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there's you (h&k)

[학교2013] the moments.1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 외전)

april_m 2013. 4. 6. 21:06





운동장에 마지막으로 섰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적어도 승리고에 전학온 후로는 처음인 것 같다 

- 행님 같이 좀 나갑시더, 같이 뛰면서 땀의 대화, 예? 싸나이끼리 얼마나 좋습니꺼? 

문득 체육시간마다 같이 좀 나가자고 졸랐던 기덕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같은 반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지금 기덕이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제 모습을 본다면 
섭섭하다 배신이다 어쩌고 또다시 시끄러울게다 
흥수는 만화처럼 눈썹을 양쪽으로 내리고 찡그리는 기덕의 얼굴을 떠올리고 피식 웃는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 서 있자니 약간 가슴이 뛴다 
운동화 아래로 닿는 땅의 느낌이 매일 등하교길에 걷던 것과는 다르다 
스트레칭 하던 팔을 풀고 제자리에서 슬쩍 뛰어본다 

통.통.통.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이 엄청 가볍다 
조심하라는 당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무릎은 다친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마치 전성기 시절 같다 

머리로 언제 축구를 그만뒀던가 꼽아본다 
3년만,인건가.. 4년인가. 

그동안 살살이라도 좀 뛰어볼 걸 그랬다 
주변의 시선도 의식했지만 
스스로도 혹시나 다시 운동장에 섰다가 정말 크게 다치기라도 할까봐 겁을 먹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다리는 운동을 하다가 다친 게 아니었는데도, 뭐가 그렇게 겁이 났던지 

오늘 잘못하면 사고 좀 치겠는데. 

가볍게 십미터 정도를 왔다갔다 뛰어보면서 생각한다 

- 제자님, 오늘은 뛰시게? 

체육선생님께서 다가와 흥미롭다는 듯 말을 건넨다 
흥수는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 컨디션은 괜찮으시고? 
- 에... 예... 뭐... 

그동안 갖은 핑계를 대고 체육 시간에 시큰둥했던 걸 생각하자 
갑자기 운동화를 신고 나와 뛰고 있는 게 선생님 뵙기에 민망해져서 
대답을 하다 말고 말을 흐린다 

그런 흥수의 조금 벌개진 얼굴과 무릎을 한번 슥 본 선생님은 
이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 에너지를 너무 담고 있으면 병 난다네, 그래도 적당히 하시게 
  선수가 본격적으로 뛰면 애들이 어디 남아나겠나 
- ...? 

벙찐 흥수를 뒤로 하고 운동장 지도대로 걸어간 선생님은 
운동장에서 각자 뛰고 있던 아이들을 호루라기로 불러들인다 

선수, 

그 말에 제가 정말 축구선수였고 
지금은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아이들처럼 지도대 앞으로 모이는데 
뒤쪽에 서있던 남순이 다가와 확 목을 조인다 

- 이 새끼.. 놔라... 
- 무슨 일이냐, 진짜 뛰게? 
- 체육시간에 그럼 뭐 하는데, 넌 안 뛰냐? 
- ... 갑자기 그러니까 

딱히 반박하기 어려운 말에 남순이 말끝을 흐린다 
걱정하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남순의 눈이 흥수는 어쩐지 불편하다 

- 이정도 뛰어서는 괜찮아 새끼.. 걱정했냐? 무슨 프리미어리그도 아니고 동네 축구 뛰면서 
- 그렇긴 하다만 갑자기 왜 그러는데? 
- ...날도 좋고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답답하잖아 

이유를 묻는 남순에게 흥수는 어색한 이유를 댄다 
저도 갑자기 왜 제가 여기 나와 서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 이해 안되는 이유를 남순에게 댈 수가 없다 
눈을 피하는 흥수를 이상하다는 듯 보던 남순은 
흥수가 체육, 그것도 축구를 하는데 끼다니 정말 괜찮아진건가 싶어서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구령에 맞춰 줄을 맞춰선다 

