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타][나나x선우] 날 울리지마. 5
=
털썩 다리가 풀려 대기실 소파에 무너져 앉는다
대견하다 김나나
어떻게든 이번주도 버텨내다니.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싶은 생각에 긴장이 풀린다
대기실 모니터에는 아직 채 무대를 마치지 않은 앞 팀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보니 4시.
마음속으로 다음 스케줄들을 정리해본다
음악 방송이 끝난 뒤 다음 행사 스케줄은 지금 옷 입혀서
...미안하긴 하지만 막내를 딸려 보내야겠다..
그래도 일단 이번 주 음방 스케줄은 끝났으니
내일은 쉴 수 있을 것 같고..
하아.. 활동은 왜 4주나 하는 건가.. 요즘 트렌드는 3주 아니던가...
이번주 음방 돌릴 옷 배리에이션을 잠깐 떠올려보니 머리가 지끈한다
역시 이건 다음 주 초에 급하게 생각하면 어떻게든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소파에 기댄 채로 한 쪽 턱을 괴고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삐빅, 하고 옆에 뒀던 휴대폰이 울린다
"저녁 먹었어?"
이제 겨우 4시인데 저녁은 무슨...
하여간 문자 보내는 거 되게 좋아하네..
"먹을거야. 지금 스케줄 중"
간단히 답문을 보내는데 눈에 들어오는
문자 창 위쪽으로 쌓인 문자들이 모두 같은 내용이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식사 때 1시간 전쯤 되면 늘 같은 문자가 도착했다
"밥 먹어"
"식사 했어?"
"점심은?"
나나의 답문은 늘 "먹었어" 아니면 "먹을거야" 두 가지 뿐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하루에 세 번 오는 선우의 문자가 도착하지 않으면
식사를 하면서도 허전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게다가 식단은 또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오늘 뭐 먹었냐고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음식이 있으면
바로 정선우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잔소리.
서서히 익숙해져버릴까봐
혹시라도 10개의 쿠폰이 끝났는데도 계속 기대하게 될까봐
나나는 이건 그냥, 실습 과목의 점수를 위한 거라고
애써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실제로 챙기는 문자 덕분인지 식사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전보다 속도 좀 덜 아프게 되었으니까
"내일 쉬지? 쿠폰 예약"
또다시 삐릭, 하고 문자가 도착한다
내일 쉰다고 언제 말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ㅇㅇ"
그럼 내일이 세번째.. 인거지
답문을 보내고 잠깐 속으로 세어본다
첫번째 쿠폰은 자신이 병원을 가는데 썼고
두번째 쿠폰은 스케줄 끝나고 심야영화를 봤고
그리고 세번째..
이러면 안되는데,
자꾸 기대해버리잖아.
후.. 하고 숨을 내쉰다
제정신이 아닌 거면 정신을 차릴 수 있길 바라면서
마침 모니터에 아리의 얼굴이 잡힌다
오늘 아리가 센터로 잡히는 건가?
애들 또 센터 욕심에 징징거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 하다
설마 옷 때문이라고 하진 않기만을 바랄 뿐.
다같이 잘 되자고 하는 건데 저 소녀들 간의 암투는
고립되다시피 학창시절을 지나온 나나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었다
홍이사님 고생이시네
처음엔 맨인블랙, 그것도 사고뭉치 윤설찬이더니 이제는 플로라 라니.
멍하니 화면을 보며 생각하는데
사람이 되긴 그른 호랑이.. 홍이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 김실장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니 울상이 된 홍이사가 두 손을 모으고 섰다
불길한 예감이 온 몸에 소름돋듯 몽실몽실 떠오른다
- 싫어요
- 아니 뭐가
- 뭐든
- 그러지 말고 김실장 한번만, 한번만 들어주라 제발
딱 잘라 미리 거절하는 나나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홍이사가 매달린다
- .... 하아... 뭔데요
- 어! 프로젝트 그룹인데
혹시라도 나나가 거절할까봐 홍이사는 바로 손에 들고 있던 파일과 MP3를 내민다
시큰둥하게 파일을 몇장 넘겨보던 나나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도로 내민다
- 이사님.
