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띠링띠링 

멈췄나 싶으면 다시 반복되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다 
잠이 예민해서 진동으로 바꾸거나 전화를 끄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어제는 너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바람에 잊었다 
정말 오랜만에 스케줄 없는 날이라 오늘은 늦게까지 자다가 느즈막히 회사에 나가려고 했는데.. 
무시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저 소리가 거슬려서 잘 수가 없다 

더듬더듬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지금 이 순간도 간헐적으로 삐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든다 
대체 누구야.... 

가늘게 겨우 눈을 뜨고 액정을 확인한다 

"쿠폰 1" 

번쩍 눈이 떠져버린다 
잠결인가 싶어 부르르 고개를 한번 흔들고 다시 화면에 뜬 문자를 확인한다 

좀전의 그 세글자가 얄미울정도로 무감각하게 자리 잡고 있다 
놀란 자신이 민망할정도로 당연하다는 듯 
문자 창 위에 정선우. 란 이름이 주인 성격처럼 차분하다 

- 전화 
- 응? 
- 쿠폰 쓰려면 발행인 연락처를 알아야 하잖아 

얼결에 내밀었던 전화기에 직접 번호와 이름까지 입력하고 바로 전화를 걸어 나나의 번호를 가져갔던 
일상인 듯 차분했던 선우의 그날 태도가 겹쳐진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싫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손끝으로 이름을 톡 하고 쳐본다 


그나저나 쿠폰이라면, 
근데 언제? 
어디로? 


다시 봐도 다른 정보는 없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일단 내려놓는다 
정해지면 연락이 오겠지 생각한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멍하니 침대위에 앉아 있다가 부스스 일어난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9시. 
어제는 새벽 3시에나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왔다 
충분히 잤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일어선다 

씻고 나와서 침대 위에 엎어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확인하지만 
그 이후로 문자나 연락은 없다 
잠시 갸우뚱. 하지만 쿠폰 쓰겠다는 쪽 말이 없는데 궁금해 하는게 주도권을 뺏기는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기로 한다 
이미 휘둘리고 있는데 더 그러고 싶지 않아, 싶은 오기가 든다 

아직도 겨우 아홉시 삼십분. 
너무 일찍 정신을 차려버렸다 
머리를 말리며 잠깐 식탁 의자에 앉았던 나나의 눈에 가방에 삐죽 나온 약봉지가 들어온다 


아아... 약먹어야지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다 

- 하루에 세번, 식후에. 

단호했던 선우의 말이 떠오른다 


별로 기대는 안 되지만, 혹시나 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역시나 텅 비어있다 
그래도 오늘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물이 반병 남아있긴 하다 

하아.. 

그냥 빈 속에 약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손을 약봉지 쪽으로 뻗다가 
머뭇, 방향을 바꿔 가방에서 약봉지 대신 지갑을 꺼낸다 
차라리 우유라도 사다 먹고 약 먹으면 안 먹는 거 보단 낫겠지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천천히 움직이기로 한다 

옷걸이에 널어뒀던 옷을 꺼내 입는다 
일할 땐 때묻을게 뻔해서 한동안 못 입었던 흰색 스키니에 자주 입는 먹색 티셔츠를 걸치고 
방금 말린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가 조금 덜 마른 것 같아서 도로 풀고 
동네 슈퍼에 가는 거니 선글라스 대신 뿔테 안경을 쓰고 금새 준비를 마친 후에 휘 방을 둘러본다 

비록 계단 5층까지 걸어올라와야하긴 하지만 전에 살던 방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라 
저금했던 걸 탈탈 털어 보증금이 모자라는 걸 겨우 메꾸고 들어왔더랬다 
넓은 방 구석에 침대 하나 옷걸이 하나 서랍장 하나 
그리고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샘플 천과 바디와 재봉틀과 온갖 재료들 

