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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of '비밀' ) 








[2001년 2월, 서울] 



하아. 


입김은 하얗게 흩어진다 
이미 입춘이 지나고 개구리가 뛰어올라온다는 경칩이 곧이건만 도무지 봄은 언제 올지 모르겠다 
차가운 도시의 거리는 아직도 겨울이다 

미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었던 수트에 코트 차림이 역시 아직까지는 좀 얇았나 생각한다 
늦었지만 집에 가서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면서 뛰다시피 거리를 걸어간다 

벌써 몇번이나 바쁘다는 핑계로 - 아니 정말로 바빠서였지만 -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 
오늘마저 빠지면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사정을 고려해서 원래대로라면 신촌에서 모였어야했을 장소를 회사 근처로 잡아줬다는 걸 안다 
그런데 토요일 마저 야근이라니. 

'니네 회사 일은 너 혼자 다하냐?" 

짜증섞인 나정의 핀잔이 벌써부터 귓가에 앵앵 울리는 것 같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퇴근 시간이 대중이 없어도 너무 없는 
A부터 Z까지 모든 일을 해내는 멀티맨이 되어야하는 벤처기업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괜히 우리 회사는 어쩌고 했다가는 구박만 더 받을 뿐이다 

강남역 골목에 들어서 두블럭쯤 올라간다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마지막으로 받았던 공지 문자를 확인한다 


'토요일 7시, 비엔호프' 


벌써 9시반이다 
8시반쯤 대체 언제 오느냐는 재촉문자만 한번 오고 아직 짜증 섞인 나정의 전화가 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다 
잠깐 호프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고 들어가는 대신 건물 옆으로 비껴선다 
일단 내려가면 올라올 때까지 흡연은 어려울 테니 한 대 피우고 내려가야겠단 생각에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달칵, 달칵, 


추워서인지 불이 잘 붙지 않는 라이터로 입에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한번 들이마신다 
차가운 밤 공기와 섞인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다 
뛰어오느라 뜨거워졌던 속이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왜 안 들어가고 섰냐?" 


후우 - 하고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의아한 표정으로 윤진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넌 어디 갔다 오냐?" 
"안에 난장판이랑게, 뒤늦게라도 먹이면 좀 나을까 싶어서. 숙취해소제." 


뒷짐진 손에 들고 있던 까만 비닐봉지를 들어보인다 
해태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담배를 다 피우지 않은 해태 옆에 윤진이 슬쩍 연기를 피해 선다 


"이제 온겨?" 
"아, 응, 좀 늦었지?" 
"회사일은 니 혼자 다 허냐, 니만 일허는 것도 아니고 사정 빤허구만 만날 바쁜 척은" 
".... 너같이 정시퇴근하는 회사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잊고 있었다 나정만이 아니다 
윤진도 시작하기만 하면 잔소리가 엄청났다 
은행에서 벌써 3년차를 단 윤진이야 주말까지 이렇게 야근하는 제가 이해가 안되겠지만서도. 


"근디, 그래 입고 일헌겨? 니 개발이람서?" 


정장차림의 자신을 한번 쓱 훑더니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윤진의 말에 자신의 옷을 한 번 더 내려다본다 
편하지 않은 차림인 걸 깨닫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다 


"오늘, 낮에 투자자 미팅이 있어서." 
"워메, 입사 1년차헌티 투자자 미팅도 시켜야" 
"... 그냥 따라간거지 뭐, 여긴 이것 저것 다 해야해" 


1998년 1학기 제대 후 복학하려고 했을 때 모두의 대재앙이었던 IMF가 터졌다 
경기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고 따라서 가세도 기울었다 
더이상 예전처럼 낭만과 여유를 찾아 살 수 없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제대 후 복학한 해태는 장학금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열중하고 과외를 많을 때는 하루에 두 개씩 뛰었다 
덕분에 무사히 졸업장을 따긴 했지만 2학년 1학기까지 내버려뒀던 학점으로는 쉬이 취직처를 찾기 어려웠고 
대신 학과 공부 때문에 익숙해진 프로그래밍 능력과 서글서글한 인상, 게임에 대한 지속된 관심을 내세워 
지금 있는 게임개발 회사에 입사한 것이 지난해 9월이었다 
눈코뜰새없이 바쁘고 모두가 모든 일을 책임져야하는 구조가 때로 버겁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적성도 살리고 전공도 살려서 잘 왔다, 만족하고 있었다 


대신 피우는 담배 양은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안했지만. 


끝까지 피운 담배꽁초를 비벼끄는 걸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던 윤진이 퉁명스럽게 핀잔을 준다 


"근디, 니 담배는 언제부터 피운거다냐? 첨본다?" 


언제 처음 피웠다,라고 생각하기엔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흡연에 대한 질문에 해태가 오히려 얘는 왜 모르지? 하고 당황한다. 

