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6
[H]
인간은 왜 이렇게 무지한걸까
왜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종종 깨닫지 못하는 걸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서로 상처주거나 다치는 일 같은 건 없지 않을까
바보같은 짓을 하고 후회하는 일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지도 않을텐데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했다
=
굳이 나서서 아는 척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해서
딱히 너에게도 그에게도 그날 어떻게 보냈는지 묻지 않고 지나갔다
그보다 물을 수 없었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시 보충수업이 시작된 교실에서 만난 그와 너는
불과 며칠 전과는 까칠한 표면이 느껴질 정도로 날서 있었다
네 쪽은 훨씬 알아차리기 쉬웠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그와는 완전히 반대쪽으로만 바라봤다
그를 훔쳐보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넘치던 에너지가 옅어진 게 눈에 띌 정도였다
축 늘어진 너에게 하경이 다가와 걱정하며 묻는 장면도 목격했다
그는 좀더 섬세하게 관찰해야하는 편에 속했다
그리고 더 걱정됐다
교실에서 멍하니 자리를 지키는 거야 평소와 같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조차도 정신을 딴데 두고 있는 듯 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한발 늦거나 동문서답을 했다
적어도 내 말에는 웃기도 하고 장난도 쳤던 이전과는 달랐다
둘은 한 교실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비껴갔다
시선이 교차되는 일도 없었고 대화도 피했다
그런 미묘한 공기가 며칠째 지속됐다
아무래도 이 형님이 나서야겠구만....
나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더랬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여느 때처럼 그와 터덜터덜 교문을 나섰다
- 라면 먹자
내가 툭 던진 말에 그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듯이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익숙하게 냄비에 라면을 끓였고
마루의 작은 상에 냄비째 올려놓은 채
미친 듯이 젓가락으로 서로를 방해하며 먹어 치웠다
- ... 더운데 누가 라면 먹자 그랬냐...
- ... 너거든 븅신아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라면을 먹고 났더니 저절로 땀이 났다
배는 부르고 날은 덥고 해서 나른하게 선풍기 앞에 나란히 누웠다
그도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그를 힐끗 보고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 이강주, 덮쳤냐?
놀랐는지 그가 홱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안들리는 척 가만히 누워있었다
- ... 뭔 개 소리냐
- 그럼, 이강주가 너 덮쳤냐?
- ... 미친 놈
- 근데 둘이 왜 그러냐? 그날 싸웠냐?
내 말에 그는 잠잠해졌다
나는 그제야 궁금해져서 눈을 뜨고 그를 돌아봤다
그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는 너에 대해서는 늘 말수가 적었다
그날도 그랬다
- 그럼 니가 고백했는데 차였냐?
- ... 미친 소리 그만하고 조용히 해라 시끄럽다
- 헉.
끈질기게 묻자 그가 귀찮다는 듯 내 배를 한 대 퍽 치고 돌아누웠다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테다 싶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 가볍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영화는 재미있게 봤냐?
- 뭐 그냥
- 너 좋아하는 감독이잖아 영화는 도통 안보면서 그 감독 껀 꼭 보더니만 게다가 액션이고
그의 뒷모습이 움찔했다
남자 둘이 영화를 보러간다는게 영 간지러워서
재회 후에 같이 영화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예전엔 액션 영화라면 죽고 못 살았다
함께 피튀기는 액션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다보면서
누가 더 멋진 영웅을 흉내낼 것인가 다투기도 했었다
그의 반응에 의아해진 내가 잠시 조용해지자 그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 나, 액션 안 좋아해
- 언제부터?
- ... 그때부터
그의 말에 뒤늦게 멍해졌다
이 병신같은 게 아직도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
내가 괜찮다잖아, 다친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니가
울컥한 나머지 이걸 정신 차릴 때까지 패줘야하나 어쩌나 고민하다가
문득, 그게 원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너 혹시, 이강주가 고백했는데 니가 찼냐?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작게 움츠러든 어깨가 답을 말하고 있었다
- 고남순, 일어나봐 얘기 좀 하자
심각해진 내 목소리에 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몸을 돌려 앉았다
나와 마주보고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린 그를 보며 물었다
- 너 진짜 이강주 찼냐?
- ...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이 미친 것이 드디어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등떠밀어 상황 만들어줬더니 굴러들어온 복을 지가 걷어찼어 이 븅신이 진짜
- ... 왜 그랬냐
- 뭐가
- 너 이강주 좋아하잖아
내 말에 그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내가 잡은 증거만도 한 박스는 넘을테니까
- ...
- 왜 그랬냐 좋아하면서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이는데, 왜 그랬냐 너
내 말에 그는 또 망설였다
망설이는 그를 기다리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그는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
- 너도, 그렇잖아
- 뭐...?
