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그건 너 외전 4. fairy tale
타다닥
급하게 거리를 달린다
내일 뭐입지 내일 뭐하지 고민하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더니
결국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하필. 하필 오늘.
지수는 제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
잠에서 깨고 보니 이미 약속시간 근처였다
기껏 고민했던 것도 소용없이 방바닥 위에 늘어놓았던 옷 중에 아무거나 집어 입고 뛰쳐나왔다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지갑을 두고 버스카드만 들고 나온 걸 알았을 때도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일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카페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는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눈으로 안을 둘러본다
조용한 공간에 순간, 침범한 듯한 기분이 된다
구석자리에 앉은 남순을 발견한다
늦는다고 보낸 문자에 답이 없길래 가버렸을까 걱정했는데
창가 자리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햇볕을 받고 있는 모습이 배경처럼 익숙하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리내지 않고 자리에 앉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의 남순은 꼭, 사라질 것만 같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가느다랗게 감고 있는 눈
긴 팔은 귀찮은 듯 꼬여있고 아무렇게나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해사한 얼굴에 낭창낭창하게 마른 몸,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서른 둘이라니. 이 사람이.
저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니.
이 세계의 시간과 상관없는 속도로 걷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 없는 듯이
=
처음 만난 날에도 그랬다
경민을 따라 이경을 만나러 간 라면가게에서
평소처럼 이경에게 용돈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있는데
마르고 하얀 남자가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서 걸어나오더니 이경을 툭 쳤다
- 가위 어쨌냐?
- 응? 헉 미안
이경이 주섬주섬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작은 가위를 꺼내자
쯧,하고 가위를 받은 남순이 돌아서다 저와 눈이 마주쳤다
신기하다..
그게 첫 인상이었다
동화책에서 본 것 같은 왕자님
공중에 반쯤 떠있는 것 같은 존재감
어딘가 이 세계에 속한 게 아닌 것 같은 희고 길고 휘청이는 사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번 깜빡거리지도 않고 남순을 뚫어지게 보는 저를
남순은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그제야 이경이 끼어들어 소개했다
- 사촌동생이야 한지수. 지수야 여긴 오빠가 같이 일하는 친구 고남순
말이 없이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는 지수를 보더니
남순이 손을 들어 쓱쓱 쓰다듬었다
- 예쁘네
확 얼굴이 붉어진 지수를 두고 남순은 도로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 저 자식 요즘 애정결핍인가, 놀랬냐? 원래 자주 저래
주로 애들이나 동물들한테 그러는데 너한테도 그런 걸 보면 니가.. 애로 보였나?
시덥잖다는 듯 말하던 이경이 막판에 저를 놀리듯 또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애라니, 발끈해서 털어버렸지만 제 머리에 닿았던 남순의 손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하얗고 긴 그 손가락이 제 머리를 헤집은 그 날,
그때부터였다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건
저를 봐주지 않아도, 자꾸만 눈이 따라갔다
식욕도 없고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떨리고 열이 났다
가까이 가면 더 심해졌지만 멀어지면 죽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내내 무심한 남순의 태도에 말도 함부로 걸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저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했을 때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한 적이 없는데
그저 보는 것조차 안되느냐고 말하려고 했을 때, 남순이 한발 빨랐다
넌 어려서 그래. 란 말에 아무 항변도 할 수 없었다
나이는 극복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시간을 뛰어넘어서 남순이 아는 걸 저도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좇아갈 수 없는 거리
남순이 사라지고 나타난 이경을 안고 펑펑 울었다
매일 저를 놀리기만 하던 이경은 그때만은 저를 안고 아무 말 없이 제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잊으리라 생각했다
저도 보지 않으리라 저를 보지 않는 사람 따위
당신도 내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주리라
그러나 때때로 빛 좋은 날이면, 그 쓸쓸한 모습이 떠올랐다
가만히 햇볕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강주와 함께 남순의 집에 갔던 그 날 집안에 감돌던 그 서늘하고 쓸쓸한 공기가
금새라도 빛을 따라 흩어질 것 같던 옆모습이
그리고 저를 내버려두고 돌아서던,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오롯이 혼자 휘청이며 걷던 뒷모습도
아주 가끔 혼자 중얼거려보곤 했다
당신은, 아직도 쓸쓸한가요.