집을 나온 후 이전의 작업실도 잃었다 
옷을 만드는 일이 직업이니 작업실에서 옷만드는게 그리웠다기 보다는 
혼자 재봉틀 앞에 앉는 그 고요한 시간이 그리웠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작업실 겸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을 구했던 건데, 
정작 이 집에 이사오고 나서는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재봉틀 앞에 앉아 있어본 횟수가 손에 꼽는다 
늘 급하게 뛰쳐나가고 집에 돌아오면 자기 바빠서 아직도 낯설다 

쯧 혀를 한번 차고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휴대폰을 집어들고 집을 나온다 
잠깐 집을 비우는 건데도 혹시나 연락이 올까봐 굳이 휴대폰을 챙기는 게 우습단 생각은 애써 무시한다 

타박타박 계단을 걸어내려와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제 겨우 유월인데 강한 햇볕이 쏟아진다 
새벽에 나와서 새벽에 들어오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계절감각이 훅 돌아온다 

곧, 여름이겠네. 


잠깐 현관 앞에 서서 햇볕을 쬐던 나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 ...! 

골목으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선 사람을 무심코 쳐다보고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린다 

- ... 뭐해? 

잠깐 망설이다 퉁명스레 말을 건네자 
그제야 담벼락에 기대 한 손에 든 책장을 넘기던 선우가 고개를 든다 

- 아, 나왔어? 
- ....뭔데 여기서 

나나의 말에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갸우뚱한다 
그리고 나나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턱 끝으로 가리킨다 


- 쿠폰. 

선우의 고개짓에 따라 
마치 처음 본다는 듯 멍청하게 제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본다 


쿠폰. 
기다린단 뜻이었나. 


- ... 왔으면 연락을... 
- 쉬는 날이라며, 생각보다 일찍 나왔는데 뭘 


너 때문에 나온 거 아닌데... 


침묵하는 나나의 파리한 얼굴을 살피던 선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 밥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선우가 훅, 하고 짧은 숨을 뱉는다 
밥을 꼭 챙겨먹으라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보다 그때의 단호했던 어조가 떠올라서 움찔한다 


- 잘 됐네 
- 응? 
- 일단 타 


손짓으로 골목에 세워진 차를 가리킨 선우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버린다 
예상과 다른 말에 당황한 나나는 그 자리에 불안하게 그저 서있는다 

- 어서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다시 부르는 선우에게 압도되서 
영혼없이 걸어가 문을 열어주는 조수석에 탄다 

뭐지? 

당황한 건 자신 뿐인 건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은 선우는 익숙한 동작으로 안전벨트를 메더니 
멍하니 있는 나나를 본다 

- 안전벨트, 해 
- 아... 응.. 

더듬더듬 안전벨트를 채우는 나나를 보고 피식 웃고는 차에 시동을 건다 

- ... 근데, 
- 응? 
- ... 어디 가는데 지금 
- 나 아니면, 다신 안 갈 것 같은 데 







- 김나나씨? 
- ... 네 
- 환자분이 김나나씨군요 


불편하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서 
불안하게 무릎을 문지르고 있는 손가락 즈음을 방황한다 


어련히 스스로 잘 알아서 왔으려고, 
(라고 말해도 아마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을 거란 건 알지만) 

(나나가 느끼기엔) 납치하다시피 해서 선우가 내려놓은 곳은 
불과 며칠 전에 자신이 '탈출'했던 병원. 
영문을 몰라 쭈뼛거리고 선 나나의 손목을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가 
마치 계획되어 있었던 것처럼 채혈실 - 내시경실 - 엑스레이실 을 정신없이 오갔다 
마침 빈 속이니 잘됐다며, 일사천리로 피뽑고 수면 마취도 없이 내시경을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의사 앞이다 


뭐지... 이 분위기는.. 


이선태, 라는 명찰을 단 이 의사는 차트를 넘기다 말고 
제 이름을 보고는 왜 말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하는 걸까 
아니 싱글거리는 이 의사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자꾸만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뒤쪽의 저 시선이 더 신경쓰인다 
나나가 차마 뒤를 바라보지 못하고 불안하게 움찔거리자 
힐끗 뒤쪽을 바라본 의사가 버럭한다 

- 정선우, 넌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 선생님, 저 김나나 환자 보호자예요 
- 니가 보호자는 무슨 보호자야, 보호자가 환자 상태를 이렇게 만들어? 

