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you - midnight (j&n)

[학교2013][정호x나리] 심야식당.1 (그건 너 확장판)

april_m 2013. 2. 16. 18:00




 

있다.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쉰다 

깜깜한 어둠 속에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곳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게 문을 연다 


드륵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정호가 고개를 든다 

고개만 까닥 숙여 목례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오정호와 책이라니 


이렇게나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하도 신기해서 정호가 없는 동안 가끔 넘겨다보면 대부분 요리책이거나 캠핑 관련 잡지였다 

그래도 무슨 책을 읽느냐 던가 혹시 캠핑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불현듯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제풀에 놀라 웃음을 감춘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괜히 신경이 쓰여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구석 자리에 앉는다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온다 


김치볶음밥. 


늘. 


같은 메뉴. 





그런 때가 있다 


인생이 남루해져버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오래 잘못 걸어둔 니트 스웨터의 한쪽 어깨에 툭 튀어나온 옷걸이 흔적처럼 

하이힐의 한쪽 굽이 닳아버려서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어느새 절뚝이며 걷고 있을 때처럼 

무심결에 올려둔 펜에 흐른 잉크가 치맛자락에 남긴 감출 수 없는 얼룩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펼 수 없는 뒤틀린 흔적투성이의 삶을 깨닫는 순간 


분명 새 것이었던 스웨터가, 구두가, 치마가 

언제 그렇게 낡아버렸는지 깨닫지 못했다 

시작을 알아야 흔적을 지워볼 수도 있을텐데 

언제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니 

이제 굽어버린 나무 줄기를 펴려고 노력하는 건 무의미했다 


분명 새 것이라 생각했던 인생이 어느새 낡아버렸다 

삶이 물에 담궜다 꺼낸 옷을 입은 듯 무겁고 축축하다 



스물 여덟. 곧 아홉. 

내게 기회가 올까. 기다리는 것도 지쳤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꿈을 꿀 때가 나았다 

다시 아역 탈렌트의 이름을 앞세워 이 세계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견딜 수 있었다 

언젠가 내게도 미래가 오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가, 곧, 오리라 


그러나 인생에 빛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지난 몇년간 제 인생에 빛은 없었다 

저에게 올 햇빛까지 모조리 누군가에게 몰아준 건 아닐까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곤 했다 


스무살 남짓한 신인 배우들이 

그 시절 무모한 청춘만이 가지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무장하고 다가오면 

그 반짝임을 견딜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무모한 반짝임이 자신에게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아무 것 없이도 빛나던 순간이 자신에게도 있었을텐데 

이젠 그 빛마저 잃은 것 같아 초조해진다 


계나리. 


절대 흔하지 않은 이 이름을 검색해보면 배우 검색 순위 1167위 

연관 검색어는 지금 출연하고 있는 또는 이전에 출연했던 드라마의 배역 

또는 그 드라마 여주인공의 이름을 포함한 


김서원 친구 

우경이 친구 

서영이 친구 


친구..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않는다 

저에게도 어엿한 이름이 있다는 걸, 한번 들으면 잊지 못할 이름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지 않는다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게 좋았을까 

그때 저는 무엇을 바라 이 세계에 기를 쓰고 입성하려고 했던 걸까 


그렇지만 지금, 이제 와서 떠날 수는 없다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이라고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그만둘 수 없다 

이제와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엔 떠나리라 다짐하지만 

그러나 다시 뛰어들고 마는 부나방 같은 삶 

이 화려한 빛에 홀려, 이젠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서 

어리석게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어차피, 여자주인공의 친구. 

몇년째 그 언저리를 전전 중인 자신의 초라한 위치를 깨닫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버릴게다 

그러니 다시 닿지 않는 빛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남루한 스스로를 깨닫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위태로웠던 밤이었다 


- 근데 너무 이미지 겹치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친구로 나왔던 것 같은데? 