인턴십으로 외국에서 지내다 비자 때문에 잠시 귀국했을 때
강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남순을 만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몇년만의 그는 여전히 크고, 마르고, 쓸쓸했다
아무에게도 매달리지도 누구를 원하지도 않을 것 같은 스산함
그래서였다
내 마음을 달라지지 않았다고,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말해버린 건
붙들어야만 할 것 같아서,
당신이 이곳에 있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줘야만 할 것 같아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그런 저를 내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순은 그 대신 제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더니 뜬금없이 등심을 제 접시에 올려주고 가버렸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끔 라면가게를 찾아가면 라면을 끓여주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제가 이야기를 시작해도
남순은 그저 저를 가만히 두고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달라진 걸까 달라지지 않은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이젠 저를 봐준다는 게
아주 가끔은 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남순이 땅에 내려앉는다는 기분에
금새라도 붕 떠서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가 사라진다는 느낌에
그게 착각이든 뭐든 붙들고 싶어져서
지수는 불현듯 라면가게를 찾아가곤 했다
그렇게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시간을 뚝 잘라내버리고 중간을 이어붙인 것처럼
서로 빈 시간을 모르는 척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지나오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건
수요일 아침이었다
출근길에 간혹 들러 초콜렛 같은 걸 문 닫은 가게에 꽂아두고 가던 버릇대로
다가간 문 앞에서 이전에 없던 걸 발견했다
지금 제가 나와 있는 이 시간과 이 장소와 그리고, 묻지 못했던 핸드폰 번호가 적힌 쪽지
그건 무슨 의미일까
의미를 부여해도 좋은 걸까
가만히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얹은 채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남순을 올려다본다
저는 왜 여기 있나요
지금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
고개가 툭 떨어져 잠에서 깬다
잠깐 졸았던 걸까 카페 벽의 시간을 확인한다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
어제 좀 잠을 설친 탓이다
마른 세수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드니 앞에 앉은 지수가 보인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이 꼬맹이 녀석...
피식 웃음이 난다
뭐라고 해야 할까
꽤 미인인 건 틀림없었지만 남순의 눈에는 어쩐지
햄스터라던가 테디베어라던가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과 비슷하게만 보였다
땡그란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걸 보면
먹이달라는 건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힐을 신고도 제 어깨에 채 미칠까 말까한 키에 쪼르르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있자면
저렇게 어린애한테 대체 그 회사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시키는걸까 괜한 걱정이 됐다
- 제가 왜 꼬맹이예요?!
하도 왜 저를 꼬맹이라고 부르느냐고 끈질기게 물어서
대답 대신 손짓으로 제 어깨에 간신히 닿는 머리를 쟀더니
다음번엔 부러질 것 같은 킬힐을 신고 나타났다
그러고도 꼬맹이라고 부르는 저에게 또 저가 왜 꼬맹이냐고 하도 물어대서
- 너 태어났을 때 난 이미 학교를 다녔단다 아가야
라고 했더니 그말에 또 파르르 하는 것이 자꾸만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꼬맹이라던지 아가야라고 부르기만 해도 진저리를 치던 어느 날인가는 오히려 톡 쏘면서 물어왔다
- 내가 아기면, 오빠는 뭐 그럼 아저씨예요?
- .. 아저씨는 맞지 나야 이제
- 자꾸 그렇게 부르면 아저씨라고 부를 거예요
- 그렇게 억울하면 그러던가
어쭈 당돌한데 싶어서 그러라고 했더니 그 후로는 꼬박꼬박 아저씨,라고 불러왔다
그럴 때마다 이겼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게 귀여워서 또다시 지지 않고 꼬맹이라고 부르곤 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아직도 젖살이 남아 있는 것이
스물 여섯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정장만 벗으면 당장 십대로 보이면서 어찌 그리 꼬맹이란 말을 싫어하는지
누가 봐도 어린애로만 보이는데
아가야 잘도 자네.
=
경민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건
이경의 마감을 기다리며 같이 퇴근하겠다고 온 경민은 왜인지 자연스럽게 라면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다고 또 커피를 뽑아주고 있는 걸 보면 습관이 너무너무너무 무섭다
커피를 내려주고 제 할일에 집중하는 남순을 보던 경민이 툭, 던졌다
- 지수 아가씨랑 어쩌려고 그래?
