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you - 외전

[학교2013] 그건 너 외전 2. 형부는 나의 스타 (+episode requested)

april_m 2013. 3. 12. 12:36




- 선영아! 대체 너 언제까지 잘거야! 안 일어나! 

마루에서 저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배어있다 
선영은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인데.... 더 자고 싶지만 
집에 얹혀사는 딸의 신분이란 무녀리만도 못해서 알아서 처신하지 않으면 더한 구박과 핍박이 있으리니...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다 
어머니가 짜증을 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도 역시 피곤하다 
육아휴직에 돌입한 하경의 빈자리 때문에 요즘 일이 너무 많다 

선영은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강 이불을 접어놓고 마루로 나간다 
소파에 앉은 어머니가 TV에 몰입하고 있다 

- 밥 먹어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 .. 방금 깨서 밥은.. 나중에 먹을게요 

선영은 대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병을 꺼낸다 
뭔가 신선한 걸 마셔야 속이 좀 편해질 것 같다 
컵에 따른 차가운 주스를 한모금 마시니 머리가 띵,해온다 
어휴 

컵을 들고 마루 쪽으로 다가간다 
대체 뭘 보시길래 저렇게 몰입하셨대 
요즘 새로 나온 드라마라도 있나 

- 저 청년 사람 참 괜찮네 너도 저런 사람 좀 데려와봐라 

소파에 슬쩍 앉는 선영은 보지도 않고 어머니가 중얼거린다 
그제야 TV를 보니 ... 지훈이다 
얼마후에 영화가 개봉한다더니 그 홍보인가... 

엄마, 저 사람 유부남이우.. 애도 있어.. 

선영은 한숨 대신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저라고 왜 저런 사람 데려오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 
데뷔할 때부터 제 이상형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처음 영화관에서 지훈을 보았던 때가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러 나왔다가 바람 맞은 날, 
그러니까 그날은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썸남에게 슬쩍 고백이라도 해볼까 하는 계획이었는데 
무참하게 거절 당하기도 전에 아예 잊어버린 듯 나오지 않아서 더 비참해졌던 날이었다 
곱게 화장하고 차려입은 채로 홧김에 아무거나 봐버려야지 하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스크린 속 지훈을 보았다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선영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닥치는 대로 영화들, 그러니까 개봉작 뿐 아니라 아주 오래된 영화까지도 
어떻게든 DVD나 상영회를 찾아내서 섭렵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어지간한 영화나 배우에 마음이 떨리는 일은 점점 드물어져 
이것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의 숙명인가 까지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 만난 지훈의 연기는 기술적으로 아주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 간혹 얼어있거나 굳어 있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곤 해서 
어쩌면 왜 저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웠는가, 하는 의문을 얼마든지 품을 수 있었다 
다만, 지훈의 연기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걸 뭐라고 부르던 간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다 
적어도 선영은 그것에 설득당했다 

저런 배우가 어디에서 왔지?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저를 바람맞힌 상대라던가 그 상대에 대한 분노 같은 건 잊었다 
절박한 눈에 대조되는 어딘가 삶의 일부를 포기한 듯한 분위기 
서툴지만 성실한 열정이 담긴 연기. 
선영은 당장 지훈의 프로필을 찾아보았고, 그날 이후 팬이 되었다 
자신이 보았던 그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고 조연으로, 그리고 이내 주연으로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서 
저만 알고 있던 보석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 같아서 아쉬우면서도 
제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기뻤다 

제가 저 배우의 첫번째 팬. 이라고 속으로 생각해왔는데... 

선영은 아무 말 없이 주스를 홀짝인다 




- 지금의 부인 되시는 분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겁니까? 

TV 속 엠씨가 묻는다 

- 어휴 얘기 하자면 긴데요 
-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 시작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죠 

지훈의 얼굴이 활짝 핀다 

- 통 공개를 안하셔서 굉장히 소문이 많아요 첫사랑이라고도 하고, 
- 첫사랑,이죠 저한테는, 아내한테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그럼 고등학교 때 부터 만나신 건가요? 십년이 넘는 세월인데 
- 아뇨, 중간에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어요 
- 아니 어떻게.. 
- 그렇잖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너무 불안정하고.. 그땐 제가 무명 때니까 언제 데뷔를 할 수 있을지 
  한다고 해도 주목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옆에 있는 사람 고생시키기 싫다는 마음에 먼저 헤어지자고 했는데... 
  헤어져있는 동안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구요, 없으면 안될거 같고..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붙들었죠 
- 단번에 받아주던가요? 