그는 진지하게 날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 너도, 이강주. 좋아하잖아
갑작스런 말에 멍해진 내게
그는 내가 했던 그 말을 돌려줬다
-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내가 본 것도 꽤 되니까
그랬던가
나는 그때까지 몰랐던 감정을 깨달았다
아니 알았지만 모르는 척 했던 감정들을
내가 그도 몰랐던 그의 감정을 알아버렸듯이
그도 내가 몰랐던 내 감정을 먼저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서만 그렇게 예민했다
우리는, 서로 지독하게 닮았으니,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같을지도 모르지
나는 문득 그 상황이 우스워져서 웃어버렸다
갑자기 웃는 나를 보고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나는 더 크게 웃었다
- 미쳤냐 너,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선머슴을
한참 웃던 내가 끅끅거리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후로도 조금 더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어째서 한 사람이냐 너랑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끝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도 그와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 마음을 어쩌면 좋았을까 나는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려고 했던 그는
겨우 웃음을 가라앉힌 나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 그리고, 그렇다고 한들 뭐가 문젠데?
- ...?
- 언제까지 내 핑계 댈거야
내 다리를 부순 것 때문에 액션 영화를 못 본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한다
병신아,
그게 말이 되냐 너는
조금 화가 났다
내 말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멍한 그의 등짝을 확 내려쳤다
- 이새끼야 정신차려 이강주나 되니까 너 받아준다 그러지
내가 언제까지 너 거둬먹이랴? 형님이 그렇게 만만해보여? 어?
풀 스윙으로 내려친 손바닥을 맞고도 그는 아픈 티도 안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 고남순, 니 행복은 니가 잡아. 과거에 그만 매여있고
그는 마치 내 눈을 빨아들일 것처럼 날 바라봤다
그의 눈이 흔들리다, 일렁이다, 차분해졌다
마치 우리가 동등했던 그때처럼
좋은 눈빛이다
나는 오래 전 그를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렸다
무심하면서도 승부를 걸 때는 확고해지는 눈
반갑다 고남순.
나는 피식 웃으며 방심하고 있던 그의 어깨를 확 찍어 눌렀다
- 형님이 언제까지나 널 지켜줄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 새끼야
- 야 이거 안 놔?
- 형님이라고 불러봐라, 그러면 생각해보고
내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그를 기술을 걸어 꼼짝 못하게 했다
- 야... 컥... 이거
- 순순히 항복하시지
- ... 항복이다... 이 새끼
- 형님한테 말버릇 봐라
- 형님 놔주세요
숨이 막혀 컥컥대는 그를 놔주고 한참을 더 웃었다
그 순간 중학교 시절,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고남순, 나의 형제, 내 분신, 행복해져라
=
- 이강주
여전히 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너를 따라나왔다
교무실 앞에서 기다렸지만 너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지나가버렸다
초조해진 나는 계단에서 널 따라잡아 네 앞을 막아섰다
- 한번만, 더 기회를 주라
- 응?
네 눈이 황당하다는 듯 커졌다
- 고남순, 병신이라 지 마음을 잘 몰라, 그러니까
간절하게 말하자 넌 움찔하는 듯 하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 싫은데... 나 별로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싫다,는 말을 듣자 내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늦은 건가,
그가 이제야 제 마음을 알았다는데, 네가 좀 받아줘 제발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 머리를 숙였다
- 딱 한번만 더, 그녀석은 손을 잡고 끌어주지 않으면 못 움직이니까, 부탁한다
- ...별로
너의 마음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망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너는 대답을 마치고도 가버리지 않고 굽혔던 허리를 편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그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로는 밀어내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을 발견했다
그에게, 희망이 보였다
그게 보였다 내 눈에는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네가 그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듯이
나는 너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으므로
네가 그의 모든 흔들림을 삼켰듯이
나는 너의 모든 불안을 깨달았으므로
- 부탁할게
나는 더이상 말을 하지않고 가로막았던 네 길을 비켜주었다
너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한번 힐끔 보고 다다다 뛰어 사라졌다
너무 뒤늦은 깨달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가 사라지고 나는 스르르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에게는 희망이
내게는 절망이
=
너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는 내 눈에만 알아차리게 밝아졌다
그리고 너와 그는 서로 살짝 눈을 마주치고 수줍게 웃기도 했다
오호라.
그 광경을 뒷자리에서 지켜보다가 그에게 슬쩍 다가갔다
- 말했냐?
널 보고 있던 그가 다른 애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한껏 낮춘 내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새끼... 긴장감 없이... 너 그렇게 무방비해서 어디가서 일짱 했다고 그러면 믿겠냐?
한심한 듯 쳐다보는 나를 올려다보고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좋냐
내가 놀리듯 묻자 그가 뭔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 그래 이 새끼야
어쭈 이제는 아닌 척도 안 하시겠다는 게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따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네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네가 나에게 생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 했다
마음 한켠이 찌릿,했다
그 마음을 숨기려고 짐짓 거들먹거리는 가면을 썼다
- 형님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거다, 거봐라
거드름 피우며 생색내는 내 말에 그는 고맙다는 듯 말없이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행복해보여서 그걸로 된거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 아니다,
그때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내 마음을 숨긴 채 널 잡으라고 그를 설득하거나
그를 받아달라고 너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와 그가 만날 기회 같은 건,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때 내가 한번만 더 망설였다면,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무모했더라면,
그랬다면,
아마도 나는
내 분신이었던 그도
마음에 품었던 너도
잃지 않아도 좋았을 거다
지금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십대처럼
지독하게 불안하고 지겨운 시간을 함께 견디고 있을게다
그때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다면
그를 위한다는 허세같은 건 꺼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리가 다른 결론을 내렸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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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대에 다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냔들은 날 싫어하게 될거야
이미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