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 아 
- 좀 가만히 있어봐 

- 아파 거기 
- 가만히 좀 있어보라니까 
- 아프다고! 

결국 큰소리를 내버렸다 
진짜 아파서였긴 하지만 먼저 소리를 질러버린 강주가 뒤늦게 눈치를 본다 

- 미안.. 

무표정하게 강주의 다리를 쓸어내린 흥수는 
제 코트를 벗어 휙 부주의하게 강주에게 던져놓고 
될대로 되라지 란 식으로 조금 떨어져 털썩 앉는다 

- 그런 건 왜 입고 나와서, 이게 뭐냐 

감정 없는 흥수의 말이 더 아프다 

강주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제 무릎을 살살 건드려본다 
역시 아직 쓰라리다 
코트를 걷고 내려다보니 무릎이 단단히 깨진 모양이다 
스타킹은 찢어진데다 흥수가 붙여놓은 반창고 근처로 채 다 지우지못한 핏자국이 남았다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미 내추럴해도 너무 내추럴한 모습을 보인 사이긴 하지만 
오늘은 좀 예뻐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지연과 옷도 사러갔고 난생 처음 구두란 것도 신어봤다 

- 강주야 너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고 다녀라 너무 예쁘네 
- .. 진짜 괜찮아요?.. 이렇게 짧은 건 어색해서... 
- 아냐 너 다리 예쁜데 왜 그동안 바지만 입고 다녔어 구두까지 신으니까 완전 각선미 예술~ 너 진짜 니 남친한테 넘기기 아까운데? 

지연의 격한 칭찬에 아무리 자신감이 생겼어도 지르지 말았어야했다 

기껏 입고 나왔는데도 흥수는 칭찬은 커녕 아무 반응도 없었고 
역시나 걱정한대로 짧은 치마와 처음 신는 힐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하필 어제 내린 눈 때문에 안 그래도 미끄러운데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본인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리는 흥수를 따라잡으려고 하다가 
크게 넘어져버렸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못하고 멍해진 자신을 아무 말 없이 일으켜세운 흥수는 
그대로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자신을 앉히고는 
근처 약국에서 소독약과 반창고를 사와 무릎을 씻어내고 약을 발랐다 
그리고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딴엔 잘 해보려고 한 건데.. 
창피하기도 하고 좀 서럽기도 해서 아프다고 버럭 해버렸는데 
그게 더 문제가 됐는지 이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역시 화가 난 것 같다 





흥수는 화가 났다 

눈치가 없는 건지 너무 눈치가 빠른 건지 

손을 잡는데만도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예전에는 그냥 거기 있는 손을 먼저 쓱 잡으면 되는 간단한 절차였고 
심지어 연상을 만날 때는 그쪽이 먼저 잡는 경우도 있었는데 
손을 잡는다.란 행위가 이렇게 눈치보이고 진땀나는 과정인 줄 몰랐다 

강주는 말만큼이나 손짓도 어찌나 빠르고 날렵한지 
손만 잡을라치면 휘익하고 방향을 바꿔버렸다 
좀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강주의 에너지는 늘 넘쳐났다 
특히나 자신을 만날 때면 더 그런 것 같았다 
어쩜 말도 끊이질 않고 몸도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아 그래 내가 분명 그게 좋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내가 왜 제 선후배들 사정까지 다 알아야하냔 말이다 

결국 일주일이나 시도한 끝에 타이밍을 잡지 못한 흥수는 
머리를 싸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낯간지러운 낚시질을 시도해 겨우 강주의 손을 획득! 할 수 있었다 

- 너 손 차냐? 
- 아니 나 손 따뜻한데? 
- 난 손 찬데 
- 아 진짜? 장갑 안 갖고 나왔어? 

이 정도만 했으면 좀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이미 자신은 오늘 밤 수십번도 더 이불을 걷어차며 하이킥을 할 것 같은 오그라듬 속으로 빠져들고 있건만 
강주는 생글생글 '사실'을 말했다 

내가 그걸 물어본게 아니라고! 