- 어 김실장
- 이게 뭐예요?
파일에 포함된 정보라고는 4명의 신체사이즈와 실루엣 사진,
그리고 컨셉 비주얼 사진들
아니 이걸 지금 정보라고 갖다주고..
- 저, 사람 직접 안 보면 일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 알지 아는데
- ....
- 아후... 김실장 나 한번만 살려주라 응?
나도 말했지 나나씨가 절대 안할 거다 말하긴 했는데
알잖아 설찬이 성격, 죽어도 김실장이 해야한다는데 어떻게 해
- 윤설찬이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름이 요즘 왜 이렇게 많은건지
아니 그보다 뉴질랜드에서 양치고 있을 애가 왜 갑자기..
흔들리는 나나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홍이사가 더 간절하게 매달린다
- 많이 안 바란다 김실장 응? 그냥 이미지만 잡아줘,
콘서트 한번만 하면 되는 스케줄이니까
1부랑 2부 나눠서, 대강만 잡아주면 나머진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할게
그간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번만,
- ...
다시 찬찬히 파일을 넘긴다
대체 이정도 정보를 가지고 무슨 컨셉을 잡고 의상을 준비하라는 건지..
어이가 없다 정말
윤설찬이 막무가내 천방지축 유아독존인 거야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할 땐 합리적인 편이었던 것 같은데 - 일할 때 한정이지만.
한숨을 폭, 내쉬고 간절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홍이사를 본다
소파 아래 쭈그리고 앉은 폼이 저러다 아예 주저앉을 기세.
저렇게까지 사정하는 모습도 오랜만이다
아마... 맨인블랙 담당할 때 윤설찬 빽이 어쩌고 하던 직원이랑 대판 싸운 이후 처음인가..
- ... 컨셉 만이예요
- 어! 그래! 컨셉! 그냥 가봉한 가안 정도만
- .. 이사님!
- 진짜, 진짜로 딱 그정도만 해주면 돼. 진짜 고맙다 김실장
하아...
뒤늦게 괜한 짓을 했다 싶다
안 그래도 활동 중이라 바쁜데...
- .. 언제까진 데요
- .... 이번주...?
일정 한번 화려하네.
머리속으로 계산해본다
수요일부터 음방 돌려면 화요일부터는 시간없을거고
천상 내일까지 끝내야한다는 소린데.. 내일은...
어쩌지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홍이사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함께 쥐어준 MP3를 가리킨다
- 잘 부탁해 김실장, 내가 김실장 믿는 거 알지?
그리고 그거 1부랑 2부 컨셉곡인데, 유출되면 안되니까 딱 김실장만 들어
내 무덤을 내가 팠지 싶다
대꾸 없이 한숨을 푹 쉬면서 이어폰을 꽂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음악에 인원이길래 이러는지 들어나 보자 하고
MP3P를 재생 시킨다
....
별로면 제대로 설찬에게 짜증내주려고 했는데....
데모곡인데도 손가락을 까닥이게 되는 게 꽤 좋다
늘 설찬과는 이런 식.
음악을 듣고나면 더이상 짜증을 낼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음악을 들으며 다시 프로필 파일을 넘긴다
일단... 실루엣을 보면 슬림하게 가도 될 것 같고..
베이스는.. 블랙.. 이어야할까
음악의 톤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고 몇가지 아이템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새야할지도 모르겠다
=
9시 52분.
선우는 쥐고 있던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고
천천히 검지손가락으로 액정을 두드린다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고
기다리기 시작한지 52분째.
골목 앞에 서있다가 결국 건물 앞까지 왔는데 나나가 내려오는 기척도 안 느껴진다
만지작거리던 휴대폰 액정을 다시 눌러본다
9시 53분.
겨우 1분 밖에 안 지났는데, 이거야 원.
