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타][선우x나나] Red Shoes
- Monster, 이후 이야기.
=
"Good Evening, Ma'am."
빳빳한 제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능숙한 동작으로 문을 연다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재빠르게 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체 누가 그랬던가
눈은 하늘의 천사님이 내려주는 축복이라니
이런 진탕길을 걸어보고서 다시 한번 그런 말을 해보라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약속에 약간 늦어버렸다
한번도 시간에 늦는 법이 없는, 아마도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상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앞섰지만 익숙하지 않은 구두 탓에 몇번이나 진창길에 미끌어질 뻔 했더랬다
문 앞에 서서 코트에 맺힌 눈송이를 조심스럽게 털어내면서
이미 사람들로 가득찬 레스토랑 안을 둘러본다
10시 방향 안쪽으로 독립된 약간 가려진 창가 자리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우아하게 물잔을 내려놓고 있는 옆모습을 발견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저 얼굴
무심하게 아무거나 옷장에서 골라입은 것 같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가볍고 날렵한 선의 회색 수트에 흰 셔츠, 포인트로 초록 넥타이
물잔을 내려놓은 손이 뭔가 불편한 듯 셔츠 손목 부분을 잡아당겨 커프스 링을 조절한다
역시 눈이 오더라도 제대로 입고 오길 잘했다,란 생각이 든다
편하게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장소를 듣고 나서 도저히 평소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나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늘 저렇게 완벽에 가까운 스타일링을 하는 상대를 만나야 할 때라면 더더욱.
숨을 고르며 자리로 다가가 똑똑 테이블을 두드린다
"왔어요?"
"죄송해요, 늦었죠, 눈이 갑자기 와서"
"아녜요, 저도 방금, 이리 줘요."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사과하며 코트를 벗는 나나의 뒤로 와 코트를 받아든다
"아, 감사해요."
"맡기면 되니까, 모자도 줘요."
"네"
코트를 들고 선 선우가 손을 내민다
그때껏 머리를 덮고 있던 털모자를 벗자 차락,하고 갈색머리가 쏟아진다
굵게 웨이브진 나나의 머리를 본 선우가 순간 놀랐다가
아무 말 없이 나나에게서 모자를 받아들어 다가온 직원에게 맡긴다
그리고 천천히 나나의 의자를 빼주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머리, 잘랐네요?"
모자에 눌려 흐트러졌을 머리가 신경쓰여 급히 몇번 손가락으로 빗던 나나가
선우의 질문에 불안하게 시선을 피하면서 귀 뒤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가닥을 쓸어넘긴다
"아, 네...겨울이기도 하고..."
대답을 하고 나니 확 혀 깨물고 싶다
겨울인데 단발로 머리를 자르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힐끔 선우의 눈치를 보지만 자신이 당황한 건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런던에 오고나서 한번도 손대지 않았던 머리를 갑자기 자른 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주일 전 받은 메일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 메일을 보낸 사람 때문.
런던에 가니 저녁 먹을 수 있겠느냐는 짧은 청과
계속 앞을 지나치기만 했지 감히 들어와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
상대를 부끄럽게 하고 싶진 않다.라고 생각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희로부터 선물 받고도 몇번 입지 않았던 블랙 원피스를 일부러 세탁했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거의 신을 일이 없던 하이힐을 꺼냈고,
그리고
머리를 잘랐다.
사실 자르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도 헤어 디자이너가 그게 훨씬 어울린다면서 권하는 바람에
에잇 이왕 하는 거,하는 생각에 저질러버렸다
그래서 지금 나나의 머리는 크게 파도치는 듯 굽슬거리는 갈색 단발이었다
나나의 대답이 들리기는 했는지 선우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갈색 머리를 한 나나는 아주 오래 전, 차라리 잊고 싶었던 그 어느 날을 다시 불러온다
순식간에, 딱딱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뭐, 왜 보는데.' 라며 삐딱하게 눈을 치켜뜰 것 같다
자꾸만 이렇게 단번에 그 시절로 소환되고 마는데
그런 선우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색하게 머리를 만지작하던 나나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는 선우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선우씨?"
