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그건 너 외전 6. how do i say
- 고회장
뒷정리를 하고 있던 남순이 무심히 고개를 든다
정작 저를 부른 이경은 말없이 불안한 눈으로 저를 본다
갑자기 마감시간쯤 들이닥쳐서는 저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뭘 말하려는 듯 하다 이내 말다가 하고 있다
카페 주인에게 대체 왜 라면가게에서 커피를 내려줘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버릇대로 한잔 내려줬더니 또 그걸 받아들고 홀짝이며 십몇분째 저 상태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 뭔지 모르지만 제발 부부 일은 둘이서 좀 알아서 해라...
매번 경민이 와서 저렇게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더니만 오늘은 이경의 차례다
또 무슨 일로 싸웠길래 저러나 싶어 말만 꺼내놓고 망설이고 있는 이경에게 묻는다
- 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남순을 보고 이경이 다시 한번 망설인다
제 성질에 못 이겨서라도 말을 해도 벌써 했을 이경이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지 모르겠다
- 남경민이 또 뭐래냐? 니가 좀 져줘라 너 너무 이겨먹으려는 경향 있어 결혼했는데 이제와 이겨서 뭐 하냐
그리고 넌 애초에 남경민한테 이기긴 글렀거든...
남순이 퉁명스럽게 넘겨짚자 이경이 데구르르 눈을 굴리더니 다시 한번 남순을 부른다
- 고회장
- ... 아 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이경이 어렵게 입을 연다
- 지수, 선 본대
툭 그 말만 던져놓고 미안한 듯 고개 숙인다
남순은 잠시 멍해있다가 저도 모르게 묻고 만다
- ...언제..?
- ...내일..
왜 이경이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
왜 제 몸이 무거워지는지도 모르겠다
남순은 뒷정리를 하고 있던 카운터 앞에서 천천히 움직여 테이블에 기대앉는다
- 그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남순을 보다 이경이 조심스레 말을 건다
- 확신이 없다고...
생략된 주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겠다
경민이 알았다면 이경도 알고 있겠지
남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든다
- 혹시 필요하면 오늘이라도..
- 어떤 사람이래? 조건은? 나이는?
이경의 말을 끊고 남순이 무덤덤하게 묻는다
오히려 대답하는 이경의 목소리가 당황한다
- 서른.. 이라던가.. 회계사라는 거 같던데..
대답을 잘 한 건지 고민하는 이경을 두고
잠시 한 구석을 보며 생각을 고르던 남순이 이내 무심히 말한다
- 잘됐네, 좋은 사람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도로 카운터 앞에 서서 매상 정리에 몰두한다, 아니 몰두하는 것 같다
더이상 말하기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아씨.. 이게 아닌데..
불편하게 몇 분을 앉아 있던 이경이 조심스레 일어난다
- 나 간다 근데..
- 어, 가라
멈칫하는 이경을 단칼에 잘라버린다
그런 남순의 인사에도 이경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늘 저에게는 한발 앞선 어른이었던 친구에게, 비로소 제가 한마디 해야할 때인 것 같다
이경은 숨을 들이쉬고는 말한다
- 정말 원하면, 솔직해도 괜찮잖아 이젠
=
곧 여름이 되려나보다
옅게 열기가 느껴지는 공기가 그러나 아직까지는 싱그럽다
딱 걷기 좋은 밤이다
아마도, 평소였다면
늘 신던 하이힐인데 오늘따라 발이 아파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걸음이 약간 끌린다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친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불편하기도 하고 복잡한 머리 때문에 조금 걷고 싶어져서
굳이 두 정거장 떨어진 교차로에 내려달라고 한 참이었다
하아...
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만다
아무래도 나가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의미 부여하지 말고 한번만 나가보는게 뭐 나쁘냐고 했어도
고개를 끄덕이지 말았어야 했다
도저히 제게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은, 내내 저를 어린애로만 취급하는 남순에게 실망해서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맴돌기만 해야하나
정말 나를 어린애로만 보는 거면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된 저를 봐주기를 기다려도 가능성이 없는 거면 포기해야할까
경민에게 투정부리듯 털어놓은 게 시작이었다
이경과 달리 눈치가 빠른 경민은 지수의 마음을 오래 전부터 알아채고 있어서 이전에도 몇번인가 답답한 걸 털어놓았었다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니 인생인데 니 마음이지 하는 제법 대범한 구석도 있어서 대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경민은 냉정한 얼굴을 하고 제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 그럼 다른 사람을 한번 만나보면 어때요?
