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2
[두번째 수업]
=
주섬주섬 짐을 싼다
일부러 늦게 가방을 챙기다보니 어느새 강의실에 혼자 남았다
경민은 거의 오가는 사람이 없는 어두운 복도를 벗어난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 끝나자 학원도 문닫을 준비를 한다
이쯤 시간이 지났면 다들 갔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온다
하아.
건물 앞 현관에 선다
역시나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수업을 들어갈 때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겨울비는
어째서인지 3시간이나 지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내린다
학원 앞에 줄지어 서있던 승용차들이 떠나는 게 보인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걸 알아서 일부러 늦게 내려온 거였는데, 그래도 밍기적거리는 애들이 있었나보다
학원이 끝나면 학생들을 태우러오는 부모들.
뭐 그런 집도 있는 거지,라고 쿨하게 넘겨버리면 그만인데
저런 광경을 보면 왜 우리집은 저렇게 서포트를 못해줄까 하는 뒤틀린 생각이 든다
경민은 거머리처럼 머리 끝을 달라붙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쓰면서
접어넣었던 우산을 꺼내려고 가방을 돌려맨다
그러다 아직도 현관 앞에 서 있던 누군가를 발견한다
아.
일부러 늦게 내려왔던 또다른 이유,
영훈이 현관에 서서 비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경민을 발견했다던가 기다렸다던가 하는 기색은 없다
사실, 지난번 수업 끝나고 돌아가던 길에 영훈에게 이이경이 아니냐,고 너무 다그쳤던 것 같아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학원 수업을 와서도 경민은 영훈을 발견하고 되도록 눈에 띄지 않을 자리를 골라 앉았고 계속해서 저를 알아보거나 찾지 않을까 조심했다
하지만 정작 무덤덤히 걸어들어와 지난 수업 때와 같은 중간 즈음의 창가자리에 앉은 영훈은
마치 거기 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수업에만 집중했다
본인만 너무 신경썼던게 아닐까 약간 허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서 일부러 늑장을 부렸던 건데
왜 다른 애들처럼 가지 않고 저렇게 비오는 하늘을 보고 있는 걸까
경민은 우산을 손에 쥐고 잠시 망설인다
어쩌면 우산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가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경민처럼 누군가 데리러 와줄 사람이 없는 걸테다
....지난번에 오해한 건 미안하니까.
뭔가 발견하려는 듯 비를 바라보고 있는 영훈에게 경민이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 우산, 없어?
그제야 경민을 발견한 영훈이 조금 놀란 듯 쳐다본다
그리고는 약간 고개를 끄덕인다
- 버스 타는 거면, 정류장까지는 씌워줄게
- 아.... 그럼 부탁할게
경민의 말에 조금 머뭇거리던 영훈이 대답한다
경민이 작은 우산을 펼쳐든다
영훈이 역시나 또 조금 망설이다 경민의 우산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산을 받아들려고 한다
!
어째서인지 뺏긴다는 느낌이 들어서 경민은 반사적으로 우산을 꼭 그러쥔다
우산을 든 손에 힘을 주자 마치 우산을 두고 싸우는 형세가 된다
문득, 영훈이 그 자리에 멈춰서자 영훈의 큰 키에 우산이 걸려 경민도 발을 멈춘다
- 왜?
- 내가 드는 게 편하잖아
그러고 보니 경민이 높게 든다고 한건데도 영훈의 머리가 걸릴 듯 말듯 수그린 게 불편해보인다
경민은 불만스럽게 우산을 내어준다
약간 경민 쪽으로 기울인 우산을 쓰고 걷자니 어쩐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경민은 힐끔 영훈을 올려다본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이경을 닮긴 했지만
옆에서 계속 보니 어딘가 분위기라고 해야할지, 느낌이 다르긴 하다
익숙한데 낯선 느낌이... 묘하게 편하면서도 어색하다
참 신기하네...
속으로 생각하며 걷는데
영훈이 학원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친다
- 버스 안 타?
- 넌?
경민이 의심스럽게 묻자 오히려 영훈이 되묻는다
- 난 걸어가
이런 건 왜 묻나 싶어 경계하며 대답한다
영훈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한다
- 데려다줄게
- 에?
경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춘다
니가 왜?
의구심이 가득차 요지부동인 자세로 올려다보자
영훈이 약간 어색하게 말을 꺼낸다
- ... 밤에 여자 혼자 보내는 거 아니랬어
저랑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인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경민은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조금 난감하다
- .... 누가?