웃는 목소리인 걸 보면 친한 사이인가 본데, 
분명 저를 두고 하는 말을 마치 제가 없다는 듯이 오가는 통에 불편해 죽을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참느라 바르르 떨린다 

그때까지 진찰실 문 쪽에 기대있던 선우가 자박자박 다가와 
옆에 있던 보조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 선생님, 환자 놀라잖아요 진찰이나 빨리 해주세요 
- 거참, 보호자가 되게 말 많네.. 어디 보자.. 


중얼중얼하며 컴퓨터로 검사 결과를 띄워 확인한 선태가 
이내 스크린에 엑스레이와 내시경 사진을 띄운다 

- 김나나씨. 
- 네 

좀전과 다른 단단한 목소리에 긴장한다 
바짝 얼어서 눈으로만 저를 바라보는 나나를 보자니 
대체 어디에 병원을 마구 탈출하는 깡이 숨어있나 싶다 
게다가... 

힐끔 눈길을 돌리자 긴장한 나나를 보고 있는 선우가 눈에 들어온다 
데려오랬다고 정말 직접 데려왔다 이거지... 

- 회사 다녀요? 
- 네? 
- 아니 어떻게 속을 이렇게 버려놨어요, 집에서 좀 쉬어야겠는데 회사 그만 다녀도 되요? 

그정도로 심각한 건가 싶어서 나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불안한 듯 계속 꼼지락거리던 나나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춰서 파르르 떨린다 
이 형이 진짜.... 
옆에서 선태가 하는 수작을 보던 선우가 결국 못 참고 끼어든다 

- 형, 겁 좀 그만줘요. 환자를 이렇게 놀래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 알았어, 난리는, 니가 환자냐? 

그제야 띄워놓은 사진의 한쪽을 가리킨다 

- 보여요? 여기? 이런 게 위에 5군데 발견됐어요 이대로 방치하면 위에 구멍나거나 위궤양, 심하면 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 형! 
- 뭐! 내가 거짓말했냐? 너 조용히 안하면 의료방해행위로 쫓아내버린다 

으르렁 낮은 소리로 위협한 선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 당장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니까 지금부터 조심하면 되요 저 녀석한테 약은 받았죠? 
- 네... 
- 먹고 있어요? 
- 네.. 
- 밥은 하루 세 번 챙겨 먹고? 
- 아.. 그건 되도록... 
- 되도록이란 건 없어요 낫고 싶으면 제대로 지키는 거고 못하겠으면 안 낫는거고 
- .... 
- 불규칙적으로 먹는 게 제일 나쁘니까 시간 정해서 세 끼 꼭 챙겨먹고 약 꾸준히 먹으세요 
  일단 한달 후에 보죠 약 처방해드릴게요 나가서 예약하고 가시구요 
-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나를 가만히 보던 선태가 덧붙인다 

- 김나나씨, 
- 네? 
- 선우랑 친구랬죠?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당황한 듯 심하게 깜빡인다 
별로 어려운 질문 같지도 않은데 어째서 둘 다 대답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똑같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멍하게 저를 바라보는 두 얼굴을 번갈아보자니 
어째 이 상황이 매우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일단, 내가 일일이 김나나씨 생활 습관까지 따라다니면서 바꿀 수는 없으니까 
  다음에 올 때까지 한달동안 김나나씨 주치의는 정선우 군이 맡아서 해줄거예요 
  그리고 정선우, 
- 네? 
- 환자 상태 호전 안되면, 이번 학기 실습 점수는 없는 줄 알어 

멘붕에 빠진 두 사람을 향해 차트를 탁, 접으면서 싱긋 웃어준다 

- 한 달 후에 봅시다, 둘 다. 







