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nster, 이후 이야기.
=
(of NaNa)
정희씨,
오랫만에 쓰는 편지네요.
잘 지내셨죠? 서울은 어떤가요?
런던은 이제 길고 긴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맘 때의 런던은,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에도 몇번이나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회색빛이어서
가끔 덥긴 해도 역시 여름이 좋았구나,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말씀해주셨던 책은 얼마 전에야 겨우 다 읽었답니다
사실 조금 어려웠어요
... 아니 그보다는 주인공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상하게도 저와 이름이 같은 그녀가 매우 불편해서 몇번인가 책을 읽는 걸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정희씨의 추천이시니 끝까지 읽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왜 저에게 이걸 읽으라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녀의 생명력을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렇지만 아직까지 저는 그녀의 생명력보다는 문란함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에밀 졸라는 왜 그녀를 내세웠던 걸까요
올려뒀던 물이 끓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어요
런던은 지금 저녁 시간이거든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저녁도 꽤나 깊은 밤에 가깝지요
아직까지 식사를 하지 못했던지라, 약을 먹기 위해 간단히 저녁을 먹어보려고
스파게티를 삶을 물을 끓이고 있었던 거였는데 역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간단히 식사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지금은 이 편지를 먼저 마무리하고 싶어요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정희씨'라는 저 호칭이 어색하네요
물론 꼭 '정희씨'라고 불러달라고 하셨으니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래도 역시 저는 '사모님'이라던가 '서정희님'이라던가 하는 호칭이
자꾸만 먼저 튀어나오려고 하는 걸 멈출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는 정희씨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 제가 너무 보수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게 무례하단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정희씨,라고 말씀하시지만
한선생님께서 그러실 때마다 저는 가끔 그래도 되나 싶어 깜짝 놀라는 걸요
게다가 런던에서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몇십년이나 훌쩍 차이 나는 정희씨의 이름을 막 부르는 걸 보면
누구든 절더러 예의없다고 욕할 겁니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런던에서, 또는 제가 혹시나 서울로 돌아가게 되어 뵙게 된다면
혹시 선뜻 '정희씨'라고 부르지 못하더라도 지난번 뵈었을 때처럼 섭섭해하지는 말아주세요
편지에서만이라도 자꾸 쓰려고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바라시는대로 자연스레
그렇게 불러드릴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노력해보겠습니다
'우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게 정희씨는 '은인'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처음 정희씨를 뵈었을 때 백발이 희끗희끗하게 섞인 짧은 머리에
똑 떨어지는 검정 목 니트와 은빛 스커트가 마치 서로 일부러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답니다.
말씀드린 적 있었나요?
옷차림으로 기억을 하는 걸 보면, 그때도 저는 옷에 관심이 많았던가 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싫어하실거란 거 알지만,
그때 정희씨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 할머니가 현대에 다시 등장한 것 같았습니다.
(역시 싫어하실 것 같네요, '어머, 내가 어디가 할머니라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실 게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정희씨는 정말로 저의 요정 할머니시네요
그러니 부디 저 호칭을 거부하진 말아주세요
떠오르는 대로 쓴 거지만 쓰고 나니 제가 생각해도 참 어울리는 별명을 골라냈다 싶어서 지금 뿌듯해하던 참이거든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 인생의 절반쯤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는데 정작 그 사실을 알게된 그날의 풍경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어쩌면 저라는 책의 첫 페이지가 다시 쓰여지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하얀 벽, 아니 천장이 보였지요
어쩐지 몸이 무거워서 간신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더랬습니다.
주변은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움직이는 기척을 들은 제 옆에 있던 여자분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분주하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오고갔고 제 몸과 정신을 들었다 놨다 했고
그 후로도 벌어졌던 혼란스러운 상황들의 정점은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당황했어요
그 감정이 생경하게 떠오릅니다
기억 속과 너무 다른 모습의 아버지
저는 평생 어머니를 증오하고 아버지를 거부해왔는데
그날 제 앞에 서 있던 그 분은 그러기엔 너무 약하고... 작아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건 꿈이라고 깨어나면 잊어버릴 꿈일 뿐이라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강압적인 아버지가 늘 지긋지긋했는데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늙고 세월에 지쳐서 제 손가락 떨림에도 함께 흔들리는 그분은...
