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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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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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네?"



갑자기 고요를 깨트리는 목소리에 놀라 그때껏 조심스레 만지작거리고 있던 카메라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서늘한 그녀의 눈이 몰래 찍었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던 이젤 위를 떠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괴물이 있어요."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치아라, 작은 연못이 있는 이 마을에서 '괴물'이라고 하면 누구든 가장 먼저 자신을 떠올릴 것임으로.

그리고 그걸 모를 리 없는 그녀다.

애초에 모두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그 모습으로 그녀와 처음 만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되려 슬퍼보였으되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가장 너머를 꿰뚫어보듯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녀는, 특별한 여자였다.



"... 괴물, 이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할말을 다 했다는 듯이 시선을 거둬들였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갑작스런 말에 머리가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된다고 애써 정신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초조함에 아직까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손에 땀이 맺혔다.

혹시나 카메라가 손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할까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고 했다.

어설픈 손동작에 건드린 탁자 끝이 흔들리면서 덜커덩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그의 눈이 마치 바스락 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역시나 소리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본 그녀는 이내 사정을 짐작했는지 풋,하고 가볍게 웃었다.



"아녜요, 필성씨 얘기한 거."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때까지도 바들바들 떨리던 손 끝이 잦아들었다.

그보다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에 순간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다시 집어들 뻔 했다.

그녀가 웃는 건 아주 희귀한 일이었다.

그토록 오래 그녀의 뒤를 좇았던 그도 열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나 쌀쌀하고 서늘한 얼굴이 미소 한 줄기에 어떻게 180도로 분위기가 달라지는지,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모습을 박제해서 고정시켜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순간을 담을 용기는 내지 못했다.

그가 담은 모습은 늘 멀리에서, 아니면 몰래 찍은 뒷모습 뿐.



"진짜 괴물은 따로 있죠.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가 그녀의 미소에 홀려 망설이는 동안,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 보았다.

아마도 이젤에 담고 있었던 가을 들판의 풍경을 바라보는 걸까.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 이런 모습 보면 당신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요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쏟아지는 빗속을 도망쳐 겨우 읍내 어귀에 세워둔 차에 도착했을 때에야 겨우

손에 우산이 없고 온 몸이 흠뻑 젖었다는 걸 발견했더랬다.

당연히 차에 타야했지만 그때까지 겨우 버티고 있던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온몸이 떨려왔지만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았다.

엄마. 엄마라고. 왜 그걸 궁금해한 걸까. 왜.


얼마나 빗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을까, 갑자기 몸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웅크리고 있던 얼굴을 들자 한손으로 우산을 내밀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저를 보고,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그는 그때까지 떨리던 몸이 단숨에 멈추는 걸 느꼈다.



'뭐라고 부를까요?'

'... 아가씨,라고 해요 다들.'

'아니, 진짜 이름 말예요, 이름이 뭐예요?'



자신에게 내민 우산을 받아들고 천천히 일어선 그에게 눈을 맞추며 그녀가 건넨 질문은 너무 낯선 것이어서 그는 잠시 멍해졌더랬다.

아가씨, 그게 자신의 이름인 줄 알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이름이 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가씨,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아가씨, 경멸과 공포의 이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 것도, 그가 누군가에게 이름을 말해본 것도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그는 잠시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 강.. 필성'

'강필성...'



그녀는 겨우 내뱉은 자신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었다.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니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반가워요, 강필성씨'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마치 거기에 무슨 주술적인 의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건 정말 주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환하게 웃던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에게 내밀었던 길고 흰 손에는,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또렷한 그 목소리에는 

어쩌면 마법의 힘이 깃들여져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단 한번의 눈길에 세계의 벽을 힘없이 무너지게 하고

단 한번의 손길에 미친 듯이 빠져들고 마는 마법의 주문 같은 것.



그날부터였다.


그녀는 종종 그의 집에 찾아와, 들판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아니 미술학원과 집에 갖혀있다시피 하던 그녀가 무심결에 답답하다,고 한 말을 듣고 

언제든 그림을 그리러 오라고, 트인 곳에서 아틀리에 삼아 그리면 좋지 않느냐고 

어차피 자신의 집은 아무도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고 먼저 제안했던 것은 그였다.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 했던 그녀도 역시 이 폐쇄적인 마을을 견딜 수 없었던지 그의 집을 가끔 찾곤 했다.


그렇다고 관계가 가까워졌다던가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는 서늘했고, 그의 세계가 다시 무너지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서로의 공간에서만 아주 가끔 대화를 주고 받았을 뿐,

자신의 집을 벗어나면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모른 채 지나쳤다.

어쩌면 그정도의 거리감이 그를 오히려 안심시켰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녀의 부탁으로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기도 했다.

어떤 물건을 구해달라던가 하는 작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는 만큼이나 쉽게 잊었으므로, 그런 부탁들은 종종 아주 쉬웠고,

어려웠다고 해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역시 어떤 주술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토록 먼 거리에서도 고립되어 살아가던 그의 세계를 움직인 그녀는

아마도 아치아라, 이 마을에서 가장 달콤하고 위험한 주술, 그 자체.



그녀는, 아주 특별한 여자였다.



'혜진씨'



그는 뒷모습인 채인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먼저 물어봐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정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눈에 띄게 싫어했다.

뭐라 의사표현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순식간에 경직되는 눈빛을 몇번인가 마주한 뒤로는

저절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이름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왜 이름을 싫어하느냐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대신 이름을 불러야할 상황이면 그는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예를 들면,



"무슨 생각해요?"



영원히 돌아보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등을 향해, 아무런 파문도 그리지 못할 돌멩이 같은 문장이 퐁,하고 깊은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창틀이 캔버스 프레임이라도 된 것처럼 박제된 그림같이 꼼짝않던 그녀의 등이 그제야 움찔,하고 돌아섰다.

