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자들][라헬x효신] IRON MASK.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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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 - "Close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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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t le temps que tu a perdu pour ta rose qui fait ta rose si import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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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적한 거리 끝에서 달려온 자동차가 쌩하고 지나간다
효신은 자동차 소리에 슬쩍 고개를 빼고 돌아보다 그저 지나가는 걸 확인하고 이내 무관심하게 고개를 떨군다
사거리의 명품관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 중간쯤의 거리는 아마도 북적이고 있을 백화점과 달리 한갓지다
차도 사람도 통 다니지 않는 거리에 무료하게 서 있다가 문득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다
자신이 일찍 도착했을 뿐이다
언제나 붐비는 서울 시내에 사오분 쯤 늦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저 그녀는 여느 때처럼 약속 시간에 맞춰 조금 늦거나 빠르게 도착할 수 있게 나왔을 것이고
이 한적한 거리를 향하는 길 위 어디엔가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 입고 있던 점퍼의 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헤집는다
역시나 손에 걸리는 건 담배 대신 바스락거리는 비닐
무심히 동그란 사탕을 꺼내 비닐 껍질은 벗기고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화아 - 하는 박하향이 입 안에 퍼진다
도록도록 사탕을 입 속에서 굴리면서 힐끔 뒤쪽을 돌아본다
눈에 들어온 위압적인 외관의 빌딩은 창문 하나 없이 온통 흰 대리석 재질의 파사드 형태로 정면을 대신하고
아마도 아래 쪽에 가느다란 선처럼 보이는 틈 사이로 안쪽으로 들어가게 설계된 듯하다
매끈하고 흰 외관에 까맣게 직선으로 그어진 틈, 그리고 건물 꼭대기에 작게 영문으로 그려진 로고가 알아달라는 듯 박혀있다
이 건물만이 아니다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건물이 앞다투어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특별하다는 듯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이런 건물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는 용건이 없다
건물에서 건물로 샵에서 샵으로 이동하기 위한 짧은 거리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재빠르게 그림자 같은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한때는 효신도 저 세계에 속해있었다
저 건물들의 숨기듯 드러나있는 문양들, 또는 그 문양이 대변하고 있는 브랜드는 소속된 세계를 알려주는 표지였다
효신이 속해있던 그 세계의 모두가 그러하듯이 효신도 아주 어릴 때부터 저 문들을 드나들었다
기억을 하는 그때부터 저 위압적인 문을 통과해서 저를 '도련님', 어머니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제 몸을 맡겨 제작한 제복에 가까운 정장을 입었다
체형이 채 갖춰지기 전, 취향이라는 것이 확립되기 전부터 수트는 당연히 주어진 옷이었다
몸가짐과 핏은 수트가 몸에 익숙해져야 나오는 것이므로, 되도록 어릴 적부터 몸의 일부분처럼 되도록 해야한다는 교육 방침때문이었다
그런 옷들은 어린아이의 취향이나 운동량, 같은 건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므로 효신은 언제나 옷에 맞는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효신이 취해야하는 태도와 달성해야하는 목표가 달라졌다
그러니 그건 그저 옷만이 아니라 행동을 규제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취향이라는 건 주어진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
좋아해서가 아니라 알아야만 하는 어떤 기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가,가 '계급'을 결정짓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취향 또한 결국 '돈'으로 구매해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에서는 '돈'으로 계급을 결정짓는 것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아니 그 시절에도 효신은 도무지,
돈으로 취향을 사는 것과 돈으로 계급을 사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취향 중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날,
그리고 자신의 것이 아닌 취향,이 자신을 규정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효신은 그날부터 조심스럽게 자신의 '취향'을 차곡히 쌓아가며 성밖으로의 탈출을 준비했다
어쩌면 자신의 부모는 -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
아들이 세계의 부조리를 깨닫고 그 너머로 탈출할만큼 충분히 영민하고 용감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런 명민함과 판단력을 물려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거라고 때로 효신은 자조하곤 했다
무심하게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계를 휙 둘러본 효신은 문득 고개를 든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아래 나뭇가지에 맺힌 연두빛 이파리가 쨍하고 비친 햇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한번쯤 더 올 것 같다지만 그래도 봄 기운이 완연하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아직 채 다 돋아나지 않은 새순을 흔들고 지나간다
손을 들어 뺨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다
크게 들이마신 숨에 매연이 가득할 공기에서 어쩐지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효신의 머릿속에 문득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저 건물에서 건물로 차에서 또다시 건물로 다닐 뿐, 하루종일 하늘 같은 건 올려다볼 틈도 없을
세상에 봄이 와도 여전히 겨울인 자신의 성 안에 살고 있는 차가운 눈의 여왕은
얼어붙은 눈을 하고 주변을 얼려버릴 듯이 서늘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지만
그 얼음장벽 너머의 일곱이나 열셋이나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때로 무방비하게 처연해지곤 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매번 목도하고 마는 효신은 그때마다 순식간에 그녀가 도로 갑옷을 휘감는 변화를 모른 척 하곤 했다
섣불리 그 벽을 두드렸다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 없을까봐, 두렵다.