말간 나나의 눈을 마주하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난 선우가 상냥하게 웃는다
"예뻐요, 잘 어울리네요"
선우의 칭찬에 얼굴이 저절로 발그레해진 나나는 어색하게 흠,하고 헛기침한다
그리고는 새삼스럽게 레스토랑을 한바퀴 돌아본다
은은한 조명에 띄엄띄엄 놓여있는 테이블들
비어있는 테이블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붐비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여기 예약 어렵다던데, 대체 어떻게 이런 자리를 구한 거예요?"
"... 누가 취소했나봐요 전화하니 자리가 있다고 하던데요"
"운이 좋았네요 진짜.
분위기에 압도된 듯 소근소근 묻는 나나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별다르지 않게 대답한 선우가 메뉴판을 집어든다
"제가 주문할게요, 괜찮죠?"
"네, 저야 뭐."
"안 먹는 거 있어요? 돼지고기라던가, 생선이라던가."
"저 다 잘 먹는 거 아시면서,"
"혹시 모르잖아요. 그새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던가 할 수도 있고."
"설마요."
"그럼, 내가 사는 거니까 비싼 거 먹어요 여기 스테이크 괜찮은데."
"네, 여긴 다 맛있을거 같아요"
능숙하게 웨이터에게 주문을 마친 선우가 다시 정색을 하고 나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잘 지냈죠? 그새 무슨 일 있었어요?"
"저희 마지막으로 본 거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머리를 잘라서 그런가 되게 오래된 것 같아서"
"저언혀 별 일 없어요.그것보다 선우씨는 무슨 출장이 한달에 한번 있어요?"
근황을 묻는 선우의 질문에 대답하던 나나가 오히려 이해가 안된다는 듯 묻는다
"나나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훨씬 바쁜 사람이라서요."
눈을 찡긋하며 웃는 선우에게 나나도 피식 웃어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저 밥이나 사주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그게 뭐 어때서요?"
"선우씨, 바쁜 사람이라면서요"
"나 놀러온 거 아닌데"
"그럼요?"
"오늘도 조금 전까지는 일도 했고,"
"우와, 싫다. 이런 날까지 일하는 상사"
"그리고, 임무도 받았구요"
옆자리 아래 내려놓은 종이 가방에서 뭔가 꺼낸 선우가
테이블 위로 나나 쪽으로 쓱 밀어놓는다
리본이 묶인 작은 상자를 보고 나나가 갸우뚱하며 눈으로 이게 뭔지 묻지만
선우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하고 만다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고 천천히 상자를 연 나나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어머니로부터, 나나씨 꺼예요."
선우의 말에도 상자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나가 옆에 꽂혀있던 작은 카드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입술을 꼭 깨물고 몇번이나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그래도 채 붉어진 눈시울을 다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든다
"마음에 들어요?"
상냥한 선우의 물음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하고 걱정하셨는데."
"....매번 받기만 하고...."
"받아줘요. 나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온건데."
훌쩍 눈물을 삼킨 나나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평범한 얼굴을 하고 차곡하게 상자에 카드를 접어넣는다
차분히 나나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다
심장이 움찔,한다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던 저 미소.
저도 모르게 오랫동안 품어왔던 말을 꺼내고 만다
"그거 알아요?"
"네?"
"정희씨... 어머님이랑 선우씨, 되게 닮은 거. 갤러리에서 선우씨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거든요"
"... 그랬나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선우씨도 나 모르는 거 같은데 낯설지가 않아서 이상하다, 왜지? 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님이랑 비슷해서 그랬나봐요."
어느 새 그리운 듯 배시시 웃으며 처음 보았던 갤러리의 그날을 떠올린다
그랬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선우의 입은 웃고 있지만 어느새 눈은 조금 슬퍼진다
"... 전혀 생각 못했어요? 내가 혹시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는?"
나직한 선우의 질문에 나나는 먼 기억을 더듬다 고개를 젓는다
"정희씨 아드님이 영국에서 유학했단 이야기만 들었으니까요,
사실 플랫에서 물건들 보면서 어떤 분일까 궁금해하긴 했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신기하죠?"
궁금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플랫의 원래 주인.
쾌활하고 우아한 정희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그 사람.