손발이 이미 사라진 것 같았지만 
욕망은 민망함을 이기는 법 

- 니 손이 따뜻한지 어떻게 아냐? 
- 어? 나 손 따뜻하다니까 진짜루 
- 그러니까 진짜 따뜻하면 한번 증명해보든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민망함을 감추고 어색하게 쓱 손을 내미니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강주가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머뭇거리며 손을 잡아왔다 
너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 싶으면서도 
잡은 손이 정말로 따뜻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 진짜 따뜻하긴 하네 
- .. 그치... ? 
- 내 전용 손난로 해야겠다 

수줍은지 도로 빼려는 강주의 손을 더 꼭 붙들어 잠바 주머니에 넣으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미션, 
그러니까 거의 수비수 세명을 개인기로 제치고 골키퍼 일대일 대치 상황에서의 슛을 성공시킨 수준의 성취감이 느껴진다 
그간 느꼈던 고뇌와 민망함이 사라졌다 
손을 잡았다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줄은 진짜 몰랐다 

하지만 그 기쁨도 며칠 못 갔다는게 문제다 

일단 손을 잡았으니 다음 단계로 진행! 도 금새일 줄 알았건만 
다음 스테이지의 강주는 더더욱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손도 내주고 간간이 팔짱도 껴왔지만 
도무지 그 이상의 틈은 보여주질 않았다 

나름대로는 손을 잡은 게 어색하고 민망했는지 
이전보다 말은 더 많아지고 몸놀림은 더 잽싸졌다 
지금 무슨 도둑잡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와의 스킨십 타이밍을 노리려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하다니.. 
좌절감까지 든다 

오늘은 처음 보는 짧은 치마까지 입고 나와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더니 
역시나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재잘재잘거린다 
분위기 좀 잡을라치면 참새처럼 금새 포로록 달아나버리는 통에 
급기야 강주가 놀라든 말든 그냥 확 덮쳐버릴까 하는 조바심까지 나던 참이었다 
이럴 거면 치마는 왜 입고 나오고 예쁘긴 또 왜 더 예뻐보이는 거냐 
좋은 점이라곤 구두에 익숙하지 않은지 비틀거리면서 자신의 팔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 뿐 

잠시만이라도 조용히 좀 해주면 좋겠다 
내가 그 타이밍은 놓치지 않을테니 

강주의 말들을 흘려들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의 발걸음이 좀 빨랐던지 좇아오던 강주가 펄썩 하고 넘어졌다 

애는 빙판에 엎어진 채로 멍하니 넋이 나갔고 
무릎에선 피가 철철 나고 
괜히 이런 건 왜 신고, 왜 입고 나왔나 싶어서 짜증도 나고 
자신이 제대로 못 데리고 다녀서 그런가 싶어서 속도 상했다 

잘 좀 따라올 것이지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내내 한마디도 않고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쭉 뻗은 다리에 쓸데없이 마음이 설렌다 -_- 
지금 설레봐야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기집애는 결국 다쳐서 분위기는 잡아보지도 못하게 할거면서 
이런 옷은 왜 입고 나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나 

잘 모르겠으면 누구한테 좀 물어나 보던가! 





강주는 이미 지연에게 여러 번 물어본 바였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세상에서 흥수가 제일 멋있는 것 같은데 
그런 흥수가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딱 집어 말해준 게 이해가 잘 안됐던지라 
흥수와 함께 지나가다가 예쁜 아가씨들을 발견하면 괜히 눈치를 보게 되고 
내가 뭔가 달라져야하는 게 아닐까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주는 아직도 불안해지곤 했다 

흥수가 첫 남자친구였던지라 뭔가 친구일 때와는 달라야할 것 같긴 한데 
특히나 흥수가 간간이 낯선 눈빛으로 다가올 때는 당황스러워서 
낌새만 있어도 모르는 척 휙 물러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또 그러는 저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어떤 시점에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어디든 연애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구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미국에서 돌아오지않은 하경에게 굳이 메일이나 전화로 물어보긴 멋쩍었고 
그래도 처음 망설이고 있던 때의 자신의 마음도 간접적으로(사실상 직구로) 전해서 계기를 마련해준 
지연이 굉장히 어른처럼 느껴져서 슬금슬금 이런 저런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주의 연애를 굉장히 반겼던 지연은 기꺼이 조언을 해주곤 했다 

- 니가 해줄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않을까? 
- 내가 할 수 있는 거...? 
- 응 널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거잖아 그걸 해주면 되지 
  그쪽이 너한테 뭘 원할까, 지금 뭘 원하는 걸까를 생각하고 그걸 그냥 해주면 돼 

내가 잘하는 거... 
나한테 좋다고 했던 거...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좋다고 했더랬다 
이야기를 하는 건 스스로도 자신 있는 바였고 

흥수의 바람이나 지연의 의도와는 매우 다른 결론을 내린 강주는 
평소의 아주 작은 순간까지 다 에피소드로 기억해두었다가 흥수에게 이야기했고 
이상하게도 자신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흥수는 더 시큰둥해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내가 싫어졌나? 

