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아무리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해도 시간은 흐른다 
환호 소리를 뒤로 하고 급히 차에 올라탄 지훈은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이거야 원, 돈 벌어 남주는 기분이구만 - 내 팔자는 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인지. 
그러고 보니 처음 벌었던 돈도.... 정호 녀석 반지 찾는데 썼었지..... 팔자 맞네.... 
생각하면서 앞자리 운전석의 매니저에게 말을 건다 

- 다음은 어디냐? 
- 영등포 에서 두 관만 무대 인사 하시면 오늘 일정은 끝나십니다. 

영등포. 
그래, 오늘은 친구들을 모두 영화 시사 겸 초대한 날이었다 
일부러 마지막 스케줄에 맞춰 자리를 마련했고 끝난 후 뒤풀이에도 들릴 예정이었다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한 때로 부터 생각하면 일년에 2-3편 이상 씩 꼬박꼬박 쉬지 않고 일해온 지훈은 
이렇게 일부러 친구들을 초대하고 그 이후 뒤풀이에 잠시라도 들리지 않으면 친구들을 통 만날 수가 없었다 
이경은 농담처럼 소처럼 일하는 건 좋은데 그 돈은 다 누구 주려고 그러느냐고 
바쁘다는 핑계로 도무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지훈을 타박하곤 했다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그러니 오늘 술은 내가 산다고 쉬게 되면 같이 여행이나 가자고 하면서도 
지훈은 지난 몇년 간 한시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굴 알려진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냐 툴툴거리면서도 한강변 구석에 쳐박혀 밤새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나눠준 정호와 이경을 제외하곤 
거의 일년만에 얼굴을 보게 된 친구들을 생각하는 지훈의 얼굴에 경계심 풀린 미소가 떠오른다 

영등포로 향하는 차가 막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창 밖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들이 오늘도 깜빡이며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고, 
지훈은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알아달라는 저 많은 절박한 신호 중에 올바른 의미를 읽어내는 건 불가능할 것만 같다 
마치 모르스 부호 처럼 
그때, 그애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여름 방학이 지나고 슬쩍 서늘해질 무렵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교실의 예민함은 극한에 달했고 
하경이 지훈의 공부를 따로 봐주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대신 그에 반비례해서 독설 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증가했다 
하도 공부 안하냐 머리는 뒀다 어디 쓸래 니 뇌도 이제 심심할거다 등등 독설로 기를 죽이는 통에 
나한테 너랑 같은 전교 일등의 수준을 원하지 말라고!!! 
라고 말하고 싶은 적도 수십번이었지만 어쩐지 무표정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하경의 얼굴을 보면 
조금만 더 투덜거렸다간 바로 '아, 그럼 관두든가.' 라고 말해버릴 것 같아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는게 무서워서 
지훈은 (대체 왜 자신이 사과하는지는 몰랐지만) 결국 매번 내가 모자란 탓이다..... 잘할게....라고 사과하곤 했다 

이 기집애, 스트레스를 나한테 다 푸는 거 아냐? 

남들은 고3이 되면 살도 찌고 먹을 것도 많이 먹고 성격도 예민해진다던데 
하경은 도통 지난 1년과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다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기 때문이다,란 의구심을 지훈은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생각하면 딱히 하경의 말에 잘못된 점을 찾을 수는 없었으므로.. 
꼭 한번은 내가 널 놀래키고 말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한 지훈은 
민기에게 몰래 물어 도움이 될만한 (일반 고3들에게야 필수참고서지만 지훈으로서는 선행학습에 해당하는) 문제집을 추천받았다 

이걸 다 풀어내서 내가 널 놀래키고 만다. 
아직 풀지도 않은 문제집을 사들고 이미 뿌듯해진 마음으로 막 서점을 나오려는데, 

저 뒷모습. 
익숙하다. 

건너편 패스트푸드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플라스틱 좌석에 앉아 새초롬하게 책을 펼쳐두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뒷모습이 꼭 어디선가 본 듯 했다. 

지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애써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저 등, 저 어깨... 어디서 봤는데. 

누구지... 

지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토록 익숙한 뒷모습이 누구일까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 뒷모습을 관찰했다 

아.. 

하경이다. 

누구인지 밝혀냈는데도 지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년동안 바라봤던 그 뒷모습이었다 
아니 그 뒷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 하경의 뒷모습인데 교실에 앉아 바라봤던 기억과 달리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꼿꼿하던 철옹성이 아니라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모래성이 거기 있었다 
가만히 앉아 책을 펴놓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왜 그렇게 위태로워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지훈은 한참이나 더 그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쟤는 여기서 혼자서 뭐하고 있는거지? 

