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이경x경민] 예쁘잖아.1 (그건 너 확장판)
아무리 평일보다는 덜 바쁘다지만 주말에 연달아 땡땡이냐고
정호와 남순에게 욕을 먹을만치 먹고 나서야 겨우 빠져나왔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경민은
심지어 자기가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고
마치 당연히 니가 나와야지 하는 태도로 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게다가 자기 동네로 불러내는 이 패기라니.
익숙한 동네의 익숙한 카페를 대니 모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7년 만의 연락에 단번에 목소리를 알아 들은 것도 스스로 어이없고
불러준다고 그 시간에 이 장소에 나와있는 게 제일 어이없다
나 어딘가... 칩 심겨있는거 아니야.. 뇌에... 조종당하는..
엄한 생각을 하며 차 앞에서 서성인다
그땐 매번 제가 기다렸지만 오늘은 경민이 좀 기다려보라지 하는 심술이 나서
십분 넘게 일부러 안 들어가고 있는 소심한 복수다
5분쯤 늦은 시간을 확인하고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구석자리에 있던 경민이 고개를 든다
허. 아예 모자를 눌러쓴 트레이닝 복 차림이다
일하던 중간에 나오면서도 집에 가 옷까지 갈아입고온 자신이 억울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툭 핀잔을 주고 만다
- 너 요즘은 막 다니는구나
자신의 도발에도 경민은 무덤덤하다
- 너 만나는데 굳이.
...당했다...
이경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홱 돌리며 묻는다
- 근데 그때 난 왜 데리고 나간 거냐?
- ...다들 니 얼굴에 홀린 거 같길래 친구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
또 당했다
더 말해봐야 저만 손해다
- 왜 보자 그랬냐
전화를 받고 나서 내내 궁금했다
벌써 7년째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살아온지라
지난주에 그렇게 만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 니가 SKY를 나왔다고?
경민이 이거 봐라 라는 식으로 팔짱을 끼며 말한다
미팅에서의 이야기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래 이경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출신 대학을 밝혔고 당연히 찬경의 친구들은 명문대생이었으니
그런 착각을 한 건 알겠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이경은 전혀 대학 얘기를 한 적이 없다
- 내가 언제 대학 나왔다든? 니가 착각한거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대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또 묻는다
- 게다가 요식업 사장님이시고?
니까짓게 무슨 사장이냐는 식의 어조에 이경은 울컥한다
이 기집애는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냐
나 사장 맞거든? 라면가게 사장도 사장이다!
이경은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경민은 살짝 놀랐다가 금새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이 된다
- 근데 박찬경씨랑은 어떻게 아는 거야?
- 알바하다 만났다 왜
- 친해?
- ... 친하니까 그런 데까지 끌려 나가지
- 흐음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불러낸건가 싶다
- 할 말 다 했냐? 나 간다?
- ...나 찬경씨랑 만날 거야
뭐?
일어서려다 말고 이경은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는다
폭탄을 직격으로 맞아도 이거보단 덜 놀랄 것 같다
얘가 지금 뭐라고 그랬냐?
- 그저께 연락 왔더라고.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어
- 니가?
- 그래
- 누굴 만난다고?
- 박찬경씨
- 니가 찬경형을 만난다고?
- 그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풀이해서 묻는 이경에게
경민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몇 번이고 다시 대답한다
허허...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 너 외모지상주의잖아? 안 예쁜 건 옆에 두기도 싫다며? 근데 니가 지금 누굴 만난다고?
내가 진짜 형을 좋아하지만...형이 진짜 멋있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진짜 외모는.... 아니지....
차라리 얼굴을 보고 완전 꼴통이랑 사귄다고 그러면 믿겠다
오로지 얼굴 때문에 나랑 사귀는 거라고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아놓고 이제 와서 뭐?
- 언제적 얘기를 지금. 찬경씨 조건 장난 아니더라 사람도 좋아보이고
하!
-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쓸데없는 소리도 하지 말고.
니가 그때 나한테 잘못했던 거 갚는다고 생각해
내가 잘못하기는 뭘 잘못해!
니가 나 귀먹을 때까지 소리지르고 팼던 건 기억 안 나냐? 엉?
속에서 열불이 나서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말들이 머리에서 뱅글뱅글 혀끝에서 뱅뱅 돌기만 해서 한마디도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경민은 이경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든 말든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지 못해서 가는 신음 소리를 내든 말든
제 할 말만 다하고 새침하게 일어선다
-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간다
가긴 어딜가! 내가 지금!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알아듣긴 뭘 알아들어! 이 기집애야! 당장 앉아봐!
소리치고 싶은데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말이 나오질 않는다
경민이 가볍게 걸어나가버리는데 잡지도 못했다
이경은 경민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자리에 멍하니 그러고 앉아 있었다
저게 부탁하는 태도란 말인가
저런 마녀같은 기집애가 뭐가 좋다고 한달씩 좇아다니면서 사귀자고 그랬을까
그때 내가 진짜 미쳤던 게 분명하다!
방해하지 말긴 무슨! 그냥 두나봐라!
찬경이형 때문에라도 이 관계 절대로 진행되게 안둔다 내가
내가 겪었던 괴로움을 형이 다시 겪게 할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온 경민은
빨개진 얼굴을 푹 숙여 모자로 감춘다
막 다닌다니.
