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4
[K]
여느 여름보다 하늘이 더 파랬던 것 같다
전날 비가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꼭 비 온 후 개인 것처럼 하늘이 파랗고 공기가 적당히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빨래를 널면 잘 마르겠다,라고 생각했다
두근거림에 잠을 설치고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약속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먼저 도착했다
툭, 던진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지 한달만에 정말로 그 약속이 실현되자
너희 둘과 하경까지 넷이서 가기로 한 것임에도 생각만 해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어서 자꾸만 잠에서 깨버렸다
더웠다
아무리 비 내린 후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해도 여름은 여름이었다
8월 초 한여름의 오후,
난 약속장소였던 광장의 시계탑 앞에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서있었다
금새라도 땀이 흐를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엇갈릴까봐 어디 들어가 있을 수도 없었다
긴장한 나는 빠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
- 이강주, 보기보다 깡다구 있네
여름방학이 막 시작하려고 하던 교실에 어쩌다 너와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날 놀리려고 할 때면 으례 짓는, 흔치 않는 미소를 띄고 말했었다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안 들리는 듯 외면했다
모른 척 해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건 네 생각이었으면서
대답 없는 나를 보고 이내 너는 또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 고남순, 액션 좋아하는데 너 사람 죽고 그러는 거 괜찮냐?
날 뭘로 보고
내가 약점이 잡혀서 말을 안하니까 만만해보이나
피 튀기고 그런 거 그때 난 광팬이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땐 알지 못했으니까
나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 끄덕였다
너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 송하경도 불러라 나도 간다고 하고
라고 말했다
내가 했던 말이긴 하지만 너의 입에서 나온 하경의 이름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너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 쏭, 영화보러가자
- 응?
- 보러가자아
- ... 뭐 볼건데
- 너 보고 싶은 거?
- 갑자기 왜...? 우리 둘이 가는 거야?
- .... 아니... 고남순이랑.... 박흥수랑....
하경은 당황했는지 그저 내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
나도 설명할 말이 없어서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러니 한번만 같이 가자고 졸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왜 너와 그가 우리와 함께 가야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하경은 한참을 탐색하는 듯 내 얼굴을 살피다가 결국 별 말 없이 승낙했다
대신 날짜는 보충수업과 또다른 보충수업 사이,
고3에게 주어지는 아주 짧은 방학 중 하루로 하경의 의견에 맞춰 조정되었다
내가 전한 하경의 말을 들은 너는 그에게 통보하다시피 날짜를 말했다
그는 그저 눈을 스윽 굴리더니 무표정한 너와 불안해하던 나를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너의 부탁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았다
=
어째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초조해지려는 찰나 멀리서 그가 보였다
멀리 인파에 섞여있는데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인파와 섞이지 않는 느릿한 움직임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던 그는 햇살을 받아서인지 더 하얗게 보였다
나는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놀란 표정에 나는 어쩐지 수줍어져서 이름을 부르는 대신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놀랐다는 듯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이상한 걸까
치마자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말이 없던 그는 마침내, 한마디를 내뱉았다
- ... 예쁘네,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내 얼굴은 숨길 수 없이 붉어졌고
자신이 한 말을 그제야 깨달은 그의 얼굴도 그랬다
- ... 이상하지...
- ... 괜찮은데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지만
내 가슴이 그 말에 얼마나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던지
스스로 심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며칠 전 하경과 일부러 옷을 사러가길 잘했다, 생각했다
통 옷에는 관심 없던 내가, 게다가 여름 원피스라니
한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집어드는 나를 보고 하경은 또다시,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을 때처럼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을 모르는 척 하는 내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직 내 마음도 그의 마음도 확신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수험 스트레스 때문에 일탈 아닌 일탈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와 하경을 설득했다
하경은 내가 들어도 말이 안되는 설명을 납득하는 걸 포기한 듯
내가 겁내할만한 옷들만 골라서 입혀보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
마치 인형이 된 듯한 기분으로 하경이 옷걸이 채 안기는 온갖 옷을 몇시간에 걸쳐 벗고 입기를 반복했다
급기야 내가 무슨 옷을 입었고 입지 않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을 무렵
하경이 옷 한 벌을 쑥 내밀었다
- 이걸로 해,
- ..?