- 괜찮아 인상이 흐릿해서 중요 배역은 힘들지만 이런 친구 역에는 익숙한 느낌만 있는 낯선 얼굴이 오히려 어울리니까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의 감독 미팅을 마치고 

또다시 친구 역이지만 그래도 배역을 따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방송국 로비의 카페를 벗어나다가 

장갑을 두고 온 것을 발견하고 도로 돌아간 길이었다 


방금 전 자신에게 첫회 대본을 건넨 감독과 스탭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나리는 잠시 굳은 채로 그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 어 나리씨 


뒤늦게 나리를 발견한 스탭이 어색하게 웃고 

자신들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나리의 얼굴을 살폈다 

발견당한 나리는 활짝 웃으면서 다가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놓인 장갑을 집어든다 


- 장갑을 놓고 가서요 

- 아 그래 밖에 춥지? 


얼버무리는 걸 보니 서로 못 들은 것으로 해야하는 분위기 


- 그러네요 감독님도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완전 독하대요 

- 그래 나리씨도 조심하고 다음주 리딩 때 봐요 

- 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울지마 

웃어 


나리는 배시시 웃어보이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웃음 

미소 

적당한 눈치없음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나리는 이십대 초반 인지도를 위해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태도 논란으로 악플세례를 당하고 

웃지 않는 인상 때문에 몇번인가 캐스팅에서 잘린 후에야 깨달았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성격으로는 

수없이 많은 신인 배우 중 한 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들어도 듣지 않은 듯이 

보고도 못 본 듯이 

웃어야 한다 


살아남아야한다. 

이번 배역을 따내야한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중간에 잘리지 말아야한다 

이번 화에서 출연 분량을 확보해야한다 


당장은 웃어야만 살 수 있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웃었다 


방송국에서 보여주는 미소가 여유롭고 방정맞아질수록 

그렇게 확보한 인맥으로 드라마를 끊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나의 날이 오리라 생각하면서 


아니 이젠 그저 버릇처럼 



분노.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순간. 분노.한다 



한마디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분노한다 


그대로 집에 돌아온 나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단촐한 차림으로 나선다 


애인이 없었던 적보다 있었던 적이 더 많았지만 자신의 어두운 면은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 쪽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밝은 얼굴만을 보고 다가왔고 

방송 쪽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그랬다 브라운관 속의 자신. 

그게 전부 

말할 수 없었다 그 화사한 미소 뒤에 감춰진 분노 같은 건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이 솟는 날이면 무작정 걸었다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져 자버릴 수 있을 때까지 

마음에 쌓인 것을 모두 땀으로 배출해버렸으면 하고 


한 시간 넘게 어둠 속을 걸었는데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막막하다 


나는 이런 삶을 언제까지 견뎌야하는지 

인생이 마치 이 거리처럼 깜깜하다 

차만 가끔 빠르게 달려 지나가는 인적이 드문 대로변을 걷다가 

나리는 문득 자신이 이 세계에 홀로 남은 듯 막막해진다 


어둠. 

빛 같은 건 없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견했다 


그 어둠 속에 반짝이고 있던 빛. 





가까이 다가가보니 불을 밝히고 있던 건 라면 가게였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이미 인적도 없는 이곳에 왜 문을 닫고 있지 않은지 의아했지만 

라면,이라는 가게 이름을 읽는 순간 잊고 있던 허기가 찾아왔다 


소박하고 깔끔한 외관에 

힐끔 들여다보니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 몇개 

안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불빛의 따스함에 이끌려 

분명 문 앞에 걸린 "영업종료" 팻말을 발견하고도 나리는 저도 모르게 가게 문을 열었다 


덜컹.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서 흠칫 놀랐다 


가게 구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든다 

뭔가 말하려는 듯 일어서는데 나리가 빨랐다 


- 김치볶음밥, 되나요.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라면가게에서 김치볶음밥이라니 


당연히 거절당하겠지 싶어 도로 나가려고 더듬더듬 문고리를 잡는데 

자신의 말에 물끄러미 보던 남자가 한마디만 남기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 들어오세요 


어쩐지 받아들여진 기분이라 나리는 조심스레 남자가 부엌으로 자리를 비운 빈 가게에 들어서 

문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벽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고소한 김치 볶는 냄새가 난다 

배가 고파온다 


따뜻하다 


가게의 공기 때문인지 

불빛 때문인지 


나리는 그날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잠시 후 남자는 달걀을 얹은 김치볶음밥을 내놓았다 

잘게 다진 김치를 타지 않게 볶아 밥과 버무린, 터트리지 않은 노른자까지 

요리책에나 나올 것 같은 김치볶음밥이었다 

무심결에 주문하긴 했지만 라면가게에서 이런 음식이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나리는 조금 놀랐다 


- ... 잘 먹겠습니다.. 