잠깐 망설이다가 조금 전 올렸다 다시 내렸던 전화번호부를 띄워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전화 수신음이 끊기기 직전에야
뚝 하고 통화가 연결된다
- ....
침묵.
- 여보세요?
대답이 없다
전화가 끊어졌나 확인하고 도로 갖다대니
아주 약한 숨소리가 들린다
- 김나나, 듣고 있어?
- ... 응...?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대답을 한다
- 어디 아파?
혹시 지난번처럼 쓰러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 급한 마음에 묻자
여전히 잠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 그런 건 아닌데... 근데... 오늘은 안되겠다
- ... 왜
- ... 일이 안 끝나서... 오늘 하루 종일 작업해야할 것 같아
여전히 잠긴 목소리는 아마도 피곤에 절어 있기 때문인가 보다
명백한 이유가 있으니 알겠다고, 물러나야 하는 게 맞는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다
- 아침은.
- 응?
- 먹었어?
말을 이어가보려고 쥐어짠 게 고작 밥 먹었냐는 정도라니
니가 수재는 무슨 수재냐, 스스로 조금 한심해진다
잠깐의 망설임이 느껴지는 침묵 후에
나나가 흐릿하게 대답한다
- .. 아.. 니...
- 밥은 있어? 같이 먹을 사람은?
- .. 어? ... 아... 먹어야지 이제
100% 먹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이건.
저도 모르게 훗,하고 웃음이 난다
- 어디야 지금? 설마 회사?
- 아니... 집인데
- 알았어
- 어?
- 30분 뒤에 보자
=
10시 37분.
식탁 의자에 앉아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나나는
결국 벌떡 일어나 도로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샘플들 앞에 선다
컨셉 컬러는 정했고
멤버가 4명에.. 바리에이션을 해야하니까..
그러면 하의 컬러를 딥하게 하고 상의로..
하아.
머리 한 켠이 뒤엉켜서 더이상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30분 있다 온다더니.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식탁 위에 얹어둔, 잠잠한 휴대폰을 노려본다
30분 후에 보자. 란 말만 남기고 선우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안 그래도 작업하다가 그대로 샘플 속에 파묻혀 잠이 들었다가
전화 소리에 깬지 몇분 안되서 정신도 없는데
잠깐 혼란스러워 멍하니 있다가
혹시 이게 오겠다는 얘긴가?! 깨닫고
급하게 씻고 우선 눈에 띄는 건 서랍에 몽땅 밀어넣어서
그래도 그나마 사람 사는 집처럼은 보이게 겨우 만들었는데
그걸 다 삼십분 만에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온다는 말이 아니었나..?
혼자 삽질한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번쩍, 뛰어오른다
혼자일 뿐인데 괜시리 눈치를 살피면서 살며시 현관으로 다가간다
예상했던 일인데도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 않는 건 왜인지.
나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어 애써 떨리는 걸 가라앉힌 후
아무렇지 않은 퉁명스런 표정으로 문을 연다
- 뭔데
- 아직 아침 전이지?
저지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쓱 들어와버린다
잠깐 신기한 듯이 방을 둘러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식탁위에 올려놓는다
툭,하고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난다
- ... 여전하구나
재봉틀과 천이 얹어진 방금까지 작업하던 바디를 보며 선우가 중얼거린다
문득, 선우가 여기에 있지 않은 그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나나도 깨닫는다
아마도 그곳.
....정선우가 김나나를 찾으러왔던, 거기
자신이 집을 떠나면서 잃은,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었던 곳
같은 장소를 겹쳐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먹먹해온다
아니다.... 슬쩍 고개를 흔들어 감상에 빠지려는 걸 억지로 멈춘다
- 작업, 언제 끝날지 몰라
눈짓으로 좀전까지 보고 있던 의상 더미를 가리킨다
완곡한 거절에 선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 신경쓰지 말고 하던 거 해
- ...
