나 인적이 없는 길에 차를 세운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라헬은
찬찬히 동향을 살피는 듯 아예 대놓고 보고 있는 효신 쪽으로 홱하고 돌아본다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라헬의 눈을 대면하고도 효신은 여유롭게 싱긋하고 웃는다
그 미소를 본 라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 선배, 할 말 없어요?"
"... 예뻐졌네, 전보다 더"
잔뜩 가시돋힌 라헬의 질문에 멈칫하는가,했던 효신은 금새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한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라헬은 처음 그 말을 듣는 것처럼 머뭇한다
그러나 금새 조금 전보다 더 얼굴이 차가워진다
"그런 거 말고, 정말 할 말 없어요?"
"으음... 너 웃는 거 예쁜데, 예전만큼 웃진 않는구나? 눈의 여왕 같이"
태연하게 대답하는 효신의 말에 라헬의 심장이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아진다
"지금 무슨 어린 애들 장난 치는 줄 알아요? 그런 걸 묻는게 아니잖아요
그럼, 선배는 무슨 왕자와 거지 놀이라도 하는 중이예요?
아니 선배가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라도 된 줄 알아요?
신분을 숨기고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대단히 영웅다운 일이라도 했던 모양이죠?"
죽은 줄 알았다고 나는 당신이.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은 목 너머로 꿀꺽 삼킨다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발언을 정통으로 받아든 효신은 대답 대신 라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선을 느낄수록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조금씩 더 굳어가는 표정을 보고 효신은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한다
말하지 못한 라헬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진 건 아니고, 자리잡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근데,"
성급하게 반박의 말이 튀어나온다
관심없는 듯 가장했던 태도가 무너져버린다
효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시선을 떨궈 입고 있던 야상 잠바를 한 손으로 쓸어내린다
"보시다시피 자리를 못 잡아서"
"...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사라졌단 말이냐,고 추궁하고 싶은 충동을 찍어누른다
라헬이 금새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온갖 가시돋친 말들이 입 속을 맴돈다
평소라면 이미 수십마디를 쏘아붙였어야하는데 어째서인지 적절한 말을 고를 수가 없다
가장 고통을 주는 말과 모르는 척 하는 말 사이에서 라헬은 군중 속에 홀로 길을 잃은 것처럼 갈팡질팡한다
흔들리는 라헬의 눈동자를 슬쩍 훑는 효신의 얼굴에 흥미로운 빛이 어른거리며 지나간다
웃지 않으려는 미묘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흔든 효신은 여전히 망설이는 라헬이 방심한 틈에
느릿하게 팔을 뻗어 라헬의 날카로운 앞머리를 살며시 흔들어놓는다
효신의 손길에 생각에 잠겨있던 라헬은 번쩍 놀라 큰 눈을 깜빡한다
"게다가, 이렇게 만나잖아 결국"
사각거리는 옷깃 스치는 소리와 나지막한 목소리에 라헬의 심장이 순간 두근, 한다
잠시 어느 때로인가 돌아간 것 같다
익숙한 홍삼 내음과 함께 뒤에서 들려오던 느릿한 발소리, 낮은 목소리, 모호한 미소
"유라헬, 검찰보다 대단한데? 어떻게 찾아낸 거야 나를?"
멍하니 금새라도 딸꾹질을 할 것처럼 꿀꺽 숨을 삼키고 있는 라헬에게 스륵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묻는다
그제야 라헬은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기억해낸다
얼마나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우감독,을 추적했는지도,
단지. 이 단 한마디를 묻기 위해서.
라헬은 몸을 뒤로 빼 효신의 손길을 피한다
허공에 허무하게 효신의 손이 멈춘다
"... 왜 그랬어요?"
