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고구마수프 (그건 너 확장판)
딩동.
딩동.
벨소리가 계속 울려 안그래도 흔들리는 머리가 울린다
답이 없으면 가겠거니 했는데 누군지 밖에 선 사람도 꽤나 끈질기다
남순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 현관으로 나선다
- ... 큼... 누...구세요
잠긴 목으로 겨우 문 쪽을 향해 소리를 높여본다
그때까지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반복해서 울리던 벨소리가 뚝 멈춘다
- 고남순! 문 열어!
익숙한 목소리에 남순이 인상을 찌푸린다
쟤가 왜 여기...
남순이 대답이 없자 밖에서는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이러나 저러나 시끄러워서 죽기는 마찬가지겠다 싶어
남순은 결국 문을 열어준다
- 왜 왔냐?
- 걱정되서 온 누님한테 그게 할 소리냐 니가 지금
- 오빠 저도 왔어요
- 좀 비켜봐 들어가게
하나만도 힘든데 둘이나...
남순은 문에 버티고 선 저를 단번에 밀치고 들어서는 강주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지수는 여전히 문 밖에 서서 남순의 눈치를 보고 있다
한숨을 푹 쉬고는 남순은 지수에게도 들어오라고 고갯짓 한다
- 근데 진짜 왜 온건데
기운이 없어 터덜터덜 다리를 끌면서 들어오니 이미 강주는 냉장고를 뒤지는 중이다
뒤따라 들어온 지수가 쪼르르 달려가 강주를 돕는다
분명 우리집인데 마치 제 집인 양 행동하는 건 뭔가 싶어
남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짚는다
그런 그를 힐끗 본 강주가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말한다
- 들어가서 쉬어 너 아프다며
제 질문에는 대답도 없이 도로 냉장고에 고개를 박는가 싶더니
들어가라고 할 땐 언제고 불쑥 묻는다
- 야 넌 집에 어떻게 이렇게 먹을게 없냐? 평소엔 뭘 먹길래 죽도 못 끓이겠네
- .... 라면 먹으면 됐지 뭘...
집에서 딱히 요리를 해먹을 일이 없으니 당연히 냉장고도 텅텅 빈 채일게다
가게를 시작한 후로는 더더욱 집에서 뭘 해먹을 기회가 없었다
대체 뭘 찾는 건가 싶어서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려고 하니
이미 스캔을 끝낸 강주가 냉장고 문을 탁 닫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 고남순....
- 어?
- 니가 그동안 안 아팠던게 신기하다... 이 따위로 밥을 먹고 다니니
딱히 그것 때문에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싶지만 일단 강주의 박력에 압도되서 고개를 끄덕인다
- 너 아프다고 흥수가 먼저 좀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오길 잘했네
아침에 흥수에게 뭔가 물어보는 문자가 왔길래
몸이 좋지 않아 오늘은 가게를 쉬고 집에 있으니
내일 알아보고 연락주마 했던 게 강주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가라고 말하려는데
강주는 남순의 의중같은 건 아랑곳 없이 집안을 한번 쓱 둘러본다
- 고남순 너는 들어가서 쉬고,
쉴 수가 있겠냐 신경쓰여서....
항변하고 싶은데 단호한 강주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일단 마루로 후퇴한다
- 방에 들어가서 누워
니네가 거기 그러고 있는데 내가 방에 불안해서 누워있을 수가 있을 리가 없지 않냐
차마 말은 못하고 손짓으로 됐다고 표시만 한다
그런 남순을 한번 보고 강주는 이내 포기한 듯 지수에게 말을 건다
- 일단 죽 좀 끓이고 뭔가 부드러운 것도 끓여야할 거 같으니까 장도 봐야겠고
- 장보는 건 제가 다녀올게요
- 그럴래요? 그럼 그동안 내가 쌀 불려놓을게요 쌀은 있으니까
- 네 딴 거 시킬 건 없으세요?
