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rs - h&r/iron mask

[상속자들][효신x라헬] IRON MASK. 8-2

april_m 2014. 5. 23. 02:07








고요한 밤이었다 


검푸르게 짙어진 어둠의 천정에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알 수 없는 반짝이는 존재 몇 개와 
아직 보름이 되기엔 한참 남은 하얀 달이 떠 있는 하늘은 이미 태양이 지배하는 낮부터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도시의 어둠으로 소실되어 사라지는 골목의 끝을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마침내 시원하다 못해 얇은 겉옷을 입어야만 하는 서늘한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 차 안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람 한 점 없는 후텁지근한 여름밤이 몰려왔다 
서성이던 발길은 이내 제 방향을 찾아나섰다 

익숙하지 않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동안 차 안에서 걸치고 있던 얇은 자켓은 이미 벗어들었다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호흡을 고르는 제 숨소리 외에 다른 인기척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일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마치 지옥문을 열기 직전, 레테의 강을 건너기 직전, 그 어떤 선을 범하기 직전의 긴장감.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직전, 세계는 소란스레 참견하는 대신 바로 이 순간처럼 숨죽여 그 선택의 순간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겨우 계단을 다 올라선 발걸음은 그제야 머뭇거린다 


손을 내밀고 

그저 이 손잡이를 잡고 

잡아당겨 여는 것만으로 충분히 


여기까지 찾아온 수고와 찾아내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그 자태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 어떤 회유와 압박에도 결국 열리지 않은 그 입 속에 단단히 갖혀있는 비밀이. 
유라헬과 김탄이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그 비밀이 지니고 있는 이름을. 

지나친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소한 핑계가 거대한 한 발짝을 가로막는다 




수상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탄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스스로 쟁취하는 편을 택했을 라헬이 먼저 뭔가를 요구한다는 건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고 
그 요구가 탄,과 관련이 있다는 건 차라리 놀라운 기적에 가까웠다 
더이상의 설명은 거부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손을 내민, 일견 다급해보이기까지 했던 라헬에게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초조함, 
절박함, 

그러니까 자신들이 처음 가족으로 묶일 뻔 했던 그 언젠가, 
이 결혼을 막을 방법이 없느냐고 신경질적으로 요구했던 그 순간, 
최악의 순간이 금새라도 다가올까 두려워하고 있던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태도 
싸가지 없고 저보다 더 안하무인이라는 소문 속에 숨은 유라헬이라는 '인간'을 제대로 마주했던 순간 
그때 위악을 떨고 있는 자신만큼이나 자기 방어에 너무 능숙해져버린 또다른 아이를 발견했더랬다 

그때와 같이 초조해하는 소녀를 다시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서 '오빠 믿지?'를 거듭할 수 없어 때로 아쉬웠던 그 '시스터'를 다시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다 
우쭈쭈하는 기분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라헬이 요구하는 대로 탄의 연락처를 내주고 잊어버렸다 

그러나 역시 지금에 와 돌이켜보니 수상했던 건 그때부터였다 


오히려 플랜비의 실행을 요구한 그날의 라헬은 차분했다 
큰 눈에 일렁이던 불안은 사라지고 확신만이 남아있었다 
플랜비를 꺼내야할 정도의 절박한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고요함이었다 
그게 헷갈리게 했다 


플랜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전'은 자신이 초조함에 사로잡혀있던 시절 농담처럼 라헬에게 제안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한 계획이었다 

모두가 알만큼 떠들썩한 스캔들, 위장 약혼 혹은 위장 결혼, 그리고 격렬하고 센세이셔널한 파경. 
이후로 누구도 감히 결혼상대자로 자신을 고려하거나 스캔들로 누구를 엮거나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낙인을 스스로에게 찍기 위한 연극. 

'인간' '최영도'였다면 선택의 자유였을지 모르나 '제우스 그룹의 CEO'인 최영도에게는 
사회적으로나 사업파트너로서의 신뢰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사랑'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런던과 파리, 주로 유럽을 무대로 모델 활동을 하고 있던 자신의 연인과 
필연적으로 복잡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겨우 시작했지만, 
이 관계가 언제든지 종료될 수 있으며, 만약 대중에 공개될 경우 감당해야할 결과에 대해 
매일 바짝 치고 들어오는 불안을 숨길 수 없었다 
그 불안에 안그래도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던 관계는 조금씩 서툴게 삐걱였다 
몇번이나 닥쳤던 파국이 단 한발 앞으로 다가왔을 때마다 연인에게 달려가 한번 더 붙들었던 영도에게 
둘의 장소와 알리바이를 제공해주었던 것이, 라헬이었다 

'거래'라는 명목으로 못박기는 했지만 처음 이 관계를 털어놓았을 때 
라헬은 잠시 놀란 듯 눈이 커졌을 뿐 금새 대수롭지 않으 말을 들은 것처럼 평소의 무표정으로 복귀했다 
미쳤냐, 던가 다시 생각해보라,던가 하는 당연히 들을 거라고 각오한 질책의 말은 없었다 
자질구레한 사정 같은 건 모두 귀찮다는 듯 고개를 꺾으며 물었을 뿐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있을 건데' 


자신이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때 라헬의 협조 덕분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어째서 라헬에게 털어놓을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만큼 절박했던지도.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눈으로부터 도망치기만도 버거웠던 그즈음이었다 
라헬에게 농담인 것처럼 플랜비에 대해 말을 꺼냈지만 언젠가는 정말로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방패가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한다면 라헬만큼 좋은 상대는 없었다 
감정적으로도 비즈니스적으로도 그랬다 
그 스캔들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추문은, 당연히, 자신이 모두 뒤집어쓸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그리고 조금이라도 라헬의 명예에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생각이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보상을 해야한다면 차라리 그 상대도 라헬인 편이 낫다는 계산이었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조건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미리 조심하고 잘하란 말이야 괜히 조용히 있는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빈정거리는 어조 뒤에는 염려가 숨겨져있었다 
그 마음을 읽었기에 다시 그 계획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라헬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동질감을 느낀 대상이었다 
뾰족하게 날선 성격, 가감없이 드러나는 소유욕과 승부욕, 감춰진 지독한 외로움, 약점을 위장하기 위한 공격성까지. 
아마 자신에게 진짜 여동생이 있었대도 이토록 닮아 있었을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쌍둥이 같은 내면의 그애가 자주 신경쓰였다 