얼음장처럼 얼어버린 라헬의 목소리에 효신은 알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뜬다
라헬은 원망스럽게 효신을 노려보다 운전석 옆에 내려놨던 핸드백에서 태블릿 PC를 꺼낸다
휙휙 넘겨 뭔가를 찾아낸 라헬은 볼륨 버튼을 눌러 조절하더니 효신에게 들이민다
"이거,"
느릿한 피아노 음이 차 안에 울려퍼진다
음악에 한번, 그리고 예상치 못한 영상에 한번 효신의 눈썹이 꿈틀한다
"이거,"
라헬은 다시 한번 같은 단어를 꺼내다, 버거운 듯 숨을 삼킨다
"나죠"
라헬의 질문 아닌 질문에 그때껏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효신의 표정이 사라진다
굳어진 얼굴을 확인한 라헬은 답을 얻어냈다는 성취감 대신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약한 기대가, 유리벽처럼 힘없이 무너지는 걸 느낀다
"재미있었어요?"
스스로의 말이 심장을 찌른다
"내가 우스웠나요?"
딱딱하게 굳은 효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내가 이렇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선배 멋대로 써버리면 그만이예요?
날 짐작해서 선배 이야기에 써도 좋다고, 누가 허락했어요? 선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예요? 누구 마음대로..."
마구 쏟아내던 라헬은 순간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것에 말을 멈춘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는 효신에게 화가 치밀어오른다
답답한 마음에 눈을 감고 겨우 긴 숨을 내쉰 라헬은 낮게 중얼, 거린다
"어떻게.. 날 이용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건,"
라헬의 말에 효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가 절망한 듯 감긴 라헬의 눈을 보고 천천히 도로 거둬들인다
"... 어떻게 해줄까."
한참동안 차 안의 공기를 짓누른 침묵을 깨고 마침내 효신이 묻는다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참느라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던 라헬은 그제야 눈을 뜬다
라헬과 눈을 마주친 효신이 체념한 듯 살며시 웃는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여유롭고 침착하기만 하던 효신의 이런 얼굴은 처음이라
어쩌면 이런 것이 자신이 바랬던 결과일지도 모르는데도, 라헬은 순간 참담해진다
"... 우습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효신은 조심스럽게 징검다리 건너듯 천천히 말을 고른다
"이용,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효신의 말을 따라 물살을 건너던 라헬은 비틀,한다
이 물살에 휘몰려 떠내려갈 것만 같다
"그러니까 말해봐, 뭐든"
저 차분한 눈동자가 씁쓸하게 웃는다
그 눈을 마주하고서야, 뭐든 말해보라는 말을 듣고나자
라헬은 그제야 자신은 그저 화가 났다는 걸, 아니 내내 화가 나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효신에게서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은 인정이 아니라 변명이었는데,
그래서 스스로의 자존심에게 영상을 핑계 대고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찾아왔는데
한마디 변명도 없이, 그는 쉽게 무엇을 대가로 원하느냐고 묻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분노가 차갑게 라헬을 덮친다
대답 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숨을 삼키는 라헬에게 효신이 다시 한번 묻는다
"뭐든, 말해봐.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뭐든."
효신은 문득 생각난 듯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아, 금전적인 배상은 어렵겠지만, 보시다시피"
보란 듯이 빈티지라면 초빈티지한 야상 점퍼를 쓸어보이는 효신을
웃지도 눈을 떼지도 않고 빤히 보던 라헬의 한쪽 입매가 심술궂게 비틀어진다
"돈은 됐어요, 그런 건 나도 이미 차고 넘치니까"
그렇다면? 하고 묻는 대신 눈썹을 치켜올린 효신의 얼굴에 의구심이 어린다
라헬은 잠깐 침묵하면서 속으로 셈을 고른다
"시간,"
"응?"
