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정호x나리] 심야식당.4 (그건 너 확장판)
달칵.
어두운 공간이 환하게 밝아진다
문 앞에 서서 한참 멍하니 섰던 정호가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어쩐지 먼지가 쌓인 것 같다
예민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정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접어 휴지통에 버리고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계산대에 올려둔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까지 걷어 붙인 뒤
주방에서부터 홀까지 가게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넓지 않은 공간인데도 혼자 쓸고 닦으려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힌다
마지막 테이블을 훔쳐내고 나서야 비로소 정호는 자리에 앉는다
소독제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이 공간이 갑자기 낯설다
어지간하면 제 집에 같이 가자는 지훈의 말을 거절하고
그러면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이경의 청도 뿌리치고
굳이 가게로 돌아가겠다고 오기를 부린 게 조금 후회된다
내내 잊고 있던 상실감이 갑자기 밀려온다
일주일 전 갑자기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해졌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은 가게 문을 닫고 찾아와 내내 함께 있어주었다
귀찮을 정도로
자신의 친구들 외에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는 빈소를 지키면서
정호는 먹는 양이 조금 줄었다는 것 뿐 평소와 다름 없는 덤덤한 상태로 지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의 빈소에 잘못 앉아 있는 것처럼
이렇게까지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도 되는 걸까 아주 가끔 죄책감이 들기도 할 정도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때때로 들리는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마른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슬프다던가 아쉽다던가 하는 감정 같은 건 한참 전에 이미 말라버렸다
형들도 어머니도 결국 연락이 되지 않는 지금
그래도 자신은 할만큼 했다 생각했다
오히려 그동안 짓눌러온 병원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홀가분함이 컸다
그동안 친구들이 가게 매상 배분을 자신에게만 더 많이 주고 있는 걸 병원비가 버거워서 모르는 척 받아온 것도,
그 돈을 다 갚으려면 앞으로도 한참 걸리겠지만, 적어도 배분율은 이제 똑같이 할 수 있다는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제 제 인생의 발목을 잡는 건 없다 생각하면서도
허전한 이 기분은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혼자 있고 싶어서 친구들의 손을 거절했지만
역시 혼자 있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정호는 거칠해진 얼굴에 마른 세수를 한다
그때
드륵.
문이 열렸다
=
빛.
다시 불을 밝히고 있는 가게를 발견하고
나리는 안심한다
지난 일주일 간 몇번이나 이곳을 찾아왔지만 번번이
가게 사정으로 휴업합니다.
라는 종이 한장만 붙어 있는 굳게 닫힌 문이 자신을 맞았다
결국,
되돌릴 수 없었다
매달려도 봤고 애원도 해봤다
눈물 흘리며 죽겠다고 협박도 해보고
뭐든 바꾸겠다고 맹세도 했다
처음엔 미안하다며 사과도 하고 자신을 설득하려고도 하던 그는
계속된 애원에 오히려 더 차가워졌다
이대로 버림받으면 혼자 남게 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실오라기보다 더 가느다란 가능성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애썼다
단단한 벽에 대고 주먹이 부서져라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리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 소용 없었다
- 너 정도면 집착도 병이야 니가 내 부인이라도 돼? 우리 결혼할 것도 아니었잖아
자신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로 내뱉은 그 말에
다리가 휘청 풀렸다
주저앉거나 기절하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였다
경멸하듯 자신을 한번 보고는 가버리는 뒷모습을
아무 말도 못하고 끝까지 바라본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목도 마르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건가
깊은 절망에 빠져 나리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지난 일주일동안 그렇게 멍하니 방에 갖혀 있다가
밤이 되면 매일 이곳을 찾았지만 번번이 굳게 닫힌 어둠과 마주쳤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또다시 거절당한 것 같아서
이곳만은 언제든 불이 켜져 있었는데
이제는 제 인생에 불빛이라곤, 저를 기다려주는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더 힘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가게에 불이 켜져 있다
얼마나 저 빛이 그리웠던지
어찌나 그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었던지
왜 그동안은 꺼져있었던거야, 하고 울컥 억울해진다
나리는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선다
평소와 다른 차림,
검은 정장 바지에 셔츠를 입은 정호가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자신을 보고 당황한 것 같지만 나리는 우선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서 있는데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던 정호가 그제야 부엌으로 향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자글자글한 기름에 볶는 소리
고소한 냄새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나리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이걸, 기다렸어
=
막상 다 먹고 나니 어색하다
그동안 어디 갔던건가, 힘들었던 시간이 생각나서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건가
정호가 넘겨보던 캠핑 잡지가 떠오른다
늘 주방에서 일하던 캐주얼한 복장이어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평소 같지 않은 정장 차림을 보니
그래 이렇게 안정되어 보이는 가게가 본인 소유일 정도면
오정호도 편한 인생을 살겠구나,
원래 저런 정장이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겠구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과 갑자기 비교가 되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초라해진다
- 어디 다녀왔어?
여느 때처럼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마주 서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묻는다
정호는 조금 당황한다
딱히 자신의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 생각이 들어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다
- 뭐 좀.
눈을 마주치지 않는 퉁명스런 반응에
나리는 울컥하지만 다시 웃으며 묻는다
- 좋은데 갔다왔나봐 좋아보인다 오늘
나리의 말에 정호는 어이가 없고 문득 귀찮아진다
혼자 있고 싶다
어서 가줬으면 싶어서 대답없이 거스름돈을 건넨다
자신을 외면하는 정호가 갑자기 그의 얼굴과 겹쳐보인다
이곳에서마저도 저가 그렇게 귀찮은 존재인가 싶어서 울컥 다시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어차피 넌 여행이나 다니고 편하게 살겠지
정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미안해. 그때. 네 이름을 대서.
사실 잊고 있었다 그런 일 같은 건
혜선과 화해하고 금새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지금 이순간
바로 그게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한 결정적 순간인 것만 같다
니가
내 인생을 꼬이게한 니가
나한테 그러면 안되지
날 거절하면 안되지
- 니가 그렇게 잘났어?
멈출 수가 없다
- 니가 내 인생을 망쳐놨어 이 양아치 새끼야 여기서 착한 척 살고 있으면 감춰질 줄 알았어?
너만 아니었어도 니가 그때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진 않았어
니가 뭔데 니가 어떻게 날 무시해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그렇게 바랬다고 날 조금만 배려해달라는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왜 날 무시하는거야 왜 늬들이 나쁜거잖아
발악하는 나리에게서 정호는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왜 저에게만 이런 일이
왜 저에게만 이런 불행이
세상이 저를 자꾸만 돌려세우는 것 같았을 때
분노로 가득 차서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 때
정말 제 탓인가 싶어
이 분노가 정말 저로부터 시작된건가 싶어서
정호는 물끄러미 나리를 바라본다
말없이 선 정호에게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독설을 쏟아붓던 나리는
그제야 퍼득 정신이 든다
당황과 미안함이 섞인, 그러나 냉정한 얼굴
그런 눈을 최근에 나리는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어떻게든 달래려고는 했지만 그러나 결코 책임지려고는 하지 않았던 그 눈
저도 모르게 멈칫 물러선다
정호는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바라보기만 하고 서있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리는 비로소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도로 테이블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났다
모든 걸 망쳐버렸다
이제 이곳마저.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정말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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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는 나도 답답한 이걸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