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7
[K]
그리고,
그날이 왔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한여름의 오후 2시는 끔찍하게 더웠다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려는지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쏴아 하는 그 소리가 주변을 오가는 버스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마저 덮어버릴 것 같았다
전에 그를 만났던 그 시계탑 아래에서
나는 그가 예쁘다고 말했던 그 원피스를 다시 입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가 약간 늦고 있었다
알바가 늦게 끝난 걸까
나는 혹시나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애써 참다가 약속시간이 10분이 지나자 결국 전화를 걸고 말았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처럼 보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 문자를 남겼지만 확인 표시도 뜨지 않았다
더위 때문이었는지
당황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자꾸만 식은땀이 나려고 했다
오후 2시의 태양은 너무 뜨겁고
공기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마침내 휴대폰이 울렸다
반가운 마음에 확인하니 그가 아닌 하경이었다
나는 실망해서 전화를 받는 대신 무음을 눌러버렸다
도저히 하경의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왜 그가 나타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혹시나... 혹시...
나...차인거야...?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지... 안 나타나는 건 뭐람..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오갔다
다정했던 그의 말과 눈을 떠올렸다
그래 거짓말은 아닐거야, 사정이 있겠지
초조해지려는 때 문자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그의 연락이 아닌 하경의 문자였다
뒤따라 갑작스런 민기의 문자도 함께 도착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찾는 건지
귀찮은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 ....!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이 놀라 쓰러진 나를 바라봤다
- 학생 괜찮아?
- 정신 좀 차려봐요 이봐요
나를 흔드는 사람들의 말이 웅웅거리며 멀리서 들려왔다
이곳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매미 소리가 또다시 쏴아 하고 밀려왔다
여름의 마지막을 알리려는 듯 시끄럽게 매미가 우는 날이었다
여름의 모든 이야기를 다 쓸고 지나갈 것처럼
나는 그 소리에 휩쓸렸다 휩쓸리고 싶었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이 꿈이었기를
하지만 그건 현실,
그 여름의 끝자락에 그는,
[고남순 부고 ** 병원, 장례식장 확정되는대로 다시 연락하겠음]
[고남순 소식 들었어? 지금 어디야? 이거 보면 전화해]
=
- 왔어?
하경이 지친 얼굴로 나를 맞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보는 '친구'의 장례식장은 어색했다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어서 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하경과 함께 빈소에 들어섰다
중앙에 놓인 그의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급하게 인화했는지 영 빛이 바랜 것이 눈이 거슬렸다
내가 지금, 누구의 빈소에 와서 서 있는 거지
내가 지금, 누구의 영정에 고개 숙인 걸까
악몽이라면 지금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악몽은 계속되었다
너는 빈소 한쪽 켠에 아무렇게나 구겨져있다가 나와 하경이 빈소에 올라서자 기계적으로 일어섰다
절을 하고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네게 돌아섰다
너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유리 구슬처럼 텅빈 눈을 하고 너는 그저 박자에 맞춰 춤추는 인형처럼
허리를 숙여 우리에게 맞절하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외운 듯이 말을 하고
우리가 빈소에서 내려서자 원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웅크리고 앉았다
빈소 옆 장례식장에는
한번도 듣지 못했던 그의 친척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젊은 나이에 부모 앞서 돌아간 자식의 장례는 호상이 아니라고 하루 짧게 빈소를 차리고 내일 바로 화장한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앞세운 자식에 대한 원망과 후회를 토로하고 있었다
네가 상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을 피해 복도로 나오자 이미 와있던 동급생 몇몇이 구석에 모여있었다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영 교류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사건을 함께 겪었던 2학년 때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만큼이나 황망한 표정이었다
당혹스럽게도 나는 혼자만 놀란 것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했다
장례식장에서 몇개 집어들고 나온 과일을 서로 나눠먹었다
문득, 이경이 말했다
- 근데 고회장 원래 오토바이 탔어?
- 일진 시절에 쫌 타지 않았겠나?
- 그래도 요즘 타는 건 못 봤는데, 오토바이는 어디서 났대?
오토바이..?
하경의 문자에 넋이 나가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온 나는
그러고 보니 그가 어째서 이런 황당한 사고를 당했는지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 아까, 심부름센터 사장이 와서 고남순 아버지께 설명하는 거 들었는데
처음부터 와있었던 것 같은 민기가 말했다
- 오늘 약속이 있는데 늦었다고, 한번만 빌려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 약속? 무신 약속인데 오토바이까지 타노
- 모르지... 한번도 안 그랬는데 하도 간절하게 부탁하길래, 약속했던 알바시간보다 늦기도 했고 약속장소도 들어보니 멀어서 빌려줬는데...
- 그 새끼는 왜 안 타던 걸 타서...
- 근데 그쪽은 왜 간거래? 우리 학교 쪽도 아니고 집에서도 멀잖아
- 약속이 있었다잖아
나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선 나를 하경이 어리둥절해서 쳐다봤다
-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네
- 괜찮아? 집에 얼른 가서 쉬어
- 응... 학교에서 봐...
