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햇살이 따갑다 
해변에 산책하는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보이는 그룹들이 오가고 있다 
지훈은 그 흐름을 따라 걷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한다 

멀리 서퍼들이 보인다 
파도에 휩쓸릴 듯 하다가 반짝하고 빛나며 물에서 솟아오른다 
문득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먼 수평선을 찍는다 
사진에 찍힌 하늘이 파랗다 

아직 4월인데도 LA는 벌써 초여름이다 
하기사 사시사철 이런 날씨라고 하니 
사람들이 조금 느슨한 느낌인 건 역시 날씨 덕인지도 모른다 
아직 반팔을 입기엔 쌀쌀한 서울의 날씨를 떠올리니 갑자기 추위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지훈은 따스한 공기에 어울리지 않게 부르르 떤다 


첫 단독 주연 작품의 촬영이 막 끝나고 
잡지 화보 촬영과 휴가를 겸해 온 일정이었다 
지난 3년간 빡빡하게 달려왔으니 이김에 좀 쉬다 오라는 배려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주어진 여유 시간 앞에 오히려 불안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긴 비행을 했고 
좋은 숙소에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것들을 보았지만 
진심으로 누릴 수가 없었다 

LA에 내려서 멍하니 이끄는대로 스케줄을 소화하다 막상 떠나려니 아쉬워 겨우 자유시간을 받아냈다 
혼자 좀 걷다 오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형 영어 못하잖아요 -_-' 라고 걱정이 산더미여서 
코리안타운도 있는 이 LA 바닥에 한국어 하는 사람 하나 없겠냐 멀리 안 간다 시간 맞춰 돌아오마 약속하고 나온 터였다 

목적지 없이 그저 발닿는대로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사람이 북적이던 번화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해변 

문득 주머니 속 아이폰을 꺼내보니 호텔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돌아볼까 고민하다가 남은 시간은 그냥 이 해변에서 머물기로 결정한다 
저 사람들처럼 바다에 발을 담궈볼 수는 없겠지만 
멀리서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진다 
지훈은 해변으로 통하는 길가에 통나무로 얼기설기 설치된 난간에 걸터앉는다 
이어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이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다 
분명 저 사람들도 자신처럼 고통스럽고 무료한 삶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이 그림 속에서만은 행복해보인다 
아이들의 웃음이 햇빛에 닿아 부서지는 것처럼 번지고 연인들에게 걱정 따윈 없이 충만하다 
일상을 잊어야할 것 같은 풍경 속에 홀로 앉아 
태평양에 닿아있을 머나먼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지훈은 갑작스럽게, 외로움을 느낀다 


미국. 

그게 문제였을까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땅 어딘가에 하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비행기를 타던 순간 생각했다 

만약 너도 이 비행기를 탔다면, 
열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는 동안 넌 어땠을까 
피곤했을까 
지쳤을까 
아니 새로운 생활에 들떴을까 
익숙한 일상처럼 아무렇지 않았을까 
..... 혹시 날 떠올렸을까 

손에 쥔 카메라를 괜히 도르륵 만져본다 
하경과 헤어지고 생긴 취미였다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카메라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정작 인물 사진은 찍지 않으면서 남들이 보면 이게 뭐냐 싶은 사진들,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라던가 
텅빈 거리라던가 
잠시 신호에 멈춘 순간의 가로등 같은 걸 찍어댔다 

넌 대체 사진기를 그렇게 끼고 살면서 여자 사진 한 장 안 찍고 뭐했냐, 
지훈의 사진 폴더를 발견한 친구들이 모두 어이없어 했던 풍경들이었다 
그러나 지훈에게는 그러니까 그런 사진들은 모두 자신의 시간을 박제하는 행위였다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멈추고 싶은 욕망이 커질수록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을수록 
더 강박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타닥타닥 DSLR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던 지훈은 
다시 카메라를 들어 먼 수평선을 향해 초점을 맞춰본다 

이 순간 
아무도 날 방해하지 못하는 이 순간 마저 
나의 심장을 흔들어놓는 너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셔터를 누르지 않고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휘익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빨간 풍선이 프레임에 들어온다 
파란 바다와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에 끌려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바라보니 
빨간 풍선 몇개를 쥐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아주 단촐한 촬영 장비와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촬영 중이었던가보다 

직업 탓에 반가운 마음이 든 지훈은 그쪽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멀리서 몰래 한 장을 찍고 나서 사진을 확인한다 
어려보이는 스태프들 차림이나 장비 수준을 보니 학생 작품인가 싶다 
자신에게 신인상을 안겨준 그 영화도 학생 졸업 작품이었단 생각이 나서 어쩐지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때 그 작품을 찍지 않았다면 자신도 여기 있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때 그 작품.. 