- 네...?
- 냉정하게 하는 말인데, 아가씨는 너무 어릴 때부터 고남순만 바라봐서 그게 익숙해진 걸 수도 있어요
시험삼아 다른 사람 만나봐요, 세상엔 고남순만 있는 건 아니니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 억울한 기분에 승낙해버린 건
경민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며칠 새 소개팅 상대를 구해 연락처를 넘겼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
지수는 생각하니 더 미안해진다
차라리 이상하거나 나쁜 사람이었으면 나았을 걸
경민이 연결해준 상대는 어쩐지 어색해서 실수연발에 말도 잘 못하는 저를 그저 웃으며 넘겨주었다
차분한 매너에 나름대로 즐겁게 화제를 이끌어가기도 했고 식사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런데 저녁 내내 남순이 떠올랐다
라면 귀신에 야쿠르트 좋아하는 애기 입맛에 저를 이름 한번 불러준 적 없이 내내 꼬맹이라고 놀리기만 한 남순이
놀릴 때 말고는 말도 별로 없고 제게 딱히 잘 해준 적도 없는 그 아저씨가
자꾸만 생각났다
아 이런 말을 하면 아저씨는 날 놀렸을 건데
이렇게 당황하면 아저씨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걸
이런 실수를 하면 분명 놀릴 거리 찾았다고 즐거워했을텐데
예의바른 상대와 함께 있는 시간 내내
저를 괴롭히던 사람이 떠오르다니 미친 게 분명하다
바보 같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어쩐지 남순 몰래 바람이라도 피운 것 같은 죄책감에
만난 상대에게도 집중을 못해 동시에 죄를 지은 느낌이다
괜히 나갔다 아무래도
지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젓는다
그보다
그저 제가 남순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 확인해버린 게 제일 답답하다
경민은 왜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세상에 남순만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만 말해줬을까
세상에 남순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제 마음에는 남순만 있다는 걸 확인할 수도 있다는 건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확실하게 알게된 제 마음에 더 혼란스럽다
자신은 언제까지 가능성 없는 마음에 기대를 걸어야하는 걸까
한번도 제가 원한 걸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다행히 머리도 좋았고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는 사랑받았고, 밖에서도 사람들은 대개 저를 좋아했다
저도 대부분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뭘 원하든 언제나, 어쩌면 지나치게 쉽게, 얻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닿을 듯 닿지 않는 건,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가질 수 없는 걸,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지
차라리 모른 채 살 걸
차라리 맴도는 자신이 바보같다 생각하면서
이게 무슨 마음일까 의아한 채로 살아갈걸
괜히, 알아버렸다 이렇게 아픈데
심장이 지끈, 해와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쥔다
걷다보니 발도 아프다
아니 온 몸이 아픈 것 같다
아파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다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먼 길을 돌아온 듯 마침내 보이는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서는데,
그늘에 서있던 누군가가 눈물이 날까봐 고개 숙이고 빠르게 걷고 있는 제 손목을 턱, 잡았다
=
모르겠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끔 데려다줬던 지수의 집 앞이었다
이경의 말을 듣고도,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선을 보던, 다른 남자를 만나건 그건 그 애의 자유
제가 그걸 구속하거나 단속할 이유는 없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라는 말의 의미를 그때 절감했다
제가 여유롭게, 네가 클 때까지 기다리마,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말하는 저를 떠나지 않은 지수를 전제해서 가능했다
혹시나 제 마음이 들킬까봐 애써 거리를 유지하느라
사랑스러울수록 더 괴롭혔다
예뻐보일수록 더 놀렸다
만지고 싶을 땐 겨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파르르 반응하는 지수를 보며 아직은, 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직은 시간이 더 있다
아직은 네가 내 곁에 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네가 아직 어리니까, 네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하고 마음을 말하는 걸 미뤘던 건 그저
그랬다가 혹시라도 제 마음을 거절하면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
정말로 지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처럼도 만날 수 없게 되면 혼자될 스스로를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 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 정말 그런 저에게 지쳐버린 거면 어쩌나,
이제 그만 포기하고 떠나버리려는 거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러다 놓쳐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오후 내내 가게에서 일하면서도 그 생각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경이 말했던 지수가 선본다는 저녁이 다가올수록 몸만 두고 정신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결국 평소보다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마감도 팽겨쳐놓고 와버렸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같은 건 없었다
그저,
그저 와야겠다고.