- 우선 지수씨는 목록대로 사오는 것만 부탁
잠깐만 내가 써줄게
마루의 양지바른 곳에 기대앉아
속닥속닥하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멍해지는 게
또다시 열이 올라서 까무룩해진다
- 그럼 언니 다녀올게요
덜컹.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꾸벅꾸벅 졸던 데서 깨고 보니
강주가 방에서 이불을 가지고 나오고 있다
- 깼냐? 이거 덮어 들어가기 싫으면
어지간히 귀찮게 한다 싶지만 순순히 이불을 받아덮는다
따뜻한 햇살 밑에 이불까지 덮고 있자니 다시 졸린다
- 넌 학교 안 갔냐?
- 내일 학교 행사라 일찍 끝났어
그래서 왔구나 싶어 고개를 대강 끄덕인다
- 지수씨 데려와서 불편하면 가라고 할까?
멍하니 있는 저에게 강주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오는 길에 뭐 부탁할거 있나 싶어서 가게 들렀는데
지수씨가 거기 왔다가 내가 너한테 간다고 하니까 같이 가겠다고 해서
이강주 오지랖에 안 데려오는게 더 이상하다 싶다
언젠가 이경을 만나러 라면가게에 들린 지수는
이후에 경민과 함께 몇번인가 놀러왔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순에게 꽤나 열심히 들이대는 중이었다
스무살의 패기란 저런 것일까
자신은 스무살에 어땠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수의 마음을 듣고도 - 사실 모를 수가 없는 방법으로 티를 냈으니 가게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만 -
그냥 한 때 저러고 말겠거니 무시하는 중이었다
가끔은 지수의 그런 무모함이 두렵기도 했다
그 시간의 자신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저런 상처받을 가능성 같은 건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한번도 미움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랑받음 아우라가 느껴져서
혹시라도 제가 잘못 다루기라도 하면 의도와 상관없이 그 보송보송한 표면에 상처라도 남을까봐
그게 제 탓이 될까봐 남순은 지수를 무심하게 대하며 피해왔다
... 그렇긴 하지만 이미 데려왔으니 어쩌랴...
강주와 둘이 집에 있는 것도 우습고...
남순은 귀찮다는 듯 강주에게 관두라고 손짓한다
오늘따라 더 나른해보이는 남순을 힐끗 보고
거실에 널린 물건들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강주는 말한다
- 애 괜찮은 거 같던데 넌 별로야?
- .... 시끄러워서 싫어....
- 에라이, 그럼 나도 시끄러워서 싫냐?
- .... 어
망설이다 한 대답에
강주가 저를 한대 퍽 치고 돌아선다
환자를 이렇게 세게 치다니,
엄살을 피우며 기대 앉았던 자리에 픽 쓰러진다
벌써 오후라 창으로 쏟아져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남순은 멍하니 창으로 보이는 작은 하늘을 바라본다
=
- ...사람이 이렇게 조용히 잘 수도 있네요...
- 쉿, 이리와요
그새 잠이 들었던지 감은 눈 너머로
소근소근하는 대화소리와 사사삭 움직이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다
조금 멀리서 나즉한 목소리가 들린다
- 예전부터 그랬어요 숨 죽이고 자요 원래 고남순
- 아, 고등학교 동창이라 그러셨죠 이경오빠랑도
그땐 어땠어요? 남순오빠? 그때도 지금 같았어요?
- 그래도 요즘은 많이 괜찮아졌죠 완전히 붕 떠있진 않으니까
- ... 예전엔 어땠게요
- 지금 같았죠
- 네?
목소리가 아련해진다
- 저렇게 햇볕을 받으면서 누워있었어요 책상에, 늘.
- 헤에... 좋은 학생은 아니었네요
- ... 그렇다기보다는 금새라도 사라질 것 같았어요
잠시 말소리가 멈추고 힐끗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남순은 깨어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 더 눈을 꼭 감는다
- 저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지 않을까, 금새 어디로 떠나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불안했어요
- ... 그래서요?
- 그래서 더 괴롭혀줬죠 밥도 같이 먹자고 강요하고 회장 노릇 잘 못한다고 갈구고
너는 어디도 못 가 여기가 니 자리야 말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아마 그땐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잘 몰라서 그렇게 했지만
- 뭔가 어렵네요...