또다시 하경을 떠올린 지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우며 다시 한번 촬영팀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번엔 조금 가깝게 
뒷모습 뿐이지만 미래의 거장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찍은 사진을 확인하려는 지훈에게 관광객 몇명이 다가온다 

- 이지훈씨죠? 

한국인이다 
지훈을 알아본 모양이다 
이 먼 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지훈도 카메라를 끄고 인사한다 

- 네 안녕하세요 
- 꺄아 반가워요 제가 진짜 팬인데... 싸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해가 높이 떴다 
하경은 급하게 시간을 확인하고 모자 챙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에 눈을 찌푸린다 

여기서의 촬영은 이만 접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오늘 예정된 촬영을 다 소화할 수가 없을 듯 하다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하는 감독을 설득하면서 
하경은 촬영팀 철수를 지시한다 

이게 LA에서의 마지막 촬영이 될 것이다 
지난 2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무작정 LA로 건너와 필름스쿨에 지원할 준비를 할 때만해도 
당장의 입학에 매달렸을 뿐 졸업을 하는 날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은 졸업작품이 무사히 끝나는게 중요하다 
졸업을 해야 다음 스텝을 결정할 수 있을테니 

하경은 장비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스탭들을 헤치고 지나가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아역 배우의 손에서 풍선 더미를 받아든다 

- you did a great job, sweetie 

잘했다고 칭찬을 하니 기분 좋은 티를 안 내고 거만하게 걸어나가는게 귀여우면서도 
에휴 여기 애들은 하여간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문제야 싶다 
그래도 저 아역이 이번 작품의 주연이니 비위를 잘 맞춰놔야한다 

한 손에 풍선을 들고 주변을 휘 둘러본다 

사람들 통제도 동시녹음도 어렵다고 스탭들 모두 심지어 감독까지 반대하는데도 
꼭 이 씬만은 여기서 촬영해야한다고 박박 우긴 건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쓴 하경이었다 

죽도록 힘들 때,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을 때마다 
이곳에서 바다를 보며 숨죽여 울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 꽤 사람이 있지만 평소엔 한적한 곳이라 
해가 질 때 즈음 난간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그저 한두명 쯤 이상하단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고 갈 뿐이어서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다음날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러니 마지막 작품에는 촬영 장소로 꼭 넣고 싶었다 
이제, 이곳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 영화 속에서는 볼 수 있을테니까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멀리 들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돌아보니 좀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명을 중간에 세우고 주변으로 모인 걸 보니 유명한 사람이라도 나타난 모양이다 
할리우드가 있는 LA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번엔 누굴까, 생각하면서 다시 장비 점검에 들어간다 
짐을 다 챙겼으면 다음 장소로 얼른 이동해야한다 

- OK! let's move on! 




- 어!...이 폴더는 뭐야?... LA 갔었어? 
- 응? 아 화보 촬영 때문에 
- 아, 여기 좋지 나도 좋아했어 이 해변 
- 니가 거길 어떻게 알아 
- 나 LA에서 공부했잖아 마지막 졸업작품 엔딩씬도 여기서 찍었는걸 
- 신기하네 나도 거기 좋던데 

- ... 이거 
- 응? 
- 나인거 같은데 이 빨간 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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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강주 에피가 딱히 생각나지 않는 동안..... 오랜만에 지훈*하경... 
나냔에게 흥수*강주가 로코,라면 지훈*하경은 멜로 느낌이 강해서 쓴 글도 아무래도 좀 가라앉네 - 

이건 아마도... 8화와 9화 중간 쯤 어딘가? 
사실 그때도 쓰고 싶었던 에피였지만.... (이렇게 엇갈리는 아이디어가 몇개 있었음;) 더 엇갈리게 했다간 내가 말라죽겠어서.. 패스.. 
그치만 이 아련히 엇갈리는 정서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날리긴 아쉬워서 한번 쪄와봤어... 
아.. 그리고 이 에피 짤 때 즈음에 보통의 연애 DVD를 복습한지라 지훈이의 카메라 애착에는 보통의 연애 재광이의 영향이 있음 

즐겁게 봐줘 :)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