'시스터'라고 부르며 엉길 때마다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매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굳이 지적하는 라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괴롭힘'에 가까웠을 제 관심표현을 내치지 않았다 
분명 미묘한 애정이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던 마음이 언제 지금처럼 미풍과 같은 잔잔한 친밀감의 형태를 띄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에 위태하게 걸렸다 싶은 순간이면 그 즉시로 반격에 당하는 것조차 어떤 때는 역시 유라헬이다 싶어, 실실 웃음이 나와서 
이젠 정말 동생 바보인 오빠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자신에게는 여전히 까칠했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자신의 연인과 있을 때 라헬은 종종 긴장이 풀린 듯 먼 곳을 보곤 했다 
첩첩이 쌓여있던 방패막이 순간 걷힌 그 깊은 심연은, 놀라울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때로 빈 분식집에 계속해서 되돌아가는 악몽에서 깨어나곤 하던 그 어느 날 밤 거울 속에서 본 그 눈 
언젠가 첫사랑으로 각인된 그 이름을 놓아주고 돌아선 그날 저녁 쇼윈도에 비친 그 눈 

깊은, 애정의, 대상을, 잃은 눈.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은 라헬이 자신이 만난 것과 같은 확고한 애정의 상대를 만나기를 무엇보다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견고한 애정이 한 인간의 결핍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것인지 자신은 홀로 알아버렸고 
그 충만을 자각할수록 저와 똑 닮은 외로운 그 아이가 걱정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저리 치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라헬을 '시스터'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혼자만 행복해진 것 같아서 우리 시스터는, 언제쯤 행복해질까 못내 마음 쓰였다 


아무리 거래와 빚이라는 형태로 못박긴 했지만, 라헬이 함부로 남을 위해 움직여주는 사람이 아닌 걸 아는 이상 
자신을 위해 미끼가 되어준 라헬을 위해 자신이 미끼가 되는 일 쯤은 거래의 댓가를 제시하지 않아도 기꺼이 할 생각이었다 
'플랜비'를 시동걸어야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면 그 어떤 조건을 걸지 않아도 먼저 나섰을 것이다 

그저 말만 했다면 
자신이 라헬에게 연인에 대해 털어놓았듯이 
그저 설명만 해주었다면. 



그러나 라헬은 조건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네가 먼저 말을 꺼낸 너도 원했던 일이 아니냐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다 

그래, 그 이유 같은 건 모르는 척 지나갔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라헬의 말대로 자신이 꼭 그 이유를 알아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만약 플랜비와 역시나 이유나 조건을 밝히지 않는 '탄의 연락처'가 연관되어 있다면 스케일이 달라졌다 
어쩌면 제국그룹과 RS 인터내셔널 간의 사업 차원의 문제일지도 몰랐고 
여전히 자신이 나서기엔 주제넘는다 할지 몰라도 만약 라헬이 필요한 도움은 플랜비,에 그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과 많이 닮은 라헬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태의 돌파구로 '플랜비'를 떠올렸다면, 
그랬다면 그 결론은 하나였다 
라헬에게 누군가 필사적으로 지켜야하는 상대가 생겼다는 의미. 
자신에게 자신의 연인이 그러했듯이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이 세계의 생리에 따라 환부 도려내듯 잘라내는 대신 스스로의 명예와 이름을 던져서까지 감춰야하는 누군가가. 


자신은 기꺼이 약점이 될 수 있는 연인을 공개했고 플랜비,라는 자신의 명예에도 흠집을 낼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데도 
결국 결정적인 이유에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라헬에게 조금은 섭섭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못 알아낼 것 같으냐,하는 오기도 오랜만에 느꼈다 
꽤 오래 그런 유치한 승부욕 같은 건 잠재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그저 잠들어있었을 뿐이었다 
도저히 상상은 잘 안되지만 만약 그 상대가 영 어설픈 놈이어서 마뜩찮다면 
'오빠'의 권리로 이런 위험을 감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골난 시스콤 오빠마냥 생각했다 


하도 자주 바뀌어서 그 가치가 현격히 하락한 소문 속 라헬의 상대들을 뒤좇으면서 
그 어이없는 염려는 강해지고 의욕은 저하되었다 
하나같이 도무지 라헬의 옆에 서기에는 모자란 녀석들 뿐이었고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어떻게 이런 소문이 퍼졌나 싶을 정도로 맥없이 관계의 흔적은 사라졌다 


하긴, 스스로를 숨기는데 철저한 라헬이 쉽게 '약점'을 들킬 리가 없지. 
라고 거의 체념을 할 무렵이었다 


바로 그 점이 자신이 간과한 영역이었다 
요즘 너무 평화롭게 살아서 전쟁에 임할 때의 원칙을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이만큼이나 거대하고 위험한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건 
이미 그 지켜야할 상대가 노출되었거나, 적어도 그에 상응한 위험에 처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비서가 은밀히 가져온 최근 라헬의 주변에 있었다는 인물들의 사진을 휙휙 넘기던 중에서 
거칠게 확대되어 윤곽이 희미하다못해 뭉개져있었지만 분명한 얼굴선과 입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이 분명한 
CCTV에 희미하게 찍힌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을 때, 

뭔가 그동안 찜찜했던 것들이 납득이 되면서도 동시에 혼란에 빠졌다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름이 맞다면 라헬의 상대라고 추정해볼 수 있었다 
그 이름의 인물이 맞다면 라헬에게 탄의 연락처가 필요했던 이유도, 어쩌면 탄의 빚탕감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 
어째서 플랜비라는 계획이 필요한 건지 
어째서 라헬이 그를 이토록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는 건지 

그 이유에는 도무지 가닿지 앟았다 
차라리 여자였다던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던가 유부남이었다던가 어린애였다면 납득하기 쉬웠을 
그 이유와 이 인물 간에는 아무래도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지난한 과정과 혼란과 정교한 덫을 지나 마침내 앞에 선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문 앞에 꽤 오래 망설인다 
자신이 놓은 덫이었고 지나칠 정도로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달했는데도 
그 결과를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이 순간, 오히려 망설인다 

이 상자를 열어도 되는 것인가 
이 비밀을 마주해도 되는 것인가 
대체 무엇이 있길래, 
자신의 주변에 남은 몇안되는 '사람'의 둘이나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는 걸까 

섭섭다, 해도 무방할 낯선 감정이 다시 훅, 끼쳐든다 


아마도 긴 노래를 두 번쯤 돌림으로 부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주먹을 천천히 쥐어든다 
이 거대한 사기극에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동참한 이상 그 끝을 알아내야겠다 
부속품처럼 쓰이는 건 '최영도' 답지 않으니까, 참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시스터'의 그늘에 숨어있는 그 존재의 가치도 마땅히 오빠로서 알아볼 의무가 있다 

스스로 납득하면서 괜히 한번 꾹 쥐어본 주먹을 높게 쳐든 영도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가차없이 문을 내려친다 



- 쾅, 쾅, 쾅, 쾅, 쾅 



리듬도 데시벨도 무시한 소음이 정적을 깨고 울려퍼진다 
사람이나 어떤 생명체도 들을 귀가 있다면 견디고 있기 어려울 정도의 큰 소리다 
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면서도 아무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분명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그새 증발해버린 걸까 싶은 생각이 막 들 때 쯤 
육중하게 영원히 닫혀있을 것만 같던 문이 벌컥, 열린다 