걱정하는 하경을 남겨두고 애써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자꾸만 후들거려 풀리는 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웠다 깨끗하게
=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깼다
- 강주야, 하경이 왔다
엄마의 목소리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하경이 들어왔다
- 왔어?
힘없이 웃어보이는 나를 보고 하경이 속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 괜찮아?
- 응, 쉬어서 이젠 열도 다 내렸다구 그러구 내일 학교 가려고 했는데 괜히 왔다 너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고 하경은 아무 말 없이 괜히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하경이 온몸으로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지난 삼일 동안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말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지났다
학원을 가고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은 것처럼 세계가 매일 그랬던 것처럼 돌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2학기가 시작하던 날 알았다
- ... 박흥수는 오늘 결석이고....
조회를 하던 담임선생님께서 마무리를 하다 말고 말을 흐렸다
잠시 시선을 멀리 두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 우선 부회장이 경례해라 2학기 회장 선거는 곧 할테니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얼결에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어야하는 회장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빈자리.
선생님이 방금 시선을 둔 자리가 어디였는지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교실에 들어와 한번도 그 쪽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정말로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이 세상에 없고
더이상 이 교실에 오지 않을 거고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 차렷, 경례
내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떨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인사를 하다말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3일 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고 3이라는 말에 심한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다고
우선 열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안정,하면서 차도를 보자고만 했다
심한 스트레스라는 말에 부모님은 심히 걱정하셨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면서도 나는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열에 시달리면서
몇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환상 속에서, 꿈 속에서 그리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계속해서 그를 만나고 잃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날 만나러왔고
내가 울면서 그 손을 잡으면 이내 사라졌다
웃지나 말지
온다고나 말지
꿈에서 깰 때마다 지칠 정도로 울었다
소리를 낼 수 없어서 베개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탈진해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기를 3일,
이제는 아픈 것에도 익숙해진 걸까
다시 죽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열도 서서히 내렸다
정말로 내일부터는 학교에 갈 생각이었다
고 3은 함부로 아플 권리도 없었다
마음 아파하고 있을 시간은 더 없었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희미하게 웃는 나를 보던 하경이
울컥하는 듯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냥 울어 바보야 고남순 때문이잖아
내 눈을 외면하면서 괜히 이불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다
하경은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 내가 널 몰라? 어쩜 말도 없이 너 이렇게 많이 아프면서
금새라도 울 것같은 큰 눈을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하경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하경아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어
그저 그가 더이상 여기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니야
내가 말을 하면 넌 날 싫어하지 않을까
이 끔찍한 진실을 말해도 넌 날 받아줄까
날 안쓰럽게 바라보는 하경을 향해 생각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입 속에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던 그 문장이, 완성되었다
말을 해도 될까
나는 몇 번이나 숨을 삼키고 삼켰다
불안해하는 나를 하경은 기다려주었다
신실한 그 눈을 보면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가 그 눈이 나를 거부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졌다
- 하경아,
- 말해
마침내 어렵게 이름을 부르자 하경이 내 손을 붙잡았다
- 하경아..... 고남순... 내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경이 다 안다는 듯 내 손을 토닥였다
- 내가.... 죽였어... 고남순 죽인 거.. 나야
하경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그러나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자꾸 작아졌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지난 3일 내내 그랬다
그를, 내가 죽였다
그 무게에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모든 걸 없었던 걸로 되돌리고 싶었다
- 말도 안돼
- 그날....만나기로 했어... 늦었다는 거 나야...
나 아니면 오토바이 같은 거.. 안 탔어... 무리 안했어... 사고 같은 거 없었을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때 우리가 만나기로 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에게 만나자고 하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그날이 아니었으면
아니 단지 몇시간만이라도 더 늦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급한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그는 여전히 교실 뒷자리에 나른하게 앉아 있었을텐데
나는 여전히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볼 수 있었을텐데
내가 욕심내지 않았으면
내가 그에게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죽었어 남순이
이젠 통곡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그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주룩주룩 눈물이 흘렀다
말없이 울고 있는 나를 하경은 끌어안았다
내 등을 몇번이나 간절한 손길로 쓸어주더니 꼭 안았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하경의 어깨를 적셨다
교복이 다 젖어버리겠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나...
- 강주야 아니야 그건 니 탓이 아니야
하경이 날 안은 채로 단호하게 말했다
- 고남순이 나쁜 거야 널 만나러 오다 그렇게 가버린 걔가 나쁜 거야 니 탓 아니야 절대로 절대로 아니야
날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안고 있는 하경의 팔이 강했던 걸까
눈물 때문에 머리를 묻고 있었기 때문일까
숨을 쉬기 어려웠다
더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하경은 나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울음이 잦아든 날 보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하경의 성실한 눈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믿지 않았다
그를 죽인 건, 나였으니까
=
- 이강주 걱정했잖아
- 이야 깡주가 쓰러지는 날도 있네
- 방학동안 살쪄서 교복 안 들어가길래 굶어서 그래 굶어서 배고파서 쓰러진거야
오랜만에 교실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걱정했다는 눈빛을 한 채 농담을 걸어왔다
나도 짐짓 억울하다는 듯 웃으며 농담을 했다
- 괜찮냐?