이미 미워하는 것이 무의미해져 있었지요..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완전히 알게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세상에 없었고 아버지는 낙향해서 그저 그런 노인이 되어 있었고
저는, 그 사실들을 당연히 다 알고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기억해낼수 없었습니다.
제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불과 몇 주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깨어나지 않았어야 한 인생을 연장한 댓가라도 된 걸까요 저의 기억은.
길고 지루한 검사와 상담 끝에 받은 결론은 드라마에서 그토록 지겹도록 봤던 기억상실.
십년의 세월이 통째로 사라져있었죠.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기억도 희미해져서 사실상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이 백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기억이란 건 곧 그 사람의 증명이라는 걸 그때야 알았습니다.
기억이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늘 불안해야한다는 걸.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지요
그때, 정희씨가 나타난겁니다.
지금도 궁금해요
저를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그리고 왜 저에게 이 많은 것들을 기꺼이 해주신 건가요
책임,이라고 하셨죠
정희씨는 저에게 책임이 있다고요, 제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그렇지만 정희씨를 생각하면, 그리고 제게 해주신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렇게나 저를 책임지실 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실마리는 제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겠지만,
그걸 찾아내려면 앞으로도 한참을 더 있어야, 어쩌면 영원히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저는 제 마음대로 정희씨를 제 친구이자 은인이자, 보은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뭐든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그게 뭐든 지원해주겠다고 하셨던 그 말씀,
그게 정희씨에게는 별 일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기억에 있는 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격려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셨던 건지는 지금도 미스테리입니다
어떻게 제가 천을 만지고 바느질을 할 때면 마음이 평온해질 거라는 걸 아셨을까요
한선생님처럼 뾰족하지만 타인의 일에 쉽게 참견하지 않는 분이 저와 맞을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아셨을지요
예전에 아드님이 유학시절 지냈다는 플랫을, 아마도 제가 좋아하게 될 거란 것까지
정말 정희씨는 모든 걸 다 아는 요정할머니인건가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덕분에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지난번에 런던에 오셨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드렸던 앤틱 박스를 좋아해주셔서 기뻤답니다
저도 그걸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하고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비싼 건 아니지만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주셔요
아, 이야기가 길어지고 말았네요
사실 오늘 쓰려고 했던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이상하게 정희씨에게 편지를 쓰는 날은 꼭 이렇게 길어지고 말아요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 제가
유독 편지를 쓸 때면 말이 길어지는 건, 아마 이게 유일하게 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어서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아마 제 손을 붙잡고 제 이름을 부르며 '그러지 말지 그랬어요'라고 하시겠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해요, 영 내키지 않구요.
그래도 너무 걱정마세요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거든요
생존을 위해^^ 다녔던 영어학원에서 억지로라도 말을 하다보니
그래도 영어로 대화 - 라고 하기엔 생존 영어에 가깝지만 - 하는 건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여전히 한국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없고, 노력하고 있지도 않아요
한 선생님은 좋은 분이시고 (조금 괴팍하시긴 해도) 여러 가지로 저를 신경써주시지만
아시잖아요, 그다지 좋은 이야기 상대는 아닌 거.
그러니까, 평소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한국어로 이야기를 털어놓는 기회가 생기면 저답지 않게 많이 길어지는 것 같아요
이메일을 썼다면 중간쯤에 지워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손으로 쓰기 시작하면 찢어버리기 전에는 멈추거나 수정할 수 없으니까요
지루한 건 아니시죠?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나,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알려달라고.
사실 제 삶이란 게 패션 스쿨의 예비 과정과 한 선생님의 아틀리에를 오가며
쳇바퀴 돌 듯 똑같이 흘러가는지라 그동안 통 별다르게 전해드릴 이야기가 없었는데,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본론이군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지난번에 정희씨가 런던에 오셨을 때 함께 갔던 National Portrait Gallery 말이예요.