"그냥 부수지 그러냐, 수리비는 네가 내고" 


귀찮은 듯 투덜거리며 열린 문 사이로 등장한 주인공은 문 앞에 서있는 영도를 확인하고 그대로 멈춰버린다 
불이 켜진 방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드디어 얼굴을 확인한 영도는 아무 말 없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채 굳어버린 그를 내려다본다 

마침내 마주한 그 얼굴은 뭐랄까, 잔뜩 지치고 까칠해져있다 
먼 발치에서 탄과 함께 서 있는 얼굴을 확인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위태로운 분위기 
저에게 지나간 시간만큼 효신에게도 주어졌을 순간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효신에게서 순진한 앳된 인상을 가져가고 
대신 미처 드러나지 않고 봉인되어 있던 냉소적인 기운을 덧입혔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으면 어떻게든 변하는 것이 당연하고 스스로도 아마 그때로부터 수없이 변했을 텐데도 
효신만은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일 거라고 기대라도 한 것처럼 
예상치 못하게 변한 스스로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확인한 것 마냥 
지친 얼굴을 지켜볼수록 불쑥 치미는 묘한 배신감에 당황한다 


둘 사이를 흐르는 침묵 속에 당황한 듯 경직되어 있던 효신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꿈틀,하고 뒤틀린다 
잠깐 드러났던 당혹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잠시 드러났던 열기는 차갑게 식는다 
짧게 지나간 경계심까지 감춰버리는 무표정에 새삼 이제야 익숙한 이효신을 보았다는 생각에 왜인지 안도하면서 동시에 감탄한다 


어어! 


잠깐 딴 생각에 잠긴 새 도로 문을 닫으려고 끌어당기는 효신을 저지하며 
한 손으로 문 위쪽을 잡고 버티면서 오히려 약간 안쪽으로 몸을 들이민다 


"오랜만이네요" 


일부러 신경을 건드리기 위해 태평하게 던진 안부인사에도 더이상의 표정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또는 어째서 찾아왔는지 한번쯤은 물을 거라 생각했던 지극히 당연한 질문조차 꺼내지 않는다 
자신이 냉큼 붙들지 않았다면 닫아버렸을 문을 막아선 채 무표정과 침묵으로 명백한 거부의사를 전할 뿐이다 

영도는 효신의 어깨 너머로 슬쩍 방을 건너다본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살풍경한, 텅 비어있다시피한 방을 확인하는 순간 
아무래도 오늘 자신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저 공간에 발을 들여놓아야만 한다는 직감이 든다 


"화장실 좀 쓸게요, 선배" 


피차간에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니겠지만 서로의 유일한 접점을 언급하자 효신도 그 기억을 떠올렸는지 새삼 얼굴이 굳는다 
효신이 제 공간에 침범했던 공식적인 사건. 
아직도 그가 이 세계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변한 것처럼 보여도 당연히 세계의 기본 공식이 몸에 배여있을 것이다 


"괜찮죠?" 


아무렇지 않게 나른한 목소리로 묻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효신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 길을 내준다 
'신세'를 졌던 건에 대해서는 싫든 좋든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은 정확했다 
아직도 그는 자신과 같은 세계의 룰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추정도, 도박이었지만 틀림없었다 

이 상황을 애써 무시하고 싶은 듯 한발 물러서기만 했을 뿐 눈을 마주치지 않는 효신에게 
해맑게 한번 웃어주고는 정말 급한 것처럼 호들갑스런 제스처를 하면서 바로 앞에 보이는 욕실로 들어선다 
고개를 한 번 수그려야만 하는 작은 문을 통과하자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낡은 집 특유의 시큼한 물 냄새가 훅 하고 끼친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허름한 풍경에 아무리 각오했더라도 또다시 동공이 흔들린다 
멈칫 했던 영도는 제 뒤에서 저를 주시하는 시선을 느끼고 기계적으로 욕실 문을 닫는다 


마침내 혼자 남겨진 한평이 채 될까 말까한 공간을 다시 찬찬히 돌아본다 
이런 곳에 와본 것은 지금껏 단 두 번 뿐이었다 
아주 오래 전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던 은상의 어머니가 있던 그 좁고 어두운 방. 
그리고 한 번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던 연인을 찾아냈던 어느 지방 도시의 모텔. 
자신이 살아왔고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은 지구 위에 존재하는 거라고 믿기지 않았던 그 공간들과 비교해도 
더 텅비어 있다고 해야할 이 곳이 어째서 '이효신'이 머물고 있는 곳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논리적으로 납득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오히려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만다 
아니 이미 리스트에 올라있는 질문들은 이미 페이지를 넘길 정도로 충분했다 


처음 사진 속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으로 상대를 알아낼 수 있다는 착각은 금새 무너졌다 
마침내 찾아낸, 효신이 분명한 사진 속의 인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이름이 달랐다 
아니 이름만이 아니라 배경도 직업도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효신과 연결할 수 있는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드러난 정보조차 희미한 소문들 뿐이었다 

짙은 안개 속을 더듬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 
확인도 미확인도 아닌 희미한 존재감 
파편처럼 흩어져 덧붙여진 이미지들 

그것들을 모두 결합하면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괴물이 탄생해버렸다 
처음 글을 배운 사람마냥 서툴게 모은 정보들이 의미있는 이야기로 연결되지 못하고 소득없이 흩어지는 동안 
결국 플랜비는 실행 직전의 단계에 어느새 도달해있었고 영도는 거의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 와중에도 라헬은 거침없이 확신에 차 움직였고 이제 영도는 그저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만 여전히 궁금하고 불안했다 


그즈음에 다시 등장했다, 제국그룹의 이름이. 