"시간을 줘요,"
처음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효신의 얼굴을 보며
라헬은 차가운 미소를 띄며 절대적으로 유리한 거래에 뛰어든 것처럼 조건을 제시한다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선배의 시간을 내주면, 생각해볼게요 그걸로 될지 어떨지"
라헬의 말에 효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시선을 떨구고 크게 몇번인가 차 안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쉬기를 반복한다
아주 긴 숨을 마지막으로 내쉰 효신은 고개를 들어 라헬을 바라본다
공기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처럼 천천히 가득 숨을 들이 마시며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 차분한 눈이 똑바로 마주해온다
순간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 라헬은 오기로 더 뚫어져라 그 눈을 바라본다
잠시 머물러있던 시선이 스윽,하고 빠르게 라헬을 훑어본다
꼭 다문 입술이 달싹,하고 흔들린다
"... Now -- for a breath I tarry, nor yet disperse apart --"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 아닌,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 낮지만 또렷하게 들려온다
순간 당황한 라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말을 잃은 것처럼 망설인다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돌리는데도 효신은 끈질기게 라헬의 말을 기다린다
정말은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는 게 정확할게다
수없이 오갔던 편지의 아마도 세번째나 다섯번째쯤으로 효신이 좋아했던 이야기라며 추천했던 소설에 인용되었던 시였다
추천의 이유는 창조론과 세계관의 흥미로운 변주. 논술에 인용하면 신선할거야 가산점이 있을지도. 였고
실제로도 신화와 과학, 철학이 뒤섞인 짧은 소설은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꽤 긴 편지가 둘 사이에 오고갔더랬다
손 같은 건 없던 컴퓨터 프로스트가 컴퓨터인 베타에게 최초의 인간으로서 손을 내밀며 건넨 문장.
손이 없는 베타가 최초의 인간인 프로스트에게 응답했던 문장.
"... Take my hand quick and tell me, what have you in your heart"
한참을 망설이던 라헬은 멈칫거리며 다음 문장을 암송한다
처음 더듬거리는 듯 했던 문장이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효신은 눈에 띄지 않게 슬몃 미소짓는다
"Speak now, and I will answer; How shall I help you, say;"
다음 문장을 암송한 효신은 아주 미세하게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 해보인다
"... Ere to the wind's twelve quarters, I take my endless way."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라헬은 마지막 문단을 완성한다
대체 갑작스런 시 암송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에 라헬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씹는다
"Your pole is cold,"
"... 외롭지 않아요. 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효신이 결심한 듯 다음 말을 내뱉자 라헬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앉으며 고개를 흔든다
"자꾸,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아직 대답 안했어요"
단호한 어조와 달리 흔들리는 라헬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신이 해야하는 답을 라헬에게서 구하는 듯 침묵하며 헤매던 효신은 이내 눈을 아래로 내리깐다
무심히 아래로 향한 시선이 불안하게 기어 스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라헬의 손에 가닿는다
어둑한 실내등이 오히려 밖에서 비쳐드는 가로등 빛에 힘을 잃은 차 안에서
홀로 하얗게 빛나는 흰 살결을 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라헬의 손 끝을 들어올린다
살며시 제 쪽으로 라헬의 손을 끌어당긴 효신은 손 등에 가볍게 입맞춘다
"...!"
부드럽게 닿는 감각에 저절로 눈이 커진다
라헬은 그저 걸쳐있다시피한 손을 미처 뺄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천천히 고개를 든 효신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라헬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 여전히 라헬의 손을 가볍게 쥔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낮고 우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As you wish, Your Highness"
============================
등장한 소설은 로저 젤라즈니의 "For a breath I tarry"(한국 번역은 프로스트와 베타)
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슈롭서의 젊은이 라는 연작시의 일부인데 이부분은 상당히 로맨틱하다고 느꼈어.. SF면서-_-
아, 원래 마지막 부분은 "Your pole is cold, and I am lonely" (너의 극은 춥고, 나는 외로워) 인데
라헬은 lonely 라는 말이 싫어서 제대로 답하지 않은 거.. 라는 설정.. 시의 전문은 숨김글 뒤에... 나름의 번역을 붙여놓을게
Your Highness 는 공주나 왕자를 높여서 지칭하는 말로, 번역하자면 - '그대의 뜻대로(따르겠습니다), 전하' 정도
조금 길고.. 어수선하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봐주길 바래...