- 뭐 때문에 필요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게 제일 예뻐
하경은 궁금함과 장난기가 반쯤 섞인 눈을 반짝이며
어쩐지 겁이 나서 섣불리 받아들지 못한 그 옷을 들이밀었다
하늘 빛이 도는 시폰 소재의 무릎 위로 기장이 올라오는 살랑거리는 원피스
그런 걸 찾고 있던게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막상 실체를 확인하니 망설여졌다
내가 그걸 언제 입어봤는지 정말 잘 어울리긴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경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강력한 추천에 못 이겨 원피스를 구매하고 질질 끌려가서 옅게 오렌지빛이 도는 립글로스까지 샀다
괜찮을까
약속장소로 나오기 직전까지 수십번을 고민했다
그냥 평소에 입던 옷 입고 나갈까
너무 기대한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내 마음이 티 나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어색한 이 옷이 이상하진 않을까
그 걱정들이 다 사라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 근데 다른 애들은?
- 아... 아직...
그의 물음에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는 영화관에 들어가야할 시간이었다
시간에 칼 같은 하경이 어째서 오지 않는지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더위와 다른 이유 때문에 달아올랐을 내 얼굴을 보았는지
그는 주변을 훅 둘러보더니 광장 한 쪽의 영화관 건물을 가리켰다
- 저기 들어갈래?
- 혹시 엇갈리면,
- 오면 전화하겠지.. 덥잖아 지금
내가 채 대답하기 전에 그가 몸을 돌리고 나를 다시 쳐다봤다
더웠던 건 사실이라, 별 말 없이 그를 따랐다
건물 안에 들어서서 광장 쪽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침묵이 흘렀다
아무래도 하경에게 연락을 해봐야할까.. 싶어졌을 때 문자가 도착했다
[깡주~ 나 오늘 못 가 영화 재밌게 봐♥]
헉
그 짧은 문자가 왜 그렇게 태산처럼 무겁게 다가왔던지
문자를 확인하는 나를 보는 그를 향해 죄지은 것 같은 심정으로 말했다
- ... 하경이 못 온대...
내 말에 그는 그저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뭔가 말하려는 찰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 어,
- 미안하다 고남순
전화기 너머로 네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를 한번 쓱 보고 나직이 말했다
- 뭐냐
- 오늘 못 간다, 둘이 영화 잘 보고
헉
아마도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을 게다
그의 얼굴도 당황한 듯 구겨졌다
- 어쨌든 이강주가 선생님이니까, 잘해라
영화 잘 보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돈은 나중에 반띵하자
전화기 너머의 네 목소리는 희미하게 들리는데도 유쾌한 기운이 묻어나서
나는 네가 날 놀릴 때마다 짓던 그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자동으로 떠올리고 말았다
이래서 영화 보러 가라고 했던 건가...
처음부터 안 올 생각이었나...
하지만... 하지만...
어색하단 말야!!!!
그는 네 말을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더니 내 눈치를 한 번 보고 구석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이내 통화를 마친 그는 내게 돌아와서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 흥수, 못 온다는데
- ... 응.. 들었어
- ... 그래도, 볼래...?
그가 옆에 걸려있던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건 너의 부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볼 마음이 있었을까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더랬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함께 있고 싶던 사람이었다
-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휙 눈을 돌려 엘레베이터를 찾았다
그리고 난처한 듯 내게 말했다
- 가자.
먼저 날 이끌었던 게 그날이 처음이었단 걸 그는 몰랐겠지만.
=
떨려서 영화는 못 볼 것 같아, 라고 생각했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 영화는 훨씬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약간 얼굴을 찡그리는 걸 중간중간 훔쳐보다 발견했다
도끼가 날아다니는 장면마다 눈을 감을 듯 말듯 찌푸리고 움찔했다
물론 조금 잔인한 건 맞지만...