두렵다.
효신은 비어 있는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저 푹 눌러쓴 모자 아래 시선을 감춘다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백팩을 걸쳐메고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서있는 효신의 앞에
날렵한 검은 표범같은 외관의 스포츠카가 마치 지나칠 것처럼 쌩하고 달려와서는 급정거한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효신을 향한 조수석 차창이 스륵 소리없이 내려간다
열린 차창 사이로 무표정하게 저를 응시하는 운전자를 확인하고서야 효신의 굳은 얼굴이 풀린다
그 변화를 본 운전석의 라헬은 오히려 황당한 듯 얼굴이 굳는다
"빚 있어요? 아니면 어디 잡혀갈 짓 저질렀어요?"
스스럼없이 조수석에 올라탄 효신이 버릇처럼 안전벨트를 끌어당기는 걸 보던 라헬이 의구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응?"
"아니면 왜 매번 그렇게 놀라요?"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우다 말고 효신이 멈칫한다
라헬은 이거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효신을 만나러 가던 날 가져갔던 검은 벤틀리 세단, 주로 출퇴근, 업무용으로 쓰는 붉은 색 벤츠 SUV,
기분 전환용으로 가끔 운전하곤 하는 노란 비틀,에 오늘 가지고 나온 이 검정 마세라티 스포츠카까지.
효신은 차가 바뀔 때마다 매번 저렇게 놀랐다가 저인 것을 확인하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미심쩍게 저를 보고있는 라헬에게 바로 대답하는 대신 효신은 피식 웃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벨트를 채우기 위해 슬쩍 안전벨트 클립 쪽으로 시선을 떨군다
"유라헬이 이런 취향일 줄은 몰랐거든"
"... 취향이 뭐요"
"뭐랄까... 까만 스포츠카라고 하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척 하던 효신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꼬리를 스윽 올린다
"금욕적인 섹시함이라고 해야하나"
제법 심각하게 대답하는 효신의 말에 라헬의 뺨이 괜히 확 달아오른다
침묵하는 라헬의 당황을 읽은 효신의 눈이 반짝,하고 장난스럽게 빛난다
"뭐, 그런 것도 난 좋지만."
어중간한 효신의 말에 당황한 듯 잠깐 입술을 깨문 라헬은 퉁명스럽게 효신의 옷을 가리킨다
"난 별로예요 선배 취향"
"내 취향이 어때서"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아닌데?"
괜한 라헬의 지적에 효신은 어깨를 으쓱한다
조금 과장된 제스쳐에 라헬은 도로 유심히 효신의 차림을 살피고 만다
물빠진 옅은 그레이 청바지에 컨버스, 차이나 칼라의 옅은 하늘색 셔츠 그리고 카키색 야상 점퍼, 언제나 푹 눌러쓴 채인 챙 깊은 모자
이보라는 듯이 낮은 셔츠 깃을 붙들어보이는 효신의 손을 지나 시선을 떨군다
"그거 지난번에도, 그 전에도 입었잖아요"
라헬은 못마땅하게 점퍼를 가리킨다
"아아, 이건 뭐"
"그건 뭐요"
"점퍼는 이거 하나뿐인 걸, 그리고 이게 작업할 때 편하기도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말에 라헬의 미간이 꿈틀,하고 비틀린다
"그래도 빨래해서 다려입고 나오는 건데, 별로야?"
별로,라기 보다는 낯설다 - 이효신,이라는 인물과 빨래, 다림질이라는 단어의 부조화라니.