- ... 아버지가
영훈의 대답에 경민의 눈이 동그래진다
진짜 영훈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걸 왜 저에게 그러는 걸까
아무에게나, 얼굴 본 게 겨우 두번째인 사람에게까지 그러라고 한 거라면 되게 고루한 집안이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촌스러운 차림인 것도 이해가 간다
이 말을 다 믿어도 되는 걸까
경민은 한참 생각하며 영훈을 뜯어본다
아무래도 이경과 닮은 외모가 어딘가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서 이성적인 판단을 가로막는다
더 설명하지 않고 경민을 기다리는 영훈을 보던 경민은 영훈이 포기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대신 매번 뛰다시피 가던 골목이 아니라 큰 길을 택한다
- 이쪽이야
=
어색하다
혼자 가기가 그러고 보니 조금 무섭기도 하고 영 이상한 애는 아니겠지 믿고픈 마음에 같이 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얼굴이랑 이름만 아는 사이인데 한 우산을 쓰고 가자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계속 침묵하자니 그것도 어색하다
그런 경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훈은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경민의 속도에 맞춰 걷기만 한다
경민은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쉰다
- ...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해줘 ....
우산을 나눠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다가선 탓에
영훈의 목에 걸려있던 이어폰에서 음악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린다
조용한 거리에 강렬한 기타 리프가 나직이 울린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경민은 정적을 깨고 묻고 만다
- 무슨 노래 들어?
- 아....
영훈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한다
- .. 들국화
- .... 헤에... 생각보다 올드하네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들국화라니, 몇년 전 TV 프로그램에서 지나치듯 봤던 그 아저씨들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비아냥처럼 들리는 감탄이 나오고 말았다
말을 꺼내고 바로 실수했다 싶어서 멈칫,한다
- 노래만 좋으면 되지,
내내 별 다른 반응이 없던 영훈이 처음으로 발끈한다
- ... 어쩌다 그런 걸 듣는데
노래만 좋으면 된다는 말이 딱히 반박하기는 어렵지만
저희 또래가 들을 노래는 분명 아닌 거다
언발란스한 영훈에게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 아빠가 좋아하거든
조금 전에는 아버지,더니 이번엔 아빠,다
음악 취향에 대해서는 같은 대상이라도 친근하게 느끼는 걸까
그나저나... 모든 행동의 이유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모두 아버지라니....그럼....
- 너, 파더콤플렉스구나....?
놀리려던건 아닌데 또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화낼 줄 알았는데 영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 우리 아빠 좀 멋있어
어휴 그래 이 파파콤 아
- 그래, 그래
경민이 영혼없이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 너도 좋아하게 될 걸, 분명.
그때까지도 영훈은 내내 진지하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정색하며 말하는 통에 경민은 조금 당황한다
제가 영훈을 만난 것도 오늘이 두번째,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인데
언제 영훈의 아버지를 만날 일이 있을 거란 말인지
혹시라도 제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떠올려보지만 짐작이 가질 않는다
뭐래 얘가 지금
속으로 황당해하는데, 영훈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선다
그러더니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져 뭔가를 꺼낸다
- 들어봐
- 응?
경민은 얼결에 우선 영훈이 내민 물건을 받아든다
『들국화 Best』
CD의 재킷이 촌스럽기 그지 없다
대체 어디서 이런 CD를 사서 들고 다닌 걸까
그러고 보니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채다
이걸 정말 받으라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도로 돌려주려고 영훈을 보자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 좋아하게 될거야 분명
- .... 고마워
어쩐지 또, 거절하기 어렵다
내가 얘한테는 진짜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하면서 우선 가방에 넣으려고 한 발 물러선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비가 그친 걸 발견한다
- 비 그쳤다
하늘을 보며 말하자 영훈도 우산을 치우고 비가 그친 걸 확인한다
- 그러네,
영훈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얌전히 우산을 접어 건네고 시계를 본다
그러고는 갑자기 경민에게서 한발짝 물러선다
- 미안, 나 가봐야겠다
- 응?
한손에 우산을 다른 손에 CD를 든 채 영훈의 대답에 황당해하고 있는 경민을 향해
미안한 듯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고 걸어온 쪽을 향해서 뛰어가버린다
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리 돌아왔는데!