생각해보면, 군대 제대 후엔 자신이 너무 바빴고 그 즈음에 입사한 윤진도 다른 세계에서 바빠졌다 
대학 친구들의 모임에서가 아니면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고 그나마도 자신은 바빴다는 핑계로 몇번에 한번 밖에 만날 수 없었다 
성균과는 그나마 간혹 따로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성균이 입대한 후로는 그마저도 뜸했으니 
아아, 그래, 윤진을 본 것도 지난번 성균의 제대 모임 때가 마지막이었나보다 벌써 1년 남짓 전. 
제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거나 생경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못마땅하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윤진을 힐끔 내려다본다 


잊고 있었다. 
처음 담배에 손을 댔던 날. 
아주 먼 기억. 
마치 오늘처럼 공기가 차가웠던 
아니 오늘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가 숨 쉴 때마다 폐를 아릴 듯이 넘어오던 그날 
그때 
이거라도 없으면 죽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그땐. 
그랬지. 



"군대에서 배웠지 뭐" 


해태는 어색하게 그저 얼버무리고 습관처럼 또다른 담배를 꺼낸다 


"군대서 참말로 나쁜 것만 배워온다드니, 그게 뭐 좋다고 그래 피워쌌냐 
 니 때문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우리 아가 나쁜 것만 배운당게"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랑 결혼은 어떻게 하냐?" 


괜히 저한테만 왜 저러나 심통이 나서 일부러 보란 듯이 더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뿜어낸다 
기겁하고 한발 물러선 윤진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본다 


"당장 끊어야, 그게 뭐 좋다고 그래 피워싼당가" 
"싫어, 니가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내가 왜 니 말을 듣냐? 내 여자친구가 싫다고 해도 생각해볼까 말깐데." 


들은 척도 안하고 담배를 피우는 해태를 '어후 이걸 한대 때려줘야쓰겄는디' 싶은 눈빛으로 올려다 본다 
아주 오래전 성균의 목을 졸랐던 윤진의 살기가 문득 느껴져서 해태는 저도 모르게 움찔 한다 


"워메, 이자슥 보소, 니가 빌빌거림서 군대 있고 학교 다닐 디 돈벌어서 니를 거둬멕인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한 소리만 골라허네 
 니가 그만치 얻어 먹었으믄 나를 엄니로 모셔도 모자랄 것인디, 야 글고, 니 요즘 서울 가시내 만난다드만 아예 서울말만 헌다? 
 아주 영혼까지 갈아꼈당가? 머시매가 닭살스럽게 뭐하는 짓이여?" 


새삼스럽게 사투리는.... 


"... 서울서 칠년 넘게 살면서 아직도 못 고친 니가 이상한 거거든...." 
"사투리가 워디가 워뗘서 고친당가, 그래 영혼 쏙 빼먹듯이 바뀐 거이 더 이상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투리를 쓰는 것보다 서울말을 쓰는게 더 편했다 
입에 붙어 있던 사투리를 고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막상 고치고 나니 돌아오지도 않았다 
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미 빙그레 뿐 아니라 삼천포도 심지어 나정까지 모두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유독.... 


"나만 그러냐? 나정이도 천포도 고쳤는데 어째 너만 올곧이 여수 사투리여 
 하여간에 과연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이랑게" 
"뭣이 어쩌고 저째? 디지고 싶냐?" 


일부러 어설픈 사투리로 대답해주니 파르르 짜증을 낸다 
대체 저 걸은 여수 사투리로 은행 업무는 어떻게 보는 건지, 면접은 어떻게 통과한건지 
아아, 창구가 아니라 본사 쪽이라고 했던가 

어휴.... 저 성격을 데리고 살아야하는 삼천포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시하고 싶다 
속으로 생각한 말을 꺼냈다간 한 대 맞을게 분명하니 그것 말고 건조하게 다른 지적을 한다 


"그리고 이제 말도 좀 곱게 해라, 디지고 싶냐가 뭐냐? 남편 친구 한테. 
 너 이제 한달만 있으면 성균이랑 결혼해. 너 이제 나한테 제수씨라고." 
"허이고 이게 미칠라믄 곱게 미쳐야제, 제수씨? 제수씨 겉은 소리 헌디. 니가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제?" 