정희는 아들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지만 한번씩 화제로 등장할 때는
말 대신 어조와 눈빛에서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은 대체 어떨까. 생각해보곤 했다
가끔 혼자 잠들지 못하는 밤,
플랫에 아직 남아있는 '그'의 물건들은 조심스럽게 집어보고 몇몇 책을 넘겨보고 음반을 들어보면서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음악을 듣고 이런 물건을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말을 할까, 어떻게 웃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선우일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그날까지 내가 누군지 전혀 몰랐던 거네요 나나씨는"
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잠긴 것처럼 들린다
어째서인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해진다
나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전혀요. 어머님께서 런던 온 김에 마침 아드님도 여기 있으니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그런가보다 했죠
아드님이 궁금하긴 했지만, 설마 선우씨일줄은."
마치 자신의 편지를 읽고 날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오랜만에 정희가 런던을 방문했던 지난 가을.
자신과 지내시라고 권했어도 이미 런던에 아들이 와있다면서 사양한 정희가 저녁 식사에 아들과 함께 나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궁금했던 사람을 볼 수 있다는 호기심에 수락했다
두근거리며 도착한 약속 장소에서
정희 옆에 앉아 있다, 막 도착한 나나를 보고 놀라던 익숙한 얼굴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이제 겨우 개인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게 되었지만
나란히 한자리에 앉아 있는 건 더이상 어색하지 않게 된,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저릿해져서
어느날인가는 갑작스럽게 그의 눈물에 전이되기라도 한 듯 울어버렸고
그날의 이야기는 더이상 꺼내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공유한 사이
그래서 그 눈물의 이유를 물어보지도, 자신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그 사람.이
왜 정희 옆에 앉아 있는 건지
처음에는 아들과 같이 나오겠다고 했던 정희의 말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자신도 놀라긴 했지만,
그렇지만 그 순간의 선우는 뭐랄까
절대 마주칠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한동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반가움에 일단 정희와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땐 그저 자신과 같은 이유라고 짐작하고 미처 묻지 못했는데,
문득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혹시, 선우씨는 알았던 거예요? 제가 누군지?"
".. 아뇨, 저도 뭐."
혹시나 하는 호기심을 채 감추지 못한 목소리에 선우가 어색하게 얼버무린다
더 묻고 싶지만 선우의 얼굴이 불안하게 굳어버려서 말을 꺼내지 못한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선우의 눈치를 보며 데구르르 큰 눈을 굴리던 나나가
문득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묻는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선우씨 매일 갤러리에 와서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편지에 썼는데,
일 안하고 놀러다닌다고 혼난 건 아니죠? 저 때문에."
"아뇨, 왜 그런 생각을."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우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런 선우를 갸우뚱하고 바라보던 나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한다
"불편해보여서요 지금."
"그래요? 아닌데, 그냥..
나나의 말에 새삼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은 선우가
대강 얼버무리려다 또랑하게 바라보고 있는 눈에 포기한 듯 짧게 숨을 내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나가 말꼬리 물어 덧붙인다
"그냥?"
"... 아무래도 나나씨는 너무 우리 어머니 팬인 거 같아서요."
나나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잘해주셨는 걸요... 어떻게 다 갚아야할지 모를 정도로"
"그런가요..."
나나의 지나치게 강조하는 긍정에 선우가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과 달리 지그시 바라보는 눈이 슬퍼보여서 나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깐다
저 눈.
아련히 그리워하는 듯 멀리 바라보는 저 눈과 마주치기만 하면 왜인지 자신까지 심장이 저려오고 만다
나를 향한 게 아니다.라고 몇번이나 다잡았지만 그래도 또 자신까지 슬퍼지려고 한다
대신 나나는 테이블 왼쪽에 올려뒀던 상자를 열어 보인다
"보세요, 이것만 해도 정말... 어떻게 제가 팬이 아니라 더 한거라도 안될 수 있겠어요."