앞에 놓인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자 달콤한 향이 확, 퍼진다 
앞으로는 커피 대신 마시라며 소화에 좋다고 시켜준 유자차. 
병원에서 나와 죽을 사먹인 선우가 데려온 이 고즈넉한 분위기의 찻집에 앉아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고 있자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딸랑, 


바람이 사락, 하고 처마 끝에 걸린 풍경을 흔들고 지나간다 
맑은 소리에 잠시 창 밖의 풍경에 끌렸다가 이내 시선을 돌린다 

마주보고 앉은 탁자 건너편으로 
선우가 차분히 찻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조심스레 차를 따르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주전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한손으로 찻잔을 받쳐들고 가져가 한모금 입술에 대는 모습이 
마치 자로 잰 것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단정하다 



지금 입고 있는 짙은 색 셔츠의 깃처럼 선우는 그때도 늘 저렇게 단정하고 베일 듯 했다 
차갑다,와는 다른 느낌.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모두가 의지하지만 정작은, 늘, 한발짝 물러서있는 초연한 태도 
딱 떨어지는 직선처럼 너무 투명하고 정갈해서 
마치 투명한 1급수에 살 수 있는 물고기가 한정되어 있어 늘 비어있는 것처럼, 
시끌벅적한 교실 한가운데서 급우들에게 둘러싸여있어도 
선우의 주변으로는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온갖 소문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그때의 자신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은 선우가 
아주 가끔 무표정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걸 발견하면 
문득, 정선우도.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자신과 선우 사이에 놓인, 그 선을 감히 넘으려는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멀리서 첼로를 메고 걸어가는 선우를 발견하면 그저 혼자 중얼, 물어보기도 했다 
그 세계는 어때? 거긴 좋아? 
그저 다른 세계를 구경하는 정도의 호기심 

그렇게 단단하고 투명한 수정 같았던 정선우.라는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세이,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그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저 세계가 흔들릴 수도 있는 거였구나 
나처럼, 이렇게 어두운 세상의 나처럼 
정선우도 흔들리고 깨지고 혼탁해질 수 있는 거였구나 

그 정도에서 멈췄어야 했다.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 거기서. 
한 발 더 내딛어 쓸데없는 희망 같은 건, 
혹시나 하는 마음 같은 건, 
그렇게 기약없이 맴도는 일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졸업 이후 줄곧 선우의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결국 이렇게 마주 앉고만 이 상황이 우스워서 
나나는 씁쓸히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려 찻잔을 든다 

따뜻하지만 
달콤하지만 
그렇지만 
이 온기가 얼마나 지속될까 


천천히 입에 한모금을 머금고 찻잔을 내려놓는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선우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 어때? 
- .. 괜찮아 
- .. 집에다 두고 먹어 커피보다 백 배 나으니까 
- ...... 
- 여전하네 김나나. 
- 뭐가 
- 혼자서는 밥도 안 먹고 차도 안 마시다니.. 의외로 소심하다니까 

발견했다는 듯 작게 웃는 선우의 미소를 보다 
문득, 나나는 심장이 짜르르 하고 아파오는 걸 느낀다 
아프다고 진단을 받은 건 위였는데 
왜 심장이 아파오는 건지 모르겠다 

- 왜? 또 아파? 

굳어버린 나나의 얼굴을 보고 묻는 선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게 무섭다 
또다시 꿈에 취했다가 깨어나면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이 내 것이 아니라고 뱉어야한다면


나는 너에게 또다시 희망을 걸고 싶지 않아. 


- 뭐야 이건 
- 응? 
- 또, 선의야? 


그렇다면 
이번엔 너의 선의를 받아줄 여력 같은 건 없어 


대답을 기다리는 쪽이 더 불안한 건 왜일까 
잠시 찻잔에 머물러 있는가 했던 나나의 손이 
어느 새 손 끝 거스러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무의식 중에 잡아 뜯고 있는 나나의 손을 가만히 보던 선우가 
대답 대신 손을 잡아 테이블 위로 끌어당긴다 

- 손, 왜 이래? 

