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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2013] the moments.3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 외전)

april_m 2013. 4. 30. 11:32







서늘한 바람이 분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러나 후덥지근하지는 않은 
나뭇잎을 흔들고 밀려온 공기가 
싱그러운 유월의 사과,같다 

천천히 가로등을 따라 걸으면서 
남순은 잠시 평범해진 기분이 된다 

타박타박 남순과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는 강주는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분명 같은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자신은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을 이야기들을 
강주는 끝없이 발견해내고 있었다 

자신이 무심히 지나가버렸던 장면들을 연결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이야기로 조립해내는 강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순은 조금 감탄하고 있었다 

그저 화려한 액션씬에 끝 부분이 울컥하는 정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강주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굉장히 심오한 영화였던 것만 같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액션씬이 많은 영화여서 
몇몇 장면은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다른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마치 자신은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사랑' 

'구원' 



자신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단어인데 

강주의 입에서는 마치 그것이 절대진리인 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듣는 건 수업 시간만으로 충분했지만 

남순은 때로 높아졌다가 금새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마치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변화처럼 
단조롭지만 지루해지지 않는 강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잘 듣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단지 얼굴 표정으로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니라는 걸 
지난 몇주간 '스터디'에 참여하면서 알게되었다 

강주는 여전히 남순에게는 제대로 말을 걸지도 대화를 이어나가지도 않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꽤나 열심히 문학 문제집을 풀어오던 흥수와는 
'스터디'를 하는 시간 절반 가까이는 문제 풀이를 해줄 정도로 
대화를 나눠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 때면,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순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하는 듯 
그러나 결국 책상을 맞대고 앉은 남순에게도 들릴 수 밖에 없는데도 
굳이 목소리를 낮춰 흥수에게 설명을 하곤 했다 

조근조근. 
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주파수가 하나 뿐인 것 같은 일정한 목소리 속에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들이 오가는지 
남순은 책을 보는 척하면서 들키지않게 그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 그거 답 아닐 걸? 
- 무슨 소리야, 화자의 감정이 이 문장에 나타나니까, 이걸 
- 그러니까, 그게 답이 아니잖아 
- 어? 
- 니가 지난주에 아니라고 그랬거든, 이거 
- 아.... 
- 솔직히 말해봐 너 힘으로 부회장 하는 거지? 논술 대회 1등은 어떻게 하는거냐 자기가 한 말도 기억 못하면서 
- 씨이.... 글은 기억력으로 쓰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너 이거 해답 보고 푼 거지? 

푸훕. 


간혹 웃음을 참지 못하고 듣고 있다는 걸 들켜버릴 때도 있었다 
흥수의 응수에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아아 이래서 흥수가 그렇게 강주의 빈틈을 찾아서 놀려대는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대신 듣고 있었단 걸 그렇게 들켜버리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서 
그날 교실 밖을 나갈 때까지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남순은 자신이 듣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만 했다 


이렇게 완전히 저에게만 들려주는 목소리는, 
그래서 엿듣는 것처럼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건 적어도 올해 들어서는 거의 처음이 아닐까 
모래 위 딛고 선 발을 스치고 돌아가는 파도처럼 톡 건드리면 꺄르르 소리가 날 것 같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제 귀를 간지럽혀주길 바라면서 남순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잖아 

모르겠다 세상의 희망같은 건 

그보다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자연스럽게 휙 고개를 돌려버린 강주가 신경쓰인다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한 채인 강주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짧은 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말할 때마다 조금씩 흔들린다 
마치 목소리의 높낮이를 그대로 그려내는 것처럼 
한숨처럼 꺾였다가 웃을 때의 높은 톤처럼 금새 올라왔다가 
갸우뚱할 때면 살짝 옆으로 흔들린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뒷 목에 
가까이에서 보니 가느다란 솜털이 솟아있는 게 보인다 

건드리면, 마치, 병아리처럼 보송한 느낌이 들까. 

