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선글라스를 쓰고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부페에 들어선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부딪히지 않고 걷는 것도 힘들다 
조심스럽게 벽을 따라 걸어가 초대장에 쓰인 홀을 확인한다 

<김재현 어린이 돌잔치, 아빠 김정환, 엄마 신혜선> 

슬쩍 홀 안을 들여다본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문 반대편에 한복을 입고 아이를 안고 있는 혜선이 눈에 띈다 
나리는 어색하게 회장을 가로질러 혜선에게 다가간다 

- 혜선아 
- 어머 나리야! 

아이를 안고 손님에게 인사하고 있던 혜선이 나리를 보고 반색한다 

- 왤케 오랜만이야 연락도 안하고 나 너 죽은 줄 알았잖아 

아이까지 남편에게 맡기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 반가워하는 혜선이 
어쩐지 불편해서 슬쩍 한손을 빼고 선글라스를 벗는다 

- 너도 바쁘잖아 재현이 키우느라 나도 정신 없었어 요즘 
- 그래 너 진짜 정신없겠더라 안 그래도 TV만 틀면 너 나와서 완전 반가워 나 너 나오면 다 챙겨보는 거 알지? 

그래서 정신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리는 행복한 혜선의 모습을 보는 게 좀 씁쓸하다 

- 나 재현이랑 둘이만 집에 있으면 말하고 싶어서 죽을거 같아 담에 집에 놀러와 
  재현이 한테도 내가 맨날 TV에 너 나오면 유명한 이모 나온다고 세뇌시키고 있다? 
  와서 나랑 얘기도 하고 애랑 놀아주기도 하구 
- 그래 다음에 그러자 

짧게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한다 
파리한 나리의 얼굴이 걱정이 된 혜선이 다시 한마디 하려는데 
뒷쪽에서 사회자가 아기 어머니 준비하시라고 부른다 
망설이다가 혜선은 나리의 손을 꼭 잡는다 

- 우선 먹어 먹고 좀 있다가 나 꼭 보고 가 저쪽에 강주랑 하경이도 왔어 

혜선이 손짓하는 방향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영 마음이 안 놓이는지 혜선은 다시 나리를 보고 눈으로 다짐하고는 그제야 사회자에게 종종 걸음으로 간다 

딱히 아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도 
누가 알아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나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향해 걸어가 
강주와 하경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비껴 등지고 앉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무래도 혜선을 다시 보고 가는 건 어렵겠구나 
잠시만 앉았다가 일어나야겠다 생각한다 

- 오정호 힘들었겠네 
- 그러니까 참.. 이상하지 겨우 이 주 전에 정호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오늘은 혜선이 애 돌 잔치에 와있고.. 
  사람 죽고 사는 게 진짜 별 거 아닌 거 같아 

나리는 음식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 한다 

- 오정호... 괜찮아? 
- 흥수 연락 받고 장례식장 갔더니 애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딱 굳어가지고.. 하경이 너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때 맨 뒤에 앉아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내가 진짜 마음 안 좋아가지구.. 
  요즘엔 그래도 가끔 웃기도 하고 그랬는데 완전 십 년 전으로 돌아갔더라니까 
  빈소에 사람도 없고 사실.. 고등학교 때 애들 부르기도 뭐하고.. 오정호가... 좀 그랬잖냐... 
  그래서 한참 앉아서 자리 지키다 왔잖어 너도 못 불렀어 
- 아냐 나 어차피 그땐 연락줬어도 못 갔을 거야 
- 그러게 송하경 넌 무슨 회사를 혼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왤케 바쁘냐? 
  이렇게 돌잔치, 결혼식 이런 행사 생겨야 니 얼굴 보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야? 
- 미안 근데 진짜 바빴어 강주야 진짜루 

머리속으로 시간을 따져본다 
2 주 전 장례식 
자신이 찾아간 밤이 아흐레 전쯤 

그렇다면 

갑작스런 일주일 간의 공백도 
그 검은 정장과 흰 셔츠도 
자신이 여행의 피로 때문일거라 생각한 거칠한 얼굴도 
황당한 듯 차가웠던 표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도 

그건 모두 

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하필 그날 저는 왜 그곳에 가서 
이미 절망하고 있었을 정호에게 독설을 퍼부었을까 
자신의 감정에 빠져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여전히 불이 밝혀진 가게를 두어걸음 앞에 두고 
나리는 십여분 째 망설이고 있었다 