소문일 뿐이었지만 사진 속 인물의 후원인이 제국그룹의 관계사라는 정보. 
두 번이나 등장한 이름을 무시해버릴 수 없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한번 건드려보자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효신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탄의 반응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올바른 과녁을 겨냥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탄이 명백히 알고 있는 효신의 소재를 모른 척 하는 것과 라헬의 비밀은 같은 배경을 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거대한 사기극의 이유는 그 이름의 주인 때문이라는 걸. 
그러니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 배후에 '이효신'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영도가 기억하는 효신은 분명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언제나 절제된 행동과 뛰어난 능력으로 학교를 지배했던,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조차도 원대한 의도가 있을 거라고 해석될만큼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모범생의 이면에 
불안정하게 들끓는 욕망이 숨겨져있다는 걸 처음 알아차린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누가 봐도 자신과는 정반대에 서 있었던 존재가 놀랍게도 자신과 같이 뒤틀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걸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억누르고 살 수 있는지 신기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글거림을 악의를 분출하는 것으로 겨우 발산했다면 
효신은 그런 불안정함조차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늘 평온하게 우아한 제스쳐를 취하는 그는 적어도 영도 앞, 아니 누구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시절 자신이 유독 효신의 질서를 흐트러트리려고 했던 건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당신도 나와 같지 않느냐,는 삐뚤어진 동질감과 유치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효신은 그 도발에 한번도 넘어오지 않았다 
어떤 말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차가운 눈이 인상적이었다 
차라리 효신이 화를 냈거나 선배나 학생회장이라는 권력으로 찍어누르려고 했다면, 
그래서 단단한 껍질이 무너지고 부글거리는 용암이 자신을 향해서 폭발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걸 굳이 확인해버렸다면 지금껏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인상적이었다고 한들 지나간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엔 
그 시절 이후 자신은 너무 바빴고 세계의 공격을 받아내기만도 허덕였다 
그러니 잊고 지낸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가 
대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침착한 효신의 표정을 떠올린 영도는 차가운 세면대를 붙잡고 그르렁한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심하잖아, 시스터' 


효신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 당황했던 건 왜 플랜비가 필요한 건지 납득할 수 없어서였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효신이라면 설사 약간의 반대가 등장할지언정 위험을 감수할 대상은 아니었다 
존재를, 이름 자체를 감춰야할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막상 눈으로 확인을 한 지금 이곳은... 

알고 있다 이런, 도망치는 사람의 공간. 
자신에게서 도망친 연인을 찾아낸 그것도 딱 이랬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긴장감, 불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이미 떠났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인간의 온기가 없는 방 
차라리 저항을 체념한 기운마저 읽힌다 

대체 이효신은 왜 이런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그 헛똑똑이 시스터는 이 상황을 어디까지 감당하려고 하는 걸까 

자신에게 라헬이 질책하거나 핀잔을 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영도는 끙,하는 신음소리를 낸다 


무엇보다 라헬이 이 모든 짐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신경쓰인다 
적어도 자신이 플랜비를 떠올리고 제안했을 때는 자신은 연인과 함께 있었다 
계속 '함께' 있기 위해, 그리고 그 위험을 '함께' 나누어지기 위해 떠올렸던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위험한 연극이 실행되고 있는 지금, 
당연히 라헬의 곁에 있어야 할 그는 홀로 세상에서 유리된 듯 숨어 있다 
효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 걸까 
이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인지 알고 있는걸까 
그녀가 자기자신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렇게 물러나있는 건가 
뭔가, 지나치게 책임감이 넘쳤던, 그래서 스스로의 소용돌이마저 억제하던 이효신 답지 않다 
긴 세월은 그에게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이효신을 완전히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영도는 일부러 콸콸 소리가 나게 세면대 물을 튼다 
푸더덕하는 큰 소리를 내며 손을 씻으면서도 머리 속은 아직도 복잡하다 
무엇을 확인해야할지 어떻게 물어야할지 이 상황을 인정해야할지 거부해야할지 
복잡한 계산을 하면서 여러번 다시 손을 씻은 영도는 무표정하게 벽에 걸린 수건으로 손을 닦고 마침내 욕실 문을 연다 


손님의 눈에 되도록 띄지 않는 것이 기본인 호텔에서 일하면서 몸에 배어버린 조심스런 동작으로 
인기척을 내지 않고 문을 열자 어느새 깨끗해진 방 한쪽에 꼿꼿이 앉아 
낮은 상 위에 올려진 PC 화면을 뚫어져라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효신의 옆모습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 손으로 현란하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손에서 언제나 책을 놓지 않았던 교복입은 효신의 모습이 문득 어른, 떠올라 겹쳐진다 
집중하느라 꽉 다문 입매가 그때와 같다 
기억 속의 익숙한 모습과 이 낯선 공간이 어울려보인다는 것이 이질적이다 
저 존재를 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고 해야할지, 
영도는 순간 공간이 겹쳐지는 SF 영화 속에 들어선 착각이 든다 
관심을 끌고 싶었던, 결코 고백할 수 없었지만 동경했던 '그' 이효신이다 

우습게도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조차 그때와 같이 그의 관심을 끌고 싶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큼," 


일부러 낸 헛기침 소리에 그제야 예민하게 돌아본다 
여전히 한 쪽 귀에 걸린 이어폰은 꽂은 채다 
영도를 올려보는 효신의 눈은 방 안에 놓인 몇 안되는 가구를 보는 것처럼 텅 비어있다 
여전히 냉랭한 그 눈빛이 왜인지 낯설다 생각한다 


아아, 

영도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끄덕,한다 
그때는 미세하게나마 드러나던 적의가 사라졌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저 눈은 완전한 무관심이다 

새삼스럽게 소리의 정체가 영도임을 확인한 효신은 무심히 시선을 돌린다 


"문은, 알겠지만, 저쪽이야"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순서를 완전히 뒤바꾼 종료 선언이 먼저 선수를 친다 
아직까지 머리 속으로 복잡하게 계산 중이던 영도는 담백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린다 
제 할 말만 다 하고 마치 이 방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뒷모습을 본다 
이미 다른 세계로 넘어가버린 듯 높이 쌓아올린 투명한 벽이 둘 사이의 좁은 공간마저 갈라놓는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잠시 효신을 골똘히 바라보던 영도는 체념한 듯 한 발 물러서서 
효신이 가리킨 방향의 손잡이를 향해 천천히 돌아선다 


어라? 


막 돌아서려던 영도는 미심쩍다는 듯 슬쩍 눈을 찡그린다 
손잡이를 잡으려다 말고 흘낏 뒤쪽을 돌아본다 
여전히 무표정한 옆모습과 멈춘 것 같은 굳은 어깨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마우스. 

마우스. 

위화감이 든다 
달칵거리는 클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휠은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지나치게 고요하다 
도록도록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손은 사실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고 
그래서 마치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PC의 화면은 
조금 전부터, 아무리 힐끔거리며 보아도, 멈춘 채 어떤 움직임도 없다 


'뭐야.. 그런거야?' 


