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 여기가 니네 집이냐? 어따대고 뻑하면 와서 라면을 끓여내래? 돈도 안 낼거면서 

- 이 시간이면 배고프단 말이야 고회장 니가 라면은 또 기막히게 끓이잖냐 그치 흥수야? 


오늘은 무슨 날인지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지훈이 라면을 먹으러 왔고 

근처 도서관에서 각각 임용고시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흥수와 강주까지 들이닥쳐서 

오랜만에 일찍 문 닫은 가게가 북적였다 

가게 문 닫을 시간에 들이닥쳐 라면을 끓여달라고 한 게 미안했던지 

강주가 살살 애교스럽게 웃으며 흥수에게 동의를 구한다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남순은 귀찮다는 듯 라면 두 그릇을 내려놓는다 


- 됐어 얼른 먹고 가 염장질 하지 말고 

- 우와 역시 니가 끓이는 라면이 짱이야 면발 살아있는 거 봐라 


라면을 먹으며 강주가 엄지를 치켜들지만 

남순은 한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가게 한 켠에 걸린 TV의 볼륨을 올린다 


월드컵 때문에 일부러 가게 규모에 맞지 않은 큰 화면의 TV를 구매했지만 

정작 가게를 연 동안 TV를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바빠서라기보다 정호는 TV 속의 세상이 낯설었다 

드라마나 예능에서 사람들이 웃고 우는 이야기들이 

뭐 그렇게 대수인가. 살아지면 사는 거지 싶어서 공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비교하면 그 고민들이 다 사치 같아서 

특히나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이 웃겨서 냉소가 나왔다 

살아있기만도 버거운 사람도 있건만 저게 무슨 신선 놀음인가 싶어서 

영업시간동안 배경음악처럼 TV를 틀어놓긴 했지만 제대로 집중한 적은 없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어디를 틀어봐라 나는 이거 볼거다 티격태격하고 있는 

강주와 이경을 보던 정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 테이블에서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지훈을 본다 


여전히 까칠한 얼굴이 영 맘이 쓰인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묵묵히 라면만 먹고 있는 이 녀석의 제대로 웃는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제 마음을 혹사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이런 얼굴이 또 하나 떠오른다 

늘 모자를 눌러쓴 움츠러든 어깨의 위태로운 분위기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지나갔던 말간 얼굴까지 


- 어 여기도 나리 나오네? 


강주의 목소리가 퍼뜩 생각에 잠겼던 정호를 깨운다 


- 나리? 니 친구냐? 


이경이 멍하게 묻는다 


- 나리 몰라? 계나리 우리랑 같은 반이었는데 

- 저런 애가 있었어? 

- 아.. 기억난다 근데 쟤 원래 저렇게 방정맞았냐? 

- 바보야 저건 연기잖아 


이경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남순은 기억이 날듯 말듯 헷갈려한다 

정호는 그제야 TV 속 나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푼수처럼 활짝 웃고 있는 얼굴 

저래서야 TV를 자주 봤다고 한들 가게에 찾아왔던 나리를 알아봤을리 만무하다 

나리에게 저런 얼굴도 있었던가 싶어서 유심히 TV를 바라본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데, 기억 속에선 그렇게 해맑은 표정이기도 한데 

어째서 늘 그렇게 위태로운 상태인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하다 


- 하기사 그땐 꽤 조용했던 거 같은데... 연기지만 대단하네 다른 사람 같아 


저와 같이 물끄러며 TV 속 나리를 보고 있던 강주가 중얼거린다 


- 근데 나 진짜 기억 안나서 그러는데 저런 애가 우리 반에 있었다고? 

- 니가 그때 기억나는 여자애가 몇이나 되겠냐 경민이랑 나 빼고 

- 야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 그래도 니네가 나리는 기억이 안난다고 그러면 안되지 

- 왜? 쟤가 뭔데 

- 야 그때 신혜선 핸드폰.... ...아니다 됐다 이이경 니가 뭐 언제는 기억력 좋았냐 

- 이강주 너 흥수 믿고 까불면 다친다? 

- 흥수 없이도 너쯤은 한손거리거든? 