문득 '관찰'하는 느낌에 남순은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린다 


나란히 에서는 본 적이 없었지만 
사실 저 뒷모습은 익숙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어느 봄날. 
이라고 불러야할 오후 

꽤 늦었던 봄 햇살이 가만히 창으로 쏟아져내리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창가 자리에 앉아 그 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던 그날 
눈을 감고 있으면 햇살이 일렁이는 것처럼 눈 앞에서 춤추는 걸 느낄 수 있어서 
남순은 종종 그렇게 눈을 감고 있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그저 눈을 감고 조금 졸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빛무리가 눈 앞에서 번져가는 걸 느끼고 
졸았나, 싶은 생각에 눈을 떴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하품을 하면서 스윽 눈동자만 움직여 교실을 훑어보았다 
남순의 자리는 교실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반 전체의 하는 양을 볼 수 있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 남순은 문득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발견했다 

흥수가 멍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순간을 포착하려는 사진사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 뭘 저렇게 보고 있는 걸까 


궁금해져서 따라간 시선 끝에, 
강주가 있었다 


의외였다, 고 해야할까. 

도무지 접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박흥수,와 이강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길래 

흥수의 시선은 
단지 졸음을 좇으려고 고개를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명백하게 무언가를 좇고 있었다 

뭘까 


대체 뭘 찾아내려고 하는 걸까 


남순은 오랜만에 보는-그건 거의 축구공을 좇을 때의 강렬함과 맞먹는- 집요한 흥수의 시선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남순도 때로 
흥수도 강주도 눈치채지 못하게 
두 사람, 정확하게는 강주를 관찰해보곤 했다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둘이 서로를 마주보는 일은 없었고 시선의 타이밍은 미묘하게 엇갈려서 
남순은 자주 방금까지 제가 그 둘중 하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감추기 위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흥수가 무엇을 기다렸는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 대신, 
부드럽게 굽이치는 선을 발견했다 

둥글게 말려서 파고 들어갈 것 같은 다른 아이들의 등과 달리 등을 꼿꼿이 세우고 
검게 찰랑이는 짧은 머리 아래 빳빳한 하얀 셔츠 칼라보다 더 하얗게 보이는 목덜미가 
가느다란 C 형을 그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에 얹어진 머리가 
아마도 생각에 따른 것인지, 감정에 따른 것인지 
물결에 흔들리는 부표처럼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아주 어릴 때 

아마도 엄마,와 함께한 거의 첫번째 기억 


비현실적일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 

사실 남순이 기억을 조작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다를 본 적이 있는 건지 이후에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다 
집안의 사정을 생각하면 가족 여행 같은 걸 갈 수 있었을리가 없는데도 
게다가 철이 든 이후에 다시 바다에 가본 일이 없는데도 
바다,라고 하면 단번에 영상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억은 생생했다 


끝없이 밀려왔다가 물러나는 파도 
쏴아,하는 소리와 
반짝하고 빛나며 부서지는 물거품 
도르르 파도에 휩쓸려 가는 모래들 
강주의 움직임은 어딘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 아주 가끔 강주가 혼자의 생각에 빠진 순간들을 발견하곤 했다 
마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맞닥트린 듯 고개를 외로 꼬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혼자 배시시 웃으며 무방비해진 표정은 
마치 내내 한번의 오차도 없이 밀려왔다 부서지기를 반복하던 파도에 햇빛이 닿은 순간, 
갑작스럽게 속살을 살짝 내보이는 순간 같았다 

가끔 나타나는 그 순간을 위해 남순은 기꺼이 기다렸다 

규칙적이면서도 변화하는 그 궤적과 무방비의 순간은 
조금씩 움직이는 흐름이 단순하면서도 변화무쌍해서 
아무리 바라봐도 지겨워지지 않았다 


마치 지금처럼. 


아니 지금은 조금 더. 


문득, 오늘 처음 강주를 보았을 때를 떠올린다 
사람이 가득찬 광장을 둘러보다 강주를 발견했을 때 
여름 낮의 햇살은 강렬해서 저도 모르게 남순은 눈살을 찌푸렸고 
그래서인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져서 
손을 들어 저를 부르는 강주가 빨려들 듯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은 지금까지 지켜봤던 어떤 때보다 강렬한 빛이 파도에 닿아부서졌다 
빛무리가 강주 주변에 팡 하고 흩어지는 것 같아서 남순은 그 자리에 움찔하고 말았다 


멈칫하는 남순을 보고 강주는 조금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잔뜩 어색해진 채로 남순은 강주에게 다가가 침묵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강주의 새 옷은, 그만큼 강력했다 