지훈이 쑥쓰럽다는 듯 웃는다 

- 제 아내도 절 기다리고 있었더라구요 제가 좀 더 빨리 갔어야 했는데, 그땐 제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야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서 
  맘 고생 시켜서 미안하죠 
- 아내되시는 분도 영화계에서 일하신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습니다 
- 아 네.. 저랑 헤어져있는 동안 영화 공부를 했더라구요, 원래 그런 쪽이 아니었는데... 그 덕분에 다시 만났죠 작품 때문에 





- 어머, 저 사람 부인도 영화 쪽 일하니? 너 알아? 

어머니의 놀랍다는 듯한 질문에 선영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알지 엄마... 왜 몰라... 내 옆자리에서 일하던 내 사수인데... 


처음 회사에 입사해서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막 부서 배치를 받고 
함께 일할 사수로 하경을 소개받았다 

- 송피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신입사원, 선영씨. 송피디가 멘토니까 앞으로 잘 좀 가르쳐봐 
- 안녕하세요 임선영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자 
머리를 연필로 틀어올리고 PC 화면에 빨려들어갈 듯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하경이 
그제야 저를 보며 웃었다 

- 잘 부탁해요 송하경이예요 

음침하기까지 했던 분위기가 미소 한 번에 사라졌다 
엄청난 미인이다, 생각하면서 내민 손을 잡았다 
원래 영화계에서 일하려면 스탭도 다 이렇게 예뻐야하나 하는 착각이 들었더랬다 

함께 일하게 된 하경은 대단히 유능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심장에 
조근조근하게 윗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걸 보노라면 
과연 저도 5년이 지나 저 자리에 올라가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할 때 냉정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저에게는 좋은 선배여서 
지적을 할 때도 언제나 칭찬을 먼저 하고 이후에 고칠 점을 말해주곤 했고 
업무를 주기 전에는 왜 이게 필요한지 설명해서 제가 소모되고 있거나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첫 직장의 첫 상사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다니 얼마나 행운인가, 하고 선영은 몇번이나 생각하곤 했다 
친절한 하경은 그러나 그 이상의 곁은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장 많이 붙어있는 사이이고, 
일부러 함께 영화를 보러간다던가 저녁을 먹으러가곤해도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선영의 쪽, 하경은 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서울대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들어온 재원,이라는 배경의 하경에게서 결핍을 읽어내는 건 어려웠다 
아주 가끔씩 텅빈 얼굴의 하경을 발견해도, 그건 대개 영화를 보는 중이거나 본 후여서 그저 예민한 감수성의 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잘 들어주고 상담해주는 좋은 선배, 좋은 언니. 제가 가장 의지하는 존재. 

그랬는데... 

설마 하경이 그, 지훈과 인연이 있을거라던가 
심지어 결혼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여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는데요 

엠씨가 주섬주섬 봉투를 꺼낸다 
선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설마 저건! 

- 아내분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 어휴... 

지훈의 얼굴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놀라 붉어진다 
보고 있는 선영도 놀랍다 
회사에서도 그렇게 이지훈의 부인,으로 불리는 걸 질색하던 하경이었는데 

- 제가 대신 읽어드릴게요 

엠씨가 목을 가다듬더니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선영은 어쨰서인지 시작부터 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지훈아 
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네 네 이름 
잊고 있었어 서연 아빠, 이지훈 배우, 그렇게만 불러서 
편지도 너무 오랜만이다 우리 편지 굉장히 많이 주고 받았는데 

서연 아빠, 
당신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인 거 알지? 
처음 무대에 주연으로 섰던 당신을 보고 울어버렸잖아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는 당신을 보면 그때처럼 떨려 
더 잘난 사람, 더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나 때문에 일상에 갖히지 않을까 늘 걱정이야 
지금도 당신한테 잘하지도 못하고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나를 받아줘서 늘 고마워 
서연이랑 씨름하느라 늘 지쳐있는 나를 예쁘다고 해주는 당신이라 너무 감사해 
매일 더 잘하겠다는 그 약속 지금도 지켜줘서 고마워 
나도 더 잘할게 영원히 빛나는 배우로 남아줘 사랑해 


선배.... 저런데 재능낭비하지 말고... 빨리 복귀해서 기획서나 쓰라구요... 
왜 제가 남의 애정 고백을 공중파로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문득 짜증이 난다 
전파낭비다 전파낭비 

- 출연은 힘드시다고 특별히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요 
- ... 지금 아이 때문에 집에 있어서요 너무 고생 많고... 