영도는 속으로 훗하고 웃으며, 잡고 있던 손잡이를 일부러 소리나게 돌린다 
그리고 반쯤 문을 열고 다시 뒤돌아본다 


삐그덕하고 문 열리는 소리에 거의 눈에 띄지 않게 효신의 어깨가 긴장한다 
저절로 뭉쳐서 약간 솟아오른 어깨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기다린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정지,에 굳어있는 등이 흔들린다 
그럼에도 끝까지 돌아보거나 확인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티는 뒷모습에 체념,이 묻어난다 


"선배" 


기다리는 문 닫히는 소리 대신 낮은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목소리가 여.전.히. 생기발랄하다 느낀다 
그 어느 때 그랬듯이, 기억 속의, 능숙하게 휘감고 사라지는 목소리 
보지 않고도 지금 영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직감한 효신의 아직 돌아보지 않은 등이 보이지 않게 흔들린다 


영도가 화장실에서 요란한 소리를 일부러 내며 제 존재를 각인시키는 동안 
방에 홀로 남겨졌던 효신은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욕지기를 끝내 참아냈다 
딱히 별다른 것을 먹은 것도 아닌데 참을 수 없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어지는 그 충동은, 
저 안에 있는 영도에게 '신세'를 졌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압박이 원인일 것이다 


이제는 정말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체념이 휘감는다 

탄, 라헬, 그리고 이제 영도까지, 
아니 급기야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영도마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이제 누구라도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게 어떤 루트를 통해서였는지는 생각하기도 귀찮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버려가면서까지 존재를 숨기려고 했지만 조금도 소용없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제대 이후 자유로워졌다는 착각에 취해있다가 단박에 박살났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또다시 순진하게 세계가 제 편이라고 착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지쳤다. 
드디어, 한계다. 


더이상 이제는 실체조차 희미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계속해서 무엇인지도 모르는 위협에 놀라는 것도 
그래서 매번 숨막힐 듯이 긴장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이 세계가 자신에게 왜 이렇게 잔인한가는 이제 그만 생각하고 싶다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언제까지 도망쳐야하는지 그런 생각도 그만두고 싶다 

저 목소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질책하고 싶지도 않다 
제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갔으면 싶다 


세계 따위, 모르겠다 
의미 같은 거, 상관없다 


그저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껌껌한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싶을 뿐이다 
허락된 남은 시간이 얼마이든 가능하면 그저 홀로,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음에도, 
다만 지금 매달리고 있는 이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 
완성하겠다,고 혼자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저 그것만 할 수 있도록 나를 내버려두라고, 소리쳐 내쫓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면서 
효신은 방금 자신을 부른 그 목소리가 듣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는다 


꽤나 다정하게 불렀다고 생각하는데 그마저도 아예 무시해버리는 효신의 무관심한 뒷모습에 영도는 약간 심기가 불편해진다 
궁금해서 찾아온 것도 질문을 꺼내야하는 것도 자신이기는 하지만 설명을 해달라며 사정해야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미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가짜라는 걸, 그러니 그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는 걸 모르는 걸까 
제법 기대하고 있던 핑퐁 게임을 시작조차 하지 않겠다는 강한 거부만 느껴지는 뒷모습에 불쑥 승부욕이 솟는다 
틈이 보이지 않을 수록 공략하는 즐거움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언제나 한방 먹고 말았던 과거의 밀고 당기기도 흥미로웠지만 
이렇게 버티고 있는 상대를 끌어내는 것도 꽤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잠들어 있던 잔혹한 위악이 눈을 뜨고 오랜만에 짜릿한 느낌이 훑고 지나간다 

영도는 효신이 보지 않게 입꼬리를 올린다 
호텔의 대표로 익숙해진 곧은 등 대신 어깨가 한 쪽 내려앉고 한 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어 삐딱하게 선다 
번쩍,하고 눈빛이 형형하게 빛난다 


"선배" 


다시 한번 효신을 부른다 
효신은 한숨을 스륵 내쉬며 돌아본다 
영도는 일부러 입꼬리만 올려서 생긋 하고 웃는다 


"여긴 얼마쯤 해요? 전세? 월세? 자가?" 


빈정거리는 말투에 덤덤하게 영도를 바라보던 효신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적당해. 네가 사는 곳보다 비싸지는 않을거야" 


우회적인 도발에 넘어오지 않는 침착함과 끝에 굳이 찔러넣는 한마디. 
새삼 옛날 생각이 난다, 생각한 영도는 씨익,하고 웃는다 


"그럴 것 같긴 하네요" 


크게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영도의 능청스러운 태도를 올려다본 효신은 더이상 말하지 않고 도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한마디쯤 더할 수 있겠지만, 영도는 톡,하고 맺힌 말을 굳이 뱉지 않고 제자리에 선 채로 휙 돌아본다 
다시 둘러본들 뭐 그리 대단한 걸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새삼스럽게 발견할만한 물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까 효신의 어깨 너머로 건너다본 방에 흩어져있던 가방과 짐이 그새 가지런히 정리되어 놀라울 정도로 더 살풍경해졌을 뿐이다 
은상의 집에는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정도로 짐이 빡빡하게 들어차있었고 모텔에는 기본적으로 놓인 가구란 것이 있었지만 
이 방에는 인간이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짐만 보일 뿐이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이 살아갈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놀란다 

효신의 뒷모습에 머물렀던 시선은 한쪽 구석에 치워놓은 배낭에 삐죽튀어나온 흔적에 걸린다 
그려넣은 것처럼 각잡혀 정리된 방에 유일하게 흐트러진 물건, 
마치 급하게 버리려다가 결국 미뤄둔 것처럼. 

뭔가 마음에 탁,하고 걸린 영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린다 


저 종이. 
그러니까 신문. 

그러니까 


신문. 


애써 기억을 더듬는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게 어디에서 였냐면 
그게 



효신이 막 문을 열었을 때 어깨너머로 보았던 풍경을 겨우 되살려낸다 
그 짧은 순간, 별 것도 없던, 정리를 하건 하지 않건, 이미 텅 비어있던, 그 방 안에 

저 신문이 


펼쳐진 채 분명 바닥에. 


기억을 더듬어 겨우 그 신문에 다다른 영도는 
신문의 제호를 기억해내고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작게 내뱉는다 


눈에 걸렸던 이유가 있었다 
자꾸만 마음에 걸렸던 이유가 


여전히 무관심한 효신을 내버려둔 채 영도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검색한다 
휙, 휙, 페이지를 넘겨 방금 제 머리 속에 떠올랐던 그 사진을 찾아낸다 


일부러 흘린 기사였다 
의도적으로 찍힌 사진이었다 
그리고 


합의에 따라 오늘 아침에 난 기사를 보고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 섭섭하게스리, 지나치게 너랑 친해보여!라는 설명을 굳이 달아서 - 
라헬이 아침부터 투덜거리는 문자를 보내왔더랬다 
그게 분명 이 신문의 그 페이지였다 

그 페이지랄 것도 없다 사실 
그게 첫 페이지였으니까 

일부러 그렇게 의도된 기사였다 
절정 직전의 예열같은 수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못 들은 사람은 없도록 


영도는 이번에야말로 만족스럽게 소리없이 웃는다 
정말로 못 들은 사람은 없었던 거였다 
내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효신조차, 
그 소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니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방 안에 

결정적인 증거. 