- ... 무리하지 말고 
- 니가 우리 누나냐 고만 좀 해라 

역시 걱정되었는지 다시 한번 뒤에 서서 조용히 속삭이는 남순에게 
흥수는 급기야 약간 짜증을 낸다 
그러면서 제가 왜 여기 나와 서있는지 떠올린다 

역시 말렸다고 밖에 못하겠다 







기말고사도 끝나고 교실은 이제 본격적인 입시 모드로 돌입했다 
국어 자습 시간에 흥수도 문학 문제집을 펼쳐놓고 씨름중이었다 

이것들은 몇 살이길래 이렇게 흥청망청 노는 거야? 
이러다가 패가망신하기 딱 좋지... 
늬들도 나이 먹어봐라 그렇게 마냥 놀던게 다 돌아와서 고생 죽어라 한다 
지금 나처럼 

단오날, 춘향이 그네를 뛰고 그런 춘향을 꼬셔보려고 몽룡이 방자를 보내 오가는 대화의 한 대목을 읽다가 
삐딱한 마음이 들어 중얼중얼 문제집 구석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데 
자습을 시켜놓고 돌아다니던 세찬이 쓱 얼굴을 들이댔다 

- 뭐하냐 
- 헉 
- 공부하냐 박흥수 설마? 
- ... 네... 
- 미리미리 좀 할 것이지 기말고사 다 끝나고 무슨 공부냐 공부는 

2학년 내내 공부 안한다고 뭐라고 하더니 이제는 공부를 해도 뭐라고 한다 
뚱해져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문제집에 고개를 다시 파묻었다 
세찬은 가지 않고 흥수가 보던 문제집의 지문을 함께 들여다 봤다 

- 춘향전이구나 

이 샘 귀찮게 왜 이래... 

대답없이 어깨로 문제집을 슬쩍 가리자 
관심없다는 듯이 지나가려고 하다가 역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 너 춘향전에서 춘향이 나이가 몇인 줄 아냐? 
- ...에? 
- 열여섯이다 열여섯 이팔 청춘 

한심하다는 쯧쯧 거리며 하는 대답을 들어도 
대체 저에게 갑자기 저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흥수가 멍하니 쳐다보다 세찬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대단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듯 말했다 

- 춘향이가 열여섯, 이몽룡은 열여덟이나 스무살로 추정된단 말이지 
- ... 
-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나이는 몇인 줄 아냐? 

그걸 제가 왜 알아야하는데요 대체 

대답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흥수를 보고 세찬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요즘 애들이 이래서 안되요 상식이 너무 없어 없어도 너무 없어 

이씨.... 

그동안 무시한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신나서 저를 무시하는 세찬에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선생님인데 욕도 못하겠고.. 부글부글 끓는다 

- 걔도 열여섯, 열여덟 뭐 이렇단 말이다 
  너보다 어려, 뭐 느끼는 거 없냐? 

대답하기도 귀찮다 
얼른 지나가기나 했으면 좋겠다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 란 태도를 보이는 흥수를 내려다보며 
세찬이 진지하게 말했다 

- 너 뭐 두근거리는 건 있냐? 
- ...? 
- 심장이 막 뛰면서 평생을 걸어봐야겠다 싶고 그런 적 없지 너? 


대체 이건 또 뭔 소린가 싶다 

- 조상님들은 그 나이에 장원급제도 하시고 연애도 찐하게 하시고 목숨도 걸어보고 그랬단 말이다 
  너도 어디에 목숨 좀 걸어보지 그러냐, 에너지 쌓아두지 말고 
  공부가 안되면 차라리 연애라도 하든가, 에너지가 아깝다 아까워 