불안해하던 강주는, 
역시 여성스러워져야할까 하는 생각에 
평소엔 입지 않던 치마에 구두까지 차려입고 옅게 화장까지 하고 나온 참이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어색한 침묵이 더 견디기 힘들다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다 





- ... 미안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강주가 입을 연다 

- 내가 괜히 구두 신고 와서... 넘어지기나 하고.. 귀찮게 하고.. 

딱히 귀찮았던 건 아니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은 흥수는 침묵을 지킨다 
흥수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더 서러워진다 

- 나는...잘 모르겠어서...내가 뭘하면 좋은지.. 그래서.. 
  나는 재미있었던 일이라 말한 건데 너는 재미없어 하는 거 같아서.. 혼자만 말해서 그것도 미안하구 
  맨날 청바지 이런 것만 입고 나오니까.. 그래도 그러면 안 될 거 같아서.. 
  지연 선배가 좋다고 그래서 샀는데 역시 입지 말 걸 그랬나봐.. 그때도 넘어질거 같았는데.. 
  진짜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니구.. 나는 니가 좋아했으면 해서.. 
  
훌쩍거리면서 말하는데 흥수는 스륵 녹아버린다 
그렇게 조잘거리던 것도 저를 즐겁게 해주려고 그랬단다 
어쩐 일로 치마를 다 입고 나왔나 했더니 
저는 내내 청바지든 치마를 입든 상관없는데 나름대로는 그런 것도 신경쓰였나보다 
제가 바란 것과는 매우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제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하니 웃음이 난다 

- 가만히 있어봐 

슬쩍 다가앉자 움찔 물러나려다가 흥수의 말이 생각났는지 꼿꼿이 굳어있다 
눈이 새빨간 게 눈물을 참느라 노력한 모양이다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힘 들어갔던 어깨가 내려앉는다 
금새 긴장 풀어버리는게 귀엽다 으이구 이렇게 단순해서야 화도 못 내겠다 

- 나 진짜루.. 
- 쉬..ㅅ 조용히 

흥수가 달래듯 말하자 강주가 다시 눈만 깜빡깜빡 조용해진다 
가만히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자 
여전히 뭔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오물거리는데 그래도 소리를 내진 않는다 

-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거든? 
- ...? 

조용히 하랬더니 말은 못하고 무슨 말인지 궁금해죽을 거 같단 얼굴로 쳐다본다 
그런 강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술을 갖다댄다 
예상하지 못했던 따뜻한 입술 감촉에 강주는 멍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강주에게서 입술을 뗀 흥수는 
그 많던 말이 다 어디로 갔는지 조용히 얼굴만 붉어진 강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착한 아이니까 크리스마스 선물. 

나 이제 너 조용히 시키는 법 알았는데 그렇게 멍하니 있다 잡아먹히면 어쩔래 








- 첫키스? 
- 네 진짜 종소리가 들려요? 
- 쪼끄만게 그런게 왜 궁금해 
- 아 말해주세요 네? 쌔앰 
- 이것만 말해주면 문제 다시 푸는거다? 
- 네네네네네네네 
- 들려. 
- 진짜요? 
- 다른 건 모르겠고 크리스마스에 하면 들려, 크리스마스 종소리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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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경의 행방을 묻는다며 강주가 지훈이에게 무지하게 짜증낸 이유 .... 
라고 혼자 생각했음;;; 

흥수오빠...도 멋있지만..... 
창피해도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강주도 나의 이상형이라고 한다 ㅠ 

아, 댓글 달아주는 냔들 늘 고마워 :) 즐거이 봐주시길 :) 

새해에는 모두 흥수 같은 멋진 남친, 강주 같은 쿨한 여친 만나서 뜨겁게 연껒하길..... 빌어주는 것 밖에 못하는 냔이라 미안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