그 이후로 종종 그 갤러리를 방문해서 시간을 보내곤 한답니다.(공짜니까요!)
종종,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일지도 모르겠네요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곳에 가곤 하니까요
한 선생님께서는 오늘도 거기에 가느냐며, 대체 그림 속에 박제된 사람들에게서 뭘 얻어내려고 하는 거냐고
아뜰리에를 나설 때마다 굳이 행선지를 확인하고 타박을 주곤 하시지만요
(사실 그걸 물어보실 때마다 세번에 두번은 갤러리에 가는 날인데 굳이 매번 물어보시고 똑같은 타박을 주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언젠가도 말씀드리긴 했지만, 저는 그곳에 걸려있는 그림 속, 사진 속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게 좋답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고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떤 상황이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그렇구요.
한 선생님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지만, 가끔은 그런 그림들을 보다가 디자인을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초상화들은 그 시절의 복식이나 디자인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놓은 거니까요
흥미로운 건 오래된 그림일수록 영감이 떠오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죠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스케치북을 넘겨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예전의 의복이나 옷감이 현대의 패션에 자극을 준다고 해야할지,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믹스매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발견하는 게 즐거워요
물론 요즘은 1950년대 즈음의 흐름에 빠져있어서 주로 긴 시간을 보내는 곳도 초상화보다는 사진 전시 쪽이지만요
그 사람을 만난 건 오드리 헵번 사진 앞이었어요.
네, 그 사람.이요
아니 정확하게는 그 남자. 라고 해야겠네요
정희씨, 지금 소리지르셨죠?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후후^^
하지만 기대하시는 것만큼 로맨틱한 일은 없었답니다
그저 자주 전시실에서 마주치면서 얼굴을 익히고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예요
이름이 뭔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쪽도 아마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거예요 하기사 저는 별로 알려줄만한게 없긴 하네요 스스로도 잘 모르니까.
우선, 궁금해하실테니 어떻게 생겼는지 간단하게 설명드릴게요
(일단은 그저 외모를 상상하는 것으로 제 설명에 만족해주세요)
키가 180정도? 꽤나 훤칠한 편이구요,
나이는 글쎄... 30대? 20대 후반?
얼굴이나 몸 선은 굵고 딱 각이 잡혀있는 거 같은데 전체적인 느낌은 부드러워요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런 게 가능하기도 하더라구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몇번인가 힐끔거리다가 들킬 뻔도 했어요 어휴 부끄러워라)
지난번에 런던 오셨을 때 소호 거리에서 봤던 마임 아티스트 기억나세요? 약간 그런 느낌이예요 실루엣이
자주 가느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오고요
오늘은 스트라이프 셔츠에 연두색 가디건을 걸치고 왔더라구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옷감의 질이나 바느질 상태, 옷의 핏 같은 걸 보면
분명 디자이너 부띠끄의 익스클루시브 아이템인 것 같았어요
아시잖아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옷이 아닌 그런 옷.
취향이 있고 안목이 있어야 찾아내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어쩌면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덜 낯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정희씨가 떠올라서
하여간 옷차림만 보면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안되요, 꽤나 경제적으로 부유할 거라는 점만 빼고는요
아, 어쩌면 음악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손가락이 아주 하얗고 긴, 꼭 악기를 연주할 법한 손이예요 실제로 연주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러니까, 네 첼로 연주자요, 그런 손이예요
그러고 보니 그 남자와 처음으로 '대화'라는 걸 나눈 것도 첼로 때문이었네요
그래서였나봐요 첼로 연주자를 떠올린 건.