어쩐 일로 저를 걱정해주나 했더니 결국 마지막 말로 뒤집어놓고 간다 

에너지 같은 소리... 
조상들이 연애하고 장원급제 할 동안 
그 청춘들을 교실에 묶어두고 에너지를 억누르는 게 
그게 어디 이 청춘들 탓이란 말인가 
이걸 제대로 발산할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할 말만 다 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버리는 세찬을 
짜증나서 노려보다가 뒤돌아보는 강주와 눈이 마주쳤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흥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뭔데? 
아니야 

눈이 커진 강주에게 귀찮다는 듯 손을 저어보이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짧은 앞머리가 물결치듯 흔들린다 
강주의 얼굴이 약간 창백하다 

방금 세찬에게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저를 보고 있는 강주를 마주보기가 어색하다 
반짝, 하고 빛나는 하얀 얼굴에 가슴이 달캉,한다 

뭐지 


- 딩동댕동 

흥수가 낯선 기분의 원인을 채 깨닫기도 전에 종이 울렸다 

- 야 오늘 체육 밖에서 한대 
- 헐 완전 더운데 
- 오랜만에 축구 한 판 하자 

- 박흥수, 너는 쉴거지? 

시끌시끌해진 가운데 남순이 가만히 다가와 묻는다 
흥수는 어쩐지 갑자기 더워진다 
이게 쌓아둔 에너지인가? 

- 나 오늘 나간다 
- 허? 

조금 놀란 남순을 두고 흥수는 일어선다 

- 어디 가냐? 
- 체육복 빌리러 

한번도 체육시간에 나간 적이 없으니 옷도 없다 
누가 그나마 옷이 맞으려나... 
이지훈이나 이이경 둘 다 작을거 같은데.. 






뛴다 
뜨거운 태양 아래 

흥수는 제가 오랫동안 이렇게 달리는 일을 원했다는 걸 깨닫는다 

달린다 

쌓였던 열정의 분출 
그리웠다 이런 기분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공은 헛돌고 있었다 

- 야! 거기 그렇게 갖고 있지 말라고! 

답답해진 흥수가 저도 모르게 버럭했다 
공을 그렇게 갖고 있으면 상대편에 빼앗길게 확연히 보이는데 
어째서 패스를 저렇게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버럭하자 오히려 공을 빼앗겼다 

아씨 진짜 

혹시 무리했다가 다칠까봐 걱정되서 수비 쪽으로 빠져있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본격적으로 무리 사이에 뛰어든다 
학생들 끼리 하는 거라 그런지 
그렇게 오래 운동을 쉬었는데도 움직임이 읽힌다 
흥수는 이내 공을 빼앗아낸다 
그리고 공을 단독으로 몰면서 달리기 시작한다 


- 야 뛰어 뛰어! 

뒤쪽으로 남순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팔을 크게 휘젓고 있을 거다 
오래 전 그때처럼 
제가 공을 잡고 달리면 스탠드에 서서 마치 자신이 뛰고 있는 듯이 소리지르던 남순의 모습이 떠오른다 

짜식, 형님이 그때도 지금도 멋있지? 

오랜만이다 이런 기분 
아드레날린의 발산 
포효하고 싶어진다 

제가 마치 바람이라도 된 것같다 
뒤 쪽으로 따라오는 상대편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단독찬스.다 
슛을 날려야지,라고 생각하며 위치를 찾아 움직이는데, 


찌릿. 


갑자기 무릎에 통증이 온다 
억지로 뛰어보지만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진다 

젠장. 

눈앞에서 공을 빼앗겼다 
하지만 좇아갈 수가 없다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지만, 격렬한 운동은 금물. 

의사선생님의 말이 지나간다 
하지만, 이게 무슨 격렬한 운동인가 
동네 축구 한판 뛰었는데 
아니 한 경기도 채 뛰지 못했는데 
이 에너지를 분출해버릴 수조차 없다니 

갑자기 모든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흥수는 천천히 다리를 끌면서 경기장 바깥으로 빠진다 

- 괜찮냐? 