기다려주고 댓글 달아준 냔들 고마워
+
덜컥, 덜컥
몇번인가 둔탁한 금속 긁히는 소리가 난 뒤 겨우 힘겹게 열쇠가 돌아간다
오래되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서 왼손으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른다
피빗 피빗 하며 두어번 꺼질 듯 말듯 깜박인 후에야 전등 불이 들어온다
불이 켜지자 그제야 사람 두셋이 누울만한 좁은 방이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 가방과 장비를 담은 또다른 가방이 방 한켠에 쌓여있고
그 옆에 컴퓨터에 관련된 선 몇 개와 노트와 스케치북, 필기구가 놓인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있다
오른쪽 벽 구석에는 두뼘도 안되어보이는 행거에 티셔츠와 셔츠, 바지 몇벌이 걸려있다
행거 아래쪽으로는 바구니 대용으로 보이는 용지 상자 두 개와 트렁크 가방 하나가 놓여있다
그 옆에 가지런히 개어놓은 이불과 베개 위에 메고 있던 백팩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맥북을 꺼내 일단 책상 위에 놓고 전원을 연결한다
그제야 잠깐 숨을 몰아쉬며 돌아볼 것도 없는 방안을 낯설게 둘러본 효신은
입고 있던 야상 점퍼를 벗어 빈 옷걸이에 걸고
점퍼 주머니의 박하사탕이니 동전 같은 자질구레한 것을 집어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는다
현관이랄 것도 없는 공간 옆에 붙은 화장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새삼 확 밀어든다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면서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물을 받아 얼른 씻는다
마지막 헹굼물 즈음에야 겨우 물이 따뜻해진다
효신은 마지막으로 신고 있던 양말을 간단히 빨아 널어놓고 방으로 돌아온다
수건으로 슥슥 얼굴을 닦고 그대로 바닥에 털썩 앉는다
어쩐지 온 몸이 꼭꼭 뭉쳐버린 것 같아서 몇번인가 몸을 비틀어 스트레칭을 한다
거의 운동중독이라 할만한 수준으로 운동을 했던 때도 있었지만
최근엔 바쁘기도 했고 겨울이라 몸이 둔하기도 해서 통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시작하는게 어렵지 운동을 그만두는 건 한순간이라던데 더 몸이 굳기전에 운동을 다시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책상 앞으로 끌어당겨 앉는다
맥북을 켜고 쓰다만 시나리오를 불러온다
이미 완성한지는 한참 된 대본이지만 어쩐지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번이나 다시 고쳐쓰고 있는 중이었다
탁탁탁 페이지 다운 키를 눌러 처음부터 주욱 훑어내리던 효신의 눈동자가 순간 초점을 잃는다
눈으로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동자는 조금 전의 시간 속을 헤맨다
손 끝에 아직 부드러운 감각이 남아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향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 향은 분명, 자신의 기억 속의 그것.
날카로운 목소리와 대조되는 그 감싸안는 내음이 자꾸만 진실이 어느 쪽인지 헷갈리게 했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 상처와 떨림을 구분하기엔 조명이 너무 어두웠다
'내가 우스웠나요?'
차가운 말이 다시 떠올라 고개를 젓고 만다
짧은 한숨을 내쉰 효신은 시나리오를 끄고 폴더를 하나 불러낸다
제목 대신 1, 2, 3 하는 번호만 기재된 영상들 중 하나를 클릭한다
영상이 재생되고 까만 화면에 글씨가 떠올랐다 빛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렷하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
조금 전 라헬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영상과 음악 모두 좀 더 깨끗하고 선명하다
느릿한 피아노 선율을 따라 천천히 카메라가 움직인다
평화로운 영상 안의 그녀와 달리, 그러나 효신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 날 이용할 수 있어요'
효신은 마치 세게 머리를 가격이라도 당한 듯이 눈을 찌푸린다
어떻게 저를 이용했다고 생각한 걸까
세상의 어느 누가 감히 유라헬을.
효신은 부드럽게 곡선이 흐르는 화면 속 소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드러나지 않은 가시들이 겹쳐보인다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은 얼마나 낮은지
이렇게 부드러운 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가시는 얼마나 뾰족하게 솟아 있는지
오늘 자신을 향해 들이댔던 그 가시를 포함해서.