어쩌다 집에 이어폰을 두고 나선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면 약간의 방패가 필요하기 때문에 낭패,라고 생각했죠
다행히 비가 많이 왔고, 갤러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습니다
거의 전시장 마지막 즈음에 다달았을 때 출구 쪽에서 작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평소에는 늘 음악을 듣고 있거나 최소한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뮤지엄 샵에서 틀어놓은 음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음악이 귀에 익었어요
여전히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노래는 물론이고, 어설프게 귀가 뚫린 후에는 영어 노래마저도요
가사에 감정이 휘둘려버려서 힘들거든요
대신 (죄송하게도) 아드님의 CD 몇 장을 빌려듣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첼로 연주가 좋아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CD가 있었는데
바로 그 곡이 나오고 있는 거였어요
전시실 안에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고
익숙한 음악을 만난 반가움에 조용히 멜로디를 따라 불렀는데
어디선가 낮은 음역대의 같은 멜로디 허밍이 들렸습니다
그 남자였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이 곡을 아느냐고 묻더군요
네, 여기서 한번 놀라셔야 해요.
그 사람, 한국 사람이었어요
한국어로 말을 걸었던 거예요 제게
평소라면 한국말에 피하거나 안 들리는 척 했을 제가 그 말에 당황해서였는지 순순히 답을 했습니다
이것도 이상하네요 당황하면 보통 말이 안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쨌든 그 곡은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이었어요 - 궁금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요
"이 곡을 아세요?"
"네"
"좋죠"
"네"
이게 그날 나눈 대화의 전부입니다
설마 그 일로 뭔가 굉장한 발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그후로 갤러리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되었지만요
여기서 딱히 공부를 하거나 직업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광객이라고 하기엔 너무 한 곳에만 머물고 있는
일상은 백수인데, 행동이나 옷차림을 보면 평범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
그 남자는 그 이후로도 자주 갤러리에 나타났습니다
아니 제가 갈 때면 거의 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일주일의 절반 이상 그곳에 간다는 걸 고려해보면 이 사람은 사실 갤러리에서 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야기만 들으면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어째서 그러고 있는 건지 궁금하시죠?
저도 잘은 몰라요
'찾고 있는 게 있다'라고만 하더라구요
더이상 설명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대답을 할 때 그가 매우 지치고 슬퍼보여서 더이상 묻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종 저에게 런던에서 갈만한 곳이나 식당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 남자가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한다는 거예요
차 주문하는 걸 들었거든요, 아시죠 갤러리의 3층 레스토랑에서.
아직까지 버스 노선 한 번 물으려해도 더듬거리면서 몇번이나 파든,을 외쳐야하는 제게
그렇게 완전한 브리티시 악센트를 구사하는 사람이 런던을 묻다니, 이상했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이상한 일도 많이 일어나니까요
제가 자주 가는 카페라던가, 아, 지난번에 정희씨와 함께 갔던 그릭 레스토랑도 소개해줬답니다
한번도 마주친 적은 없지만 다시 다른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던 걸 보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예요
그런 정도 였어요
이방인과 이방인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
Hello, Stranger.
런던 방문 때 말씀하신 영화,에 나오는 대사네요 그러고 보니
그리고 클로저에도 포트레이트 갤러리 3층 레스토랑이 나오는군요
또다른 우연이네요
오늘은 아침부터 약한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아시죠 런던 날씨. 변덕스럽기 그지 없고 비가 내릴 때면 얼마나 을씨년스러운지
한기가 들어서 뜨거운 차가 간절해진 저는 중간에 카페로 향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3층 레스토랑의 자주 앉는 창가 자리가 마침 비어있었어요
오랜만에 따뜻한 홍차와 스콘의 사치를 누리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앉아도 되나요?"
그는 혹시나 거절할까 하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고 저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지요
사실 그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는 늘 차지하기 어렵고, 그래서 그 남자와 저는 이전에도 몇번인가 합석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가 영어를 하는 걸 듣게 된 거였어요. 정희씨가 분명 좋아하실, 아주 멋진 목소리의 퀸스 잉글리시.)