- 어쭈 이게 진짜 여자라고 봐주니까 


결국 강주와 이경이 투닥거리기 시작하고 

남순이 귀찮다는 듯 자리를 옮기고 

흥수가 가만히 강주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이경을 째려봐 상황을 종료시키는 동안 


정호는 강주가 삼켜버린 뒷 말을 깨달았다 


신혜선의 핸드폰 

도둑으로 몰린 지훈 

그리고 

자신이 밝혀버린 그 이름 

계나리. 


계나리의 얼굴을 기억해내고도 

그 미소가 내내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했던 이유를 알았다 


- 근데 나리 꽤 여기저기 나오네 지난번에도 채널 돌리다가 나오는 거 봤는데, 지훈이 너 본 적 없어? 


다시 라면을 먹다 이젠 나리가 사라진 화면을 힐끗 보고 강주가 지훈에게 묻는다 


- 영화는 안 하는거 같은데. 나 오늘 처음 들었어 너한테 

- ... 하기사 여자애들이랑도 거의 연락 안 되니까... 나도 혜선이한테 가끔 얘기만 듣거든 혜선이도 졸업하고는 자주 안 보는 거 같고 


- 근데 정호 너 요즘도 가게에서 지내냐 


말없이 라면 그릇을 비운 지훈이 묻는다 


- 뭐 그렇지 


아버지의 알콜중독이 심해지고 합병증이 오면서 결국 중환자실에 입원시킨 지 한달이 넘었다 

제가 이제 제법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중환자실의 입원비는 실로 어마어마했고 결국 정호는 방을 빼서 병원비를 막고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 그냥 우리 집 들어와라 좀 작긴 해도 나 촬영 가면 집에도 거의 없고.. 

- 됐다 


더이상 어떻게 신세를 지라는거냐 

짧은 거절에 감춰진 말이 들려서 지훈은 울컥한다 

저랑 자기가 어떤 관계인데 아직도 신세 타령 


- 친구끼리 뭐... 


한번 더 말을 꺼내려는데 이경이 지훈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젓는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정호를 보며 결국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저놈의 부채의식은 정말.... 원망스럽다 


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면서도 

그저 자신에 대한 배려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 

마지막 남은 응어리. 아버지. 이것만은. 이것으로 인한 고난만은 나눌 수 없다 


정호는 문득, 나리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인간은 극도로 작은 일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자신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랬듯이 

하나의 얼룩이 인생 전체를 덮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러니 혹시 

자신이 그날 그 이름을 밝혀버렸던 것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그렇게 말간 얼굴인 채로 살 수도 있었던 

기억 속의 계나리의 인생을 빼앗아버린 원인은 아닐까 

현재의 그 날카롭고 예민한, 지친 계나리를 만든 잘못 낀 첫 단추가 아닐까 




[ *월 *일 오후 1시에 우리 재현이 돌잔치 해 올거지? 시간 비워 놔] 


혜선의 문자를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함께 연극영화과에 가자고 다짐했었지만 결국 혜선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간호학과 졸업 후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3년 전에는 결혼해서 아들도 낳았다 


그렇게 친했었는데 

우리는 꼭 같은 길을 가자고 손을 잡고 약속했는데 

단짝 친구인 관계가 멀어지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여전히 연락을 주고 받는 거의 유일한 고등학교 친구였고 

혜선은 자신에게 종종 먼저 연락해왔지만 

나리는 학창시절처럼 스스럼없이 털어놓긴 힘들었다 


오디션에 떨어지거나 촬영장에서 힘든 일을 털어놓아도 혜선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촬영장에서 너무 힘들었다 그만둬버릴까, 라고 자신은 참다참다 투정부려봐도 

그래도 난 니가 하고 싶은 일하고 사니까 좋지 않느냐 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곤 했다 


아니 나리도 혜선이 병원에서 겪는 사건이나 결혼생활, 

특히나 아이를 낳고 난 후 하는 육아 이야기들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고 

특히나 육아 때문에 혜선이 더 정신없어지면서 자연스레 연락도 뜸해졌다 

돌잔치를 알리는 이 문자가 몇개월만인지 모르겠다 

육아가 그렇게 힘들다던데 라고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이 썩 개운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이렇게 척척 쉬운 행복이 왜 저에게는 오지 않는지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올라 머리가 아프다 


- 넌 니 생각이 없어? 