라헬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소녀였다
에스컬레이터 식에 가까웠던 제국재단의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라헬이 어떤 아이란 것을
그저 소문으로 듣고 오다가다 짧게 얽히는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그게 라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는 진짜 모습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모두가 질풍노도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리석고 사악하고 미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에 이르러서였다
고집이 세고 그만큼이나 호기심이 넘쳐서 동그란 눈을 크게 뜨던, 꺄르르 발랄하게 웃던 소녀가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숨죽이고 있을 뿐이란 것을,
그 소녀가 생명력을 얻기엔 소녀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얼음성 안에 스스로를 가둬둘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효신은 경험으로 이내 알아차렸다
그것은 상상력과 호기심이 풍부했던 어린 소년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금지에 서서히 짓눌려가던 과정과 닮아 있었다
모두에게 적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자신이 먼저 규칙을 어기고 손을 내밀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마주친 그녀는 그저 잠이 안와서, 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파리했으니까
자신이 그런 영혼이 파리했던 순간 무엇을 지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저,
기꺼이 필요가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필요할 때 나타나주지 않은 그 누군가를 똑 닮은 이 아이에게 해주리라 라고
그 어두운 시간을 지나는 라헬에게 적어도 길잡이 노릇이라도 좋다고
평생을 쓸모있는 아들이자 친구이자 선배로 살아온 효신에게 누군가의 필요가 되는 일은 존재의 의미에 가까웠다
누군가의 필요에 응해주는 것에 도가 텄다고 해야할 수준이었으니 라헬에게 또한 어쩌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가기 시작한 편지 사이에서 조금씩 효신이 눈치챘던 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문장은 차갑고 시니컬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때때로 예상치 못한 풍부한 감성이 넘쳐 흘렀다
또한 라헬은 좋은 학생이기도 했다
지나가듯 한 말도 잊지 않았고 꼭 어딘가 비틀린 솔직하지 못한 말이었지만자신의 생각을 써서 보내곤 했다
효신은 라헬의 제국고 전교 2등 다운 놀라운 습득력과 비틀린 듯 보이는 시각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필요에 응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견을 주고 받는 파트너로서, 라헬은 상당히 훌륭했고, 또 발전했다
지루한 군 생활 동안 라헬과의 편지 덕분에 효신은 지적 수준을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 애썼고
또한 자신의 지식과 취향을 더 많이 공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매우 즐거웠다 그 시간들은.
그러나 즐거워도 한편으로 이 편지가 언제까지나 계속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유럽에서 유학을 시작한 라헬의 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주 이상하다,라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단어가 등장했지만 대개 그런 말이 수식하고 있는 사건들은 라헬에게 낯설고 신기한 일들이었다
라헬이 새로운 곳에 대해 이상하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게 될 무렵
효신은 더이상 라헬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미묘하게 제대와 맞물린 시점.이었던 건 우연이었다.
도망치듯 군대에 왔고,
도망쳐서 유학길에 올랐다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진,
공부와 작업과 아르바이트의 연속에 찌들어살면서 그건 그저 좋았던 때의 기억으로 남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유학 생활에 적응한 것처럼 보였던 라헬 또한 자신처럼 이내 잊었으리라 생각했다
편지로만,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채로 겨우 2년 - 그저 그렇게 두면 서로 사그라들게 될 관계였으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한국에 돌아가야한다는 중압감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라헬의 이미지가 함께 커졌다
내내 좇기고 고통스러운 이미지의 작업들만 해와서인지 부드러운 미풍처럼 두둥실 떠오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지금 보고 있는 이 영상의 쏟아져내리는 빛처럼
효신은 가만히 소녀의 뒷모습을 본다
서서히 카메라가 소녀를 향해 다가간다
이제 곧 어떻게 시선이 흔들리고 빛이 겹쳐질 거라는 걸 먼저 안다
서서히 볼륨이 높아지는 음악까지 효신은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정작 현장에는 음악도, 목소리도, 글씨도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요구받은 여배우는 촬영 내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했고
조명과 촬영 전반을 도와주었던 효신의 동료 또한 그러했다