=
경민은 골목 앞에 서서 조금 망설인다
큰길로 가면 집까지 돌아가야한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영훈과 일부러 큰길로 오긴 했지만 막상 혼자 남겨지니 큰 길을 걷는 것도 무섭다
그렇다고 저 깜깜한 골목을 뛰어가는 것도 조금 겁난다
차라리 학원 옆 골목으로 바로 갔으면 덜 무서웠을까
사실 이 길도 모르는 건 아닌데, 결국 집으로 통하는 길로 이어질 걸 아는데도 섣불리 발을 못 들여놓겠다
매일 밤마다 어떻게 뛰어서 집까지 다녔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쪽이 확실히 지름길이긴 한데...
경민은 큰 길과 골목을 두어번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빨리 가는 게 낫겠지, 생각하고 골목으로 뛰어든다
통.
어둠 속에 미처 보지 못한 누군가와 부딪혀 튕겨져나온다
- 아씨, 뭐야
튕겨져나간 건 경민인데 어둠 속의 인물이 짜증을 낸다
누구한테 짜증이야! 싶어서 따져주려고 고개를 확 틀었다가 눈이 딱 마주친다
헉.
이경이다
그날 이후 일부러 피해온 또 다른 사람.
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마지막에 저에게 씩 웃어보이고 간 그 미소도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되도록 교실에서도 맞딱트릴 일 없도록 조심해왔는데
영훈과도 오늘 얽혀버리더니 이경마저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학교 자습이 끝나고 학원으로 바로 간 경민은 아직도 교복 차림인데
이경은 어딜 다녀오는지 두꺼운 잠바를 걸친 사복이다
아직 제법 추운 날씨에 얼굴이 조금 빨개진 채다
그러고 보니 자습 시간에도 못 본 것 같다
아르바이트라도 갔다오는 길인걸까
- 너 여기서 뭐하냐?
경민을 발견한 이경이 황당하다는 듯 묻는다
경민은 모르는 척 아무도 못 본 것처럼 발걸음을 돌려 큰 길로 향한다
하필 이경이라니,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그런 경민의 뒤로 조금 떨어져 이경이 천천히 따라온다
처음엔 그냥 같은 방향인가 했는데 속도를 저에게 맞추는 걸 보니 따라오는게 맞는 것 같다
경민은 우뚝 그 자리에 선다
- 왜!
경민이 짜증스럽게 묻자 이경이 슬쩍 뺨을 긁적한다
- 집에 가냐?
그럼, 내가 너냐? 이 시간에 집에 가지!
경민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망설이다 이경이 말한다
- 데려다줄까?
- 하아...?
오늘 다들 저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방금 이경이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쳐다본다
이번에도 이미 표정관리는 실패다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난 경민을 보더니 이경이 퉁명스럽게 덧붙인다
- 넌 기집애가 이 시간까지 어딜 돌아다니다가 이제 집에 가냐? 겁도 없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헐, 너 같은 양아치 때문에 세상이 험한거거든
- 됐거든, 내가 왜 너랑 같이 가는데
- 아, 그래 됐다 됐어
퉁박놓는 말에 경민도 짜증이 나서 버럭하자
이경도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버럭하고 돌아선다
- 하여간 도와준대도, 싸가지 없기는
투덜거리는 걸 듣자니 또 짜증이 난다
저가 언제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괜히 혼자 와서 저러나 모르겠다
이경이 궁시렁거리면서 왔던 길로 돌아서자
또다시 깜깜한 골목과 텅빈 거리 사이에 혼자 서게 된 경민은 새삼스럽게 겁이 덜컥 난다
괜찮은데...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괜찮아.. 괜... 찮....
에잇.. 진짜...
다급한 경민의 손이 이경의 옷자락을 잡는다
짝피구 했던 그때처럼, 살짝 붙든 것 뿐인데 자석에 끌린 것처럼 이경이 우뚝 멈춰선다
휙 돌아본 이경은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민을 보고 짜증을 내려다
제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경민의 손이 떨리는 걸 발견한다
- ... 집이 어딘데
이경이 여전히 퉁명스럽게 묻는다
경민이 손가락을 들어 너머를 가리킨다
- ** 빌라.
알겠다는 듯 이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경민은 조심스럽게 이경의 옷자락을 놓고 큰 길로 걸음을 옮긴다
- 이리 가면 더 가깝지 않냐?