그렇게 자리를 함께 앉게 되더라도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아까 설명드린 몇몇 질문과 답을 제외하고는 없었습니다
각자 책을 읽거나 저는 스케치를, 그는 간혹 수첩에 글을 쓰는 것 같았고
그러다가 각자 볼 일이 끝나면 먼저 일어나서 나가는 걸로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할까요 아마
그 남자가 자리에 앉고 주문을 하는 걸 들으면서
저는 이미 시켜둔 차를 마시며 이곳으로 오는 길에 옥스포드 거리에서 보았던
독특한 장식의 라이더 자켓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좀 어긋난 발상일수도 있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어느 초상화에서 본 드레스와
매치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에 스케치북에 되도록 상세하게 그려보고 있었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릴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지길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비가 그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창 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저를 보고 있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네, 저를 보고 있던 게 맞아요
왜냐하면 고개를 피하거나 시선이 어긋나지 않았거든요
때때로 그 남자는 그렇게 빤히 저를 보고 있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몇번이나요
하지만 그때마다 그러지 말라던가 불편하다던가 하는 말을 하지 못한 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보고 있는게 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보고 있지만, 꼭 제 너머에 있는 어떤 다른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요
저는 그저 거기 투영하기 위해 서있는 매개체일 뿐이고
사실 정말로 보고 있는 건 저를 통한 다른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드는.
그런 눈빛이었거든요 늘. 뭔가 아주 많이 그리워하고 있는 눈.
평소라면 저는 그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다시 스케치북이나 찻잔이나 그도 아니면 책으로 시선을 떨궜겠지만
오늘은 궁금해졌습니다
저를 통해서 보고 있는게 뭔지, 하고 말이예요
어쩌면 그 '찾고 있는 것'이 사람일지도 - 그러니까 저를 통해 보고 있는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찾고 있다는 건, 찾았나요?"
제 질문에 그 남자는 조금 놀란 것 같았습니다
"... 그런 것 같네요."
답이 어정쩡한 것이 어딘가 불편해보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먼저 그 남자에게 말을 건 게 처음이었으니, 어쩌면 당황했을 수도 있겠네요
저처럼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구요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그 사람은 잠시 후에야 덧붙이듯 말을 이었습니다.
저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찾고 있다면
아마도 물건이 아니라 사람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예상했던 대답이었는데도 영 석연치 않았지요
찾았다면서 어째서 저렇게 뭔가를 잃어버린 표정인지
"사랑하는 사람을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그 사람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예의바르게 웃는 듯 마는 듯하던 얼굴은 가면을 벗기기라도 한 듯 일그러졌습니다
".... 겨우 찾았는데, 그런데, 잊어버렸네요 저를."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이 제 심장이 욱신,하고 아파올 정도로 더 슬퍼졌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도 저렇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절반 즈음을 지워버린 저를 저렇게 아파하실까요
뭉텅이로 사라진 그 시간 속의 누군가도 저렇게 슬퍼해줄까요
저를 저렇게 슬퍼해줄 누군가가 있긴 했을까요
저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뭉텅이로 사라져버렸다는 걸 안다면
그 누군가도 저렇게 아파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남자가 찾았다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사람에게 질투를 느꼈어요, 이토록 슬퍼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저와의 시간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죠.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그 남자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갑작스럽게 말했습니다
딱히 제 대답을 기대한 것 같진 않은, 거의 혼잣말처럼 들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제 마음이 많이 아파왔습니다
처음 깨어났을 때, 그리고 기억을 되살리려고 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던 것 만큼이나요
사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정희씨.
기억이란 게 싫다고 지워지는,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건 기억을 잃어버린 제가 잘 알아요
어쩌면 기억하지 않기로 한 건 제 무의식 어딘가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의 제가 결정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눈을 떴을 땐 이미 기억이 사라져있었으니.