상자 안, 검푸른 벨벳 쿠션 위에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는 건
태양인지 꽃잎인지 세심하게 세공된 금잎 위에 반짝이며 자리잡고 있는 루비가 포인트인 펜던트의 목걸이였다
언젠가 정희가 검정 드레스에 하고 있는, 튀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게 존재감을 발산하는 가느다란 금줄의 그 목걸이를 보고
너무 예쁘다고 감탄하자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소중한 거라고 대답했더랬다
그러니 설마 오늘 받은 상자 안에 바로 그 목걸이가 들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기꺼이 자신에게 선물로 내주었을 거라고는 더더욱
그렇게 아끼던 목걸이를.
그리고 카드의 글 마저.
'태양처럼,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라는 그 말에 도저히 이걸 받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그렇다면 이 은혜를, 이 감사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는데.
새삼 울컥해서 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하는 나나를 보던 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웅크리고 으쓱한다
".... 오늘도 어째 어머니가 아니라 제가 대신 와서 실망한 거 아녜요?"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텐데요..."
아쉬운 듯 대답하는 나나를 보던 선우의 얼굴이 조금 굳는다
그걸 알아챈 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 그 표정, 뭐예요?"
"....뭐가요?"
뭐가 잘못된건가 싶어 움찔 하는 선우를 보고
나나는 웃음을 꾹 참고 짐짓 어른이 훈계하듯 눈을 내리깔면서 말한다
"지금 '엄마랑 같이 다니는 건 절대 싫어!'하는 사춘기 청소년 표정이었다구요"
나나의 말에 선우가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은 듯 한쪽 눈을 찡그린다
"설마요"
멈칫멈칫 딱딱한 선우의 태도가 처음이라 새로운 면을 본 기분에
나나는 자꾸만 비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다
"아직도 약간 그런 걸요 뭘, 정희씨 같은 어머니면 난 세계일주라도 다닐 수 있을 거 같은데."
"... 그런가요"
"... 부러워요 그런 어머니 아들이라는 게. 전 기억이 없어서."
"...."
"멋지시잖아요, 선우씨 싫으면 우리 어머니 삼아도 되요?"
약간은 진심을 담아 웃으며 말을 하자
가만히 나나의 미소를 보던 선우가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 이미 절반은 나나씨 어머니 같으신데요 뭘"
"네?"
"제 껀 없었거든요, 선물."
나나를 향해 양 손을 펼쳐 빈 제스처를 보인다
"아... 죄송해요. 저라도 뭔가 준비했어야했는데."
"괜찮아요."
괜히 미안해져서 얼버무리는 나나를 향해 피식 웃어보인 선우가
조금 전의 종이 봉투에서 이번엔 좀 더 큰 상자를 꺼내 내민다
"그래도, 저는 준비했죠."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당황한 나나가
받을 생각도 못하고 깜빡깜빡 눈만 감았다 떴다를 반복한다
"나, 팔 아픈데."
"아, 네.. 저기.. 어.."
선우의 말에 놀라 덥석 일단 상자를 받아든 나나는
그걸 어디에 내려놓아야 좋을지 몰라 손에 든 채로 테이블 아래 위로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내 껀 안 열어볼거예요?"
혼란에 빠져 단순 동작을 반복하는 나나를 가만히 보던 선우가 묻는다
그제야 번뜩 제가 얼마나 얼빠져있는지 알아차린 나나가 일단 무릎 위에 상자를 내려놓는다
상자를 열려고 손을 가져가다 힐끔 건너편의 선우를 바라보자 어서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한다
천천히 상자를 연 나나는 잠깐 숨을 멈춘다
"... 이거.."
"마음에 들어요?"
대답 대신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구두를 꺼낸다
붉은 새틴 소재에 작은 보석이 박힌 앙증맞은 스틸레토힐을 손 위에 올려놓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바라본다
"... 너무 예뻐요"
"다행이네요."
".... 안 이러셔도 되는데... 저는... 빈 손이고... 또..."
"입학 축하 선물이예요."
"그래도...
"한 번 신어봐요 사이즈 맞는지."
머뭇거리며 바닥에 구두를 내려놓은 나나가 조심스럽게 새 구두에 발을 넣어본다
맞춘 것처럼 쏙하고 들어가는 걸 보고 조금 놀라 선우를 올려다본다
"맞아요?"