한마디도 안 지고 대꾸하는 통에 고개를 절레 흔들며 웃고 만다 
하여간 올곧이 조윤진,이다 
늘 이랬다 
조윤진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여전히 손에 담배를 들고 훗훗거리는 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윤진을 인지하자 
문득, 쓸데없는, 그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어이 비밀 콜렉터" 
"뭔 소리여 또" 


웃음기 섞인 해태의 부름에 윤진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아 이런 상황이 언젠가도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아주 오래 잊고 있던 시절에 빛 바랜 사진 같은 장면을 찾아낸다 
이제는 잊혀진, 그 비밀이 치솟아 견딜 수 없었던 그 밤 


"요즘도 비밀 모으냐? 폭로하는 건 됐고" 
"나가 모으는 게 아니라 느그들이 흘리고 댕긴거라고 몇번을 말혀야 알아듣냐. 
 글고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이 워딨당가. 니가 여자 몇을 어째 만났다 워찌 헤어졌는지 순서대로 말해주랴?" 


돌직구인 윤진의 대답을 듣고 해태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 거 말고 진짜 비밀 말야, 아무도 모르는"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말한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가만히 해태의 기색을 살피던 윤진이 핏,하고 허튼 소리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뀐다 


"... 이거슨 또 뭔 소리여. 되얏다고 본다. 언능 들어가기나 혀. 다들 니 기다링게" 
"진짜로, 말해줄까? 진짜 비밀. 진짜로" 


여전히 웃고 있지만 윤진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만은 진지해졌다 
제법 심각한 분위기에 평소와 다르단 생각을 한 윤진은 
잠깐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해태의 눈을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뭔디, 말혀봐" 


정작 허락이 떨어지자 망설인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이제와 말해도 될까 
하지만 이게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이 말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달이면 공소시효가 지나버리니까 


"아 뭔디, 니 또 뜸들이냐" 


고민하는 듯 초점이 흐려진 채 말없이 선 해태에게 
답을 기다리던 윤진이 기어코 짜증 섞인 말을 하고 만다 
그제야 제가 윤진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걸 깨닫는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어느새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왔다 
해태는 가만히 위태로이 매달린 담뱃재를 털어버리고 꽁초를 비벼끈다 
그리고 말한다 


"나 너 좋아했다. 정말. 아주 많이." 


아아 이렇게 쉬운 말이었나 

그땐 이게 뭐라고 그렇게 무거웠을까 
입술을 달싹여 소리를 내기만 하면 되는 걸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이렇게나 가볍게 흔적없이 사라지는 걸 
그때는 이게 뭐 그렇게 무겁다고 꽉 눌러삼킨 불덩이처럼 담은 채로 내내 뜨겁게 내 속 전체를 태워버리게 했을까 
이제와 차갑게 식어버린 이 기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작고 가벼운데. 


막상 꺼내놓은 제 마음이 도르르 구르는 조약돌처럼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차가운 것에 멈칫,한다 
아직도 열정이 남아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지만.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랬지만 그래도 그땐 그렇지 않았으니까. 


뜻모를 침묵이 흐른다 
약간 당혹스러운 해태는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윤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뭔 농담이냐고 되묻거나 
사람 놀리지 말라고 짜증을 내거나 
이제와 왜 그걸 말하느냐고 당황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러는 대신 윤진은 물끄러미 해태를 올려다본다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꽤 한참이나 해태를 가만히 보더니 입술을 한번 삐죽한다 


"알어야" 


응? 

자신이 생각했던 어떤 선택지도 아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오히려 해태가 당황한다 


"안다고?" 
"닌 나를 뭘로 보냐,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구먼.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난 또 니가 그새 나가 모르는 뭔 사고라도 친 줄 알었네" 


퉁명스런 윤진의 대답에 뒷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진다 


"나가 그때는 겁나 이쁘긴 혔지? 니가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제. 암만." 


무표정한 얼굴로 자화자찬을 하는 것이 대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윤진을 보던 해태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아무 말도 없이 미친 듯이 웃는 해태를 황당하게 쳐다본다 


"니.. 미쳤냐? 이제 드디어 미쳐버린겨?" 
".... 근데 왜 말 안했냐?" 


충분히 추측가능한 의혹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해태는 대신 또다른 질문을 한다 
수상쩍게 해태를 보던 윤진은 뭘 그런 거 까지 알아야겠냐는 듯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니가 말을 않는데 나가 뭐땀시 아는 척을 한당가. 나 더이상 예전의 폭로기계, 여수여인 아니여. 요즘은 비밀도 잘 지킨당게"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넌 대체 내 마음을 언제 알았고 
어째서 알아챈 티를 내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왜 내 곁에 있었는지 

나는 그게 궁금한데 
너는 대답해주지 않겠지 
아니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언제였든 어째서였든 이제 와서야. 