- 뭐 고남순은 귀찮아했던 거 같지만요
알고 있었다
강주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마치 교실 한 구석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자신을
묶어두기 위해서 쓸데없이 말을 건네고 일을 시키고 구박을 했다는 것을
수많은 감당할 수 있는, 또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 사이에서
그런 강주의 잔소리가 현실을 환기시키는 유일한 창구였던 때도 있었다
저가 여전히 이 교실에 소속되어 있는, 속해있어도 되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르다.라고 언제나 생각했지만
강주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강직한 눈을 보면
너 또한 평범한 학생.이라는 한번도 믿지 않았던 전제가
마치 진실처럼 설득되곤 했었다
그러니 귀찮지 않았다
그저 놀라웠을 뿐이다
어떻게 아는 걸까
그런 필요까지 어떻게 아는 걸까
그저, 그랬을 뿐이다
남순은 작게 한숨 쉬며 부엌으로 향했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눕는다
뒤척이는 소리에 놀란듯 대화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한참 남순이 움직이지 않자 그제야
도르르 굴러가는 시냇물처럼 나즉한 대화가 이어진다
- 남순 오빠 좋아하셨던거 아녜요 언니?
- .. 그랬을려나... 모르겠네요 후훗
그랬던 게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넌 왜 내게 그렇게 신경썼을까 하고
-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비밀, 우리 흥수 들으면 속상해해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남순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인데도 심장이 아프다
- 이런 얘길 해주는 건, 그러니까 지수씨도 잘 생각해보라구
이이경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니까
너무 본인 마음 밀어붙이지 말고 이게 진짜 무슨 마음일까 상대는 어떨까 잘 생각해봐요
... 혹시 내가 주제 넘었으면 미안, 신경쓰지 말아요
- ... 아녜요 언니..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어요... 제가 너무 들이대는 거 알아요
근데... 지금도 금새 사라질 것 같은 걸요 남순오빠는.
지금 당장 붙들고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가버릴 것 같아요
- ...고남순은 좀 오래 걸려요 저래뵈도 어려워서...
사람이 만나는 데엔 타이밍이란 것도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요
타이밍
강주가 지수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순은 눈을 감고 생각한다
타이밍
그때 널 만났던 게 나였다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군대에 있지 않았고
우연히 길에서 널 만난 게 나였다면
흥수에게 강주와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참 기묘한 조합이로구나 생각해서 미친 듯이 웃어주긴 했다
그저 절친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게 저도 잘 아는 강주였다는 것
그런 신기하고 묘한 감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흥수와 강주를 함께 만난 자리에서 였다
저를 앞에 두고도 이전에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눈으로 강주를 보는 흥수와
역시나 한번도 본적 없는 수줍은 얼굴로 빛을 발하고 있는 강주를 보고
남순은 처음으로 질투,라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너 여자 된거 같다, 어쩌구 라면서 강주를 놀리다가 가차없이 얹어맞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음을 크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자신에게도 필요했다는 걸
강주의 저 빛이, 자신을 강직하게 바라보는, 현실에 묶어두는 저 빛이
남순 자신에게도 필요했다는 걸
그때, 널 만난 게 흥수가 아니라 나였다면
내가 너와 연락이 닿는 곳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넌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
그래도 우리는 친했으니까
친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랬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몇번인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리란 걸 알면서도
강주의 빛을 알아본 사람은 저가 아니라 흥수이고
저는 흥수의 발견으로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 강주를 그때서야 알아차린 것에 불과하다는 걸
그러니 아마 그때로 돌아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해도
결과는 같을 거란 걸 알면서도
한동안 불안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몇번인가 둘 사이가 흔들렸을 때는
지독하게 나쁜 걸 알지만 혹시 기회일까 생각했다
중간에서 화해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그런 저의 마음이 둘 다에게 미안하고 미안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몇 번인가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이내 이런 마음 같은 건 잊었다
저가 이렇게 사람의 손을 타는 약한 사람인 걸 몇번인가 관계가 깨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리고 둘이, 강주를 얻은 흥수가, 흥수를 얻은 강주가 지독하게 부러워졌다
질투가 부러움으로 부러움이 무덤덤함으로 바뀌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벌써 6년도 넘은 이야기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몸이 약해진 탓일게다
저 말에, 다시 한번 마음이 흔들리는 건
남순은 어지러워진 머리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을 한꺼번에 새액 하고 내쉰다
조근조근하던 목소리가 끊기더니
사락사락하고 발끝을 든 것 같은 조심스런 발소리가 조용히 다가온다
제 옆에 멈춘 기척을 느끼고 남순은 몸을 더 둥글게 말고 눈을 꼭 감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가만히 가다온 기척이 제 머리에 손을 올려놓는다
열이 올랐던 탓인지 닿은 손이 차갑다
잠시 남순의 이마에 머물던 손이 이내 떠나고 살짝 물러나는 게 느껴진다
- ... 어때요?