지겨워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남자친구와 최근 들어 좀 소원해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일부러 전에 예쁘다 해줬던 옷도 입고 

남자친구가 잘 먹었던 식당도 예약하고 활짝 웃기까지 했는데 

그 모든 시간 동안 내내 불편한 기색이던 그가, 마침내 꺼낸 말.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너에게 맞춘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하고 

네가 싫어하는 건 나도 싫어하려고 했을 뿐이다 

너와 같은 생각을 갖는 것 그게 사랑하는 것 아닌가 

널 위해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널 위해 좋아하지 않은 음식도 기꺼이 먹었다 

그저 널 위해 그랬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지겹다.고 했다 


저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려고 한 것 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해준만큼 돌려받고 싶었던 게 그리 잘못인가 


그러나 그 지긋지긋하다는 표정과 메마른 목소리 앞에 

나리는 또다시 웃었다 


-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도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관계가 끝나버릴까봐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의지하고 있는 이 사람마저 떠날까봐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웠다 


다들 사랑받으면서 사는 것 같은데 

자신에게는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건가 

쉽게들 사는데 저는 왜 그 쉬운 게 안되나 


박탈감 


나리는 채 머리를 덜 만진 상태로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앉아 손톱을 깨문다 

꺼끌꺼끌한 모래 한알이 사락사락 굴러다니는 것 같던 요즘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저 권태기여서 그런 것 뿐, 이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이것만 넘기면 괜찮아질거야. 


아무래도 오늘은 라면가게에 가야할 것 같다. 





늦은 밤 가게에 혼자 앉아 몇번이나 읽었던 잡지를 다시 넘겨본다 


처음 캠핑 잡지를 사가지고 왔을 때 

남순은 조금 놀란 듯 자신을 바라봤고 이경은 갑자기 뭔 캠핑이냐며 핀잔을 줬지만 

정호는 묵묵히 몇달에 한번 쯤 새로 나온 잡지를 사들고 들어왔다 

라면가게에 썩 어울리지 않은 그 잡지를 한켠에 두고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이 나면 넘겨보곤 했다 


여행.이라는 걸 해본 적은 없다 

가출이라던지 길거리 노숙이라면 해봤지만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밖에서 자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 

언젠가 자신의 인생이 온전해지면 

그땐 자신도 캠핑이란 걸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종종 캠핑 잡지의 텐트나 장비들을 살펴보곤 했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면서 정호는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비싸다... 


작고 단단해 보이는 램프 모양의 랜턴 옆에 쓰인 가격을 확인하고 놀란다 

아직은 이런 물건들을 살만한 여유는 없었다 

한참 멀었구나... 생각하는데 

달칵 문이 열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리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까닥하고 들어선다 

정호도 보던 잡지를 접어두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요리를 하는데 집중이 안되고 마음이 불편하다 

평소보다 더 어두운 나리의 얼굴과 

얼마 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름과 얼굴만 기억하는 정도였던 이전처럼 대할 수가 없다 


오늘따라 나리의 오오라가 더 가라앉아 있어서 힐끔힐끔 눈치만 보인다 

천천히 음식을 다 먹은 나리가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여느 때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 나리를 향해 

초조해진 나머지 채 다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하고 만다 


- 미안하다 


나리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커진다 


- 그때, 네 이름을 대서. 괴로웠다면. 미안하다. 


이게 사과인건가 싶게 퉁명스런 어조지만 

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약간 비껴선 시선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그동안에 대한 보답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 응. 


대답을 들은 정호가 비로소 나리를 바라본다 

안색을 살피는 정호에게서 고등학교 교실에서 가끔 뒤돌면 볼 수 있었던 그 불안정한 눈빛을 발견하고 

나리는 데자뷰를 느낀다 


넌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니 

이 따스한 곳에 

그 눈빛을 지금껏 어디로 감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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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강주 의 밝음밝음 을 쓰다가 좀 지쳐서 완전히 방향을 바꿨더니....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어렵구나..... 

감정의 기복도 별로 없고 썩 마음이 후련해지지 않아서 쓰면서도 너무 군더더기가 많은 것 같아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모자란 글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늘.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