한국의 김 선생님도, 정희씨의 소개로 이 곳 런던에서 가끔 찾아가는 Mr. Hastings 도
(영어로 대화하는 건 참 어렵지만 그래도 마음 편한 몇 안되는 분이세요 정희씨만큼이나요!)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다면 굳이 기억나지 않는 걸 억지로 기억해낼 필요는 없다고 했죠
정희씨도 기억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면 이대로 지내도 좋지 않겠냐고 하셨구요
보통 사람도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다구요
오래되고 당장에 필요하지 않는 기억들은 그렇게 희미해지기 마련이라구요
그러니 사라진 시간도 지금의 제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잊혀졌다고 생각했지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싫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날 눈을 떴을 때 제 주변에 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잘려나간 기억 속 어딘가의 시간에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였죠
병원에서 지냈던 몇 달의 회복 기간 동안 사라진 기억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저를 찾아왔던 사람도 아버지와, 그리고 정희씨가 유일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라진 시간 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만약 잊혀진 제 인생의 기간에 의미있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제가 사경을 헤맸다는, 그래서 기억마저 잃어버릴 그 시간동안 그 누군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만약,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뭔가 사정이 있어서 저를 찾지 못했던 거라면
그래서 만약 지금 자신을 잊어버린 저를 마주한다면
저렇게 금새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까요
저는 그 사람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은 바라지 않았는데도
제 인생에서 잘려져나갔을지 모를 누군가를 떠올렸습니다
"... 싫어서가 아닐 거예요"
아마 그래서였을거예요
그는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가 저렇게나 슬퍼하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저와 같은 상태인 건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이 마음 아파하는 그 이유는 아닐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건.
"... 너무 중요하니까, 너무 ... 소중해서... 그래서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아파서...
그래서 아마 아주 깊이 감춰뒀을 거예요 다시 아프지도, 사라지지도 않게."
사실은 몇번이나 생각했습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나는 인생의 1/3이나 되는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남은 시간들마저도 불완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대체 지워버린 그 시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하고
싫어했다면.. 그랬다면 아마 더 강하게 기억을 지녔겠죠 증오하기 위해서라도
무의미했다면 그저 기억이 흐릿해지도록 내버려두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사라진 시간은 어쩌면 소중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그 기억이 있었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면
잊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순간들을 조금은 고통스러웠을지 몰라도 기억했다면
저는 좀 더 강하게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지우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기억이라면 분명 소중한 것일거라고,
하지만 제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오히려 상처가 되었던 걸까요
그 남자는 제 말이 끝난 후에도 굳어버린 석상처럼 아주 오랫동안
멍하니 저를, 또는 제 너머의 누군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초상화를 보았고, 그 초상화에 박제되어 있는 상황과 감정을 상상해보았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이, 그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게 슬퍼보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없이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잦아들어가는 빗방울이 창에 맺히고
귀기울여듣지 않으면 그저 음악처럼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가득하고
포트에 담긴 홍차가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마치 원래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어요
정희씨,
그런데 말이죠.
그 눈물을 보는 순간
제 뺨을 따라 흐르는 차갑고 뜨거운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죽음을 알았을 때도
어쩌면 평생 반쪽의 기억만으로 살아가야한다는 결과를 받고도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그때 뜨거운 것이 차올랐을까요
머리가 아팠던 것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것도 아니예요
그저 그 눈을,
수많은 감정이 교차되고 있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도 한참동안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건 무슨 병일까요
역시 병원에 가봐야할까요
+
(of SunWoo)
너의 시선이 느껴진다
여전히 고개는 무릎 위에 올려둔 스케치북에 고정한 채로
아마도 눈만 조금 위로 치켜뜨고 나를 모르는 척 관찰하고 있겠지
우리가 처음, 맨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나는 그때도 그랬듯 태연하게 책장을 넘긴다
사실 네 앞에 앉은 그 순간부터 기계적으로 넘기고 있는 이 페이지들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네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숨을 쉬는지 끊는지 눈을 깜빡였을지 시선을 내리깔았을지
내 모든 오감은 너를 따라 움직인다
너의 기척이 사라지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맞은 편 의자를 건너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맞은 편 의자의 너를.
사각이며 스케치북에 선을 그리고 있는 너는
아주 오래 전 찍은 스냅사진 같은 기억의 한 장면과 비슷하게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반쯤 꺾은 채 쥐고 있던 연필의 끝을 잘근 깨문다
나만 여기 있고
너는 아직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미 너를 만나고 가지고 잃고, 그리고 네가 없던 그 시간을 모두 지나 여기 있는데
너는 여전히 우리가 막 만났을 때, 아니 우리가 만나기도 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감당할 수 있겠니'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했던 어머니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네가 떠나고 2년,
나는 서서히 네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어느새인가는 네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도 느껴졌다
아주 가끔 너와의 기억이 덮쳐올 때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러나 어떻게든 버텨냈다
'정선우 답지 않아 일어나'
네가 내게 남긴 마지막 그 말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정선우 답게.
