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rain

[학교2013][이경x경민] 여우비.3

april_m 2013. 4. 17. 17:43




[마지막 수업. 1]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최초의 
최초의 톱니 
모든 일에는 흔적이 

알게 된다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한낱 

우리는 

    외로운 사람일 뿐야 

그러므로 우리는 

    숨막혀 




탁. 


경민은 쥐고 있던 펜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는다 
벌써 몇번째 같은 문장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다른 단어가 섞여들어와서 이 간단한 문장을 끝까지 읽을 수가 없다 

복잡해진 머리 속을 정리해보려고 교실 창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모두가 머리를 책상에 수그리고 있는 지금 
검은 머리카락이 술렁이는 바다 위로 저 혼자 불쑥 솟아 부유하는 것 같다 
비가 오려는지 검게 물든 하늘이 보인다 
여름의 소나기가 내리려는 것도 아닐텐데 검은 구름이 꿈틀거리며 모여드는 것이 마치 미술 책에서 언젠가 봤던 고흐의 그림 같다 


우산 가져왔던가 


한동안 창 밖의 구름이 움직이는 걸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경민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어 책상 옆에 걸어뒀던 가방을 열어본다 
가방 바닥에 접이우산이 얌전히 자리잡고 있다 
지난번 쓰고 가방에서 빼는 걸 잊었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한다 

요즘 들어 비가 너무 자주 오는 게 아닌가 싶다 
가방에서 우산을 빼놓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겨울비가 자주 내린다 

그러고 보니, 


경민은 혼자 가만히 꼽아본다 

사탐 특강을 들으러 간 날은 매번 비가 왔던 것 같다 
두 번은 우연이지만 세 번은 필연이라던데 그러면.... 

.... 오늘도 오려나 

비오는 날, 수업마다 만났던 그 애를 떠올린다 
대체 지난 번에는 그렇게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이경을 닮았던 외모와 묘하게 달랐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차분하고 약간 앳된 순진한 느낌이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지난 1년 동안 제가 봐왔던 이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거긴 한데.. 

어디서 온 애일까 

적어도 경민이 아는 한 이 주변에는 미래고,라는 학교는 없다 
그렇다면 이 수업을 위해서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온다는 의미. 
원하는 학원 수업을 들으려고 멀리 다니는 건 자신도 해봤던 일이니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여기까지 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 무슨 상관이야 

경민은 마구 뻗어나가는 생각을 떨쳐내려 내려 놨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시 좀 전에 읽던 본문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결국 내가 

    나는 외로워 

내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게 되기까지 

    나는 외로운 사람일 뿐이야 

말하게 되기까지 첫번째 톱니바퀴 

    인형이 되긴 


... 



하아 


아무래도 이 노래가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 
경민은 무의식 중에 펼쳐놓았던 연습장에 제 귓가를 울리는 노래를 끄적여본다 


난 네가 바라듯 완전하지 못해 
... 
제발 숨막혀 인형이 되긴 
... 
새장 속의 새는 너무 지쳤어 


가사를 휘갈기다보니 문득, 제가 지금 새장 속의 새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싶다 

다른 건, 그저 
그 새장에 들어간 게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사실 뿐. 


대학. 
대학만 가면 된다고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가는 게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텨야한다고 믿고 살아왔다 
쳇바퀴 속에서 계속해서 달리는 다람쥐처럼 
다른 사람의 형편이나 나의 마음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제 자리를 지키려고, 그 위로 올라가려고 달려왔다 
반에서 제법 고립된 제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식사 시간에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인형. 

예쁘게 진열된 인형인 것 같다 
더 비싸게 팔리기 위해서 더 많은 부가조건들을 장착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좀 더 많은 것, 좀 더 비싸보이는 조건들을 수집하려고 애쓴다 
집안이 좋지 않으니,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학벌뿐. 
다음 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필수 조건 

정말 그런 걸까 


한번도 묻지 않았던 
아니 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묻어버렸던 의문이 떠오른다 

내 인생은... 


경민은 고개를 흔든다 

고3에게 지칠 권리 같은 건 없다 
모든 건 입시 이후로 미뤄두는 게 맞다 
인생은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아 


마음을 다잡으면서 다시 본문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직 채 한 페이지도 다 넘기지 못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가버리다니 최악이다 
경민은 어수선해지는 교실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이어폰의 음악 볼륨을 올리고 
이번 시간에 다 풀었어야 했던 언어영역 문제집에 뒤늦게 고개를 박는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급하게 본문을 쓱 훑어내린 뒤 옆에 펼쳐진 문제로 고개를 돌린다 
방금 까먹은 한 시간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다 

주변에 신경쓰지 않고 첫번째 문제를 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쑥, 하고 문제집과 저 사이에 나타난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문제집을 톡톡 두드린다 


..? 


마디가 굵은 것이 제가 아는 손은 아니어서 의아해져 고개를 든다 
이경이 고개를 든 경민를 보고 싱긋 웃는다 
그러더니 경민이 조금 전에 연습장에 받아적었던 가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 

말을 하지 않은 채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어쩐지 비밀을 들킨 기분이 되어서 경민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다 

고개를 저어야할까 - 하지만 무엇에 대해서?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숙여버릴까? 
뭔가 말을 해야할까? 