지훈은 조금 울먹거리고 있다 
형부.... 지금 우는 거임...? 창피하게... 

- 아내분이 무대에 선 이지훈씨를 보고 우신 적이 있나봐요? 
- 아.. 제가 무명 때 우연한 기회에 무대에 섰는데... 그때 보러왔던 아내가 절 보고 울었죠 그때, 이 여자다. 생각했거든요 저도 
- 역시 배우의 운명을 타고 나셨나 봅니다 배우자도 무대를 통해서 만나고 
- 저를 발견해준 아내가 은인이죠 


지훈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저런 표정... 본 적 있다 그것도 직접 눈 앞에서 




지훈의 공개 고백 이후 발칵 뒤집힌 그 다음날부터 
어쩐지 질투도 나고 그동안 말 안한 하경에게 섭섭하기도 해서 퉁명스럽게 굴었더니 
얼마 지난 주말 하경이 저를 제 집으로 초대했다 

그동안 그렇게 가겠다고 해도 안 불러주던 하경의 집에 처음 가는게 이런 이유에서라니 영 불만스러웠지만 
애절하게 부탁하는 하경을 딱 거절할 수 없었다 
퉁명스런 태도로 집에 들어서자 하경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리로 안내했다 

- 선영, 스파게티 좋아해? 나 그거 하려고 하는데 
- ... 무슨 스파게틴데요... 

저는 암만 그래도 하경 선배 빠다 
여기 와 있는 거 자체가 그런 거다 
선영은 부스스 일어나서 좁은 부엌으로 다가간다 

- 올리브 오일 좋아해? 알리오올리오? 봉골레? 아님 크림으로 해줄까? 
- .. 스파게티 솜씨를 보려면 알리오올리오를 먹으라던데, 선배 잘해요? 
- .. 나쁘진 않지 아마? 

저를 보며 씩 웃는 게, 순간 데자뷰.다 
왜 닮은 거 같냐 저의 이상형과 
에휴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어쩌랴 

프라이팬에 마늘을 볶기 시작하는 하경 옆에 서서 찬장에서 접시와 컵을 꺼낸다 
두 개씩 꺼내는 선영을 보고 하경이 말한다 

- 하나 더 꺼내줘 세 개씩 
- ...? 누구 더 와요? 

선영이 의아한 듯 묻자 하경이 그제야 얼버무리며 대답한다 

- 아... 뭐... 누가 올거야 좀 있다 

선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건을 세팅한다 
대체 누가 온다는 건지 궁금한데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하경의 모습이 대답을 거부하는 듯 어색해보여서 
설마 선배가 이상한 사람 초대하기라도 했으랴 무심히 넘기고 말았다 

- 선배, 뭔가 좋은 냄새가 나요... 

고소한 마늘과 기름 냄새를 맡자 배가 고파온다 
하경이 생긋 웃으며 능숙하게 삶은 면을 꺼내 볶기 시작한다 

- 기대해도 좋아, 내 특제 스파게티는 인기가 꽤 좋으니까 와인이랑도 잘 어울리고 
- 와인도 있어요? 

선영이 두리번거리자 하경이 볶은 면을 접시에 담으면서 대답한다 

- 곧 올거야 우선 앉아 

와인도... 곧 와요...? 
의아해하는 선영이 자리에 앉자 
하경은 냉장고에서 피클이며 치즈를 꺼낸다 

- 별로 차린 건 없지만 
- ... 굉장한데요 선배 이거 뭔가...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 유학할 때, 이게 제일 싸거든 만들기도 간단하고 면이랑 마늘이랑 오일만 있으면 되니까 기본적으로 