남순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린다 
걱정하고 있는 눈을 마주하자 더 속상하다 
흥수는 남순의 팔을 뿌리친다 

네 탓이 아니지만, 오늘은 네 탓이 하고 싶어질 것 같다 

- 괜찮아. 

짧은 흥수의 대답에 담긴 마음을 느낀 남순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물러선다 

- 괜찮으신가, 

한쪽에서 심판을 보고 있던 체육선생님이 다가와서 흥수에게 묻는다 
흥수는 고개를 꾸벅 숙인다 

-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요 
- 그러시게, 힘들면 양호실 가서 파스 받고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고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한번의 충동으로는 너무 과한 실망이다 
조금 씁쓸하다 


흥수는 허탈하게 웃고 만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대강 몸을 닦은 후 
교복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복도를 걷는다 
콘크리트 재질이기 때문인지 조용한 복도가 서늘하다 
바깥의 뜨거운 태양을 떠올리고 다시 마음이 가라앉는다 

드륵, 

상한 마음에 교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에? 

분명 아무도 없어야할 교실에 누군가 누워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제가 문 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을텐데도 미동도 없다 
게다가 저긴 제가 씻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라면 아직도 운동장에 있을 남순의 자리다 

뭔가 싶어서 그 누군가를 향해 다가가본다 
엎드려있는 동그란 머리통이 익숙하다 

이강주? 

오랜만에 축구를 한다는 생각에 들떠서 여자애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약 강주가 체육시간에 나오지 않았다고 쳐도 왜 지금 남순의 자리에 누워있는 걸까 
그렇게 남순이 좋은가 싶어 약간 퉁명스러워진다 

- 이강주 

무뚝뚝하게 이름을 부른다 
엎드린 강주는 그대로다 

- 이강주 

다시 한번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고개도 들지 않는 게 진짜 무슨 일 있는 건가 싶어서 겁이 덜컥 난다 

- 이강주, 괜찮냐?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마치 무너지듯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다 
흥수는 놀라 쓰러지는 강주를 받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은 채 그제야 강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발견한다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입술이 바짝 마른 게 정말 아픈 것 같다 

손을 들어 강주의 이마를 짚어본다 
방금 찬물로 씻고 와서 제 손이 차갑다는 걸 감안해도 놀라울 정도로 이마가 뜨겁다 

대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병원을 안 가고 여기서.. 

제 몸에 미련한 강주에 속상하다 
흥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남순의 자리에서 강주를 안아든다 
치마입은 여자애를 업기가 뭣해서 안은 건데 생각보다 의식을 잃은 사람을 들어올린다는 게 힘들다 

영화니 드라마 같은 데서 이럴 때 엄청 가볍게 드는 거, 그거 다 거짓말이다... 

흥수는 비틀 하면서 생각한다 
이강주... 생각보다 컸구나 너.... 
늘 눈 아래 있던 강주여서 여자치고 큰 키란 사실을 잊었다 

한발 한발 움직이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혹시라도 떨어트리면 큰일이다 싶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몇발짝 움직여보니 요령이 붙은 건지 
처음 어정쩡한 자세로 안고 있을 때보다는 가볍게 느껴진다 

겨우 교실문을 열고 나서서 양호실로 가려고 하는데 
그때까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있던 강주가 꿈틀 하고 움직인다 
혹시 균형을 잃을까 놀라서 자리에 우뚝 선다 
꼼지락거리던 강주는 몸을 약간 둥글게 말더니 아기같이 흥수에게 폭 안겨왔다 

갑자기 바뀐 자세가 들기에 영 불편하다 
강주의 뜨거운 숨이 목 아래 어딘가에 느껴지는 것도 어색하다 
아무래도 자세가 불편한지 자꾸 조금씩 움직이는 것도 
정작 움직이는 강주는 의식이 없는데 들고 있는 제가 의식되서 몸이 뻣뻣해진다 
뜬금없이 숨이 조금 가빠지는 것 같다 