"선배" 


영도는 다시 효신을 부른다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는 듯 귀찮음이 역력한 기색으로 올려다보는 효신을 아랑곳않고 
눈을 마주치자 나른하게 끝을 잡아당기며 묻는다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효신은 물끄러미 영도를 보다가 차갑게 입꼬리 한쪽만 살짝 올린다 


"별로, 궁금해야하나?" 
"이야, 섭섭하네요 나는 그래도 나름 반가운데" 


과장되게 양손을 위로 펼쳐보이며 난감한 제스쳐를 취하는 영도에게 
효신은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건조하게 대답한다 


"볼 일 없이 그렇게 계속 서 있을 작정이 아니라면, 가 봐" 
"... 볼 일.. 볼 일이라.. 내가 볼 일이 있긴 있죠 선배한테" 


영도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하면서 
연극적으로 일부러 들어올린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효신의 얼굴은 금새라도 한숨을 내쉴 듯이 조금 더 어두워진다 


"아직도 뭐가 더 남았나?" 
"아니, 뭐 남았다기보다는" 


냉랭한 말에도 굴하지 않고 영도는 천진하게 웃는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까요" 


묘하게 비틀린 어조에 효신의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한다 
자신의 도발에 반응하기 직전 늘 보여주던 그 미묘한 흔들림을 발견하고 영도는 입매로만 맘 편하게 웃어보인다 


"궁금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죠" 


덧붙인 말에 효신은 잠시 영도를 탐색하듯 지그시 보다가 흥미없다는 듯 고개 돌린다 


"네 궁금증은 스스로 해결해, 난 상관없으니까" 


귀찮은 듯 통보하며 도로 마우스를 집으려는 효신을 향해 고개를 크게 젓는다 


"아뇨, 선배도 분명 궁금할거예요, 예를 들어" 


성큼성큼 두세번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좁은 방을 단숨에 가로지른 영도는 
효신이 채 저지하기도 전에 가방에서 단숨에 구겨진 신문을 낚아채듯 꺼낸다 
급했는지 주인의 성격에 맞지 않게 각도가 흐트러진 채 대충 접힌 신문을 펴자 
세로로 길게 주름이 잡혀 있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페이지가 꼼꼼하게 숨겨져있다 
영도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저와 라헬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확인하고 의미심장하게 효신을 바라본다 
영도가 신문을 집어드는 순간 참담해진 효신의 얼굴은 시선을 느끼고 도로 가면을 쓴 듯 딱딱해진다 


"예를 들어, 이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냐, 라던가" 


싱글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효신의 단정한 입매가 불편하게 뒤틀린다 


주인공.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아예 눈을 감으면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누가 보아도 지금 신문을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는 스스로가 아니던가 

어떤 경로인지 모르지만 라헬과 자신이 만났다는 걸 알아낸 걸까 
그래서 굳이 지금 이 순간 그녀 옆에 누가 서 있는건지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걸까 

몇 년 만에 찾아와 괴롭히는 수단치고는 상당히 유치하다 
이런 도발에, 더더구나 상대가 영도라면 아주 작은 동요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미 놓아버린 꽃을, 굳이 네 것.이라고 인정해주고 싶지 않다 
빼앗겼다는 좌절도 알려줄 이유가 없다 

효신은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찍어누르며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미안하지만, 관심 없어" 


기대와 달리 깊이를 알 수 없이 가라앉은 심연을 마주한 영도의 눈가가 의심쩍은 듯 가느다랗게 주름진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여기에 무슨 결정적인 상품이라도 걸려있는 것처럼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저 말을 믿으라는 건가 

맞닿은 깊은 어둠 저 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틈을 치밀고 들어가려고 해도 아예 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블랙홀처럼 노력은 흡수되어 버린다 
서늘한 무표정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저 가장된 평정을 뒤흔들면 어떤 진실이 튀어나올까 
그때도 지금도 또다시 가면을 부숴버리고픈 욕망이 치민다 

가느다랗게 뜬 눈에 막 야수성이 스며들기 직전 영도는 고개를 기울이며 약간 시선을 비낀다 


"그래요? 의외네요, 나는 엄청 궁금한데" 


여전히 탐색하는 눈빛에 효신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역시 시선을 비껴 떨군다 
무겁게 잠긴 입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선 것처럼 절망적이다 
어지간한 도발에는 부서지지 않을 저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차가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영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다 


"이상한 일에 휘말렸거든요 내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자신도 동의했던 일이니 휘말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을 내뱉고 나니 심정적으로 정말 자신이 어떤 음모의 희생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라헬, 탄 그리고 이제 효신까지 자신만 제외하고 모두가 숨기려고 하는 어떤 진실. 
그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도 된 듯한 느낌에 순식간에 기분이 뒤틀린다 


"그러니까," 


말을 하다 말고 영도는 끌,하고 못마땅하게 긁는 소리를 낸다 


"이 사진에 찍혀있어야 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란 거죠, 그럼 그게 누구여야 했을까요?" 


영도의 말에 효신의 차가운 얼굴이 아주 잠깐 흔들리려고 한다 
그런 말에 대답을 해줄쏘냐, 그런 말에 흔들리기라도 할 것 같으냐, 효신은 생각한다 
파르르 떨린 눈매는 금새 제자리를 찾는다 
꾹 다문 입술은 여전히 벌어질 줄 모른다 
만약, 효신이 정말로 라헬의 상대라면 사람 성질을 돋게 하고 마는 저 입매가 똑 닮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날카로운 소리마냥 짧게 스치고 지나간 거부에 영도는 이제 조금 화가 나려고 한다 


"여기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묻는 말에 결국 효신은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쉰다 
그만 두라고 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시선에 조금 더 어두워진다 
효신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글쎄, 내가 알아야 하나?" 
"원래 선배는 뭐든 다 아는 사람 아니었어요? 제국고 학생회장 이효신, 모두의 존경을 받는 타고난 리더" 


빈정거리는 말투에 효신은 살짝 찡그린다 
왜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이유를 알 수 없이 은근하게 계속되는 신경전에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효신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베일 듯이 서걱이는 목소리에 영도는 비릿하게 웃는다 


"도대체 내가 누구의 대역을 하게 되는 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대역? 


효신의 단정한 이마가 살짝 주름진다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인 입술은 힘없이 흐트러진다 
그저 가만히 그 미세한 변화를 바라보던 영도는 그때껏 짓고 있던 불길한 미소를 계속 띄운 채 
끌, 소리를 내며 다른 한 손으로 뺨을 긁적한다 


"우리 시스터가 말이죠, 이거 참 너어무 겁이 없는 거지, 온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치자고 그러더라니까" 


효신의 머리 속은 순식간에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대역, 이번엔 사기. 
우리 시스터,라고 하면 라헬일텐데 
온세상을 상대로 치는 사기는 무엇이고 영도는 무엇의 대역인가 
내내 도기 인형의 유리눈처럼 그저 까맣기만 하던 눈동자가 그제야 황망하게 허공을 떠돈다 


"... 그게 무슨 뜻이야, 사기라니" 


영도는 어깨를 으쓱한다 


"거봐요, 선배도 궁금해할거라니까. 이제 좀 관심이 생겨요?" 