- 괜찮아 괜찮아 야 내가 쓰러지니까 진짜 웃기지 않냐?
- 용가리 통뼈인줄 알았더니 깡주도 여자는 여잔겨?
-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숙제 안 했는데
- 설마 아팠다는데 숙제 검사하겠냐?
- 엄포스는? 엄포스 숙제 없었어?
왁자지껄 떠드는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그가 없었던 것처럼
한번도 내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감정을 숨겼던 적은 있지만
감정을 가짜로 내보인 적은 없었다
그게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줄 몰랐다
3교시가 지나니 또다시 머리가 어질했다
자습 중이었던 영어 수업 시간에 손을 들었다
- 저, 양호실 좀...
무슨 일이냐는 듯 말없이 보는 선생님에게 작게 말했다
아직도 안 나았구나, 싶은 표정으로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교실을 빠져나왔다
두어명이 일어서서 나가는 나를 돌아보았지만
내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교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양호실, 가야지...
생각하면서 소실점을 향해 뻗어있는 빈 복도를 바라봤다
어째서 이렇게 넓고 텅 빈 것 같은 걸까
세계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어쩐지 다음 걸음을 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교실 문이 열리고 네가, 나왔다
너와 눈을 마주친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너를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네가 나를 피했던 걸까
우리는,
같은 죄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이다가 이내 차분해졌다
- 괜찮냐
너는 조금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낯선 질문이라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울컥했다
대답없이 외면하고 있는 나를 보던 너는 뭔가 결심한 듯 내 손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뿌리치려는 내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옥상으로 향했다
끌려간 옥상에서 본 하늘은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또다시 주저앉을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었다
- 고남순, 여기 좋아했어
너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
-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고
나는 그곳에 서 있었을 그를 떠올려보았다
그 고통으로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살지 못하고 간 시간 때문에
그 시간을 빼앗았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대답 없는 나를 보던 네가 나직이 물었다
- 얼굴이 왜 이러냐
걱정하는 어조에 겨우 감정을 억눌러왔던 빗장이 풀려버렸다
난 죽을 것 같은데,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넌 남을 걱정할 수도 있단 말인가
그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면, 너에게도 조금은 책임이 있는데
- 너 때문이야
한번 튀어나온 말은 멈춰지지 않았다
-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고백 같은 건 안 했어 그날 만날 약속 같은 것도 하지 않았어
너만 아니었어도 그날 날 만나러오다가 죽는 일 같은 건 없었어
너 때문이야 다 모두 다
쏟아붓는 독설을 너는 그자리에 선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감정 없는 벽처럼 너는 내가 소리를 지르며 너를 저주하는 내내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나는 그렇게 선 너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너는 내 주먹에 움찔 물러서는가 싶다가도 이내 도로 굳건히 섰다
차라리 네가 나를 함께 비난하거나 내 말에 항변이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냥 울어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리 밀쳐도 그 자리에 돌아와 다시 맞을 준비를 하는 샌드백처럼 나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라 금새 지쳤다
소리를 더 이상 지를 수도 없었고
너를 때리던 주먹에도 힘이 빠지는게 확연히 느껴졌다
아무리 내가 퍼부어도 변화없는 너 때문에 억울했다
힘이 빠질수록 독설의 강도는 더 세졌다
- ... 왜 걔야 왜 남순이야 왜 차라리... 차라리... 네가 죽어버리지
내가 뱉은 말에 놀라 그대로 멈췄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독한 내 말에도 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널 향했던 그 말들이 내게 그대로 돌아왔다
너에게 했던 말들은 모두 나를 향한 것.
차라리, 내가 죽어버릴걸
차라리
내가
갑자기 심장이 둘로 쪼개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졌다
통증이 너무 강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내 왼쪽 가슴을 강하게 내려쳤다
차라리 아프면 이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친 듯이 내 가슴을 때렸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를 때리고 있던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내 팔을 뒤로 꺾으면서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내가 몸부림치며 널 피했지만 너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모든 걸 부숴버릴 듯한 키스, 그걸 입맞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달콤하다기 보다 파괴행위에 가까웠는데
날 산산조각 낼 듯이 덤비던 네게서 마침내 벗어났을 때 입에서 낯선 금속성 맛이 났다
입술을 만지자 피가 묻어났다
널 바라보자 네 입술에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난다고 말하지 못한 건
세상이 암전되어버린 듯한 네 눈 때문
당한 건 난데
상처 입어야하는 건 난데
넌 세상의 모든 상처를 짊어진 듯한 얼굴로
불이 꺼진 암흑 같은 눈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그때 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마치 내게서 어떤 답을 찾으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너는 갑자기 뒷걸음질치더니 옥상계단으로 사라져버렸다
옥상에 남겨진 내가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마침내 교실에 돌아왔을 때 너는 이미 없었다
그리고 그후로 널 다시는 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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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변명은 8편에서 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