효신의 스타일을 기억하고 있는 라헬로서는 다시 만난 효신의 모습에 영 적응이 되지않는 게 사실이었다
언제나 목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에 어깨에서 손목까지 정확하게 떨어지는 자켓,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마치 온전히 갖춘 수트를 입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몸가짐,
그야말로 온갖 어리석음과 순진한 죄악이 넘쳐나는 제국고의 조용한 지배자다운 품격과
'그' 최영도조차 함부로 어떻게 하지 못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그게 라헬이 기억하고 있는 효신의 겉모습이었다
효신의 군입대 이후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그런 모습 이면에 다른 얼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이렇게나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새삼 깨닫게 될 때면 낯설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 이상해요"
물끄러미 저를 보다 중얼,하는 라헬에게 효신은 다시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이상하기만 한 거면 됐고"
".. 아니면요?"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 안 부끄러워하잖아요 본인은"
"응, 나는"
효신은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뺨을 건드린다
"하지만 이거, 내 벌칙이잖아? 그러니 네가 부끄러우면 안 되는 거니까"
동의를 구하는 말에 어쩐지 마음 한 쪽이 움찔한다
라헬은 눈을 아래로 향하며 약하게 고개를 흔들어보인다
"그럼, 됐어"
다정한 말에 효신을 슬쩍 올려다본다
부드럽게 저를 건너보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자신이 부끄럽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효신이 '부끄러워'하기를 바라는 심술에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적어도 효신이 '지겹다'라고 생각하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길 바랬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았던 모든 남자들 - 김탄을 포함해서 -이 지겨워하고 싫어했던 곳,
그러니까 온갖 명품샵들과 백화점과 편집샵들에 효신을 데리고 갔던 건
자신에게 내어준 효신의 시간이 가장 무의미하고 지겹길 바라는 심술이었다
그런데 효신은 예상과 달리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김탄과 같은 저와 같은 세계의 남자들은 지겨워했고,
라헬의 돈과 지위를 보고 접근했던 다른 세계의 남자들은 그저 들어서기만 해도 주눅이 들었던 그 화려한 공간에서
효신은 마치 날 때부터 그런 곳에 드나든 사람처럼 태연했고
라헬이 집어들었다가 놓는 모든 물건을 세상에서 처음 본 사람처럼 흥미로워했다
그런 효신을 샵의 사람들은 오히려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혼란스러워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알만한 사람만 아는 명품으로 치장한 라헬과 달리
좋게 말해서 빈티지, 그러니까 RS인터내셔널의 서브브랜드 중 하나인 RS Man Blue 레이블의 화보에나 등장할 것같은
결코 명품으로 보이지 않는 캐주얼한 차림의 효신은, 물론 저런 룩의 코디네이션으로야 상당히 멋스럽다고 해야겠지만,
라헬과도, 그런 호화스러운 공간과도 조금도 어울려보이지 않았다
처음 라헬과 샵을 들어설 때마다 번번이 효신은 문 앞에서 우회적으로 가로막혔고
그때마다 라헬은 일일이 자신의 동행임을 밝혀야만 했지만
효신은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하는 대신 오히려 이 상황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아.. 네..'
당연히 라헬의 운전기사이거나 짐꾼이거나 집사일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태연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라헬에게 내온 샴페인을 우아하게 집어드는 효신을 보고 당황했다
그러니까 꼭 길거리 어디에서나 있을 듯한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면서도
명품관 전체, 아니 그 거리 전체의 소유주라고 해도 믿길만큼 당당한 태도에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때로 들려왔고
특히나 거리낌없이 라헬에게 반말을 하면서 일일이 코멘트를 하는 효신과 또 그 말을 순순히 듣고 있는 라헬을 보면서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지만 효신은 그다지 관심없다는 듯 태연했다
자연스러운 효신과 부자연스러운 직원이나 힐끔거리는 손님들의 태도는 마치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 같았고
라헬이 언제나 조금 못마땅하게 여겼던 제 세계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 같은 통쾌함에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탈의실에서 배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없이 웃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효신의 차림이 부끄럽다,라고 생각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이 자유로움 때문에 즐거웠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하는 생각에 시선을 든다
분명, 벌칙.이라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겨웠으면 어쩌지? 라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사실 불편해하고 당황해하는 건 라헬과 주변 사람들이었고 정작 효신의 얼굴은 라헬의 눈에 띄는 한 늘 그대로였다
얼굴 빛이 변했던 건 심술궂게 데려갔던 속옷가게 앞에서 뿐이었고,
언제나 지금처럼 모자를 깊이 눌러쓰거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지금도 입 속에서 굴리고 있는 저 사탕을 물고서 라헬이 이끄는대로 따라왔다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몇시간 씩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도
정작 효신의 얼굴에 지쳤다던가 지겹다던가 하는 기색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정말 즐거웠을까?