혼자만 들리게 중얼거리고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먹어본다 

노른자를 살짝 터트려 섞어 먹는 밥이, 그날 첫끼처럼 맛있었다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비운 나리는 그제야 

대각선 즈음 부엌 앞 구석자리에 앉아 다시 자신의 할일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다 


혹시 방송 쪽 사람이면 이 밤중에 어이없는 요구를 한 자신이 소문이라도 날까봐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고 어디서 봤더라 떠올려본다 



... 



오정호다. 



이지훈의 친구. 


조금 울컥한다. 



갑자기 등장해서 주목받고 있는 배우,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몇번인가 스탭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지만 

우와 정말요? 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넌 지금 여기서 뭐하니? 란 식으로 들려서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정호는 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은 단번에 알아보았는데 

이지훈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도 알아보았는데 

그렇게 저는 사로잡혀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토록 무신경한 것인가, 

넌 어째서 날 알아보지못하는 건가 

내가 그정도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란 말인가 

빛나는 건 네 친구 이지훈 만으로 충분하다는 건가 


억지라는 걸, 정호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도로 울컥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리를 보고 그제야 정호가 눈을 들었다 


- 얼마죠? 


건조하게 나리가 묻자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정호가 망설인다 


- 4,500원으로 하죠 


정호의 대답에 나리는 주머니에서 5천원을 꺼내 놓는다 


- 거스름은 됐어요 

- 그래도 


돌아서는 자신을 알아보는 대신 거스름돈 때문에 머뭇하는 걸 느끼자 

나리는 하루종일 쌓였던 분노가 다시 올라왔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혼자 지나갔을 말을 하고 말았다 


- 이지훈은 잘 나가서 좋겠다? 





충동적으로 지훈의 이름을 꺼내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온 뒤 

다시는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 맛이 자꾸만 생각났다 


김치볶음밥이 정갈할 수도 있구나 싶은 조미료 없는 담백한 맛에 

터지지 않은 노른자의 달걀 프라이가 얹어진 

집에서도 얼마든지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쩐지 똑같은 건 찾을 수 없는 

그 김치볶음밥이 자꾸 생각나서 


제발 모르길, 잊어버렸길 바라면서 

한달쯤 지난 어느날 또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라면가게를 찾았었다 


열두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그날도 불을 밝히고 있던 가게에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역시 지난번과 같은 자세로 앉아있던 정호가 저를 힐끗 보고 

아는 척도 모르는 척도 아닌 무덤덤한 태도로 일어나 


- 오늘도 김치볶음밥? 


이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요리하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먹고 싶었던 그 김치볶음밥을 먹고 조용히 일어나 다시 나올 때까지도 

정호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언젠가 부터는 주문을 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자신이 들어서면 정호는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고 

다 먹고 일어서서 오천원을 꺼내면 오백원을 거슬러줬다 


그 무심한 태도가 묘하게 긴장을 풀어줘서 

때때로 이렇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김치볶음밥을 먹고 돌아갔다 

배가 든든해지면 어쩐지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숟가락을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고 물을 마시고 

주머니에서 오천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그제야 정호가 다가와 계산대에서 오백원을 건넨다 

여느 때처럼 오백원을 받고 

잘 먹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서려다 


불쑥 말해버린다 


- 심야식당, 알아? 


갑작스런 말에 정호가 놀란 기색으로 바라본다 

내뱉고 후회했지만, 그렇지만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온지라 

그냥 말해버리기로 한다 오늘은. 

이 맛있는 음식에 대한 보답으로 


- 여기 말야, 꼭 심야식당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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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학교2013 모든 등장인물들의 미래사 다 쓸 기세.... 

어떨지 모르겠네 이런 나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