갑작스레 상처투성이의 손이 드러난 나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도로 거둔다 

- ..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야 

바느질과 다림질 그리고 온갖 도구들 
손이 성한 날이 없는게 당연한데 
지금까지 신경쓰지 않았는데 왜 부끄러워야하는지 

- ... 아직 답 안했어 
- ... 넌 뭔데? 
- 응? 
- 넌 왜 여기 있어? 김나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게 
왜 순순히 나왔을까 
안 나왔어도 그만 
도망쳤어도 그만 
거절과 무시는 내가 가장 잘하는 일 
도망치는 건 어릴 적부터 이골이 나있는데 

왜였을까. 


나나의 대답이 떨어질 때까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선우는 그저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 ... 빚. 

무감각한 나나의 대답이 툭, 둘 사이에 떨어진다 
잠깐 그 무게를 가늠해보던 선우는 피식 웃고는 도로 찻잔을 든다 
정갈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나는 가만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묻는다 


- 그래서... 넌 뭔데. 
- ... 나도 빚.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에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본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선우는 시선을 여전히 찻잔에 고정한 채 말한다 


- 나는 말야, 원래 내가 착한 어린이인 줄 알았거든? 
- ... 
- 근데 아니더라, 원래는 엄청 나쁜 놈이더라구 내가. 
  그래서.... 착한 어린이로 살지 나쁜 놈이 될지 ... 일종의 자아찾기 하는 중인거지, 아직까지. 
- ... 그런 건 혼자 하지 그래 
- 그게, 촉매제가 필요해서 말이야 

- 뭐? 
- 다들 내가 착한 줄 알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또 착한 아이가 되어 버리니까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힐끔 눈길을 던지다 
마침내 찻잔에서 시선을 들어올린 선우와 눈이 마주친다 
꽤나 뚫어져라 보는 진지한 눈에 나나는 꼼짝없이 사로잡힌 듯 멈춘다 
한참 말 없이 보고 있던 선우는 이내 마법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후루룩 웃어버린다 

- 김나나,가 제일 잘 알잖아 정선우, 나쁜 놈인거. 


태연히 앞에 놓인 찻잔을 단숨에 훅, 비워버린 선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한다 


- 아직 오늘 쿠폰 안 쓴거지? 이제 뭐할래? 











+
 

[1년 전]



- 어서 와라
- 잘 지내셨죠?
- 그래, 너도 잘 지냈니? 요즘 통 안 놀러오더구나
- 요즘 좀 바빠서요, 설찬이는 안에 있죠?
- 그래 들어가봐,

여전히 우아한 설찬 어머님께 꾸벅 인사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복도 끝에 있는 설찬의 방문을 연다

- 왔냐?

돌아보지도 않고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꾸하는 설찬이
이미 익숙해진 듯 터벅터벅 방을 가로질러 침대에 걸터앉는다


- 거기, 엠피쓰리 있지? 그거 3번 트랙 좀 듣고 있어봐
- ... 넌 이런 부탁할 거면 얼굴 보고 해야하는 거 아니냐? 지금 그건 무슨 매너야?
- 너랑 나 사이에 무슨 ... 일단 멜로디만 좀 익혀봐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귀찮아하는 말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설찬이 말한 엠피쓰리를 들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 3번?
- 그래 3번! 넌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예민하기는.....

작업 중인 설찬은 그만 건드리기로 하고
손에 쥔 엠피쓰리 목록을 넘겨 3번 트랙을 재생 시킨다

피아노 반주에.. 허밍으로 살짝 얹어진 멜로디라인
아직 가사가 다 완성되지 않았는지 멜로디만 간신히 들리다가
후렴구에 반복되는..


- 너 나한테 이런 거 시키고 싶냐?