사실은 지겨웠는데 티를 내지 않은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이효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저 미소가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동시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이러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빤히 저를 주시하는 라헬을 보던 효신은 고개를 갸우뚱하다 싱긋 웃는다
라헬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가 무슨 마음으로 시간을 내 달라고 했고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고 다니는 건지
하나도 모르면서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미소는
아주 오래 전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또다시
순식간에 라헬을 무너뜨려버린다
"... 그 모자, 꼭 써야해요?"
한참을 침묵 속에 그저 효신을 바라보던 라헬은 성대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던 말 대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효신의 눈을 그늘지게 하는 모자를 가리킨다
라헬의 말에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효신은 깊게 눌러쓴 챙 끝을 만지작한다
"무슨 도피중인 범죄자도 아니고"
"그정도는"
"그정도예요"
언제 흔들렸냐는 듯 단칼에 말을 끊어버린다
묘하게 딱딱한 어조에 효신은 오히려 슬몃 웃는다
"됐어?"
가볍게 모자를 벗은 효신은 손가락으로 몇번 머리를 슥슥 빗어 흐트러트리고는 한번 보라는 듯이 얼굴을 슬쩍 들이민다
라헬은 꼭 가까워진 그만큼 멈칫 뒤로 물러난다
그런 라헬의 반사적인 행동에 저도 모르게 효신은 후.하고 미세하게 눈으로만 웃는다
".. 뭐 그럭저럭이요"
두근했던 심장을 무시하면서 라헬은 무심히 대답하며 시선을 돌린다
아무렇지 않게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려고 브레이크를 내린다
그저 한번 더 손을 스윽 머리를 쓸어올린 효신은 의자에 기대앉아 묻는다
"어디를 가는데 오늘은"
먼저 행선지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언제나 라헬이 시간과 만날 장소를 통보하고, 효신을 픽업해서 새로운 곳으로 가곤 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습관처럼 묻는 무덤덤한 효신을 힐끗 보고 라헬을 속으로 심술궂게 웃는다
오늘은, 조금 다른 반응이기를.
"가면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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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할 정도로 가득 아이스크림을 떠올린 티스푼을 입으로 가져간다
차갑고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입 속의 맛을 음미하느라 저절로 눈이 스륵하고 감긴다
".. 맛.. 있어요?"
황당해하는 표정이 눈 앞에 그려질 듯 명확하게 툭하고 꼬리가 떨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만족스럽게 감고 있던 눈을 뜬다
입 안에 가득한 단 맛을 스윽 훑으면서 고개를 끄덕한다
"응, 먹어볼래?"
"... 아뇨, 전 됐어요"
새침하게 한 손을 들어 거절하고 그대로 앞에 놓인 커피잔을 집어드는 라헬을
의미심장하게 보던 효신이 이내 알겠다는 듯 싱긋 웃는다
"살 좀 쪄도 될 거 같은데, 난"
"네?"
"다이어트 같은 거 안해도 될 거 같다고, 너 충분히 말랐으니까"
저절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깜빡이던 라헬은 이내 뭔가 깨달은 것처럼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도 애써 태연하게 시선을 돌리며 부정한다
"무.. 슨 말인지 대체"
"좋아하잖아 단 거, 초콜렛이랑 마카롱, 아, 파르페도"
효신은 태연하게 천천히 디저트 종류를 손으로 꼽는다
접히는 손가락 개수가 늘어날수록 라헬의 뺨이 유심히 보아야 알 수 있을만큼만 홍조를 띈다
도자기 인형처럼 창백하게 굳은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인다
"... 좋아한 적 없어요 그런 거"
끝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한다
창피할 일이 아닌데도 확신에 찬 효신의 목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쪼그라든다
들킨 것 같은 생각에 사실이라고 해도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 그럴 리가"
한쪽 눈썹이 슬쩍 올린 효신이 중얼거린다
탐색하는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라헬은 모르는 척 내려놓았던 커피잔을 다시 든다
효신도 앞에 놓인 파르페 위쪽의 아이스크림을 수저로 작게 떠서 입에 넣는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는 듯 잠깐 입술을 혀끝으로 닦아내고는
어느새 딱 적당한 온도로 식은 커피를 홀짝이는 라헬의 눈치를 살피다가
흐음,하고 슬며시 턱을 괴더니 책장을 뒤적이듯이 눈동자를 몇번 까닥인다
"'너무 맛있는 게 많아서 고민이예요, 특히나 디저트들은 시험에 들게 만들어요
라뒤레의 마카롱은 샹젤리제를 지날 때마다 지나칠 수가 없는데 그게 가장 맛없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쇼콜라티에는 어찌나 많은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요'"
"선배!"