도끼로 사람을 찍어내리는 소리가 리얼하게 들리고
피가 튀기기는 하지만 저렇게 놀랄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
덤덤하게 보고 있는 내가 뭔가 잘못된건가 싶었다
소리라도 질러줘야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렇게 내내 긴장해서 봐놓고선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관 불이 켜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덤덤하게 콜라잔을 들고 일어섰다
아직까지 마지막 장면의 여운에 사로잡혀 울먹거리고 있던 내가 미처 따라 일어서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곤란한 듯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약간 민망해져서 가방에서 휴지나 손수건을 찾았지만 평소에도 들고 다니지 않던 물건이 그날이라고 있었을리가 없었다
훌쩍, 손으로 눈을 부비자 가만히 그런 나를 보던 그가 주머니에서 작게 접혀 조금 구겨진 손수건을 꺼냈다
- 여기,
예상치 못한 호의에 나는 망설이며 손수건을 받았다
톡톡 눈물을 닦는데 옅은 섬유 유연제 향과 약한 땀냄새가 섞여나는 게 어쩐지 그,다워서 살짝 웃고 말았다
- 왜?
불안한 듯 날 보던 그가 물었다
- 빨아서 갖다줄게 다음에,
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웃었다
손수건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던 그는 멋쩍은 듯 도로 콜라를 집었다
그때는 나도 따라일어섰다
손수건은 내 손에 꼭 쥔 채로
=
영화가 흥미로워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녁을 먹는 내내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서 곤란했을터였다
액션을 좋아한다던 네 말은 대체 무슨 근거였을까
그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는 게 괴롭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걸 고르지 그랬어, 라고 하니
그래도 이 감독의 작품은 다 봤다고 그러니 이번에도 볼 생각이었다고 무심히 대답했다
- 사람이 다치는 건 보기 힘들어
라고 말할 때의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두워보였다
-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더 그렇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라도 끌려들어간 듯 급격하게 흩어지는 존재감에
이 정도도 못보고 너 생각보다 겁 많구나, 라고 놀렸던 걸 후회했다
대신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면 영화 속 그 남자와 그 여자애는 정말 가족이었을까 하는 의문
나는 그 남자가 여자애를 위해 희생하는 걸 보면 둘이 가족,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그는 가족이 아니어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무엇이 세상을 구원하는가에 대해서도.
그땐 그와 했던 이야기가 그런 의미인 줄 몰랐지만
서툰 단어와 서툰 표현들로 그와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권력인가
시스템인가
이기심인가
아니면,
결국 사랑인가
아직 다 살아보지 못한, 다가올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경도된 나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만이 낼 수 있는 순진하고 희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이 마지막 인류의 희망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두 주인공이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결정을 한 덕분에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도 결국 그 희생으로 희망이 남았으니
결국 세상을 구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뭔가 말하려고 멈칫,하다가
그저 내가 말하는 대로 듣기만 했다
- 넌? 넌 어떻게 생각해?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자연스럽게 그가 집에 바래다주려는 듯 나를 따라 걸었다
몇 시간의 대화 끝에 긴장이 풀린 나는
그때껏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만 할 뿐 스스로의 생각은 말하지 않던 그에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흔들렸다 다시 깊어졌다
몇번이나 답을 고르는 듯 망설이다가 말했다
- 어렵지, 희생은. 아무나 못 해, 그런 사랑이란 건...
그 뒤에 하려던 말은
그러니까, 였을까
그렇지만, 이었을까
난, 할 수 있어
그때 난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답을 들어야할 그는 이미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굳게 잠겨있었고 내 발에 맞춰 걷고 있는 걸음은 느릿했다
옆모습의 똑 떨어지는 선이 아련했다
너무 반듯하게 대고 그려 놓아서 바람이 불면 흩어질 것처럼
문득 더워진 나는 습관처럼 손부채질을 하려고 손을 들어올리다
나란히 걷고 있던 그의 손과 스치고 말았다
뚝,하고 전기가 끊겨버린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한 걸음 앞선 그가 그런 나를 깨닫고 돌아봤다
- 왜?
언제나 높낮이에 변화없던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던 걸까 무심했던 걸까
그때까지 괜찮다고, 편안해졌다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름밤,
다시 비가 오려는지 풀내음이 진동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던
그와 나란히 가로등을 따라 걷고 있던 그 밤
말할까
그에게,
- 고남순,
부풀어오른 마음이 입술 밖으로 톡, 하고 튀어나와버렸다
그의 이름이 통통거리며 그와 내 주위를 굴러다녔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저 무심한 눈동자에, 혹시나 내 모습이 비치고 있다면,
말해버릴까봐
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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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커... 아픈 거니...?;;
아까 썼는데 기다리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