"네, 그렇긴 한데,"
오늘 밤은 마법에라도 걸려버린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딱 맞는 사이즈를 안 걸까
놀란 표정의 나나에게 아련한 미소를 띄고 선우가 말한다
"누가 그러던데요 좋은 구두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동시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나나가 뒷 말을 잇는다
선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구두가 나나씨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면 좋겠네요."
"...."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지 못하고 멍하니 선우를 바라본다
대체 이 사람, 누구일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자신이 깨질 것 같은 도자기라도 되는 것처럼
상냥하고 조심스럽게, 딱 그만큼의 선 밖에서 대하면서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웃고 있는데도 금새 눈물 흘릴 것 같은
아련한 눈빛으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이 사람은.
왜 저렇게 자신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자신은 이렇게 심장이 또 아픈지
심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그저 예민한 거란 진단을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번 더 의사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말 없는 나나를 살피던 선우가 조심스레 묻는다
"별로예요?"
선우의 말에 다시 한번 신고 있던 새 구두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벗어 상자에 담는다
"아뇨... 구두는 너무 예뻐요...그냥....
"그냥?"
상자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가만히 선우를 바라본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얼굴이 일렁인다
나나는 울컥하고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집어삼킨다
자신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후원자의 아들 이자
한달에 한번 이상 해외 출장을 다녀야하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바쁜
그리고 분명 그 바쁜 일상만큼 대단한 위치에 있을 것이 분명한
아주 가끔
가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 사람은 대체,
... 아무래도 아니겠지.
혼자서 고개를 살짝 젓는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뭐가요?"
심각하게 한참 침묵하던 나나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를 내자
선우는 오히려 당황해서 되묻는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저랑 이렇게 저녁 먹어도,"
"그게 뭐 어때서요?"
"... 같이 있고 싶어할 사람 많을 거 같은데..."
"...없어요 그런 사람"
괜한 걱정이라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런 선우의 반응을 모르는 척 나나가 괜히 찔러보듯 말을 잇는다
"게다가, 서울도 아닌 런던에서"
"와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정희씨 쓸쓸하실거예요, 이렇게 좋은 아드님이 곁에 없어서"
"괜찮아요 부부끼리 오붓하게 지내실테니, 괜히 있어봐야 다 큰 아들은 방해만 되고. 심하면 구박이나 받을 거고."
".. 그러니까요. 부모님은 오붓하게 지내시는데 아들은 크리스마스에 일하러 멀리 나와있고 그래도 되요?
게다가 대타로 선물 전달에. 저랑 저녁까지."
자꾸만 앞서나가고 싶어하는 자신을 다잡고 싶어서,
그저 후견인의 의미 외엔 더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웃으면서 던지는 말들에 선우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는다
"나나씨가 어때서요"
차가운 선우의 말에 움찔하고 만다
"...미안해서 그러죠, 이런 날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하는 거잖아요. 중요한 날이니까."
화가 난 것 같은 반응에 나나는 멈칫하고 조용히 설명한다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 당신도 중요한데."
가만히 나나의 말을 곱씹는 것 같던 선우가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네?"
"....나나씨 입학 축하하는 자리잖아요. 이게 더 중요해요."
예상하지 못한 답에 나나가 잘못 들었나 해서 되묻자
선우가 그제야 조금 풀린 듯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한다
설명이 틀린 건 아닌데
어쩌면 자신이 바랬던 정답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그 미소가 서글퍼보여서 나나는 잠시 할말을 잃는다
"... 그렇게 말하면 저야 고맙지만..."
"... 어머니 엄명도 있으셨으니, 너무 부담갖지 말아요."
"... 좋은 아들이네요."
선우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짓는다
"먹어요, 다 식겠다"
더이상 나나의 눈을 마주치지않고 막 도착한 접시에 시선을 옮긴다
마치 수학 문제의 결정적인 답이라도 찾는 것처럼 음식에 집중하는 선우를 잠깐 보고
포크를 들어 관자를 쪼개던 나나가 울컥하고 내뱉는다
"....고마워요."
"?"
나나의 말에 고개를 든 선우에게 살짝 웃어보인다
"일 때문에 온 선우씨에겐 미안하지만, 덕분에 저는 다행이예요
눈까지 오는 크리스마스에 플랫에 혼자 있었으면 우울했을텐데"
"제가 와서 잘 됐네요."