도저히 일대일로 정호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낮에도 찾아와보았지만 
가게 가득 넘쳐나는 손님에 정호와 함께 일하고있는 남순과 이경을 보고 나니 
차마 가게에 들어가 정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늦은 시간 아마도 비어있을 가게를 보면서 
어째야하나 계속해서 나섰다가 돌아섰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어쩌지 정말 

저도 모르게 한동안 물어뜯지 않았던 손톱을 또다시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익숙한 
김치 볶는 냄새 

나리는 그 냄새에 이끌려 가게 문을 열고 말았다 

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저가 화들짝 놀라 멈칫 하는데 
주방에서 정호가 저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내다본다 
서로 망설이면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참 섰다가 
용기를 내서 나리가 먼저 말한다 

- 김치볶음밥, 돼?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호가 도로 부엌으로 들어가버린다 
어색하게 나리는 늘 앉던 자리에 가서 앉는다 

우선 들어오긴 했는데 다음은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손톱을 물어뜯고 싶지만 애써 참고 가져온 봉투를 옆자리에 내려놓는다 

정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김치볶음밥을 가지고 나와 나리의 자리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또다른 접시를 들고 늘 앉던 자리에 가 
아무 말도 없이 김치 볶음밥을 먹기 시작한다 

나리는 먹기 시작한 정호를 보고서야 숟가락을 든다 

김치볶음밥. 
언제나와 같이 
잘게 다진 김치를 타지 않게 볶아 밥과 버무려서 
노른자가 터지지 않은 계란 프라이를 얹은. 

Sunny side up 
터지지 않은 노른자를 봉긋하게 올린 계란 프라이. 

그 말에 의지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노란 해 같은 이 계란 프라이를 살짝 터트려 볶음밥과 비벼먹으면 
그 빛이 내게 올까 하고. 

이게 그리도 그리웠다 내내 
이 빛에 아주 약한 희망이라도 걸고 싶었다 
충만하게 채워주는 음식을, 먹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울컥하는 걸 꾹 참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리는 천천히 그릇을 비운다 
다 먹고 고개를 드니 이미 정호는 접시를 치운 빈 테이블에 앉아 잡지를 넘기고 있다 
어쩐지 말을 걸 수가 없어서 나리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우물쭈물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 됐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호가 말한다 

- 아무 때나 와서 먹고 가 돈은 됐고 

여전히 시선은 아래에 고정한 채로 자신을 보지도 않는데 
그런데 그게 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배려하는 것 같아서 
아니, 오늘은 같이 먹어준 거 자체가 갑자기 고마워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리가 성큼성큼 걸어가 가져온 봉투를 쑥 내밀자 
정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 이거, 

나리는 대충 정호에게 봉투를 안겨버린다 
엉겹결에 봉투를 받아들고 상자를 꺼내 열자 
언젠가, 보았던 캠핑용 램프가 들어있다 

- 늘 보고 있길래 그 잡지. 

나리의 목소리가 긴장한 듯 조금 잠긴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정호는 제 앞의 램프를 뚫어지게 본다 
... 저에게 이제 그만 빗 속에 있어도 된다는 증표인 것 같다 
먼 미래 일거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이미 왔는지도 모른다 

나리는 한참 아무 말도 없는 정호 때문에 불안해진다 

- 저번에 미안해 

그제야 정호가 램프에서 눈을 떼고 올려본다 
나리는 용기를 낸다 

- 하지만 꼭 미안해서 사온 건 아니야 여기 어쩐지 이 빛 같았거든 나한테는. 고마워 늘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나리가 당황스러워 
어버버 말리지도 못하고 있던 정호는 
한참을 고르고 골라서 말을 꺼낸다 

- ....내가, 고마워. 


이제 나는 양지에 서게 되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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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니 이게 뭔가요...... 흑..... 이렇게 비루하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 ㅠㅠ 뭔가 더 깊이 쓰고 싶었는데 ㅠㅠ 
상처를 잘 다루기엔 나냔의 내공이 너무 부족했다요 ㅠㅠ 
굳이 4편과 5편을 나누어야했느냐고.. 하면.. 물론 나냔이 평소 써서 올리는 양을 생각하면 4편과 5편을 묶은게 1화 분량이지만... 
감정이 달라지니까 나누고 싶었어 ㅠ 아.. 그리고 나냔이 짝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쁜 취향도 작용;;; 민망하네;; 

쓰면서 내내 예성의 먹지 와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을 들었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널 잊지 않을게. 이 가사에 매달려 썼어 

이젠 밝은 거 쓸래 ㅠ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준 냔들 고마워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