- ... 뭘
- 나 이이경 아니야, 그 둔탱이랑 같은 레벨로 보지마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진지하다
남순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경민을 본다
-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 아직?
경민의 표정이 의아해진다
남순은 잠시 고민하는 듯 천정을 올려다본다
- 너 같으면 나 같은 사람 동생 주겠냐?
- 응?
잠시의 침묵 후에 남순이 대답한다
- 너 같으면 나 같은 사람 만나겠냐고
저 같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 객관적으로 봐서, 고졸에, 일진에, 집도, 배경도, 재산도, 가족도 없어 나 같은 사람 또 아냐?
- .... 오정호...?
경민이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한다
남순이 피식 웃는다
- 그래, 오정호 있네
잠시 침묵이 흐른다
- .. 박흥수도 강주 만나서 잘 살잖아, 이이경이랑 나도..
그게 이렇게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이유인가 싶어, 경민은 문득 희망을 꺼내고 싶은 생각에
남순에게 말하지만 남순은 경민의 말을 거부한다
- ...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니네는, 서로 어떤 사람인지
난 좀 달라, 너희들이랑은
- 지수 아가씨도 알고나면..
- .. 몰라 그 꼬맹이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지도
남순은 뒷 말을 삼킨다
경민은 할 말을 잃고 잠시 쳐다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 묻는다
- 그래서, 어쩌려고, 그냥 두는 거야 그때처럼 지나가게?
아니면 어장관리라도 하는 거야?
유독 그런 거에 예민한 경민의 목소리가 뾰족해진다
남순은 허탈하게 웃는다
- ... 기다리는거야
- 응?
경민의 눈이 더 설명을 요구하는데도 남순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다
더이상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태도에 경민은 이내 포기한다
애초에, 걱정했을 뿐이다
남순이 지수를 거부하거나 어장관리하는게 아니라면 어느 쪽이든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정작 경민은 말없이 떠난 그날 밤
고요해진 라면가게에 앉아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 나서면서
남순은 충동적으로 쪽지를 쓰고 말았다
그토록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려고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던
제 연락처와 지금 이 순간과 이 장소
다음 날 지수가 아침에 다녀갈 수도 아닐 수도
그리고 이 쪽지를 발견할 수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시험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게 될지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건지
=
남순은 가만히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잠든 지수를 바라본다
어디에서 왔을까 이 작은 존재는
사랑받고 있어요 란 아우라로 감싸고
겁도 없이 모든 사람들 사이를 부산하게 날아다니면서
아직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이 아이는
저 정직한 눈으로 저를 직시하고
제가 드러내지 않은 그 어둠을 보면
제가 지나온 쓸쓸한 시간과 깜깜한 순간들을 알게 되면
혹시라도 제 어둠들이 이 아이의 빛을 바래게 할까봐
무섭다.
아무에게도 열지 않았던 틈이 어느새 생겨버렸지만
그 틈으로 새어나갈지도 모를 그 어둠을 알게 되면
저에게 실망할까봐 두렵다
세상의 밝은 면만 보고 자란 이 아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세상의 어둡고 어두운 것까지 겪은 후에도
그래서 제 어둠을 발견해도 여전히 저 성실한 눈으로 저를 바라봐줄 수 있을지
기다려왔다
지금까지.
남순은 조용히 손을 들어 지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넘긴다
꼬맹이 아가씨,
넌 언제쯤 준비가 될까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겠니 이 어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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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아침이 되면 멘붕의 하루가 펼쳐질 것 같아서
일찍(도 너무 일찍) 올려 그래서 좀 짧아 ... 라고 하는 건 비겁한 변명
냔들이 요청한 에피들을 먼저 쓰면서 뒤로 밀렸지만 이게 원래 처음 쓰려고 했던 외전이었어
남순이는 무슨 마음일까, 지수는 무슨 마음일까, 쓰면서도 잘 모르겠긴 하네...
그저 결핍을 모르던 아이는 결핍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던 아이는 용납을 받게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아주 처음의 이야기를, - 남순아 행복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