평상시로 돌아간 듯한 덤덤한 대화에 마음이 놓인 듯 접시 위를 움직이는 나이프에서 힘이 빠진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가 사륵 내려앉는 걸 보고 나나가 미소짓자 선우는 영문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이번엔 런던에 언제까지 있어요?"
"아마 연말까진 있을 것 같은데요."
"새해에나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연말에 우울하게 그게 뭐예요, 일하느라 New Year's Eve까지 객지에서 혼자"
"그럼, 그날도 나나씨가 나랑 놀아주면 되겠네요. 약속 없죠?"
"아... 있다고 하고 싶은데... 없어요.."
"내가 구제해줄게요."
"... 뭔가 진 것 같아"
입술을 삐죽하며 축 늘어져 중얼하는 나나를 보던 선우의 손이
무의식중에 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뻗으려다 움찔,하고 멈춘다
낯설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도로 나이프를 쥐는데
나나가 그렇다면, 하고 생각난 듯 묻는다
"선우씨,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네?"
"필요한거나"
갑작스런 나나의 말에 선우는 곤란한 듯 눈썹 사이를 찌푸린다
"... 없는데.."
"생각해봐요 돌아가기전까지. 취향을 모르니까 아무거나 선물도 못하겠구. 뭔가 필요한 게 하나는 있을 거잖아요."
중얼중얼하며 앞에 놓인 접시에 집중하는 나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선우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꾹 눌러왔던 기침처럼 길게 감춰왔던 말을 작게 토해내고 만다
"... 그럼."
"네?"
마침내 스테이크를 끝내고 구운 채소를 공략중이던 나나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다
나나의 눈을 마주한 선우는 이걸 그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버려야할지
아니면 문장을 완성해야할지 잠시 고민한다
초롱초롱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나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선우는
생각을 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멍하니 말해버리고 만다
"선물 대신 부탁 들어주는 거 어때요?"
"부탁이요?"
"... 별 건 아니고.... 그냥... 혹시나.. 생각나서...."
"... 뭔데요?"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마저 설득하려는 듯 서두가 길어지자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 걸까 싶어 잔뜩 긴장한 나나는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한참 몇 번이나 입 속에서 뱅글뱅글 맺힌 문장을
소리 없이 되뇌이던 선우가 마침내 나직이 속삭인다
"... 불러줄래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나나의 머리 위에 명백한 물음표가 크게 번쩍인다
뭘 불러달라는 건지.
택시를?
"네?"
"이름,"
나나가 되묻자
선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어렵게 문장을 다시 완성한다
"... 선우야, 라고 한번만, 불러줄래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선물 대신 부탁,이라는 것까지는 납득이 가지만
그렇지만 왜 그 부탁이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인지.
지금까지 이렇게 정중하고 깍듯하게 '나나씨'라며 자신을 대하던 사람이
왜 한번도 서로 써본 적 없는 친근한 호칭을 불러달라는 건지.
그것도 앞으로는 그렇게 부를래요?도 아니라 단 한 번.이라는 이상한 요구.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예요,
라고 묻기에는 너무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기회인 것처럼
이걸 얻지 못하면 심장이 터져 죽기라도 할 것처럼.
그 마음에 전이된 듯 나나의 심장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한다
"... 물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
"싫으면 안해도 되요"
눈만 깜빡깜빡하면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나에게 불안하게 말을 건네지만,
스위치가 꺼지기라도 한 듯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음식 식겠어요, 먹어요. 방금 한 말은 잊어버려요 미아ㄴ..."
한참 침묵을 견디던 선우가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듯
도로 나나의 포크를 집어 건네면서 사과한다
"..... 선우야."
내민 포크를 집는 대신 나나가 마치 새로 배운 단어를 처음으로 음성으로 만들어 내뱉는 것처럼 어색하게 속삭인다
건너편에 앉은 선우를 향한 시선은 언젠가 선우가 그러했듯이 선우를 바라보면서도 선우 너머의 누군가를 향한 듯 아련히 멀다
"선우야, 정선우."
자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나나를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그곳에 있었어야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려는 듯 간절히.