이경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골목을 가리킨다
경민은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한다
너랑 같이 가는 건 안심할 수가 없어서 큰 길로 간다고 설명하자니
그래도 바래다 주겠다고 호의를 비춘 이경에게 미안하긴한데
그렇다고 해서 설명없이 함께 어두운 골목을 걷기도 어색하고 싫다
머뭇거리는 경민을 보던 이경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얼굴을 구긴다
- 싸가지 없는 기집애
다짜고짜 툭 던지는 말에 경민이 발끈해서 올려다보고 쏘아붙이려다
마주친 이경의 눈이 어쩐지 섭섭해하는 것처럼 보여 멈칫하고 만다
- 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돌린 이경이 먼저 큰 길을 따라 움직인다
경민은 방금 본 이경의 표정에 머리가 조금 복잡해진다
혹시 제 의도를 알아서 그런 건가 싶어서 약간 미안하기도 하다
침묵 속에 걷자니 아까 영훈과 있던 때보다 더 어색하다
영훈은 아예 모르는 거나 다름 없는데도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한학년 동안 한 반이었던 이경과는 어째서 이렇게 더 의식이 되는지 모르겠다
너무 많이 싸워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서로 너무 나쁜 점을 많이 봤으니까
... 그래도 나 그다지 싸가지 없는 건 아닌데....
어쩐지 마지막에 들은 이경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이유없이 싸가지 없이 굴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름대로는 다 저를 지키려고한 방어였는데
누가 먼저 공격 안하면, 나도 안 그러는데... 안 그러려고 하는데...
딱히 설명을 해야할 이유도
설명을 한다고 한들 이경이 들어줄 이유도 없어보인다
경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제 마음에 떠올랐던 생각을 지워버린다
오늘 갑자기 이경이 왜 이러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이번주가 지나면 3학년으로 뿔뿔이 흩어질테고 한반에서 얼굴을 보거나 어색해할 일도 없을거다
굳이 신경써봐야 무슨 소용. 하는 생각에 무의식중에 이경과의 거리를 조정한다
생각에 빠진 경민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걷고 있던 이경이 문득 알아챈 듯 말한다
- 근데 너도 좋아하냐?
- 응?
갑작스런 말에 경민이 깜짝 놀라 올려다보자
이경이 눈짓으로 아직까지 경민의 손을 가리킨다
- 아... 이거...
경민은 그제야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영훈이 주고 간 CD를 발견한다
처음 아니 두번째 본 남자애가 줬다고 설명하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긍정해버린다
경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반갑다는 듯 이경의 얼굴이 확 펴진다
- 나도 좋아하는데
- ... 어?
- 넌 어디서 듣고 좋아하게 됐냐? 내 주변엔 다들 미친 놈 취급하던데 나
그래도 전인권 아저씨 끝장이지 않냐?
갑자기 이경이 수다쟁이가 된 것처럼 속사포로 쏟아낸다
동지라도 만난 듯이 애정을 발산하는 이경의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이다
저에게는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조금 다정하고 활기찬 얼굴이
반짝,하고 빛나기라도 한 것 같아서 경민은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 신기하네, 니가 들국화를 좋아하다니
아니라고 말해야하는데 신난 이경을 보자 말할 수가 없다
경민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경민을 보고 이경이 씩, 환한 미소를 짓는다
- 다시 봤어 남경민,
이경의 눈빛이 저를 훑고 지나가자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고
덜컹,
소리가 난 것 같다
경민의 심장이 갑자기
덜컹, 덜컹, 거리다가
기차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영훈의 말이 떠오른다
좋아하게 될거야 분명.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었는데 분명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없었는데
+
< 관찰 일지 Day 2.>
작성자 : 미래고 2학년 4반 이영훈
관찰 일시 : 2013년 2월 14일
- 19세의 남경민양은 에고이스트라는 초기 가설과 달리 생각보다 친절하고 경계심이 강함
또한 강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낯선 상황에 대한 호기심과 수용도가 높은 편임
아마도 이후의 인생을 결정한 과감한 결단력과 모험심이 그때도 있었던 게 아닐지 추정됨
- 19세의 이이경군은 생각보다 아무 생각 없음
대체, 이후에 나타난 결단력이나 추진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함
-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 도출
- 당초 연구 목적 외 목적 달성을 위해 과연 가설을 행동으로 옮겨도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 중
이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이 불가하므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지만
현재의 사태 시급성을 고려하면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하는 것은 명확함
- 덧붙여, CD는 발견하지 못함.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지 못했음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인지 이미 미래는 결정되었다는 의미인지
또는 다른 장소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좀더 관찰과 연구가 요구됨
- 다음 관찰 예정일은 2013년 2월 21일
- 以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