꽤나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효신이 졸업작품으로 내놓은 이 연작을 본 교수들의 표정도 불가능한 퍼즐을 마주한 듯 했다
Lee는 무슨 생각인가 또는 Woo는 무슨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인가,
효신은 작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라헬이 질책한 대로 라헬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유학 시절, 자신에게 자욱을 남긴 모든 기억과 의미를 끌어내 작업했지만 맹세코, 라헬과의 어떤 부분도 작품에 인용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그것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여배우와, 촬영 동료와, 교수들을 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효신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애썼지만
효신은 결국 적절한 설명을 해낼 수 없었다
이제 영상은 거의 막바지이다
주욱 뒤로 물러난 카메라가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마치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서서히 피아노 소리가 고조되고, 등장하는 의도된 소음
"Ray"
효신은 낮은 음성이 등장하기 직전 나직이 중얼거린다
마치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소녀가 돌아보고 두 팔 벌려 빛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지듯 녹아버린다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 라헬보다 라헬이 이 연작을 발견했다는 걸 안 효신이 더 놀랐을 것이다
'이거 나죠' 라고 묻는 라헬에 머뭇거렸던 건,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 소녀는 그러니까, 효신을 그 즈음 덮쳐왔던 라헬의 이미지 중 일부였다
이 연작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된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의미를 설명하지도 공개하지도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효신은 적어도 이 프로젝트를 공개한 적도 그럴 계획도 없었다
졸업 작품 직전 찍었던 영화가 페낭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졸업 심사에 줄다리기 하던 교수들은 진심으로 - 학교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 졸업 작품을 수상작으로 대체할 것을 종용했지만
효신은 끝내 이 작품을 졸업작으로 제출할 것을 고집했다
이건 효신이 처음으로 작업한 '감정'을 담은 프로젝트였으므로.
어떻게 라헬이 이 영상을 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라헬이 그걸 발견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라헬은 읽어내지 못한 '감정'이 들킨 것 마냥 효신은 얼굴이 붉어졌다
피아노의 연주가 끝나고 까만 화면에 자신의 이름이 떠오르는 걸 보면서
효신은 다시 한 번 거의 들리지 않게 되뇌인다
"Ray"
++
인용된,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For a breath I tarry)의 마지막 장면 -
"'From far, from eve and morning and yon twelve-winded sky, the stuff of life to knit blew hither: here am I.'"
"I know it," said Beta.
"What is next, then?"
"'...Now--for a breath I tarry nor yet disperse apart--take my hand quick and tell me, what have you in your heart.'"
"Your Pole is cold," said Frost, "and I am lonely."
"I have no hands," said Beta.
"Would you like a couple?"
"Yes, I would."
"Then come to me in Bright Defile," he said, "where Judgment Day is not a thing that can be delayed for overlong."
They called him Frost. They called her Beta.
"멀고 먼, 황혼과 여명 그리고 저 하늘 너머 열두 방향의 바람이 불어와, 생명의 실오라기들로 나를 엮어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베타가 말했다.
"그럼, 말해 봐."
"어서- 이 숨결이 머물러 아직 흩어지지 않는 동안- 내 손을 그러잡고 말해다오. 그대 마음 속에 품은 것들을."
"너의 극은 춥고" 프로스트가 말했다. "나는 외로워."
"저는 손이 없습니다."
"가지고 싶어?"
"네. 기꺼이."
"그렇다면 브라이트 디파일로 와줘." 그가 말했다. "심판의 날이 너무 오래 미뤄질 수 없는 곳으로."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그들은 그녀를 베타라 불렀다.
+++
그리고 시의 전문,
A Shropshire Lad - XXXII
by A.E. Housman
From far, from eve and morning
And yon twelve-winded sky,
The stuff of life to knit me
Blew hither: here am I.
Now-- for a breath I tarry
Nor yet disperse apart--
Take my hand quick and tell me,
What have you in your heart.
Speak now, and I will answer;
How shall I help you, say;
Ere to the wind's twelve quarters
I take my endless way.
머나먼 곳에서, 밤과 아침과
열두 방향의 바람이 이는 천공 너머로부터
나를 자아낸 생명의 요소가
여기로 불어와, 여기 내가 있노라.
이제-- 내 숨결이 머물러
아직 흩어지지는 않을 동안--
어서 내 손을 그러잡고 말해다오,
그대 마음 속에 품은 것들을.