한 손에 티스푼을 든 채 어중간하게 라헬 너머의 허공을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언젠가 자신이 보냈던 편지의 한구절을 암송하는 걸 들은 라헬이
평상심을 잃고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입을 막아버릴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효신을 제지한다
"... 라고 했던 거, 기억하는데 분명.. 내 기억이 틀린 거야?"
그제야 먼 산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붉어진 라헬의 얼굴을 본다
동의를 구하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까닥,하는 효신의 제스쳐에 라헬은 말을 잃고 입을 다문다
단 걸 좋아하잖아,라는 건 넘겨 짚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은 언제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문장을 저렇게 확신에 차 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묵묵부답으로 꼭 벌받는 사람처럼 커피잔만 어색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라헬을 보던 효신은
얼마 후 그저 피식 웃으면서 도로 앞에 놓인 파르페에 꽂힌 빨대를 집어 차가운 음료를 빨아들인다
음료 빨아들이는 소리에 움찔한 라헬은 그제야 어색하게 효신을 건너본다
"... 선배 취향은 아니잖아요"
"응?"
"... 이런 거 선배 취향 아니었잖아요?"
작게 항변하는 라헬의 말에 효신은 수저를 문 채 어눌하게 되묻는다
"내 취향이 뭔데?"
낭랑 십팔세에 이미 발자국 소리와 홍삼향만으로 뒤에 서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내내 몸에 좋은 보양식들만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마치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하는 게 못마땅하다
"... 홍삼같은 거, 몸에 좋은 것만 먹었잖아요 선배"
딱딱한 라헬의 대답에 효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건 고삼 때 체력 비축하느라 먹은 거고, 취향은 아니었지"
"하여간 좀 올드한거잖아요"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 박하사탕만 해도"
"아아 이거?"
테이블 아래를 가리키는 라헬의 손가락 끝을 보고 효신이 주섬주섬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박하사탕을 꺼낸다
그거 보라는 듯 고개짓으로 까닥하자 싱긋 웃더니 슬쩍 라헬 쪽으로 밀어놓는다
"이건 담배 끊느라 먹은거고, 나 단 거 좋아하는데"
"... 거짓말 말아요"
"어어..? 왜 안 믿어? 나 진짜 좋아하게 됐다니까"
싱글싱글 웃으면서 쥐고 있던 티스푼을 허공에 휙휙 저어보이는 효신을 보고 라헬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쭉,거린다
이효신과 단 거.라니
대체 어디까지 제 예상을 깨야 진짜 이효신에 닿았다고 하려는 건지.
산 중턱에 훤히 시내가 펼쳐져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서
제일 전망이 좋을 만한 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주문을 할 때부터 뭔가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여자애들이 꺄악꺄악,거리며 좋아할 법한,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에
단 것만 잔뜩 팔아서 인기가 높지만 남자의 비율이라고는 1% 남짓인 카페에서라면
한번쯤은 멈칫거리거나 어색해하면서 주변 눈치를 보거나 할 줄 알았는데
조금도 어색해하거나 당황해하지 않을 정도로 강심장일줄은, 또는 그런 취향일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태연하게 이제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떠올리는 효신의 모습에 라헬은 저절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다
"보통은, 싫어하지 않아요?"
정말로 궁금해하는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효신은 스푼을 입에 문 채 역시나 라헬을 따라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뭐가, 보통은 싫은데?"
"쇼핑하는 것도, 단 것도, 이런 카페도. 보통은 남자들 싫어하잖요?"
잔뜩 진지해진 라헬의 어조에 효신도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저렇게 단정지어서 말하는 이유가 짐작이 될 듯도 해서 슬몃 웃음이 날 것 같은 걸 꾹 눌러참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난 재미있는데, 아.. 나 이거 벌칙이니까 싫었어야 하는 거지?"
생글생글 넉살좋게 웃어보이는 모습에 라헬은 표정을 잃어버린다
낯설다.