- 열은 아직도 있는거 같은데 뭘 먹어야 약을 먹으라고 할 텐데 영 일어날 생각을 안하네요
- 흥수 오빠는 언제 오신대요?
- 수업 끝나고 온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안 일어나면 말하고 가야죠 뭐
- 근데 언니 이건 뭐예요?
- 아... 고구마... 후훗 이거 우리 엄마가 나 아플 때 해주는 특제 레시피인데, 가르쳐줄까요? 굉장히 쉬워요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또각또각한 칼질 소리와
강판에 뭔가 사각사각 가는 소리, 도란도란한 대화를 배경음으로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남순은 이내 또다시 잠으로 빠져든다
이런 따스함이, 참 오랜만이다
때로... 원했다
=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어둠이 내렸다
얼마나 잔건가 싶어 부스스 이불을 걷고 일어나보니
깜깜한 집에 부엌에만 불이 켜져 있고
쪼그리고 앉은 흥수가 뭔가 책장을 넘기고 있다
- 깼냐
- ... 뭐하냐 거기서
남순이 일어나는 소리를 듣고 흥수가 고개를 든다
잠긴 목소리로 묻는데 흥수는 아무 말 없이 저벅저벅 다가와 남순의 이마를 짚어본다
- 아직 열 있네 ... 죽 먹고 약 먹어라
달칵, 불을 켠다
남순은 갑작스런 빛에 눈을 찌푸린다
익숙하지 않은 듯 찬장을 열고 달그락 거리며 그릇을 꺼낸 흥수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 두 개를 열어보고 남순에게 묻는다
- 뭐 먹을래?
- ... 뭐 있는데?
대체 환자에게 무슨 선택의 권한이 있나 싶어 남순은 느릿느릿 부엌으로 걸어간다
- 그냥 죽이랑
다른 건 뭔데 싶어 힐끗 건너다보니 뭔가 노란 액체다
- 그건 뭔데
- ... 고구마 수프..라던데
- ...?
생각지도 못했던 메뉴에 아직 잠이 덜 깨서 가늘게 떴던 남순의 눈이 커진다
흥수는 저가 한 것도 아닌데도 민망한지 큼, 소리를 낸다
- 강주가 나름 특제라고 해놓고 간 거 같은데...
- ... 그거 먹자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된다고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흔쾌히 먹자는 말에 이번엔 흥수의 눈이 커진다
남순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빠르게 가스레인지 불을 약하게 올린다
- 저게 나름대로 뭔가 비타민도 많고 탄수화물이랑 ... 뭔가 우유던가를 넣어서 영양소가 골고루라고...
속에도 부담 안될거라고 그러더라
그래도 불안했던지 주절주절 설명하는 흥수를 보면서 남순은 피식 웃어버린다
이새끼.. 이렇게 당황하는 거 오랜만이다
- 알았어 맛 없어도 욕 안 할 테니까 데우기나 해
늘 본인이 요리를 잘한다고 주장하기는 하는데
사실 라면 외에는 강주가 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지라 흥수도 불안하긴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남순 몰래 맛이라도 봐 둘 걸 그랬다 싶다
아니 뭐 딱히 니가 욕을 할 거 같아서 그런 건 아니고...