이경의 말이 생각나서 자존심 상한다
신경 썼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대강 입고 나왔는데
역시 좀 차려입고 나올 걸 그랬다
2년간의 고시촌 생활 때문에 이런 차림에 익숙해져서 방심했다
스물 넷, 독하게 마음 먹고 입성한 고시촌에서
온갖 회계, 세무, 법 관련 책과 씨름했던 2년 동안
경민은 가까운 친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처참한 상태로 지냈다
뱅글뱅글 안경에 내내 머리는 질끈 묶고 츄리닝 차림으로
고시원과 독서실, 학원을 오가는 나날들
고삼 때로 돌아가도 이것만큼 열심히 하진 못할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해도 꿈꾸는 해피 라이프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전문직인데 자기 인생이 없는 건 아니고 길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세무사 시험에 올인했다
외모가 무엇이고 연애가 무엇이냐
이 모든 것을 세무사 시험 합격 이후로 미뤄두고
진짜 미친 듯이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고시촌에 들어간지 2년 만에 합격의 영광을 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민은 그 시절의 폐인이나 다름없었던 자신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너 외모지상주의잖아
그 자식은 아직도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다니
경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는다
대외적으로 경민은 조신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에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에도 꼼꼼하게 일 잘하는 세무사.
당연히 주변에서는 예쁜 것에 집착하는 경민의 성향을 몰랐다
아이돌이나 잘생긴 배우에 대해서 주변에서 호들갑 떨며 대화하면
한번 넘겨다보고 아, 괜찮더라구요 라고 살풋 웃으며 동조하는게 다인 경민이라
대부분의 아이돌과 드라마를 알아도 그저 문화에 관심이 많구나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챙겨보고 음악을 많이 듣는구나 정도로
역시 경민씨는 예쁘기만 한게 아니라 다방면으로 다 잘 아네 이런 소리를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 이경이 말한 대로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민은 지독한 얼빠였다
예쁜 거라면 사족을 못 썼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면 없던 호감도 생겼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기준도, 음악을 듣는 기준도 명확했다
예쁜 사람이 나오는 영화
예쁜 사람이 부르는 노래
예쁜 사람이 하는 공연
그러나 세무사 사무실에 고용 세무사로 취직한 뒤
자신의 취향 같은 건 고이 접어놓아야 소위 말하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세무사 선배들과 학교 선배들을 보면서 알았다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다가는
결코 해피 라이프를 쟁취하지 못할 거라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잘생긴 건 다 필요 없다
우선 재산과 능력이면 장땡. 거기다가 성격까지 좋으면 금상첨화
그래 이제 전문직도 쟁취했겠다
이정도면 미모도 출중하겠다
겉으로 보이는 평판도 참하다,겠다
이제 남자만 잘 만나서 결혼만 하면 된다! 란 생각으로
조건이 좋고 괜찮은 남자들이라길래 친구들 몇명과 나간 미팅에서
설마 이경을 만날 줄은 몰랐다
낭패다 싶어 도망치듯 나온 자리라 당연히 날려 버린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음 소개팅은 언제 잡나 고민하고 있는데 찬경이 연락해왔다
처음에는 시큰둥 했는데 주선자에게 물어보니 그날 나온 사람들 중 조건도 성격도 제일 괜찮다는 평.
만나봐야겠다 생각했지만 영 이경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저랑 내가 언젠가 사귀었다고 말하거나
제 성격을 폭로해버리거나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말짱 도루묵이 될까 걱정 됐다
7년동안 얼굴도 보지 않고 소식도 일부러 듣지 않았던 이경에게 연락을 한 건 그런 초조함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경도 제 부탁을 들어줄 것 같고...
이제 찬경만 잘 잡으면 된다
경민은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기다려 해피 라이프!
=
- 경민씨 여기예요
예약해둔 레스토랑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찬경을 발견하고
조신하게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한 경민은 서두르지 않고 다가간다
- 잘 지내셨어요?
- 네, 잘 지내셨죠?
- 저야 뭐 오늘을 기다리느라 설렜죠
아하하 제풀에 웃어버리는 찬경을 따라 경민도 살풋 미소짓는다
어찌 보면 느끼하게도 무례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인데도
그저 함께 있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묘한 솔직함이다
명문대 졸업생에 탄탄한 직장, 거기다 성격도 좋은 거 같으니
조건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데 .... 키만 조금만 더 크고 얼굴이 조금만 잘생겼더라면...
- 들어갈까요?
아쉬운 마음에 잠시 놓으려던 정신을 찬경의 친절한 에스코트에 화들짝 도로 찾아온다
그래 얼굴이 무슨 상관이야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잊어버려 남경민 이제 철 들어야지
전부터 한번 와보고 싶었던 레스토랑이었다
게다가 창가 자리라니
햇살이 적당히 떨어지는 예약석에서 찬경이 빼주는 의자에 앉으며
역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 확신한다
그래 이런 남자를 만나야하는 거였어
경민은 다시 한번 찬경을 향해 수줍게 미소지어 보인다
똑똑
누가 창문을 두드린다
- 어! 이경아
창밖에 이경이 보인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저는 쳐다도 안보고 찬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반갑게 손을 흔든다
손을 막 흔들다가 급기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한다
- 형, 여긴 어쩐 일이예요?
-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야?
가! 가라고! 쫌!
속으로 간절하게 부르짖고 있는데 이경이 그제야 경민을 발견했다는 듯 아는 척을 한다
- 어 경민이 너도 있었네?
!!!
놀란 토끼눈이 되서 쳐다보니 이경이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다
.... 저걸 죽여버리지 않으면 내가 남경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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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경은 싸워야 제맛... 입니다.... 랄까...
아직도 갈 길이 머네....
왜인지 경민이는 그렇게 완벽하고 쌀쌀맞은 얼굴 뒤에 분명 숨겨진 취향이 있을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게다가 이경이랑 사귀었다면.. 처음에 왜 마음이 흔들렸을까.. 생각하다가 저런 은밀한 취향을 부여하고 말았;;
좀 무리수일지도 모르지만 재미있는 설정쯤으로 읽어줘 ㅋ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냔들 늘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