아무리 무거워도 그렇지 여자애 상대로 갑자기 뭔 일이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끙차, 하고 다시 강주를 고쳐들고 양호실로 겨우 향한다 


- 어머 무슨 일이니?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지를 보고 있던 건지 책상 앞의 양호 선생님이 깜짝 놀라 일어선다 

- 의식을 잃어서요 

흥수는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서 일단 현재 상태를 이야기 하고 
강주를 양호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침대에 내려놓는다 
강주의 머리를 짚어보고 이리 저리 헤집던 선생님이 이내 말한다 

- 열이 심하네, 지금 잠든 거 같으니까 우선 해열제 놓고, 나중에 병원 가보라고 해야겠다 
  담임 선생님께 말 좀 해줄래? 이 학생 깨면 조퇴해야할 거 같은데 

흥수는 고개를 숙여 긍정한다 

- 근데, 너는 괜찮니? 

흥수의 얼굴을 보던 양호 선생님이 묻는다 
그제야 무릎의 통증이 느껴진다 
강주를 안고 천천히 움직이느라 생각해보니 도로 땀도 난 것 같다 
힘들었는지 심장이 뛴다 

- 파스, 좀 주세요 

느릿하게 대답하자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약장에서 파스를 꺼내준다 
파스를 받아들고 꾸벅 인사하고 나온다 

덥다, 어쩐지 매우. 






그새 수업이 끝난 건지 교실에 돌아오자 애들이 가득하다 

- 괜찮냐? 

제 자리에 있던 남순이 교실로 들어서는 흥수를 보고 뛰어와 영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여전히 파스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약간 표정이 흐려진다 

- 많이 아프냐? 

걱정스런 남순의 말을 듣고 흥수는 정신을 차린다 
손에 파스를 쥐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그래 무릎이 아팠다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남순을 발견한다 
방금 양호실에 들어다 놓은 이강주,가 좋아하는 고남순. 
제가 삐끗이라도 하면 그게 무릎 때문일까봐 전전긍긍하는 고남순. 


- 괜찮아 이 새끼야, 파스 붙이면 돼 

무덤덤한 말에도 걱정이 풀리지 않는지 
남순은 쫄래쫄래 따라와 바지를 걷고 파스 붙이는 저를 지켜보고 있다 
귀찮은 자식.... 

- 양호실 갔다가 봤는데, 이강주 뻗어있더라 

남순의 눈이 놀랐다는 듯 약간 커진다 
그런 남순을 쳐다보지도 않고 흥수는 파스를 붙이면서 무심하게 말한다 

- 좀 있다 깨면 조퇴해야한다고 담임한테 얘기하라 그러더라 양호가. 
  니가 좀 해라 가방도 챙겨다주고 
- ... 아프다냐? 
- 몰라, 
- 근데 니가 들은 걸 왜 나보고, 
- 담임이랑 엮이기 싫어, 하여간 니가 회장이니까 부회장 챙겨, 

나 몰라라 하는 태도로 툭, 던지자 
잠시 눈을 굴리던 남순이 천천히 일어나 강주의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긴다 
그런 남순을 뒤에서 바라본다 


그제야 깨닫지 못했던 열이 오른다 

그새 강주에게 열이 옮기라도 한 건지 
마치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맺히는 것 같다 

여전히, 

감촉이 남아 있다 
뜨거운 몸에 닿았던 팔과 손 
제 가슴팍에 꼬물거리며 안겨왔던 머리 
뜨거운 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살짝 움찔한다 

무거워서였다, 

라고 생각한다 

왜인지 부들부들 팔이 떨려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그래서 혹시라도 강주를 놓칠까봐 내내 불안했다 

그래서 였다, 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렇게 두근거리는 건 

세찬이 말했던 '열정'이 깨어나는 게 아니라 
청춘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불안했기 때문이라고 


흥수는 아직도 약간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들었다 







- 영화 보자던데 

남순이 저녁으로 라면을 먹다말고 흥수에게 말한다 

- 누가? 
- 이강주, 너랑 송하경이랑 같이. 