이 말을 몇번이나 더 떠올리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만난 효신은 순간 순간 자신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는 걸 확인해야할만큼 낯설었다
다시 만난 효신은 효신 같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대학에 떨어지자 마자 집에서 강제로 입대를 시켰고 거기서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제대 후 삼수 끝에 대학에 진학,
믿을 수 없지만 현재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는 그 조명수의 고등학교 시절 같았다
자신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지만 명수의 해맑아서 더 잔혹한 입담과 일탈 행동에 대해서는
라헬도 소문으로 들어서, 그리고 영도와 함께 해야했던 몇몇 자리에서 이미 확인했던 바였다
그래서 최근의 조명수를 소위 상속자들 모임에서 가끔 만나게 되면 과묵하게 입다문 모습이 참 낯설었더랬다
그런데, 그 조명수의 과다 발랄했던 기운이 몽땅 효신에게 오고, 효신의 기운이 조명수에게 가기라도 한 걸까.
잊고 지낸 이름을 갑작스럽게 떠올리고 한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희박한 가능성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고 만다
".. 대체... 뭘 하고 지낸 거예요?"
"알고 있잖아"
날 찾아냈을 정도면.
이라는 생략된 말을 읽은 라헬은 입을 다문다
효신의 말대로 사라진 동안의 효신이 어떤 궤적을 따라 이동했고 그 와중에 어떤 작업을 했으며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분명 현재 가장 정확하고 자세히 알고 있는 건, 분명 효신이 말한대로 집요하게 효신을 추적했고, 본인에게 확인도 한 라헬일테지만
그건 그저 위키피디아에나 정리해서 올릴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대체 효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사라진 동안의 효신은 어떻게 변한건지, 왜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었는지
라헬은 아무래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저 웃는 얼굴이 높디높은 철옹성 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효신,이라는 행성의 자기장 바깥쪽에서만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
저 구름 너머의 진실이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라헬은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 정말 이게 다 재미있어요?"
"응"
"... 설마, 연구 자료예요?"
"음... 그렇다기보다는.."
내내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라헬의 시선에 오히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그때껏 파르페를 공략하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아 빈 두 팔로 팔짱을 끼고는 생각을 정리한다
"... 신기해"
"....?"
"뭐랄까.. 완전히 달라, 아아 여자들은 이렇구나, 싶달까. 그동안 본 적 없는 세계니까. 나야 순 남자애들이랑만 구르면서 살았잖아."
"... 주변에 늘 여자애들이 넘쳐나서 이보나가 일일이 커트했던 거, 아니었어요?"
"그 누구가 일일이 커트해주는 바람에 근방 10m 내에 여자가 있었던 적이 없을걸 아마.
만날 찬영이만 찾는 이보나 외에 내 주변에 있었던 여자, 이름 대봐?"
"...."
"결국 기다려줄 여자도 없었는데 뭘, 여자 형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하는 효신을 라헬은 묵묵히 바라본다
입술을 꼭 다문 라헬을 슬쩍 곁눈질한 효신은 기대앉았던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울여 턱을 괸다
"하여간, 난 전혀 벌칙 같은 거 아니야, 어쩌냐"
장난스럽게 싱글거리는 얼굴을 마주하자 강렬한 욕망이 갑작스레 온 몸을 휘감는다
갖고 싶어.
라헬은 머리 속에 떠오른 문장을 인지하고 멈칫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가장 갖고 싶어했던 것은 늘 손에 쥐지 못했다
어느샌가 정말 갖고 싶어,라고 생각한 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욕망을 품는 것조차 멀리 했다
욕심을 내는 순간, 그게 진심이 되는 순간 늘 잃어버렸으니까
그저 평범한 가정도, 아빠도, 김탄도.
차라리 욕심내지 않았다면 계속 무심히 둘 수 있던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자신이 욕심을 내는 순간 떠나보내야만 했었다
지금 어설프게 떠오른 이 욕망을 인정하는 순간 또다시 단념해야할지도 모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헬을 알아챈 효신은 아이스크림을 가득 뜬 스푼을 입에 문 채 입꼬리만 올려 싱긋 웃는다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에 라헬은 안도하면서 동시에 그런 제 마음에 당황한다
복잡하게 변하는 라헬의 표정을 의아하게 관찰하던 효신은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그 미묘한 변화에 라헬의 마음이 함께 흔들린다
왜?