느긋한 대답에 효신은 약간 울컥한 듯 움찔하다가 잠잠히 제대로된 대답을 요구하며 바라본다 
영도는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의 사진을 일부러 더 천천히 슬쩍 들어보인다 
작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굳이 확인하고서 다른 손 끝으로 사진 속의 라헬을 가리킨다 


"요 깜찍한 유라헬 양이,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고 있단 말이죠, 나는 그 연극의 장기 말로 동원된 거고. 
 이 최영도가, 장기말이라니 믿어져요? 이러니 내가 궁금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어울리지 않게 제법 애교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영도의 말에 효신은 급하게 눈을 깜빡인다 
조금 전까지 눈을 뜬 채로 기절이라도 한 건가 싶게 천천히 움직이던 눈꺼풀은 이젠 속도계를 잊은 듯 움직인다 


"... 유라헬이, 왜 그런 일을 하는데" 


이젠 아예 옥타브를 재기 힘들다 싶게 낮아진 목소리의 끝이 숨막힌 듯 떨린다 
명백한 동요의 흔적에 영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 미소짓는다 


"허, 이젠 딴 것도 궁금한가봐요? 아깐 관심없다더니" 
"... 대답이나 해, 그러려고 일부러 온 거 아냐. 유라헬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물었어" 


지하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목소리는 위험하다 
영도는 효신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마침내 닿은 어딘가의 상자를 열고 훗, 웃는다 


"역시, 선배 목소리는 여전히 좋네요. 아, 욕할 땐 더 좋았죠" 
"... 대답하라고," 
"... 목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욕까지 들을 필요는 없겠죠" 


거의 그르렁 거릴 듯 위협적인 목소리에 영도는 천천히 입꼬리를 내려놓는다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는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게 노려보는 눈매만 남는다 
꿋꿋이 고개를 치켜들고 바라보는 효신의 한쪽 주먹이 가볍게 말리는 걸 힐끗 주목한다 
거의, 폭발하기 직전. 

영도는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비스듬히 효신을 내려다본다 


"왜냐뇨, 당연하잖아요" 
"...." 
"바늘은 어디에 숨기는 게 가장 안전하죠? 시체는 어디에 두면 절대 찾을 수 없죠?" 


효신은 멍하니 영도를 바라본다 
잠깐 효신을 기다리던 영도는 금새 나오지 않는 대답에 못마땅하게 쯧,하고 혀를 찬다 


"선배, 진짜 재미 없어졌네요" 
"...." 
"고전적인 문답이잖아요, 이렇게 간단한 해답을 모르다니, 설명할 의욕이 사라지네요" 


한쪽 눈만 찡그리면서 못마땅하게 투덜거리는 영도를 효신은 멍하니 바라본다 


모르는 게 아니다 
영도의 말대로 고리타분할정도로 고전적인 문답이다 

바늘은 바늘 꽂이에 
시체는 전쟁터에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3천년전 다윗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전략이다 
그게 이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뿐이다 


대답하는 대신 혼란스러운 듯 깜빡,하는 효신을 본 영도는 
속으로 씨익 웃으면서 겉으로는 실망한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쉰다 


"바늘은 바늘 꽂이에, 시체는 전쟁터에, 그리고 소문은 더 큰 소문으로 잠재우는 거죠" 
"... 소문..." 


의미없이 새로 등장한 마지막 단어를 되풀이하는 효신을 보며 짐짓 걱정스러운 듯 영도가 고개를 끄덕한다 


"그래요 소문, 우리 시스터가 엄청 강력한 소문이 필요한가 보더라고" 


갑자기 튀어오르는 수많은 생각들 때문에 머리 속이 혼돈으로 빨려들어간다 

소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더 큰 소문, 

저 최영도를 내세워서까지 퍼트려야하는 소문, 

설마. 


"... 소문이 필요하다는게 무슨 말이야" 


지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 잔뜩 긁힌 목소리는 아예 숨을 틀어쥔 것 같다 
효신의 두 손은 하도 거세게 허공을 틀어쥔 탓에 거칠게 떨린다 
  

"왜냐고요? 당연히 이전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죠, 그리고" 


영도는 어이없다는 듯 간단하게 대답한다 


"앞으로 누구도 감히 다시 유라헬에게 접근하거나 뒤를 캐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reputation을 원하고 있죠 우리 지나치게 똑똑한 시스터가" 


아직도 저 말들이 모두 이해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친밀하게 들리는 시스터라는 단어가 거슬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우습다 
마치 1+1=2,라는 당연한 수식을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처럼 
영도는 난감한 듯 한 쪽 손으로 이마를 긁적하더니 무심하게 덧붙인다 


"그렇게까지 해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모양이예요 우리 시스터가, 그게 뭔지 선배는 알겠어요? 난 도무지 짐작이 안가서" 


효신은 끝내 숨을 멈추고 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이러다 호흡곤란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제대로 숨을 고르기 쉽지 않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느새 몇 달 전의 기억에 가닿는다 


- 세계의 문턱을 넘게 해줄게요. 


기쁜만큼 아팠던 그 말. 


- 빠져나가게 두지 않아 


절박한 핏빛 물보라. 


- 스스로를 증명해요. 우리 얘긴 그때 다시 시작이예요 


지금껏 붙들고 있었던 유일한 이유. 
끝내 그 손마저 내치고 돌아선 것은 자신이면서도 
그러나 결국 혼자라도 잊을 수 없었던 조건. 


- 다 정리했어요. 걱정말아요. 선배에게 피해가는 일 없을 거예요. 


문득 떠올린 기억에 효신은 번뜩 눈을 크게 뜬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 후에 도착한 라헬의 문자였다 

완전한 통보라고 생각했다 
이제 끝내겠다는 다짐 같은 것. 
먼저 끊어낸 사람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미 너무 늦었겠지만 증명한다면, 그러면 혹시나 기회가 다시 올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 
몇번인가 다시 라헬이 떠올랐을 때도 적어도 완성된 영화를 세상에 내보내 자신을 증명한 이후,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래서 저 사진을 보았을 때 더 깊이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저 혼자만의 의미없는 희망인 것을 알면서도 
겨우 연명하고 있던 호흡기를 강제로 떼어버린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때도 감히, 라헬을 다시 만나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잊혀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잊혀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영원한 비밀로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밀. 

비밀. 