이 아이의 얼굴을 봐야겠다고
남순은 이제야 벤치의 반대편 끝에 앉은 지수를 쳐다본다
감정이 사라진 지수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늘 웃거나 또는 울거나 풍부하게 살아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덟살이나 어린, 이 꼬마가 이렇게 무서웠던가
남순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며 고개 숙인다
무슨 말이든, 해야할 것 같은데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적절한 말이라고는 하나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스무살이 된 것 같다
이미, 십수년 전 인데 그건
=
지수는 갑자기 나타나 다짜고짜 저를 끌고 여기까지 와놓고서는 지금껏 아무 말도 없는 남순을 쳐다본다
조금 전에 깨달은 마음 때문에 또다시 심장이 욱씬, 한다
이렇게 바라만 봐도 아픈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만나왔을까
- .. 무슨 일이예요?
제 마음을 숨기려고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남순은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인다
- 그게....
뒷말 없이 또 한참 망설인다
그 시간동안 지수는 또다시 희망이 부풀었다가 다시 절망 속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하필 오늘, 이 밤에 나타나서 희망을 품게 하는 걸까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을 거면서
희망을 품은 제가 결국 또다시 실망한 채 돌아서게 할 거면서
대답 없는 남순 때문에, 지수는 사라져버리고 싶다
하지만 제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 지수야.
몇 분인가 시간이 흘렀을까, 결심한 듯 남순이 부른다
- ...!
남순이 제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지수가 놀라 고개를 든다
꼬맹이나 아가야가 아닌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다
이름만 겨우 부르고는 또다시 침묵이다
대신 마음을 떨리게 하는, 남순의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눈이 저를 뚫어질 듯 응시한다
그 눈길에 사로잡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다
남순의 입술이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인다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손이 조금씩 들썩인다
지수의 마음도 그 움직임에 따라 오르내린다
이러다 또 금새 웃으면서 긴장했냐고, 별 얘기 아니라고 놀리면 어쩌지
실망할 게 무서우면서도 그저, 지금은 다음 말을 듣고 싶다
- 한지수, 너
네, 말씀하세요 저 듣고 있어요
저도 모르게 간절하게 바라본다
진지하게 응시하던 남순은 그 모습에 순간 초롱초롱 먹이를 바라고 주인을 보는 햄스터가 떠올라 피식 웃어버린다
그걸 보고 지수는 또다시, 실망한다
기대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돌리는 지수를 물끄러미 보던 남순이
그때껏 방황하던 손을 들어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부드러운 손길을 제가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어차피 마음도 주지 않을텐데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 더 속상해져서 울먹일 것 같은 걸 꾹 참는다
한참 섰던 남순이 겨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 내가 굉장히 오래 원하던 게 있는데.. 그동안 계속 기다렸거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 지수는 고작 고개를 끄덕인다
가만히 몇 개의 단어를 고르던 남순은 제대로 된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아서,
아마도 이 말을 해버리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 이게 무슨 중2병인가 싶어
열 번도 넘게 하이킥을 하고 말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떠오르는 대로 고백해버린다
- 근데 나 더 못 기다리겠으니까 너 그만 내 꺼 해라.
에엣?
지수의 눈이 당황해서 세 배쯤 커진다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떨어질 것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
이건 긍정일까 아니면 황당한 거절일까
남순은 인생의 한번은 솔직해지기로 한다
늘 그랬듯 머리에서 멈추는 대신 손을 뻗어 지수의 얼굴을 끌어당긴다
겁 먹은 듯 커진 눈을 앞에 두고 보니 뭔가를 기대하는 듯 반짝인다
기대하는 거면 좋겠다
내가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을 너도
남순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당황한 듯 약간 열린 입술에 입맞춘다
이 말랑말랑한 솜사탕같은 걸 먹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대신 가볍게 갖다대고 살짝 문다
몇번인가 간지럽히다가 감을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지수의 눈과 마주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하고 혼란스러운 듯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한다
그 속도를 맞춰 천천히 제 눈을 깜빡여준다
네.가.생.각.하.는.그.게.맞.아.
입술이 닿을 듯이 조금 떼고 나직이 속삭인다
- 이제 그냥 가지려고, 너
몇번인가 더 깜빡이던 지수의 눈이 이번엔 제가 승기를 잡았다는 듯 살짝 장난기가 돈다
- 누구 맘대로 날 가져요? 아저씨, 법에 걸린다니까요?