궁시렁거리는 흥수를 뒤로 하고 남순은 휘적휘적 마루로 걸어와 대강 이불을 치우고 상을 편다
부엌에서 서툴게 냄비를 몇번 휘휘 젓던 흥수는
마침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를 가득 떠 가져온다
- ... 음....
잔뜩 긴장하고 있는 흥수의 시선을 느끼며 한숟갈 가득 떠서 입 안에 넣는다
따뜻하고 달큰한 기운이 확 퍼진다
열에 지쳐 있던 몸에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 맛있네
남순의 덤덤한 평에 흥수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저도 한입 먹어본다
달달하고 고소한 게 약간... 어린이 입맛 같긴 하지만 꽤나 풍미도 좋고 먹을 만하다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짓는 걸 보자니 이런 작은 일에도 반응하는 흥수가 우습다
- 이강주 요리도 잘하네
무심하게 칭찬하니 그새 강주를 떠올렸는지 흥수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하기사 저 녀석에게서 저렇게 인간다운 표정을 보게 된 것도 강주 덕분이다
강주가 아니었으면 내내 칙칙한 채로 살았겠지 저 녀석도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빛을 돌려준 사람인데,
흥수에게 강주가 어떤 의미인 줄 알면서 잠시마나 마음이 흔들렸던게 미안해진다
힐끔 보니 아직도 멍한 표정인게, 어이구 생각만 해도 좋냐 좋아 어? 싶다
유독 강주에게 약한 흥수를 익히 아는데도 막상 제 앞에서까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불쑥 놀려주고 싶은 생각에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던져본다
- 강주랑 결혼 안하냐?
- 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 벌써 7년째 아니냐? 니네 이제 헤어지기도 너무 늦었고
- ... 헤어지긴 누가... 시험 패스하면 할거야 결혼
생각지도 않은 진지한 대답에 남순은 먹다말고 입을 벌린 채 흥수를 쳐다본다
툭 대답을 던져놓고 저도 창피했는지 흥수는 고개를 돌린다
- 뭘 보냐 새꺄 먹어
- ... 박흥수 너 ... 역시 괜찮은 놈이었구나
- 됐어 새꺄... 너 이거 강주한테는 비밀이다 아직 시험도 안 봤는데
- 알았어 알았어
뭘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이 남순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 이강주가 안 한다고 그래도 꼭 붙들어
너한테는 이강주가 복덩이다 너 그나마 인간된 거 강주 덕인거 알지?
목석 같던 걸 사람 만들어 공부 시켜 뒷바라지해... 어휴 진짜 열녀 났다 열녀 났어
그래놓고 니가 이강주 버리면 인간이 아니지 암 짐승만도 못하지
오늘따라 말이 많은 남순이 황당하다
이게 열이 오른다더니 약간 이상해졌나 싶다
흥수는 아무 말 없이 남순의 이마를 짚어본다
열이... 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 알겠으니까 먹어라... 먹고 약 먹자
말이 많았나 싶어 남순은 그제야 조용히 스프를 바닥까지 비운다
단데도 질리지 않고 술술 넘어가는 것이 어쩌면 배가 고팠나 싶기도 하다
남순이 다 먹은 것을 확인한 흥수는
부엌에 올려둔 약을 가지고 와서 남순 앞에 두고
주섬주섬 그릇을 챙겨 싱크대로 간다
- 두고 가 내일 하면 돼
하다하다 설겆이까지 하려는 건가 싶어 남순이 말려보지만
힐끗 뒤쪽을 돌아보고 도로 물을 튼다
- 약이나 먹어
뭔 약이 이렇게 많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한웅큼이나 되는 약을 입에 털어넣는다
물 한컵을 다 마시고서야 겨우 약을 다 삼키고 잠시 켁켁거리다가
몇 개 안 되는 그릇의 설겆이 마무리를 하고 있는 흥수의 뒤에 대고 다시 말한다
- 집에 안 가냐
어디서 배웠는지 수건을 탈탈 털어 싱크대 옆에 걸어두면서 흥수가 대답한다
- 자고 갈거야 너 아픈데 혼자 두고 가냐
- ... 안 그래도 되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그냥 가라고 거절해보는데
흥수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 뭐하는 짓이야 너 지금
- 뭐가
- 어따대고 괜찮은 척이야 너 같으면 그냥 가겠냐?