그렇게 말한들... 신경이 .... 매우 쓰인다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나의 시선을 느끼고
봉투에서 이것 저것을 꺼내던 선우가 싱긋 웃어보인다
- 일해, 나도 할 일 할테니까
- ... 일이 있는데 왜 ... 여기 올 필요 없잖아
얘 좀 보게? 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틱 증후군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깨가 움찔한다
그런 나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표정으로 선우는 대답한다
- 너, 제때 밥 먹이는 거 그래서 약 먹이는 거. 그거 내 일이잖아
=
나른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창가의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보던 선우는
쥐고 있던 연필을 책 사이에 내려놓고 쭉, 기지개를 켠다
하암..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와서 움찔 멈춘다
힐끗 방의 건너편에 있는 나나를 바라보지만 알아차리지 못한다
제 눈에는 똑같은 검정인 것 같은데
양손에 들고 이리저리 들었다 놨다 비교해보더니
이내 내려놓고 다른 셔츠를 집어든다
옷과 옷, 천과 천 사이를 움직이는 손이
춤을 추듯 우아하게 정확한 목표물을 향해 움직인다
선우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 비슷비슷해보이는데
뭘 저렇게 고민하는 걸까
일에 집중하고 있는 김나나는 새롭다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는지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다
또 이내 설레설레 저으며 새로운 목표물을 집어든다
평소엔 그렇게나 무표정하면서
집어든 옷의 색감과 재질에 반응하는 표정이
마치 온몸으로 옷을 평가하는 것처럼 보여서
저가 아는 나나가 아닌 것 같아 낯설다
다이나믹한 나나의 움직임을 좀 더 보고 싶지만
몰래 보고 있었단 게 들킬까봐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책으로 고개를 떨군다
이렇게 저렇게 만지던 바디에
마침내 옷을 다 입힌 나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살짝 뒤로 물러선다
흐음,
한 발 떨어져보니 뭔가 모자란 것만 같다
하여간... 이래서 안한다니까...
아무래도 실제 사람에게 대보질 못하니 감이 오질 않는다
한숨을 폭 내쉬며 뻐근한 고개를 돌린다
스트레칭 하듯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 문득 잊고 있던 선우가 눈에 들어온다
뭐야....진짜....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팔짱을 끼고 책을 무릎에 펼쳐둔채로 침대 헤드에 기대 조용히 졸고 있다
소리죽여 조심스럽게 다가가본다
정선우가 ... 졸기도 하는구나
선우도 사람이니까 졸기도 하고 잠도 자는 게 당연한데,
늘 꼿꼿하게 앉아 있던 것만 봐서 그런지 잠잠히 잠든 모습이 너무 신기하다
침대 아래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올려다본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이렇게나 조용히 이렇게 마음껏.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긴 속눈썹에 닿아 반짝, 한다
햇볕에 태워본적 없는 듯한 하얀 피부에.. 남자 녀석이 입술은 왜 붉고 그래.
나나는 괜히 아랫입술을 삐죽인다
단정하게 잘린 갈색 머리를 조금 흐트러트리면 어떨까 싶은 충동이 든다
가만히 감겨있는 저 눈이 어떤 빛을 내는지 알고 있다
- 난 내가 본 것만 믿거든
그 말을 믿고 싶었어
아니 정말 넌 네가 본 것만 믿었지만
그렇지만
그 말을 해줬더라면 더 좋았을 걸
네가 본 것을 믿을 수는 있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내 마음을
넌 보았지만
받아줄 수는 없다고
오른손을 들어 가만히 선우의 얼굴선을 따라 그려본다
해를 가린 나나의 손그림자가 선우의 얼굴에 흔적을 남겼다 사라진다
차마 갖다대지도 거두지도 못하고 그저 맴돌고 있는데
뭔가 느낀 것처럼 번쩍 눈을 뜬다
화들짝 놀라 나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 ... 무슨 일 있어?
제 옆에 선 나나를 보고 의아하게 묻는다
나나의 얼굴이 괜히 붉어진다
- 아니..