너 지금 장난치는 거 딱 보여
최소한 날 밀쳐내기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해야지
어디서 그렇게 나쁜 것만 배워가지구, 혼나야겠네
남순은 제게 기댄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수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 그럼 지금부터 하는 것도, 고소하든가
널 봐주기엔 난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거든
===========================
정말이야, 남순이 이야기를 더 쓸 생각은 없었어
그리고 분명 새 이야기를 쓰고 있었어, 좀 더 정리되면 올릴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이건 다 오늘 간 콘서트 때문이야... 저 노래를 듣는데.. 갑자기 이 이야기가 떠올라서 사라지질 않는거야 머리 속에서 남순이가 막 움직이고..... 그래 이왕 할거면 확실하게 질러서 꽉 닫아 마무리 해버리자 싶어서. 남순이에게 용기와 행복을!
그리고, 약간의 숨김글도 ↓
+
- 대체 언제까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데?
경민의 날카로운 말에 카페에 모인 인원 전부가 한숨을 쉰다
처음 있는 경민의 호출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정과 아이와 일을 모두 내버려두고 문자로 보낸 시간에 모여보니
대체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꺼내놨다
- 연애야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는 거라,
강주가 멋쩍게 웅얼거린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계속 불안해하던 이경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알아서 하질 않잖아, 우리 아가씨 저러다 말라 죽겠어. 고남순은 대체 왜 그런대니?
경민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톡 쏘아붙인다
어쩐지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이 문제가 제 탓인 듯 느껴진다
아무 말 없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흥수가 느릿하게 말을 꺼낸다
- ... 고남순이 좀... 그런 거엔 둔하긴 하지... 제대로 된 연애랑은 거리가 좀 있달까...
- 하기사.. 고남순이 뭘 원한다고 말하는 거 들어본 적 없는 거 같긴 해?
- ... 좀 그렇지 고남순 그게...
- ... 감정에 솔직해지는데 있어서는... 중딩 수준이라고 봐야지..
동시에 남순을 떠올리고, 동시에 한숨쉰다
- ... 그냥 지수 보고 형한테 고백하라 그러면 안되냐?
- ... 우리 아가씨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야 되는데? 고남순이 좋아하는 거 확실하구만
답답한 마음에 나름 대책이라고 내놓은 말을 어이없다는 듯 경민이 단칼에 잘라버린다
지훈이 놀라 움찔하자, 하경이 토닥인다
- 내가 진짜... 어지간하면... 고회장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지수가 아까워... 못 주겠어...
- 물 건너갔어, 그건 잊어 지금은 어떻게 고남순을 움직일지나 생각해
- 하기사 우리라도 안 움직이면... 남순이형은 평생 고백 안할지도 몰라...
- 근데 대체 어떻게 해야 움직이겠냐? 저렇게 대치 상태인지 몇년째인데 이제 와서
- ... 아무래도 질투,라던가... 극한으로 몰아붙이는게 낫지 않겠어?
- 극한..?
- .. 뭔가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을 만드는거지
- 그런 게 뭔데
- ... 음... 예를 들면 지수씨가 딴 남자를 만난다는 걸 고남순이 알게 되었다던가...
- ... 걔가 고남순만 본지가 벌써 몇년째인데.. 그게 되겠냐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경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 되게 하면 되지
- ....?
의아해하는 모두를 향해 경민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한다
- 내가 아가씨 설득해서 소개팅 나가라고 할테니까, 고남순한테 정확하게 전달하기나 해
- ... 누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이경이 당황한다
- ... 내가?
- 그럼 너 말고 누가 해?
- ... 나 하기 싫..
- 그럼 박흥수가 해? 여기서 누가 제일 지수 아가씨랑 가까운데?
- ...너
- 나는 지수 아가씨 상대도 찾아야하고 설득도 해야하잖아
뭔가 말린 것 같은데 할말이 없다
이경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 보안 확실하게 하고... 되도록이면 안 들키게 바람도 좀 잡아줘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경민이 혼잣말처럼 말한다
- 만약에 이래도 안 움직이면 고남순한테 내가 우리 아가씨 못 줘
최고의 남자로 준비할거야, 아가씨 마음 흔들리게
... 진심이다 저건.
이럴 때의 경민은 무섭다
괜히 이경이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붙들려 사는 게 아니다
고남순 이 자식... 화이팅....
너 이래도 안 움직이면... 남경민한테 먼저 죽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