남순은 순간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 같다
한동안 흥수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분주해지면서 자연스레 연락도 전처럼 자주 하진 못했고
이제 다른 세상에서 서먹하게 살아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던 터였다
당연하다는 듯한 흥수의 말을 들으니 저 혼자 그랬나 싶어 울컥한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더니 오늘 참 별일이다
말없이 앉은 남순을 지나 척척 방으로 들어간 흥수는
이불을 도로 잘 펴더니 바닥 온도를 한번 손으로 짚어보고 보일러를 조금 올린다
- 약 먹었으면 들어와 누워라
니가 무슨 아빠라도 되냐...
궁시렁궁시렁거리면서도 남순은 순순히 흥수의 말에 따라 방에 들어간다
- ... 그럼... 우리가 가족 아니냐...?
남순이 자리에 눕는 걸 확인하고서 불을 끄려던 흥수가 조용히, 멋쩍은 듯 말한다
듣고 있던 남순은 뭉클하면서도 닭살 돋는다
저게 이강주랑 다니더니 이상한 돌직구만 늘었네 거참
그래도 그 말이 고맙다
- ... 큼.. 물론 내가 형님인 걸로..
남순이 대답이 없자 민망해진 흥수가 덧붙인다
남순은 대답 대신 베고 있던 베개를 퍽 하고 집어 던진다
- 됐고, 너 혹시라도 강주랑 통화할거면 괜히 들리게 해서 남 염장질 하지 말고 건너방 가서 해라
그리고 그런 고백은 이강주한테나 하고
- ... 나 마루에서 책 좀 더 보다가 잘거니까 필요하면 부르고...
니 말대로 통화는 건너방에서 하마
어휴 저걸 그냥 확, 싶지만
우선은 환자니까 참자 하고 흥수는 순순히 불을 끈다
문을 닫으려는 흥수에게 남순이 조용히 덧붙인다
- 이강주한테 잘 먹었다고 전해라. 고맙다고. 너도.
흥수는 별 말없이 문을 닫는다
어두운 방에 홀로 남겨진 남순은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데도 어쩐지 혼자가 아닌 기분이다
문 건너편에 시험 대비 문제집을 넘기고 있을 흥수의 기척과
낮에 들었던 또각또각한 요리하는 소리가 느껴진다
아직도 그 따스한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장 소중한 친구와
가장 가까운 여자가 가족이 된단다
친구를 잃거나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대신,
가족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자신의 일을 제 일처럼 여기고 함께 있어주는, 그게 가족이라면,
저에게도 비로소 가족이 생겼다고
이제 그 가족이 늘어났다고
이 따스한 기운을 잃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고
보일러 열기 때문인지 제 열이 오르는 건지
따뜻한 기운이 충만하게 가득한 채 잠으로 빠져들려고 하면서
남순은 문득 생각한다
둘이 결혼한다면,
아이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좋은 삼촌이 되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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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냐고...?
..... 고구마 스프가 먹고 싶어서 썼어...... 라는 건 너무 무책임한거 같지만;
근데 진짜 먹고 싶기도 했고, 이상하게 이 아이디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
남순이도 언젠가 한번쯤은 강주에게 미묘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 강주도 그랬을 것 같고... 하지만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가끔 생각나는 미묘한 흔들림을 써보고 싶었으나... 음...
다 쓰고 보니 열에 들뜬 남순이 만큼이나 글도 오락가락하네.. 음... 쩝... 하여간...
기본적으로 흥수*강주 이야기랑 이경*경민 이야기를 다 읽어야 몇몇 설정들은 이해가 될텐데 음... 그래도 안 읽어도 무리는 없을 거야 그치?
약간 마무리가 이상해졌지만, 그래도... 재미나게 읽어주길 바라며.....이만 뾰로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