- 예쁘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더 당황했다 
이마에 땀이 삐질 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오늘 날이 더워서,라고 애써 생각했다 
더위가 몰려오는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손부채질을 하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아서 
남순은 괜시리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 이상하지 
- 괜찮은데, 

자신없이 중얼거리는 말에 
역시나 작게 부정하고 나서야 강주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하늘거리는 천 때문에 강주는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이강주는 강해' 라는 선입견을 도무지 적용하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학교에서의 빳빳한 셔츠와 자켓이 아닌 오늘 강주가 입은 원피스는 
강주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치맛자락이 걸음에 따라 살랑거리며 굽이쳤다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드러나던 부드러운 선들이 
오늘은 살며시 흔들리는 고개짓뿐 아니라 
날아오를 듯 손으로 그리는 곡선들과 
몸을 따라 움직이는 옷자락이 그리는 궤적들과 
그리고 마치 그 높낮이를 시각적으로 그려낸다면 역시나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을 목소리의 흔적들까지 

그 모든 곡선들이 겹쳐져서 
일렁이는 파도처럼 덮쳐오는 바람에 

남순은 급기야 숨이 아주 느릿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저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면 질식해버릴 것처럼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더이상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남순은 강주를, 자신을 휘감아오는 그 곡선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 강주가 저를 돌아봤다 






- 그러니까, 송강호랑 고아성은 가족인 거잖아, 결국 고아성을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한거니까, 안 그래? 
  그런 희생을 가족도 아닌데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갑자기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강주의 시선에 남순은 동작을 정지해버린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지 거의 따라갈 수 없는데도 
꼭 대답을 해야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희생.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 누군가의 인생을 버리는 것, 
그걸 희생이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그 누군가의 인생을 댓가로 치르고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어머니 

기억도 나지 않는 그리운 이름. 


그리고, 


박흥수. 



자신이 인생을 빼앗아버린 사람. 
그리고 

너는 어디 가서 힘들단 얘기나 해봤냐며 
놓아버렸던 제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사람. 


그걸 가족이 아니니 희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세상에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도 있는 게 아닐까 


지금도 남순은 어떻게 흥수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제 인생을 단번에 돌려놓을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걸 희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 가족이 아니어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희생할 수 있어 


남순은 오늘 처음으로 힘주어 말한다 
강한 어조에 강주는 조금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이내 궁금증이 얼굴에 그대로 떠오르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남순은 조금전까지 잊고 있던 흥수를 떠올리고 
순간이지만 흥수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남순의 세계는 흥수가 전부였다 
그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더더욱 

그런데, 잊었다 
조금 전, 잠시. 


제가 여기 왜 나왔는지 잊고 있었다 
영화를 보자고 말을 꺼낸 건 강주 였지만 
결국 이 약속을 성사시킨 건, 그러니까 남순에게 영화를 볼 것을 종용한 건 흥수였다 
강주보다 더 흥수와는 접점이 없어보이는 하경까지 나오기로 했다는 말에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그저 강주와 단 둘이 있는 게 어색한가보다,하고 납득했다 
갑작스레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보다는 
강주한테 잘해라, 라는 말이 더 크게 들렸다 

나 대신, 이라는 말로 들려서 
남순은 정말로 오늘 최선을 다했는데 


그러니까 그건 강주를 좋아하는 흥수,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런데 잊고 있었다 그 흥수를. 


자책감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온다 
흥수를 만난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한 자기비하가 다시 살아나서 남순은 조금 움츠러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 손으로 흥수에게 치르게 했던 그 댓가를 되갚을 수는 없을 거다 
그걸 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남순은 애써 빠르게 뛰던 심장을 가라앉힌다 
너무 오래 걸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나치게 오래. 