당연히 기대했던 서늘한 무표정 대신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너무 지쳐보여서 그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필성씨"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스케치를 하던 연필를 그러쥔 채였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질문을 던졌으니 대답을 하는 대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흐름상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아무런 의미없는, 호명 대신인 질문이었는데도 이 순간만은 그 대답을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녀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사진 속에 수없이 박제해온 그 하얗고 서늘하고 초연한 얼굴을,

그리고 자신이 포착해온 그녀의 순간들을, 아마도 그녀조차 몰랐을 흔적과 틈과 뒷모습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아는 얼굴과 그녀도 모르는 찰나들을.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와 그녀 사이의 공간에는 정적이 흘렀다.

늘 그녀와 그 사이에는 침묵이 있었고, 그 암묵적인 약속이 깨지는 것이 희귀한 일이었는데도

그 순간의 고요는 평상시와 달리 마음을 괴롭혔다.


숨소리마저 사라진 것 같은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말을 꺼내면 목숨을 빼앗기는 게임에 참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만 간혹 흔들릴 뿐 꽉 다문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열려 있던 창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에 살랑, 머리카락 몇 개가 흔들렸다.

긴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눈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도 저도 모르게 따라서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아 - 



누구에게서인지 모를 한숨이 정적을 깨트렸다.

거세게 몰아쉰 숨소리에 움찔 놀란 그와 달리 그녀는 조용히 무릎 위로 시선을 떨궜다.




"부탁이 있어요."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조금 전의 바스라질 것 같은 그림 대신 귀기 섞인 일렁임이 입을 열어 움직였다.

그는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핏기없이 하얀 얼굴

검은 머리칼

서늘한 표정

차갑게 굳은 입꼬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



저 눈에는 주술이 걸려있다.



"절, 찍어주세요."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부탁으로 몇번인가 그녀의 그리고 또 다른 이의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요."



그런 거라면 그의 전문 분야였다.

지난번 사진도 그렇게 찍지 않았던가.

각도도 표정도 완벽하게 그녀가 주문한 그대로였던 그 사진을 본 그녀는 처연하게 웃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했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본 거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도 잊었을리가 없었다.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날 찍어줄 수 있나요?"



그는 조금 불쾌해지려고 했다.

얼마나 더 자신을 시험하려는 걸까.

한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은 없었다.

모두 다 잊은 걸까.


그는 울컥하고 튀어나오려는 볼멘 소리를 억지로 눌렀다.

긴장할 때면 그렇듯이 손가락이 뒤틀릴 것 같아서 깍지를 꼭 눌러 끼자 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죽일 듯이 내려다 보았다.



"필성씨"



그녀는 꼭 대답을 원했다.

정작 자신은 늘 침묵으로 일관했으면서도.

그는 문득 잔혹해지려는 충동을 느꼈다.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와 같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마 인생에 다시 일어나지 않을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찍는 건 어렵지 않아요. 특별히 원하는 게 있나요?"



꾹 눌린 성대에 자그맣게 겨우 낸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에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을에 괴물이 있어요."



처음에 했던 말이었다.

기시감에 방금 전까지 느꼈던 짧은 분노는 갈피를 잃어버렸다.



".. 그러면 그 괴물을 찍을 건가요?"



어리둥절한 그의 질문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는 오늘 그녀의 새로운 표정을 유독 많이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낯선 미소의 끝에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죄책감. 

두려움. 

그녀에게서 한번도 느껴지지 않던 감정들.



그는 순간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한번도 친밀했던 적은 없지만,

이토록 먼 존재였던 건 처음이었다.



"아뇨, 절 찍어주세요."

"그게 괴물과는, 무슨 관계죠?"



답해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방패가 될 거예요, 증거가 될지도 모르구요."

"...방패요?"



당신에게 방패가 왜 필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증거는 또 무슨 말이냐고도 다그치고 싶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이 뭔지 알아요?"



그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질문과 함께 저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이제 너무 슬퍼보였다.

아니 절망을 본 사람처럼 까맣게 사라져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할 말을 모두 잃어버렸다.



"사람이 그 사람인 걸 알려주는 세가지 조건이 있대요."



그녀는 가만히 희고 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지문"


"이름"


"가족이나 친구" 



손가락이 하나씩 접힐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씩 더 낮게 가라앉았다.

그 무게가 더해질 때마다 그의 손바닥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알 수 없는 초조감에 저도 모르게 뚝,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가만히 접힌 세 개의 손가락을 보다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 이상하죠. 남들은 다 있는데 죽어도 이걸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게."



누구라고 지칭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갑자기 심장을 관통당한 듯 찌릿한 아픔을 느꼈다.

왜 그녀 앞에서만은 그가 그토록 약해지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한번도 말한 적 없는 그 모든 사정을, 단번에 알아차린 걸까.


지문과 이름과 가족과 친구.

그 중에 무엇도 없는 자신. 

괴물.

그녀는 지금 그에 대해 말하는 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영혼을 공유한 사이였는지도 몰랐다.



"..혜.."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거래요. 잊혀지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누군가 날 기억해준다면, 그렇다면,"



미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스산한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는 조금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두 손은 그때껏 쥐고 있던 연필을 금새라도 부러트릴 듯이 세게 비틀어쥐느라 어느새 새빨갛게 피가 몰려있었다.

처연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귀기 같은 절박함이 어려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압도되어버렸다.

금새라도 뚝,하고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순식간에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는 저 심연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날 찍어주세요,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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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사진은 왜 찍은 거예요?"

"이뻐서요."

"에이. 세상에 예쁜 여자가 쎄고 쌨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거죠?."



"그 여자는 정말로 특별한 여자였어요."



사라지지 않을, 나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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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