라고 묻는 듯한 저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게 자신일지 궁금해진다
타인의 상냥함에 기대는 것이 결국 어떤 상처로 남게 되는지, 라헬은 잘 알고 있다
그저 거절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친절에 라헬은 꽤 오래 어둠 속을 걸어야만 했다
손끝까지 신경이 곤두서서 때때로 평정을 잃어야만했던 그 고독의 시간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건
지금, 저를 물끄러미 건너 보고 있는 저 눈동자 때문이었다
상냥하고 무심한 길잡이.
어둠 속의 작은 불빛.
그 습관적인 친절을 오해한거라면,
그래서 섣불리 갖겠다고 나서면
자신은 거의 유일했던 가이드마저 잃게 된다
라헬은 망설이며 숨을 고르다, 겨우 정말 묻고 싶었던 말로부터 두단계쯤 떨어진 질문을 한다
"힘들지 않다고 했죠 이거"
"응? 아아, 지금까지의 얘기라면, 그래."
"... 왜 이렇게까지 해요?"
"... 응?"
"모르는 척 해도 그만이었잖아요. 내 억지 같은 건"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이 억지였다.고 정의하는 시니컬한 고백에 효신의 눈동자가 다닥 흔들린다
라헬의 시선이 그 움직임에 필사적으로 따라붙는다
한적한 카페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서면서 열린 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간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새 아이스크림은 조금 더 형체를 잃는다
"글쎄, 왜 일까"
효신은 조금 난감한 듯 중얼거린다
머뭇거리는 습관적인 미소에도 라헬은 대답을 요구하듯 입을 꾹 다문 채 바라보기만 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냔 말이지."
효신은 다시 중얼거린다
더이상 미소도 난감한 빛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만난 이후 가장 진지해진 얼굴로 몇번인가 테이블 아래 무릎을 톡톡 내려치던 효신은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며 침묵한다
한참 기다리던 라헬은 온몸과 공기마저 굳어버린 것 같은 착각에 간단히 손을 들어 커피잔을 집어든다
이미 차가워진 커피를 한모금 흘려문다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흐른다
문득 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아 살짝 몸이 떨린다
그런 라헬에게 마침내 효신이 낮은 목소리로 낯선 언어를 읊조린다
"'Je suis responsable de ma rose'(나는 내 장미에 책임이 있어)"
커피잔을 내려놓던 라헬의 손이 멈칫한다
저절로 머릿 속에 공간이 펼쳐진다
익숙한 책장, 시선은 칸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중앙의 세번째 칸 한쪽 켠에 꽂혀있던 책이 촤라락 하고 펼쳐진다
순식간에 넘어가는 페이지 사이에서 라헬은 단번에 저 문장을 찾아낸다
아주 어릴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그저 '교양'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을 뿐이다
한참 머리가 굵어지던 때에는 내심 순진한 생각이라며 비웃었다
세계는 그런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관계나 길들이기,같은 것이 어떻게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까
어쩌면 돈,
어쩌면 권력,
어쩌면 의무
그 이야기에서는 부정되고 있는 것들이 라헬의 세계를 움직였다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가치를 결정짓는 것.
이미 존재해버렸다면 최선을 다해서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야한다.라고 - 생각했다. 말했다. 세계는 라헬에게 설득했다
그래서 장미덩쿨의 장미들에게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린왕자에게 막연한 적대감마저 품었다
그렇게 순진한 소리, 가지지 못한 자의 망상,으로 치부해버렸던 그 이야기를 다시 집어들었던 건
그것마저도 저 목소리의 주인 때문.
관계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당연하다는 듯 편지에 인용했다
그리고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 라헬은,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세계는 그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그 순진한 믿음을 심어준 장본인은,
한 줄의 문장으로 대답을 다한 자신의 말에 확신을 더하려는 듯 조금 고개를 끄덕인다
책임.
책임.