네 생각이지? 
저를 향한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않는 남순 대신 
눈앞에 놓인 라면 그릇에 집중하면서 흥수가 모르는 척 대답한다 

- 잘됐네, 맨날 신세만 져서 미안했는데 그날 좀 갚으면 되겠네 
- ... 신세는 무슨 
- 이강주, 고3이다, 지 공부할 시간 내서 우리 봐주는 건데 
- 그거야, 

남순이 뭔가 말을 하려다 만다 
흥수는 남순을 한번 힐끔보고 말한다 

- 갈거지? 방학이잖냐, 우리 영화 본지도 오래 됐고 
- ... 남자 새끼랑 둘이 영화는 무슨.... 
- 그러니까, 이강주랑 가면 되겠네, 뭐볼래? 
- ... 몰라.. 그때 봐서 
- .. 새끼, 싫다고는 안하네 

흥수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이번엔 남순이 수상쩍게 라면 그릇에 코를 박는다 

- 게다가 송하경이라니 좀 이상한 조합이지만, 영화 보는 건데 뭐 어떠냐, 
- .... 알았다고 

무덤덤히 중얼거리는 흥수의 말에 남순이 졌다는 듯 덧붙인다 
흥수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라면 그릇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남순의 뒤통수를 내려다본다 

이 형님이 널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나 아냐 

갑자기 손을 뻗어 남순의 뒤통수를 마구 헤집어놓는다 
라면을 먹다말고 테러 당한 남순이 벌컥 화를 내며 고개를 든다 

- 야! 사람 먹는데! 
-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고개 박고 먹으랬냐 
- 이 새끼가 진짜 
- 그러다 라면 엎는다 조심해 

젓가락을 소리나게 탁 집어던지더니 
라면 냄비가 올려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저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남순을 피하면서 흥수가 살살 약을 올린다 

- 이 새끼 너 이리 안 와? 
- 니가 나한테 되냐 어? 형님한테 지금 
- 형님 같은 소리 한다, 너 죽고 나 죽자 오늘 
- 죽기는 무슨, 쨉도 안되는 게 

저에게 달려드는 남순을 피해 뒤로 슬쩍 빠진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마구 달려드는 남순과 한판 몸싸움을 한다 
미친 듯이 엎치락 뒤치락 레슬링을 하고 나니 
방금 먹던 라면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벌써 도로 배가 고프다 

- ... 안 되는게 덤비기는.... 
- ... 내가 너 봐준 거거든.... 
- .... 웃기시네.... 


헉헉거리며 바닥에 나란히 누워서 입으로만 서로 공격을 하자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진 흥수가 먼저 푸하하 웃는다 
내내 심각하던 남순도 그제야 피식 웃어버린다 

- 아까, 왜 그랬냐 
- 뭐가 

담담하게 묻는 남순의 말에 흥수가 멍청하게 대답한다 

- 갑자기 왜 뛰었냐고 
- ... 에너지가 넘쳐서 
- 어? 
- 청춘이잖냐 우리 
- .... 말하기 싫으면 그냥 대답하지 마라 

솔직한 심정을 말한건데 남순이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린다 

- 니가 뭘 알겠냐 이 청춘의 열정을 
- 미친 놈 

쉰 소리 취급하며 돌아눕는 남순의 반응이 한치도 예상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게 웃겨서 흥수는 갑자기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한다 
남순은 황당한 듯이 일어나 앉아, 누워서 웃고 있는 흥수를 바라본다 
그 어이없어하는 눈을 보니 더 웃음이 난다 


좋다, 이런 기분 
꼭 운동장을 달리지 않아도 된다 
고남순 너만 있으면, 내 청춘은. 
두근거리지 않아도 
포효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러니, 이강주. 

고남순, 저 불쌍한 녀석에게도 청춘을 부탁해, 

















======================= 
너무 오랜만........ 
읽어주는 모든 냔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