머뭇거리는데 바디에 입혀놓은 옷이 눈에 들어온다
- 잠깐, 도와줄 수 있어?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먼저 바디 쪽으로 다가간다
영문을 모르는 선우가 어리둥절해서 따라와선다
- 잠깐만, .. 팔 좀..
재빠르게 선우 주변을 뱅그르 돌면서
까치발을 해서 손을 대보고 몇번인가 팔을 벌려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 얼추.. 비슷하네..
- 뭐가?
대답 대신 바디에 입혀놨던 셔츠를 벗긴다
프로필 상의 한 멤버와 선우의 사이즈가 비슷하다
마스크나 분위기까지 같진 않겠지만, 그래도 비율은 가늠해볼 수 있을테니까
임기응변이긴 했지만 차라리 잘 됐다
- 이거, 좀 입어봐줘
선우는 조금 쭈뼛거리며 나나에게서 옷을 받는다
- 그냥 입기만 하면 돼?
- 핏만 볼거니까.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티셔츠 위에 받아든 셔츠의
한쪽 팔을 끼우고 반대 쪽 팔을 찾는 선우를 보다
나나가 다가가서 셔츠 한 쪽을 잡아준다
- 옷이.. 좀 작은 거 같은데..?
간단한 옷 입기도 못했다는 게 살짝 창피해서 웅얼거린다
- ... 원래 딱 맞게 입는 거라 그래..
선우는 영 불편한 듯 꼼지락거리는데
아랑곳 않고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려 주름을 펴고 옷 태를 잡는다
일단 어깨 선을 맞추고 살짝 손 끝으로 주름을 편 뒤
허리 선을 탁탁 집은 후에 손바닥으로 쓸어넘겨 앞쪽으로 셔츠 핏을 다듬는다
집중해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나나는 진지하기 그지 없는데
자꾸 살짝 살짝 건드리는 통에 선우는 점점 더 몸이 굳어진다
- .. 저기..
- ... 가만히 좀 있어봐
움직였다간 찰싹 때릴 기세라서 그대로 멈춰서있긴 하는데
더 참다간 호흡곤란이 오겠다 싶은 찰나
나나가 조심스럽게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건가
선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중간쯤에 아직 열린 채인 단추를 붙든다
- ... 김나나
- 응?
셔츠를 보고 있던 나나가 선우의 부름에 고개를 든다
- ....
순간 지나치게 가깝단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 속에 동시에 스치고 지나간다
잠깐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발 물러선다
- ... 내가.. 할게
- .. 어.. 그래...
혹시 당황한게 들켰을까봐 고개를 숙인채 단추를 잠그고 있는 선우를
슬쩍 외면하고 괜시리 좀전까지 마구 헤집어놨던 악세서리 박스를 뒤적인다
뭘 매치하려고 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뭔가 은 재질.. 이었던거 같은데..
뭔가 가벼운...
진정되지 않는 마음만큼 악세서리 박스를 휘젓는 손길에 약간 빨라진다
작업대 위에 차례로 올려두던 악세서리가 꽤 늘어났을 때쯤 뭔가 동그란 것이 손에 잡힌다
팔찌? 였던가?
검정 옥으로 된 뱅글을 손에 쥐고 갸우뚱하다가 작업대에 올려둔다
조금 급하게 내려놓는 통에 뱅글에 닿은 귀걸이 하나가
도르르 하고 굴러떨어진다
앗.
저 조그만 게 옷 속에 굴러들어가버리면 낭패다 싶어
재빨리 손으로 받아내보려하지만 나나의 손보다 귀걸이가 빨랐다
귀걸이를 놓치고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한다
옷 더미 쪽으로 그대로 추락! 이라고 생각한 순간
뭔가에 낚아채인 듯 그대로 위쪽으로 올려지는 느낌이 든다
...?