당신이 정말로 내게 책임이 있다면,
리헬은 어렵게 숨을 삼킨다
아직도 팔랑이고 있는 머릿 속 책장을 앞으로 넘긴다
앞으로
또 다시 앞으로
그리고 마침내, 찾고 있던 그 장면에 다다른다
"'Tu seras loin, toi. Quant aux grosses betes, je ne crains rien. J'ai mes griffes'
(당신은 멀리 있을 거잖아. 짐승들은 무섭지 않아. 난 가시가 있으니까)"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가 마치 자신의 말인 것처럼 내뱉는 문장에 효신의 눈썹이 꿈틀하고 불안정하게 뒤틀린다
얼굴의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 그러나 한 켠에 내내 남아있던 여유마저 휘발된 것처럼 흩어진다
사막 한가운데 뜨거운 태양 아래 오래 서 있던 흙벽처럼 부스럭하고 흩어지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갑작스레 오랫동안 버려진 성벽처럼 황폐해진 효신의 변화에 속으로 놀라면서도 라헬은 애써 도전적으로 시선을 마주친다
순식간에 세계가 진공 상태에 돌입이라도 한 것처럼 멈춰버렸던 공기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그려진 인물마냥 딱딱했던 눈매가 천천히 공기 중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라헬이 마주하고 있는 그 눈꼬리가 스륵 가라앉고, 주위를 감싼 공기마냥 서서히 물기를 머금는 듯 무거워진다
슬퍼진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은 그 변화에 라헬은 슬퍼졌다
아니 그 얼굴은 무표정한데도 슬퍼보였다
책임같은 거 필요없어.
도망치려면 지금. 가버려.
라고 기회를 준 건데,
그 말을 들은 효신은 상처를 입거나 도망치는 대신 연민에 찬 시선을 바라본다
탄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해졌을 때도, 스스로 연민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어서 화가 났을 때도
정작 자신의 뒤에서 그 마음을 알아챘던 효신은 결코 자신을 연민하듯 바라보진 않았다
들켰지만 들키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오히려 인정해줬다
그래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이효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라헬은 뾰족한 가시가 잔뜩 달렸던 그 말을 도로 거두고 싶어진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라헬을 바라보던 효신은 뭔가 발견한 것처럼 조금 어깨를 움츠린다
중력에 끌린 것처럼 효신의 입이 열린다
"'Le jour de quarante-trois fois tu etais donc tellement triste?'(노을을 마흔세번 본 날, 넌 그토록 슬펐던 거니?)"
물기를 머금은 것 같은 축축한 공기 속으로 메마른 목소리가 순식간에 흡수된다
모래처럼 까끌하게 심장을 긁고 지나가는 그 말에 라헬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조금만 더 긁히면 덮어놓았던 생채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은 위기감에 무의식중에 두 팔을 감싸안는다
제 팔을 감는 손의 감촉에 번뜩 테이블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든다
이미 다 알아차린 것 같은 효신은 그저 조금 전처럼 슬프다
라헬은 짧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이 물기 젖은 공기에 지지 않기 위해 열렸던 빗장을 겨우 끌어닫는다
감싸안고 있던 팔을 풀고 자연스럽게 내리고 허리를 곧게 세운다
늘 그랬던,
당당한 여왕 같은
오만한 눈빛이, 반짝하고 돌아온다
"Tu sais, on peut voir le soleil se coucher une fois par jour"
어느새 도로 닫혀버린 라헬의 문을 확인하고
효신에게도 속을 읽을 수 없는 넘치는 여유가 덧씌워진다
무거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가벼워진다
"불어, 능숙하네"
"일, 해야하니까요. 선배야말로"
"나야 겨우 외운 정도인거고"
태어날 때부터 패션 기업의 상속자였으니 비즈니스에 필요한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기본으로 익혔고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프랑스어에는 좀더 능숙해졌을 뿐이다
그 세계에서 라헬이 특이한 건 아니었다
효신 또한 분명 어릴 때부터 가능한 모든 언어를 포함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피차 간에 마찬가지인 상황이면서 굳이 칭찬하는 말에 라헬은 조금 긴장이 풀린다
못마땅한 듯 고개를 까딱하면서 소파 뒤로 기대는 라헬의 풀린 모습을 보면서
효신은 슬쩍 미소지으며 버릇대로 늘 있던 모자 챙을 만지작거리려다가 대신 가만히 이마를 긁적한다
"유라헬"
아무래도 차가워진 커피를 더 마실 순 없겠다 싶어서 종업원을 부르려고 우아하게 한 손을 들어올리는 라헬의 이름을 무심하게 부른다
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서비스 정신 없는 종업원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난 라헬이 웃지 않고 돌아본다
"이번 주말에 시간 내줄래?"
갑작스런 말에 라헬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한다
"이번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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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주고 있을까.
매일 조금씩, 한 문장, 한 문단. 그렇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아서. 처음 쓰려고 했던 감정대로인지. 자신이 없지만. 느리게 나마 끝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