다시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음성에 어질하게 기뻤다가
그건 그저 한번 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나락으로 추락했다가
여전히 자신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과거의 자신에게 향했던 것과 같은 익숙한 나나의 시선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묶어놨던 감정이 터져나오고 만다
".... 응, 나나야."
겨우 두마디뿐,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마치 세계에서 유리된 것처럼
크리스마스 이브,
초가 따스하게 공간을 밝히는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와 나직한 대화가 오가는
런던의 레스토랑이라는 시공간에서
자신들만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서로를 바라본다
".... 왜 그렇게 봐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선우에게
아직까지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않은, 꿈에서 방금 깨어난 듯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묻는다
가만히 나나를 보던 선우가 아프게 웃는다
"나나씨는.. 왜.. 울고 있어요?"
그제야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가라앉은 코맹맹이 소리도 눈물 때문이었다는 걸.
천천히 손을 들어 뺨에 흐르고 있는 눈물 자욱을 확인하는 걸 보던 선우가
조심스레 팔을 뻗어 냅킨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울지 말아요."
조용히 말하는 선우의 목소리도 자신만큼이나 잠겨 있다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는 부드러운 손길에 멍하니 선우를 바라본다
머릿 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심장이 저릿해오고
뒤죽박죽 감정이 뒤섞인다
나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린다
이건 너무 이상한 생각이지만,
너무 이상해서 절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몇번이나 튀어나오려고 했던 걸 바보 같다고 치부해왔지만,
그렇지만,
"...우리, 알던 사이인가요? 원래, 우리. 알고 있었어요?"
가만히 선우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선우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나나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몇번인가 나누어 겨우 묻는다
나나의 말에 선우의 손이 멈칫 한다
반응을 느낀 나나가 간절하게 선우를 건너다본다
"..... 아뇨."
한참 말이 없던 선우가 대답한다
"그러면....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슬프게 웃는지
어째서 나는 매번 이렇게 심장이 아픈지
당신의 그 시선은 어째서이고
나의 이 떨림은 어째서인지
그것은 모두 우연일뿐인지
착각인건지 아니면 의미가 있는 건지
채 음성으로 다 만들어 전달하지 못한 그 질문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선우가 복잡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 미소에마저 나나는 심장이 아파오는 것 같아진다
"나중에"
"?"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요."
잠깐 멀리 바라보고 답을 고르던 선우가 알 수 없는 말을 꺼낸다
멍하니 다음 말을 기다리는 나나를 향해 나직하게 덧붙인다
"길을 떠난 갈색머리 아가씨가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
방금까지 오가던 이야기에서 어떤 맥락에 따라 등장한 것인지 모를 뜬금없는 대답에 나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선우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웃는다
여전히 슬프지만 밝은 미소에 따라 웃게 된다
그 갈색머리 아가씨는 누구인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결국 행복해진다고 하니까.
선우가 말하면 정말로 그럴 것 같으니까.
"날 믿어요. 갈색머리 아가씨는, 꼭 행복해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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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Happy Ending.
대화부분만 써놓은지는 며칠 지났는데 이야기로 다 만드는데 시간이 더 걸려버렸어.
그래서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윤종신의 Annie(http://youtu.be/rXdlEBL3VzQ)를 듣고 있었는데
후반부엔 아이유의 분홍신(http://youtu.be/K0FT6A4kg1E)을 내내 듣게 되어서 아무래도 분위기나 이야기가 마구 섞여버렸네....
그래도 -
결국 갈색머리 아가씨는 행복해졌다고 믿고 싶어.
초 다크하게 시작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화사하게 끝낼 수 있게 한 냔들의 댓글(에 담긴 해피엔딩의 염원)에 Respect!
+
사실 나냔은 Spotless Mind 를 쓰면서 이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나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던지, 둘이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던지, 나나가 싫어서 그런건 아닐거라고 설명해주는 거라던지..
그리고.... 나나가 기억을 찾으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지 않을까 해서...)
냔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좀더 끌어올려써봤는데 이번 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주려나.
다시 읽어보니 Red Shoes 는 어쩐지 아이유의 너랑나, 와 비슷한 부분이 있네. 생각했던건 아닌데... 알고보니 나 아이유 팬이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