질끈 감았던 눈을 뜬다
넘어지려는 나나의 팔을 낚아채 자신쪽으로 끌어당긴 선우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 있다
오른쪽 팔은 선우의 왼팔에 붙들리고 허리는 반대팔에 감긴채
자신의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몸을 타고 느껴진다
아주 긴 침묵이 흐른 뒤에야
누군가 호각이라도 분 것처럼 동시에 떨어진다
- ...그만.. 가봐야겠다...
- ...그래...
선우가 빠른 동작으로 옷을 벗어 바디에 걸쳐놓고
자신의 셔츠와 가방을 챙긴다
- 미안, 더 못 도와줘서
서로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선우는 아무 말이나 웅얼거리고 스스로 바보 같은 말을 했다며 마음속으로 쥐어박는 동안
어색하게 서있던 나나가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아니... 고마워 오늘..
나나의 말을 듣고 선우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 .. 처음, 인거 알아? 그 말?
- ... 그랬나...
곤란한 표정의 나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 걱정마, 내가 놀아달라고 한 거니 오늘 쿠폰은 깔거고 .. 그리고 대신 나도 부탁 하나 할테니까
- 부탁....?
무슨 말인가 싶어 시선을 마주치지만
선우는 대답해주지 않고 장난스럽게 웃기만 한다
저런 얼굴의 정선우는 처음이라 나나는 살짝 눈이 부시려고 한다
- .. 뭔데
- 안 가르쳐줘
- ... 뭐야 유치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리는 나나의 말을 듣고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고 선우가 대꾸한다
- 유치해져 보려고, 누가, 사람이 좀 유치해질 때도 있어야 한다고 그랬거든 예전에.
알지? 라는 듯 웃는 얼굴에
잠깐 미소 비슷한 게 떠올랐던 나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쁜 자식....
아직도... 면서..
'정선우'가 '누구'의 말을 담아두고 변했던 걸 본 건 그때 뿐이다
아마도 세이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담아두고 있는 거겠지
아직도 세이가 마음에 남아 있으면서 왜 저에게 이러는 걸까
그렇게나 조심했는데 저는 또 어느새 기대를 걸고 있었던 걸까
무섭게 굳어버린 나나의 얼굴을 보고
그때까지 웃고 있던 선우도 당황한다
- 왜..
- .. 가라.
내가 흔들리기 전에
흔들리는 나를 들키기 전에
이 눈물이 결국 흘러내리기 전에
제발, 가 줘.
+
- 형... 선우형
- ... 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당황한 표정의 명규와 진욱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왜 그러세요?
수상쩍은 눈초리를 따라가보니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제 손에 멈춘다
엉거주춤 베이스 줄 근처에 늘어진 손이 원래 뭘하던 거였더라 잠깐 되짚어보고서야
자신이 조금 전까지 합주 중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도 도중에 연주를 멈춰버렸던 게고
그러니 저렇게 황당한 표정으로 멍한 자신을 보고 있을 거고..
왜?
라는 물음표가 가득한 두 사람에게 무슨 답을 주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선우는 깊이 한숨을 내쉰다
- 잠깐만 쉬었다 하자
대답을 듣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가 한쪽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아버리는 선우를 보고
명규와 진욱은 이상하다는 듯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갸우뚱 하다
조심히 일어나 선우를 혼자 있게 두고 합주실을 빠져나간다
멍하니 앉아 있던 선우는
문득 생각난 듯 구석에 던져뒀던 가방을 끌어당겨 이어폰을 꺼낸다
그리고 몇번 인가 휴대폰 액정을 터치해서 마침내 찾던 걸 재생시킨다
[혹시라도 내 마음을 들킬지도 몰라 조금은 차가웠던 나였죠]
가벼운 피아노로 시작되는 음악에
떨리는 듯 나즈막한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한다
수십번, 아니 수만번은 반복해서 들었을 것 같은 이 노래.
절대 유출하면 안되는 건데 특별히 준다고 설찬은 생색을 냈지만
선우야말로 이 노래를 누구와도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나중에 결국 남녀 듀엣의 정식 음원으로도 발매되었지만
선우는 여전히 가끔 호흡을 놓치는 이 노래만 듣곤 했다
1년 전쯤 우연히 설찬의 데모곡이 담긴 MP3에서 듣고서, 단번에 알았다
이건,
나나의 목소리.