네가 바랬던 정선우 답게.
그러나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네가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하는 것 뿐 - 나의 경우에는 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파묻혀 사는 나를 어머니는 안쓰러워하셨다
그땐 왜인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몰랐지만.
여장부이면서도 소녀감성인 어머니는
동생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나를 매우 아끼셨고
그때까지 나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해 좋은 아들 노릇을 해왔지만
네가 떠난 뒤 이미 그럴 여유 같은 건 사라져버렸다
그런 나에 대한 어머니의 걱정은, 일부러 무시했지만,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한 작은, 그러나 이야기가 있을 법한 브로치를 출장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이걸 깜짝 선물로 드리면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했던 건 그래서였다
깜짝 선물.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어도 좋았을까.
그저 그때까지처럼 의연하게 살아내고 있었을까
몰래 브로치를 숨기려고 연 어머니 서랍장에서 발견한 작은 앤틱 상자.
그 안에 담긴 편지들.
사진들.
나나.
너의 이름.
거실의 탁자에 그 상자를 내려놓았을 때,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셨어요'
겨우 꺼낸 질문은 그것
하지만 그것이 전부
왜였을까
그리고 나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너와 어머니의 연관성을
그렇게 통속적으로 묶기에 넌 너무 독립적이었고
어머니는 너무 열린 사람이었다 -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상처주거나 사라지게 하는 일 같은 건 다른 세상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았다
'뭘 말이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렇게나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이 편지들은 뭐죠? 이 사진은요? 제가 찾고 있다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를 괴롭힌 배신감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널 알고 있었고
내가 왜 그렇게 일에 파묻히는지 그 이유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나 널 찾았고
결국 실패했고
괴로워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제 사람을 돈으로 산건가요, 어머니. 왜 그러셨어요.'
고통스러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쩌면 증오해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왜 그러셨냐구요 서정희 여사님.'
나의 질문에 어머니의 얼굴은 모욕이라도 당한 듯 하얗게 질렸다
푸른 보석의 반지를 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반지 보다 푸르게 돋아난 핏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아이를 책임져야했어.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나에게 널 알려주지 않은 걸까
납득하지 않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을테다
무슨 말이어도 나는 그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다
굳게 닫힌 나의 반응에 어머니는 상처받은 얼굴로 보다가 여느 때의 여장부로 돌아갔다
'감당할 수 있겠니'
어머니의 얼굴이 굳건해졌다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나를 보던 어머니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상자를 들어올려 무릎 위에 놓고는 사랑스러운 듯 몇번인가 쓰다듬었다
너에게로부터의 물건이 가득한 상자를 그렇게 소중히 다루는 태도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안목이 있더구나 그 아이'
나는 끈질기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상냥하기도 하고 말이야'
내 눈을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듯 내내 상자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마침내 결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런던에 있단다 그 아이. 하지만'
하지만.
그리고 들은 모든 이야기들.
듣고도 믿지 못했던 이야기들.
아니,
직접 보고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너는 여기 있는데
내 앞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
그런데,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네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빤히 내 시선을 마주쳐온다
저 공허한 눈.
가슴이, 아니 온몸이 저릿해온다
우연을 가장해 매번 너를 만날 때마다 확인해야했다
이제는 나를 기억하지 않는 너.
나를 지워버린 너.
더이상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나.
차마 너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나를
평소보다 길게 응시하던 네가
우리가 다시 만난 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건넨다
"찾고 있다는 건 찾았나요?"
너는 순진한 표정으로 묻는데
나는 가슴이 아파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감당할 수 있겠니'
어머니가 왜 끝까지 나에게 숨기고 싶어했는지 알겠다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나에게 여전히 소중하지만
너에게는 더이상 의미없는 그 시간들을
언젠가 나를 사랑했던 너는 더이상 없다는 사실을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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