아직도 이어지는 강주의 이야기는 마치 불꽃놀이 같다 
세상의 밝은 면에서 자란 아이가 
얼마나 아름다운 눈으로 세계를 읽을 수 있는지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양을 그려낼 수 있는지 
남순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이야기에 아찔해진다 

남순은 계속 침묵했지만 그건 이전에도 늘 그래왔던 일이라 
지금 남순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강주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세상을 이렇게 희망으로만 읽을 수 있는 걸까 
한번도, 단 한번도 상처받아본 적 없는 것처럼 

언제든 기꺼이 손을 내밀어줄 것처럼 

남순은 인생을 걸어도 얻지 못할 것 같았던 구원을, 
단 한마디로 완성해버렸던 흥수처럼 
한번 망설임도 없이 '희생'이란 단어를 말하는 강주의 목소리가 
눈 앞에 팡,팡,하고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불에 데인 듯 마음을 따끔거리게 해서 
남순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저 말없이 
의문과 아픔을 숨긴 채 가만히 걷기만 하는 남순에게 
강주가 물었다 


- 넌? 넌 어떻게 생각해? 


언제 남순을 피한 적이 있기라도 하냐는 듯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오는 강주의 눈에 
덜컹, 심장이 멈췄다 



탕, 


총소리가 들리고 


그대로 남순의 심장 중앙이 저격당했다 



무기는 그저 
말없는 한마디 


나는, 사람을, 버리지 않아. 


그 정직한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을 버리는 일 같은 건 생각해본 적 없어 
나는 누군가의 손을 놓치는 일 같은 건 없어 


그 눈이, 
말했다 


그 눈을 마주하자 
흥수를, 버렸던, 과거가 되살아났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그 과거가 
부끄럽게 되살아났다 


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니 


나도 그때 쉽게 손을 놓았던 건 아니었어 
그때 이후로 나도 내내 힘들었어 


그건 그저 강주의 본성일 뿐인데 
저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건 아닌데도 
남순은 애써 변명이 하고 싶어졌다 


내가 받은 희생이란 건, 
그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라고 
강주의 순수한 믿음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믿음이 자신을 향하기를 바랬다 
흥수로부터 받은 그것이 늘 한켠에 부채감이 따라붙었다 
그런 조건같은 건 없어보이는 이 맹목적일만치 순진한 믿음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아서 
남순은 두려우면서도 갖고 싶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강주를 남순은 꽤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번이나 머리 속에서 
갖고 싶다는 욕망과 그래서는 안된다는 당위와 
눈밭을 짓밟고 싶은 악의와 이 순수를 지켜내야한다는 선의 사이를 
끝도 없이 오가다가 마침내 말했다 

- 어렵지, 희생은. 아무나 못 해, 그런 사랑이란 건... 


겨우 그 말 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강주는 알아차렸을까 
남순은 생각했다 

아무나 못해 - 하지만 나는 받았어 
아무나 못해 - 하지만 넌 할 수 있을거야 
그런 사랑이란 건 - 그러니까 난 바랄 수 없어 
그런 사랑이란 건 - 그렇지만 늘 원해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오랜만에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남순은 또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남순의 지나치게 생략이 많은 답이 또한 어려웠는지 
강주도 마침내 조용해졌다 


가로등을 태양으로 착각했는지 여름밤에 어울리지 않는 매미가 쏴아 하고 울었다 
비가 오려는 건지 물기가 섞인 공기가 쏴아 하고 뒤에서 밀려왔다 
말없이 걷고 있는 강주의 머리가 흩어졌다 
머리가 날리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긴 강주의 얼굴은 또다시 무방비했다 
남순은 문득 헝크러진 강주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순간, 
동시에 들어올리던 강주의 손과 스쳤다 


불에 데인 것처럼 
또다시 


이번엔 남순이 먼저 손을 거둬들였다 


언젠가 교실에서 손이 닿았던 때,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뒤늦게, 너무 뒤늦게 
그때 몫까지 한꺼번에 

밀려오는 당혹감에 남순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추려 조금 빨리 걸어버렸다 
밭은 숨을 두번 급하게 내뱉고 나서야 열기가 가라앉았다 

강주를 지나쳐버렸다는 걸 깨닫고 뒤돌아 봤을 때 
강주는 조금 전의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 왜? 


속이 울렁거리는 듯 멍한 표정을 하고 
남순이 서있는 보도블록 어딘가, 를 바라보고 있던 강주가 
남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맑다,고 생각했던 강주의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여서 
남순은 그 물결에 휩쓸릴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누군가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고남순, 


무거운 돌이 쿵,하고 떨어진 것처럼 
둘 사이에 남순의 이름이 음절하나하나 갈라져 데구르르 흩어졌다 


-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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