경민이 이경을 올려다보며 다음 말을 고민하는 동안 
이경은 경민이 꽂고 있는 이어폰을 손짓으로 가리키더니 
눈에 띄지 않게 엄지를 한번 치켜세워보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저도 모르게 눈이 그 뒷모습을 따라가고 만다 
교실 밖에서 오늘도 먼저 나가 기다리던 지훈이 이경의 머리를 툭, 치고 
이경이 버럭 짜증을 내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지훈의 손을 탁, 쳐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 열어 사랑을 해봐 


반복되던 노래의 가사 하나가 귀에 퍽 꽂혀버린다 

뒤늦게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진다 
경민은 훅, 하고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다시 떨궈 문제집에 고정한다 
직전까지 답을 골라내고 있던 문제가 무슨 의미인지 또다시 모르겠다 

이래서 피했던 거였다 


하필 이이경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저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고 
저도 만만치 않게 못되게 굴었고 
그래서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그래 이번 학년만 끝나면 

다시는.. 

그랬는데.. 



그날 이후로 마치 둘만 공유하는 뭔가 있다는 듯이 저에게 가끔 다정하게 구는 이경이 신경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날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던 느낌이 너무 생생한 나머지 
이경의 모습을 멀리에서 보기만 해도 그 기억이 되살아나 파르르 떨려서 아예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는 이 떨림을 인정하거나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닌 척 쌀쌀맞게 굴었는데도 
이경은 가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렇게 툭, 건드리고 가곤 했다 
혹시라도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봐, 
이경이 저를 건드리는 그것 말고, 
그 건드림에 동그란 파문을 그리는 제 마음을 누가 알아채기라도 할까봐 

그때마다 경민은 흔들림을 감추려고 애써야했다 

아무도 못봤겠지.... 
예를 들면.... 


- 이이경, 뭐야? 

얘처럼. 

무표정을 가장하고 이어폰을 낀 채 책을 뚫어져라보고 있는 경민에게 다가와 
굳이 어깨를 톡톡 손가락 끝으로 건드려 저를 부르는 은혜를 향해 내키지 않은 티를 내며 돌아본다 

- 뭐가 
- 쟤 너한테 왜 그러는데, 넌 또 왜 그러고 

대체 뭐가 왜,라는 건지 모르겠다 
의심스런 얼굴로 캐묻는 은혜에게 경민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 니네 사귀니 설마? 

경민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은혜의 약간 비웃는 듯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경민은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혹시나 제 두근거림을 들키기라도 한걸까봐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 말도 안돼 

바람 빠지는 소리 내듯 힘없이 부정하는 경민의 말에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은혜가 팔짱을 끼고 입을 삐죽 내민다 

- 이이경이 너한테 친하게 구는거 같은데? 너도 그렇고 


친하게. 

설마. 


경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 그러니까 왜 그렇게 친해보이냐고 

쐐기라도 박으려는 듯 
새침하게 다시 묻는 은혜의 말에 참아왔던 한계가 툭, 놓쳐버린다 


- 내가, 그런 양아치랑 왜, 사귀기는 누가 

약간 화가 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도 조금 높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항변한다 
아니면 말고,라는 듯 금새 흥미를 잃은 은혜가 뒤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약간 당황해서 시선을 돌린다 
대답도 없이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은혜를 보고 의아해진 경민은 은혜가 바라봤던 제 뒤를 돌아본다 


교실 앞 문, 경민의 자리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경이 서있다 
손에 음료수를 든 채로 저를 뚫어지게 보는 이경을 발견하고 방금 제가 한 말이 생각나 그대로 굳어버린다 
심장이 또다시 덜컥 내려앉는다 

혹시 들었으면 어쩌지 


거짓말은 아닌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그러게, 왜 거기 서 있어. 

라고 

평소 같으면, 평소의 저만 아는 남경민이면 
굳이 그때 거기 서 있어서 그런 얘기 들어버린 이경의 탓을 하면서 
남의 마음 같은 거, 상처 같은 거 무시하고 
내 마음 편하게 해석해서 합리화하고 
다시 내 세계로 돌아가버려야하는데 

그런데, 

꼭, 상처받은 듯 보이는 이경이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다 

입을 꾹 다문 채 화난 듯 노려보는 눈이 사실은 너무너무 상처입은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파란 싹이 올라왔던 관계라는 들판에 경민이 마치 핵폭탄이라도 떨어트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다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데미지를 입혀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말을 꺼내도 되는 건지 망설이는 사이 경민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경은 저벅저벅 뒤쪽의 제 자리로 돌아가버린다 
그저 좀 전까지 이경이 서 있던 자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경민은 저를 스쳐지나간 이경의 흔적을 느끼고 만다 

그 흔적이 경민의 마음을 또다시 흔든다 
아니 할퀴고 지나간다 

찌릿, 


아프다 





















인용된 글은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노래는 <제발,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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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실 3화의 앞부분 정도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마무리를 못할 거 같아서 우선 올리고... 도망... 
읽어주는 냔들, 고생 많아 고마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