후렴구를 듣다 말고 불쾌한 듯 이어폰을 확 빼고 설찬에게 버럭 한다

- 뭐가?
- 이거 세이 꺼지?
- ... 그냥 좀 불러 코러스 따면서 되게 생색 내네


어느새인가 예전처럼 스스럼없이 설찬의 집에 들리게 되었다
그저 멍하니 설찬이 작업하는 뒤에 앉아 이런 저런 악기를 만지작 거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설찬의 작업실은 빡빡한 생활 속 거의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그렇게 악기를 집어들고 뚱땅거리다 보면 작업을 하던 설찬이 간혹 연주를 부탁하거나 보컬을 따는 경우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처럼 불렀던 곡들이 가끔 전혀 다른 색의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설찬 개인 서버에 저장되는 일이 더 잦았다


그러니 이렇게 갑자기 코러스를 부르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그런데,

후렴만 들어도 러브송이 분명한, 그것도 대상이 누군지 확 알겠는 이걸 
굳이 굳이 저에게 부르라고 하다니 저 자식 악취미는 하여간...!


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설찬의 태연한 뒷모습을 잠시 노려보다가
포기한 듯 도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새 곡이 넘어가버렸는지 조금 전 들었던 것과 다른 멜로디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가져가다가 갑자기 멈칫,한다

잠시 가만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던 선우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어딘가 멍해진 목소리로 묻는다

- 윤설찬
- 어?

여전히 건성인 대답이지만 모르는 눈치다

- 김나나, 잘 지내냐?
- 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서 그제야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돌아보니
골똘히 생각에 빠진 선우가 눈에 들어온다

- 잘 모르지 나야
- 모른다고?

황당하다는 듯한 선우의 표정에 울컥한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그럼 너는 아냐?!

- 너 내가 놀아준다고 내가 누군지 잊었나본데, 내가 스타야, 그냥도 아니고 슈퍼스타! 일개 직원 사생활까지 내가 어떻게 다 아냐?!
- .. 일개.. 직원?


아씨.. 말꼬리 잡기는... 저 자식 진짜 유치하게


- 물론, 김나나가 일개 직원은 아니지, 아닌데... 아씨 진짜... 하여간.. 아 몰라 김나나가 그런 거 말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씩씩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설찬을 빤히 보던 선우는
흥미를 잃은 듯 별다른 말 없이 도로 이어폰을 꽂는다


근데 저 자식 그건 갑자기 왜....

설찬의 눈이 도르르 굴러가고
느낌적인 느낌의 촉이 차라락 개방된다

뭐지 이 간질간질한 느낌은...?


- ... 사생활이야 잘 모르지만 연애는 확실히 안 해
- 뭐?

한번 낚아볼까 하고 던져본 말인데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서 그건 또 어떻게 들었는지 움찔한다
더더욱 수상해지지만 일단 내색 않고 눈치를 보며 말을 잇는다

- 김나나가, 얼마전까지 우리 담당이었거든? 우리 스케줄이 또 한번 시작되면 24시간 내내 굴러가잖냐
근데 그걸 다 따라다니는 거니까 그 와중에 안 들키고 연애까지 한거면 인간이 아니지, 슈퍼맨이지
- .....

관심없다는 듯 가타부타 대꾸도 없이 재생버튼을 누르는 선우의 입가에
슬쩍 안도감 같은 게 스치고 지나간 걸 놓치지 않는다

- 뭐야?
- 뭐가

귀찮은 듯 대강 대답하며 엠피쓰리를 쳐다보고 있는 선우 앞에
설찬이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앉는다

- 갑자기 김나나가 왜 궁금한데?
- .. 아무것도 아니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게 백 배 더 수상하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아는데도 어쩔 수 없는 건지 

-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뭐야, 연락처 줘? 
- 됐어 이제 와서.


뭐야 이 심각한 표정은? 
장난 걸어보려고 했던 건데 갑작스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당황스럽다
대체 둘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 있었던 걸까?
같이 밴드 한 사이. 정도로만 생각했지 둘을 딱히 연결지어 본 적 없는 설찬은
대체 선우가 왜 이러는 건지 궁금해 죽을 것 같다


- 뭔데? 뭐야? 어?

눈 앞에 팔을 휘휘 저으면서 집요할 정도로 귀찮게 구는 설찬을
이리저리 피하던 선우는 결국 밀어내기를 포기한다

- .. 그냥 좀..
- 그냥 좀 뭐?
- ... 울렸거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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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