뒤늦은 의문이 떠올랐을 땐 하경은 재빠르게 가방을 메고 패스트푸드 점을 나오는 길이었다 
멀찍이 서서 하경을 바라보고 있던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하경의 뒤를 따랐다 
엉뚱하게도 큰 찻길 옆으로 들어선 하경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강 다리 위 보행자 통로로 들어섰다 

얘는 여기는 또 왜 온거지? 

걸어서는 한번도 한강을 건너보지 않았던 지훈은 
잠시 다리로 통하는 건널목에 서서 망설이다가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하경의 뒷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길을 건넜다 
정작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하경은 여전히 자신을 깨닫지 못한 듯 일정한 걸음으로 다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중간쯤에 가더니 난간에 완전히 몸을 맡긴 듯 기대어 섰다 
쟤는 위험하게 또 저기서 뭐하는거야.. 
걱정이 된 지훈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하경 뒤에 섰다 


- 이번엔 너야? 

다리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어 있는 하경의 어깨에 막 손을 올리려는데 
무뚝뚝한 얼굴을 휙 돌려 바라보는 통에 내뻗은 손이 민망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 괜찮아 나 안 죽어. 버리지도 않을거고. 


딱히 죽을까봐 그런 건 아닌데. 

지훈은 멋쩍게 손을 거둬들이면서 어색하게 옆으로 가 선다 


- 여기서 뭐하냐 
- 넌 여기서 뭐하는데 
- 나야 뭐… 


네 뒷모습이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아서 
걱정이 되서 


입 속에 맴도는 말을 차마 내놓진 못하고 얼버무렸다 


막상 나란히 서고 보니 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문제풀이 외에는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민을 털어놓는 일 따위는 더더욱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난간에 기대선채로 시간이 지났다 
여름 끝자락이라지만, 저녁엔 좀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떻게 해야하나 추운데 그만 가자고 해야하나 혼자 가도 되려나 
지훈이 우물쭈물 망설이는데 

그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서 멀리 바라보기만 하던 하경이 
갑자기 팔을 길게 뻗어 멀리 어둑해진 어둠을 따라 붉게 떠오르는 가로등을 가리켰다 

- 저기 말야 
- 응? 
- 저기 꼭 뭐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아? 

뜬금없는 하경의 말에 지훈은 얘가 드디어 그동안 쌓인 수험스트레스로 미쳐 버린 건가 싶은 생각에 덜컥 겁이 나서 
하경이 가리키는 방향 대신 하경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 아니 그쪽이 아니라 저 불빛들 말이야 

우선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하경의 차분한 얼굴에서 도무지 문제를 찾아낼 수 없었던 지훈은 
머뭇거리며 다시 하경이 가리키는 방향, 올림픽대로의 어딘가, 어둠 속에 붉게 떠오른 가로등불을 바라본다 

- 자세히 보면 말야 저 불빛들이 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거든? 

지훈은 도무지 무슨 속도가 다르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인다 

- 저 불빛들이 다 이리로 오라고 말하고 있다면 말야, 도대체 어느 빛을 따라 가야하는 걸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 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빛을 따라가도 좋은 거 잖아 꼭 한 줄로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거잖아 저렇게나 빛이 많은데 말야 

울컥 북받친 듯 다다다다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하경이 겁나기도 하고 어쩐지 안쓰럽기도 해서 
지훈은 고개를 연신 끄덕여주었다 

그래 세상에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 
그래 꼭 빛을 하나만 따라가야하는 건 아니지 
그래 아니야 

한참 속엣말을 토해낸 하경은 그제야 새삼 지훈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이 잠시 멈칫 하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방을 둘러메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태연한 그 뒷모습은 다시 철옹성 같았지만 
지훈은 어쩐지 그 단단한 철문 안 쪽에 금새라도 무너질 듯한 성채를 넘겨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경이 손짓으로 가리켰던 방향을 훑어본다 
저 애는 대체 어떤 빛을 봤다는 걸까 
수없이 점멸하는 가로등 중에 어느 쪽인지 지훈은 아무래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재호야 수고했다 들어가 
- 형님 절대 오늘 술 드시면 안됩니다. 아시죠? 내일 아침부터 스케줄 있는거. 
형님 여기 내려드리고 간 거 저 걸리면 실장님한테 죽어요 ㅠㅠ 

막내 매니저가 징징대며 차문을 붙들고는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안한다 

- 알어 여기서 딱 한시간만 있다가 바로 집에 들어갈거다 내가 스케줄 펑크내는거 봤냐? 
걱정 말고 들어가 이럴 때 아니면 내가 친구들 못 만나는 거 알면서 그러냐 한번만 봐주라 

억지로 달래서 매니저를 들여보내고 지훈은 신나게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 오오오오오오 배우님 오셨어! 
- 이야 이지훈, 제법이던데 이젠 감정연기도 하더라? 
- 됐고!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 받아라 넌 얼굴 보기가 왜이렇게 힘드냐? 