이제 말하면, 나 대답하리
그대 위해 내가 할 일을, 일러주오;
바람의 열 두 방향으로
내가 끝없는 길을 떠나기 전에.
| | 와- 로맨틱하다. 외롭지 않다고 했지만, 라헬인 늘, 쭈욱- 외로웠었고... 아직도 외롭구나. | .88 | |
|
| | 우오 씐난야 냔이가 왔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도 벌써 다음편은 언제나오나 이생각 ㅠㅠㅠㅠㅠ 냔아 시골 안가지? 연휴때 출석해야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85 | |
|
| | 어어 좋다ㅜㅜㅜㅜㅜ 둘은 서로를 이해할수 있는 소울메이트 느낌이라 좋더라ㅜㅜ 담엔 언제 오니ㅜ | .115 | |
|
| | 라헬이가 그간 많이 외로웠던게 보이는거같아 ㅠㅠㅠㅠ | .209 | |
|
| | 너의 극은 춥고, 나는 외로워. 어 좋다 ㅠㅠ sf면서 로맨틱하다니.... | .140 | |
|
| |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 | .154 | |
|
| | 둘이 정말 좋아 ㅠㅠ 다음 이야기 진행이 궁금하다~ㅎㅎ | .69 | |
|
| | 둘을 정말 좋아하긴 하는데 라헬이가 외로웠던게 느껴져서 효신이가 야속하다.. 문장을 읽을 때 주도권도 뺏기고 ㅠㅠㅠㅠ | .174 | |
|
| | 으아아 얘네는 분위기가 진짜 치명적이다 치명치명해.. 클래식 듣는 기분도 들고 빗소리 듣는 기분도 들고 검은 성 같다. 그 안에 공주랑 기사같애 공주랑 왕자일 수도 있고.. | .102 | |
|
| | 글 분위기 너무 좋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239 | |
|
| | 라헬이 너무 외로웠나봐ㅠㅠㅠㅠㅠㅠ 둘이 좋다ㅠㅠㅠㅠ | .75 | |
|
| | 글분위기가 너무 좋아. 시도 너무 잘어울려ㅠㅠㅠ | .207 | |
|
| | 라헬이가 끌리네. 화가 나 버렸어. 말 안해주는 거 싫어. ㅠㅠㅠㅠㅠㅠㅠ | .83 | |
|
| | 로저 젤라즈니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 | .254 | |
|
| | "As you wish, Your Highness" .... | .61 | |
|
| | 시를 잃어주는 연인은 항상 로맨틱하네... | .184 | |
|
| | 으아아아ㅜㅜㅜㅜ 효신선배ㅜㅜ 로맨틱하다 진짜ㅜㅜ | .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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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라니ㅠㅠㅠㅠㅜ로맨틱한 커플이야ㅠㅠㅠ효신선배 사랑하요 능력도있고 로맨틱 다정해 | .8 | |
|
| | 진짜 효신이 진짜 라헬이ㅠㅠ 긴장검 쩔어ㅜㅠ 제발 행쇼하길 둘이서ㅠㅜㅠㅠ | .84 | |
|
| | 효신이랑 라헬이ㅜㅜ저둘사이의 분위기가 좋다ㅜㅜ | .1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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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진짜 라헬이 짝은 효신이 같아.. 효신이 짝은 라헬이 아니어도 되지만, 라헬이 짝은 꼭 효신이 같은 남자여야만 할 것 같아... | .2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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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헐 대박........너 천재다.... | .108 | |
|
| | And I am lonely....냔이는 작가인가요 | .82 | |
|
| | As you wish, Your Highness..이부분..나도 찌르르 했어..ㅠㅠㅠㅠ | .1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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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으아.ㅠ 분위기가 아찔하면서 몽환적인게 너므 좋아 ㅠ | .1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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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와ㅠㅠㅠㅠㅠ 이런 분위기 너무 좋아 ㅠㅠㅠ |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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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와 숨도 못쉬고 읽었어!!! 아 완젼 좋군!!!! | .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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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아......냔이의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하아ㅠ | .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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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행하는 중... 냔이 글 진짜 좋다ㅠㅜㅜㅜ | .1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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