효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이젠 통제할 수 없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비틀거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고른 효신은 천천히 눈을 뜬다 


"... 고작 비밀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고작 나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가 더 정확한 문장이다 
아직까지 차마 내뱉지 못한 감춰진 단어를 영도는 순식간에 알아챈다 


"그러게요, 고작 그 뭔지도 모를 일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네요 우리 시스터가, 나까지 끌어들여서" 


고작 당신 때문에, 유라헬이 나를 끌어들였다고 영도는 눈으로 비난한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를 혼란에 빠진 효신은 미처 그 비난을 알아채지 못한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금새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효신의 들쑥날쑥한 혼란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영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천천히 신문을 도로 접는다 
그리고 일부러 보란 듯이 느릿하게 효신의 곁으로 몸을 기울여 가방 속에 신문을 집어넣는다 


"... 뭐, 아무래도 상관없죠" 


제 옆을 스치듯 지나 몸을 수그렸다가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키는 동안 효신은 온몸의 신경이 고슴도치처럼 곤두선 채 그대로 멈춘다 
슬쩍 효신의 굳은 표정을 훑어본 영도는 그제야 속내를 드러내는 것처럼 차갑고 잔인하게 미소짓는다 


"유라헬이 왜 이런 사기극을 하는지, 뭘 감추고 지키고 싶은 건지 그런 거 따위. 
 우리 시스터는 이 연극의 결말로 추락한 명성, 더럽혀진 명예를 원하는 것 같지만" 


영도는 일부러 한 마디를 쉰다 
효신은 눈을 치켜뜨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린다 


"꼭 유라헬이 원하는대로 되라는 법은 없죠, 떠들썩한 스캔들 이후의 파경이야 그쪽이 원하는 거고" 


이 말을 하면 라헬이 저를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지만 멈출 수가 없다 
제 말 한 마디 마다 밀랍인형처럼 창백해진 효신의 얼굴에 수만가지의 감정이 지나간다 
이효신에게도 저토록 강하게 흔들리는 순간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동안 그렇게 뒤흔들려고 했던 노력에도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철옹성이 막아섰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중에 라헬로부터 무슨 말을 듣더라도 아니 이걸 빌미로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효신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니 

영도는 약간 흥분되어 올라오는 감정을 감추고 
대신 무관심하게 어떻게 되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위악적으로 혀를 쯧 찬다 


"사실 내 입장에서야 이대로 결혼까지 가도 그만이긴 한데" 


아아, 기쁘다 

영도는 스스로가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말에 흔들리는 효신에 만족스러워진다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효신의 얼굴이 낯설다 
그리고 그 스위치가 라헬,이라는 것도 


라헬을 떠올린 영도는 태연하게 표정을 감추며 어깨를 으쓱한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수없이 쌓인 협상의 경험으로 볼 때 지금이 결정적인 단서를 날릴 타이밍이다 


"유라헬, 매력적이잖아요? RS인터내셔널 전체를 가지고 오니 지참금도 두둑하고" 


영도는 일부러 휘익,하고 짧게 휘파람을 분다 
힐끔 바라본 효신은 무슨 생각인지 오히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감정이 드러났던 얼굴도 어느새 차디차게 변했다 


"내버려 둬" 


마침내 효신이 작게 속삭인다 
잔뜩 억눌러 참고 있는 그 목소리에 영도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긋한다 


"네? 뭐라고요?" 


과장되게 손짓하며 아예 효신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영도가 자신을 향해 제스쳐를 보이는 걸 죽일 듯이 노려보던 효신은 
다음 순간 번개처럼 달려들어 팔목으로 영도의 목을 압박하며 벽 쪽으로 밀어붙인다 
약간 방심한 새 그대로 벽에 붙어버린 영도는 목젖이 눌리는 호흡곤란에 칵 하고 거친 숨을 토한다 
기습적인 공격이었던데다 온 힘을 다 실은 듯 제압하고 있는 힘이 엄청나서 
오래 배운 유도 기술을 걸어보기는커녕 저를 누르고 있는 팔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저를 제압하고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한다 
숨이 막혀 컥컥 대면서도 그 눈빛에 피식 웃음이 나려고 한다 


"유라헬, 건드리지마"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영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지 효신은 으르렁거리며 위협한다 
흔들리던 눈빛은 사라지고 저를 겁박한 팔은 단단하다 


"니가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야" 


서서히 또렷해지는 목소리에 비로소 아우라가 깃든다 
언젠가 우아하게 제 도발을 물리쳤던 차분한 위엄이 명령한다 


좋아했다. 


영도는 생각한다 
그때 명백히 자신은 이 남자의 소년 시절에 이미 완성된 우아하게 다듬어진 절제를 동경했다 
세계의 무엇에라도 지시를 할 수 있을 것 같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부수고 싶을 만큼 갖고 싶었다 


"... 선배가 나설 일 아닌 거 같은데" 


영도의 반항적인 대답에 효신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여전히 저를 놓아주지 않는 압박에 숨이 막혀 컥컥,거리면서도 
영도는 비식비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하고 웃는다 
정상은 아닐 반응에도 효신은 긴장을 풀지 않고 영도의 대답을 기다린다 
만약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죽이기라도 할 듯이 필사적이다 
다시 한번 삐딱하게 굴면 그땐 큰일나겠는데, 라고 영도는 혼자 생각하고 다시 풋,하고 웃는다 

천천히 손을 들어 저를 제압하고 있는 효신의 팔을 슬쩍 민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걸 확인하고 그제서야 표정은 차가워진다 


당신이 여전히 이효신이라는 것도, 
당신의 스위치가 유라헬이라는 것도, 
이제 알겠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저 사진 속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나한테 명령할 권리는 없지" 


대답하면 들어주지 


"선배, 알죠? 그게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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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돌아온댔지만...꽤 길게 걸려버렸어.... 게다가 지나치게 길어지기도 했고..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도 쓸 생각도 아니었는데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아... 
예상과 달리 효신이 아니라 영도가 버티는 바람에.. 사실 효신의 동인은 '유라헬'이면 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거기까지 영도가 왜, 어떻게 몰고 갈지를 알아내는데 좀 오래 걸려버렸네;; 그리고 중간 중간 이미지가 좀 튄다 싶은 건... 그건... 엑소의 중독과 강하늘의 내게 남은 세가지와 인피니트의 라스트 로미오까지 집착계와 치유계를 오가는 음악들을 섞어 들으며 썼기 때문일거야... 하지만 뭔가 배경음악으로 깔긴 좀 그래서 그냥 언급만...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가져 왔으니 너무 미워하진 마 ㅠㅠ 
거의 막바지다 으음.. 다음 편엔 둘이 다시 만나요 이제 결론 봐야지 둘이. 

늑장이 대부분인 글 기다려줘서 고마워 ㅠㅠ 이젠 금방 올거란 약속도 못하겠다... 흑... 미안 그리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