고소한 냄새에 감탄하며 포크로 면을 말아 올리려는데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온다는 그 사람인가 싶어 하경이 나가도록 두고 
누군가 빼꼼이 내다보다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 안녕하세요 
- 우리팀 선영씨, 알지? 
- 알지 현장에서 봤잖아 여러번, 처음에 미팅 때도 선영씨가 오셨구요 맞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인사는 커녕 대답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내다보느라 뒤로 젖힌 의자가 넘어질 뻔 했다 

- 여기 와인, 이거 맞아? 
- 아, 응 이거 맞아 잘 사왔네 
- 스파게티야? 자랑만 하고 안 해주더니 
- 그러니까 오늘 해주잖아 얼른 앉아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어 둘을 빤히 쳐다본다 
얼어버린 저를 앉혀두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둘은 그제야 선영을 보고 말을 건다 

- 선영씨, 괜찮아? 
- 아, 네 선배 괜찮죠 그럼요.. 아하하... 맛있겠네요 이거 
- 많이 드세요 먹을만할지 모르겠지만 저도 말만 듣고 한번도 못 먹어봤거든요 

저를 향해 찡긋 눈짓을 하는 이지훈이 정말 그 이지훈인지 모르겠다 
선영은 눈을 깔고 접시에만 집중하다가 힐끔 눈을 들어 둘을 쳐다본다 
저를 잊었는지 맛이 있네 없네 하고 둘이 티격태격하다가 지훈이 무심히 하경의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하경이 순간 수줍어진다 

하경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아니 지훈의 저런 표정도 처음 본다 

이 사람들이.... 지금 솔로 앉혀놓고 염장질이야 뭐야 

빤히 보는 선영을 느꼈는지, 하경이 조심스레 말을 한다 

-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구... 
- 제가 말하자고 했는데 하경이가 워낙 완강해서요 
- ... 너 내 탓할거야 자꾸...? 
- 그러니까 미리미리 말했으면 이렇게 속상할 사람 없고 좋잖아 선영씨 섭섭했죠? 

저를 보고 동의를 구하는 지훈에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게 아닌데 뭔가 

- 넌 좀 조용히 해.. 하여간 선영, 내가 진짜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거든.. 상황이 좀 그래서, 미안해 

하경이 두 손을 모으고 저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 선배... 이러는 거 처음 본다... 
에고......... 

선영은 고개를 젓다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 그래서 둘이 언제부터 만난건데요? 
- 응? 
- 어디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저한테 말씀 안하신 이야기가 어디까진지 
- 선영... 진짜 화났.. 

퉁명스런 선영의 반응에 하경이 당황하는데 지훈이 불쑥 끼어든다 

- 고등학교 때 만났어요 우리, 동창인 건 아시죠? 

그리고 그 이후로 두 시간 동안 제 이상형인 남자가 제 이상형인 여자와 사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야기를 풀로 들었다 
그동안 어디 가서 누구한테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아온 게 폭발했는지 지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때도 형부가.... 좀 눈치가 없긴 했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처음 본 저에게 그 얘길 다 하고 싶었을까... 
그래..... 그래도 언니니까 데리고 사는 거지... 암... 그럼... 
그날 일을 떠올린 선영이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두 시간에 걸친 연애 스토리를 듣는 동안 
지훈이 사온 와인을 대부분 저와 하경이 나눠마시느라 에라 아무렴 어떠랴 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 ... 그럼 선배가 튕긴거예요? 이지훈 배우님을? 선배 완전 별루다 
- ... 그치... 쟤가 나 튕기려고 하는데 내가 꽉 잡은 거지... 
- 선영 괜찮아? 너 좀 취한 거 같아 지훈아 너도 쫌 

하경이 말려 보지만 이미 분위기에 휘말렸다 

- 배우님이 좀 대단하시네요... 아 뭐... 우리 언니가 좀 괜찮긴 하지만... 
- ... 근데 선영씨는 나한테 언제까지 배우님 할건가? 
- 에? .... 그럼 뭐라 그래요 
- ... 형부 좋네 형부. 하경이 보고 언니라고 하면 나는 형부지 
- 우와, 진짜요? 진짜 형부라고 불러요? 우와 
- 그래 선영 처제, 형부라고 불러 
- 둘 다 좀 그만 해! 