일부러 설찬이 그렇게 주문을 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건지
고등학교 시절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가녀리게 노래한다
귓가에 속삭이듯이 읊조리는 나나의 목소리가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가사를 말하는 것만 같다
눈을 감고 가만히 울리는 노래에 집중한다
김나나.
언제나 완벽한 가면 속에 숨겨왔던 자신의 결핍을 짚어내고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단단한 성채 뒤에 숨어서
남들에게 좋은 대로 행동하고 있던 저를 알아본 이상한 소녀
저를 한심하게 봤던가
아니 안쓰러워했던가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음을 낼 수 없다고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그냥 끝,일 뿐이라고
머뭇거리던 제 등을 뻥차서
결국 끝까지 가볼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끝까지 갔던 자신이 채 되돌아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모두의 기대에 맞춰 착한 어린이로 사는 게
모두를 위해서, 옳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정말 바라는 건 때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렇게 살다간 영원히 다른 사람의 취향에 맞춘 소리밖에 낼 수 없다고
그러다간 결국 내 안의 음은 잃어버리게 된다고
네 소리를 내라고
그 말이,
계속해서 마음 속에 파문을 그렸다
언제나 고요하게 튀어오르지도 흔들리지도 않던
마음을 자꾸만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가끔
그 퉁명스런 어조가 귓가에 맴돌고
딱딱했던 표정과 달리 아련히 젖어있던 눈이 떠오를 때면,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이 선을 넘어도 되겠느냐고
그러면 어디선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나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고 올려다보며
너 그렇게 머뭇거리다간 그대로 끝나.
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내 안에도 어둠이 있다는 걸
욕망이 있다는 걸
늘 반듯하게, 단 한번도 흐트러져본 적 없지만
사실은 그 선을 늘 넘고 싶었다는 걸
나는 정말은, 내가 내고 싶은 소리를, 찾고 싶다는 걸
정작 그걸 깨닫게 한 그 장본인은 더이상 만날 수 없었다
서로 참 많이 얽혀있었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칼라바의 멤버들과 종종 만났고
설찬의 절친이었으며 세이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는데
나나는 설찬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한다고 하고
은하나 세이와는 여전히 잘 지내는 듯 하고
가끔 규동의 공연도 보러간다는데
그 수많은 접점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한번을 마주쳐지질 않았다
아니다 한번쯤은 찾아갈 수도 있었으리라
마음을 먹었다면 연락처는 언제든지 얻을 수 있었을테지만
막 끝난 곡을 다시 재생시키면서 생각한다
- 결국 저는 그때도 머뭇거렸을 뿐.
마지막으로 본 눈물 없이 울고 있던 그 등이
다시 만나게 되면 저에게 무슨 말을 할 지 두려웠다
떨리던 목소리 작은 속삭임에 담긴 그 원망을 기억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만의 생각으로 다시 찾아도 되는 걸까 망설였다
[내가 먼저 다가서면 멀어질지 몰라 한걸음 멀리 서 있죠]
그건 그저 변명.
그러니 널 다시 만나게 된 이상
더이상은 물러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네가 가르쳐준대로 나는 부딪힐거라고
그런데.
다시 한번 오늘 마지막으로 본 나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떠오른다
마치 그 밤, 자신이 상처주었던 그 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입술을 꼭 깨물던 그 얼굴이
대체 왜.
자신의 무엇이 나나를 상처입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쿠폰 10장,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이대로라면 남은 7장 동안 남은 가능성은 얼마일까
이미 멈춘 노래를 다시 재생하는 대신 이어폰을 빼고 깊이 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멈춘 노래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저 기다리는 것 이상의 뭔가가 필요할 것 같다
다시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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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나야! 그건 오해야! 라고 외치는데..
http://tvcast.naver.com/v/7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