방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 이미 지들끼리는 1차를 끝낸 분위기다 
지훈마저 그 분위기에 동참시키려는 건지 채 자리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술잔 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아 재호가 알면 날 죽이려 들겠군 

지훈은 신신당부하던 매니저의 얼굴이 떠올라 슬그머니 술잔을 내려놓고 
그때껏 한마디도 없이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꼴을 바라보기만 하던 흥수의 옆에 앉는다 


- 송하경, 연락 왔냐. 

조용히 앉아 맥주잔이나 홀짝이던 녀석이 
마치 오늘 날씨 어때. 란 질문처럼 여상스럽게 툭 던진다 

앞에서 지들끼리 투닥투닥하느라 정신없는 애들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신나게 웃고 있던 지훈의 상체가 휘청 꺾인다 
나즈막한 흥수의 목소리가 자신에게만 그렇게 크게 들린 모양이다 
여전히 시끌벅적 정신없는 친구들을 흘낏 보고 
잠시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지훈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흥수를 바라본다 

- 이강주. 물어보더라 네 번호. 

무심한 녀석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면서 제 할 말만 하고 다시 침묵. 
거론된 이름의 주인공은 건너편에 앉은 남순을 버럭버럭 갈구는 중이었다 
내내 궁금했던 의문이 하나 풀렸다 
그래 하경은 아직도 강주의 베프겠구나 
그리고 내내 무의식 속 형 노릇을 했던 흥수는 예상치 못하게도 강주와 오래 만나는 중이었다 
자신이 막 살던 시절 오이지들은 커녕 고남순이 전설의 일짱이라는게 밝혀졌을 때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던 강주가 
유일하게 한 풀 꺾여주는 상대. 
강주의 오지랖이 지나치다 싶을 때면 흥수는 그저 가만히 강주의 눈을 응시했고 그러면 매번 강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신해지곤 했다. 
거참 신기한 커플이라고 친구들은 모두 얘기했지만, 지훈은 늘 이 솔직한 커플이 부럽기만 했다 
다시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하경은 강주에게 자신의 번호가 필요하다고 할 때 무슨 이유를 댔을까 
아 어쩌면 너도 친구 나도 친구, 모드의 생각보다 둔한 강주는 그런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지훈은 다시 몸을 기대 여전히 앞에서 마이크를 쥐네마네 티격태격하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 답은 했냐. 

잊고 있었다. 흥수의 태평양같은 오지랖. 
오지랖 넓은 놈이 눈치까지 빠르면 참으로 피곤하다는 걸 지훈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아. 뭐. 그냥. 

그때도 지훈과 하경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던 기운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흥수였다. 
그리고 그 기운이 일시에 소멸되고 지훈의 인생이 갑자기 치열해진 이유도 

지훈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던 시절, 
오랜만에 잠시 들린 술자리에서 다들 저게 돈 벌다 죽으려고 그러냐 친구도 좀 만나라 투덜거릴 때 
스케줄 때문에 미안하다 말하고 돌아서는 지훈에게 나직히 한마디만 전했다 


- .... 잘 지낸다더라 ... 너도 밥 잘 챙겨 먹어라 


그 한마디가 마치 그애가 전해준 말 같아서 
오지랖이 시베리아 벌판 같은 놈이니 걱정이 되면 얼마든지 거짓말로도 할 수 있는 말이란 걸 알면서도 
굳이 잊고 그 말을 붙들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 없지만 
어쩐지 지훈은 흥수에게만은 전부 이야기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흥수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 문자가 왔는데... 
- .... 
- 무슨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서.... 
- .... 그래서...? 
- 뭐, ... 잘 지내냐고. 
- ... 미친 새끼 

한심하다는 듯, 슬쩍 안타까움을 섞어 퉁박을 놓는다 
지훈은 남순처럼 가까운 사이도 오정호처럼 손이 많이 가는 녀석도 아니었지만 
그 말썽꾸러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차리고 자신에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높이는 지훈이 흥수는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저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어버리는 지금의 지훈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그렇게 웃지마 새꺄 정들어 

화면 속 화사한 지훈의 미소는 그저 만들어낸 것만 같았고 
이렇게 마주하고 앉으면 금새라도 꺼져버릴 것 같은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흥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때까지 홀짝이기만 하던 술잔을 훅 꺾어 마셔버린다 

- 전에는 잘만 웃더니만. 

씁쓸한 흥수의 말에 결국 지훈도 마시지 않는 술잔을 집어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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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밤중에 글을 올리는 건.... 다 2번 글의 1베일 을 위해서야 ㅠ 
나름 매인 몸이라 글쓸 시간이 없었어.... 겨우 집에 들어와서 급히 휘갈겼는데;;; 
반짝이는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하고 글의 퀄리티가 산으로 가서 미안해 ㅠ 

그래... 지훈이가 문자는 보냈어..... 근데 둘이 언제 행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