자꾸만 실실거리는 웃음이 난다 
이렇게 간단해버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그때 괴로웠던 기억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실은 넌 그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니 
나는 이미 더이상 비밀이 아닌 그 비밀을 지키느라 그렇게 괴로웠다니 

차라리 그게 좋은 길이었을까 
적어도 지금 나는 네 앞에서 웃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오래 막아뒀던 병마개를 열자 새액하고 갖혀있던 공기가 흘러나온다 
한구석에 내내 담아뒀던 마음을 다 풀어버리려는 듯 
멈추지 않고 작은 소리로 낄낄거리던 해태의 웃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자 
그제야 윤진은 싹, 굳었던 표정을 풀고 진지하게 해태를 올려다본다 


"그라고, 니는 내 친구잉게, 친구가 비밀을 지키고 싶어헌디 우째 나가 아는 척을 한당가" 


친구. 


해태는 속으로 그 단어를 한번 중얼,해본다 


그래 친구. 


우리는 이제 친구가 되었지. 
그때의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 

친구. 


이제는 조금 걱정스럽게 저를 올려다보는 윤진에게 짐짓 섭섭하다는 듯 말을 건넨다 


"야, 그래도 감격이라도 좀 해야하는 거 아니냐? 나 정도되는 남자의 첫사랑으로 남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 나-는 첫사랑이랑 결혼을 항게, 남의 첫사랑이 되는 거는 별로 관심이 없어야." 


하여간 낭만 없는 예비 아줌마야. 


그때, 널 좋아했던 건, 
결코 얼굴 때문은 아니었지만. 
내가 널 좋아했던 건 아주 많은 다른 이유들 때문이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순간들 속의 너였기 때문이지만. 
널 좋아했던 건, 그건 그저 네가 너였기 때문이지만. 

그래. 

네가 예뻐서였어. 
그때 넌 친구,하기엔 내 눈에 너무 예뻤거든. 
넌 친구를 그만두고 싶고, 친구를 잃어도 좋을 정도로 예뻤어. 
친구야, 
넌 그때 그랬었어. 

그때 내가 아직은 뜨거웠던 비밀을 말했다면 
나는 너를 얻었을까 아니 잃었을까, 결국 친구 둘을 잃게되었을까. 
그게 두려웠지 그땐. 


"하기사 그때 니가 천포를 택하길 천만 다행이다. 
 어휴 내가 얼굴에 홀랑 홀려가지고 너랑 사귀기라도 했으면 진짜 어쩔 뻔 했냐?" 


저도 알고 윤진도 아마도 알고 있을 솔직한 마음을 말하는 대신 농담을 하며 부르르 몸서리를 친다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또다시 무의식 중에 담배를 꺼내 무는 걸 못마땅하게 보던 윤진이 
구두 뒷축으로 확하고 해태의 오른발을 내리 찍어버린다 


"악!" 


저도 모르게 몸을 수그리자 그대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낚아챈다 


"뭐여 니 지금!" 
"니 일단, 나 앞에서 다신 담배 피울 생각 말어라" 


니가 뭔데...... 

불퉁한 표정으로 본다 
그렇다고 반항한다고 다시 담배를 꺼냈다간 이번엔 어딜 걷어차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의 성격이 워쨌네, 제수씨가 어쩌니 이딴 소리 한번만 더 꺼내믄 나가 니 죽여불랑게 그리 알고" 
"...니 성격 지랄 맞은 거야 온 신촌 바닥이 다 알잖여, 
 글고 엄연히 말혀서 삼천포가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잉게, 그럼 부인인 너는 제수씨가 맞잖당가..." 


당황하니 사투리가 저절로 튀어나와버린다 
해태가 계속 궁시렁거리자 윤진이 한심한 듯 보다가 쐐기를 박는다 


"... 니가 말 안하믄 나도 없는 일이다 생각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디 니가 스스로 말항건게 말여 
 한번만 더 제수씨 어쩌고 기어오르믄 니 나 좋아혔다고, 고백도 했다고 확 불어버릴랑게 그리 알어. 
 함 평생 아-들이랑 모일 때 마다 안줏거리 되보든가" 


... 야! 
... 너! 
... 그렇게 남의 첫사랑을! 
... 그렇게 막 협박 도구로 쓰고 그러는 거 아니야! 



소리없는 아우성만 치고 있는 해태의 일그러진 얼굴을 한심한 듯 훑어본 윤진이 퉁명스럽게 손짓한다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구 언능 따라 들어와야. 
 다들 니 기다린다고 술만 쳐먹고 저래 취해버렸으니 
 니가 빨랑 들어와 밥 먹고 취해야 이 모임 끝나지 싶다. 언능 와야" 


....또 당했다. 


총총히 호프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사라지는 윤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저 피식 웃으며 스스로의 머리를 뒤헝큰다 


이 낭만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아줌마야!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내가 두고 볼거야 너! 

내친구 윤진아,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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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거고 이젠 해태도 다른 길을 걷게 될테니까 - 후다닥 마무리. 
눈물로 쓰기 시작했던 '비밀'도 이렇게 마무리 하고 보니.. 그저 다 지나간 시간 같네.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