하경의 짜증을 뒤로 하고 술김에... 이상형과 형부-처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뭐 그런 건데.... 
술 김이니 잊어버렸다고 하면 그만일텐데 지훈은 그후로도 
사석에서 만나게 되면 꼬박꼬박 저를 처제,라고 웃으며 불러주었고 
자연스레 저도 지훈을 형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뒤늦게 하경의 호칭도 선배에서 언니로 바뀌었다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선배였지만 




- 아휴 쟤네는 어쩜 저렇게 예쁘게 사니 

어머니의 감탄사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다 
TV에서 아기 사진이 나오고 있다 
선영의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백일이 지난 뒤 하경의 집에 놀러가서 본 서연은 어쩜 아빠 엄마를 쏙 빼닮았는지 
아직 아기인데도 쌍꺼풀이 질 것 같은 큰 눈을 깜빡거리면서 
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에 홀딱 빠져버렸다 
언니네 아기는 암만해도 눈이 쏟아질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정말 그 구슬같은 눈은 금새라도 데구르르 떨어질까봐 불안할 정도로 크고 맑았다 
제가 잠시 안고 있는 동안 서연을 바라보는 지훈과 하경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지쳐보이면서도 부드럽고 행복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지훈이 너무 서연을 끼고 돌아서 
저래서야 시집이나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경은 웃으며 몰래 속삭였었다 

- 아기가 너무 예쁘네요, 이름이 뭐라구요? 

엠씨의 말에 지훈이 배시시 웃는다 

- 서연이요 이서연, 엄마가 워낙 미인이라서요 딸이길 정말 바랬는데 다행이죠 엄마 닮은 딸이라 
  머리도 좋을 거 같아요 아내가 워낙 똑똑하거든요 성품도 좋고 

형부.... 그쯤 되면 염장질이 아니라 고문이예요! 그만해요! 그만하라고! 
지훈이 평소에도 얼마나 하경을 떠받드는지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지나친 자랑질에 선영이 불에라도 덴 듯 진저리를 친다 
그런 선영을 어머니가 이상하게 바라본다 

- 왜 그러니? 
- 응..? 아... 그냥... 좀... 짜증나지 않아 저런 거? 자기만 결혼한 것도 아닌데 유별나게 
- 남 행복한 거 보면 좀 배울 생각을 해야지... 너도 저런 사람 만나서 저렇게 살아야겠단 생각 안 들어? 보기 좋기만 하구만 

엄마.... 저게 다가 아니라고.... 저게 배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말이예요.... 
저기에서 말하는 건 정말 백분의 일도 안된다구! 
내가 그동안 당한 염장질을 다 모으면... 진짜 염전도 차리겠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 때문에 선영은 속에서 불이 난다 
주스를 마실까 보니 이미 홀짝이며 다 마셔버렸다 
선영은 벌떡 일어나 다시 냉장고로 간다 
이번엔 냉수를 꺼낸다 

냉수 먹고 속이나 차려야지 젠장. 

벌컥벌컥 냉수를 마시고 있는데 마지막 멘트가 나온다 

- 마지막으로 이지훈씨에게 행복이란 뭔가요? 
- 음...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 이라고 해야겠네요 
- 오, 현재에 만족하면서 사는게 정말 어려운데 말이죠 
- 배우로서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좋구요...  완성이란 없는 거 겠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까요 딸이랑 아내랑 함께 있으면 그저 이 시간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 들죠 

하아....... 
선영은 급기야 참았던 한숨을 내뱉고 만다 
마지막까지 화면에 집중하던 어머니가 그 한숨에 돌아본다 

- 선영아, 엄마는 저런 사위면 딱 좋겠다 더도 안 바래 
- ... 난 별로야... 

선영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하경이 왜 제가 지훈의 사진을 들이밀며 잘생겼죠 했을 때 난 별로, 라고 했는지 알겠다 
내 것이 될 수 없으면 다 별로,인거다 

아 속쓰려.... 

내 짝은 대체 어디 있는거지...? 
















이건 쓰면서 들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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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평소보다 좀 더 날려쓴 글을 남기고 가... 
새로운 이야기 짜다가 죽을 거 같아서, 
기분 전환 삼아 오늘 새벽에 어느 베이리가 남겨준 리퀘스트에, 원래 외전으로 쓰려고 했던 아이템을 붙여봤어.. 
후루룩 써버려서 어수선하지만 즐겁게 봐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