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 거야 예아 ♬
오늘 뭐가 되도 되겠구만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서 내린다
라면가게로 독립을 하자마자 그동안 알바해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산 차였다
그런 이경을 보고 정호는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써버리냐며 생각 없는 놈이라고 욕 했지만
각자의 기준이 다른 거니까, 흘려듣고 구매를 강행했다
역시 남자는 차.다
중고차인들 어떠랴 중고라고 써붙인 것도 아니고 보기에 폼만 나면 되지
세차까지 깔끔하게 끝낸 흰색 중형차에서 내리면서
이경은 오늘 어쩐지 굉장한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이를 스물 일곱이나 먹고 무슨 미팅이냐고 시큰둥해했던 이경을
찬경은 끈질기게 꼬드겼다
그래도 영 넘어올 기색이 안 보이자 급기야는
너야 안 급하겠지만 나는 이제 서른인데 해 넘기기 전에 여자친구 만들어서 장가가야하지 않냐며
이번에 미팅하는 애들이 진짜 예쁘고 조건도 좋다더라
사람 수가 모자라서 그러니 관심 없어도 그냥 나와서 바람잡이라도 하게 앉아만 있어달라고
하도 간청을 하는 바람에 까짓 거 한번 나가주자 싶어서 수락한 터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온갖 알바를 전전하면서
훤칠한 키에 해사한 얼굴, 특히 여자손님들을 공략하는 미소
게다가 손님에게는 절대 함부로 굴지 않는 절대 접대 기술로 무장한 이경은
곧 상대 레스토랑에서 은밀하게 스카우트 제안까지 들어오는 서버 계의 아이돌로 급부상했고
덕분에 알바비도 쏠쏠하게 벌어들였다
찬경과는 그 시절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다 만난 사이였다
이경보다 3살이 많았지만 사회 경험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처음부터 실수투성이인 찬경을 보고
사람이 저렇게까지 어리바리하고 순진할 수도 있나 싶어
이미 레스토랑의 고참 서버였던 이경은 아이 돌보는 심정으로 종종 거들어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찬경은 명문대 대학생이었고 집도 꽤 잘 살았다
대체 왜 이런데서 일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하자
무조건 육체노동으로 번 돈으로 용돈을 해야하는게 아버지 교육 방침이라고
과외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런 알바를 계속 해왔다고 멋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거참 신기한 방침일세.
내내 선택의 여지 없이 이런 알바를 계속해온 이경으로서는
굳이 다른 편한 일자리를 두고 육체노동을 선택한 찬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찬경은 자신이 부잣집 아들이라던가 명문대 생이라는 티는 전혀 내지 않고
<우리는 경자 돌림이네> 라며 이경을 마치 제 친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서
찬경이 알바를 그만두고 졸업을 하고 꽤 좋은 직장에 취업한 후에도
형 동생 하며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이경에게야 서른이란 나이가 그냥 그런가보다 실감나지 않았지만
번번이 연애 실패한 채로 모태솔로로 어느새 서른을 맞고 만 찬경에게는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얼마전부터 미친 듯이 소개팅에 나가는 것 같았다
학벌에 재산에 성격까지 그저 완벽한 찬경에게 그러나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외모였다
어지간한 여자들이 힐을 신으면 바로 작아지는 키와 썩 깨끗하지 않은 피부 때문에
찬경은 만나는 여자의 시선이 조금만 흔들려도 번번이 자신감을 잃었고
그러니 소개팅에서 성공할 확률은 더 낮아졌다
뭘 저렇게까지 목을 매나 싶었지만
그래도 친한 형이 연애 한번 해서 장가 가겠다는데
가서 바람잡이로 얼굴 마담 한 번 해주지 싶어서
이경은 일부러 좀 덜 차려입고 찬경을 위해 나선 참이었다
오늘 나오는 여자들이 예쁘다고 했던가
그냥 도우미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오니 마음이 좀 설렌다
가게 문을 연 후로는 자리 잡는데만 신경쓰느라 정신없이 지내서
그동안 연애는커녕 잠시 여유시간을 내는 것도 어려웠다
정말 오랜만에 주말에 외출을 해보니
가게를 열었던 게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다
아 진짜 우울하다 청춘을 가게에 틀어박혀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리를 비운 자신을 욕하면서
라면을 끓이고 나르고 있을 남순과 정호를 생각하니 잠시 미안해졌다가
그러면 늬들도 약속을 잡던가 싶어 금새 털어낸다
가을 하늘이 참 좋구나
날씨 끝내주네
감상에 젖었다 시계를 보니 약간 늦었다
찬경에게 혼나겠군 ... 싶지만 뭐 오늘 제 인연을 찾으러 나온 것도 아니고.
이경은 천천히 2층에 자리한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 휙 둘러본다
구석 자리에 여자 네 명의 뒷모습이 보이고
자신을 향해 남자 세 명이 앉아 있다
그 셋 중 안절부절 못하던 찬경이 이경을 보자마자 얼른 오라고 고갯짓을 한다
에휴 형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니까 안되는 거야
이경은 속으로 생각하며 여유로운 태도로 마지막 남은 자리에 앉는다
- 죄송해요 날씨가 좋아서 좀 늦었네요
어쨌든 늦은 건 늦은 거니까 필살의 미소를 날리며
앞에 앉아 있는 여자들과 아이 컨택을 하는데
오. 마이. 갓.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지긴 했다
=
왜 여기 경민이 와서 앉아 있는 걸까
이경은 대각선에 앉아 꼴같잖다는 듯 썩소를 날리며 저를 보던 경민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부터
그대로 굳어버린 채 불안하게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정작 경민은 그때 이후로는 이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여성스러운 자태로 앉아 사람들의 말에 맞장구만 치고 있는데도 저는 손에 식은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된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른 시간이 가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이경이 분위기 메이커로 활약할거라고 생각해서 꼭 좀 와달라고 부탁했던 찬경은
갑작스럽게 침묵을 지키며 극도로 불안해하는 이경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의아하지만
그래도 진행은 해야지 싶어 주먹을 탁탁 쳐서 주목을 끈다
- 자 그래도 파트너는 정해야죠? 마음에 드시는 분 있으면 지금 나가셔도 되구요
찬경은 그저 우스개 소리로 덧붙였을 뿐인데 갑자기 경민이 손을 든다
- 네 경민씨
헐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진짜 남경민이야
이경의 몸에 한기가 돋는다
그런 이경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경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 저 분이랑 나가봐도 되죠?
- 네?
경민의 검지 손가락이 정확하게 이경을 가리킨다
일곱 명의 눈이 휘둥그레져 경민과 이경을 빠르게 오가는 사이
경민은 태연하게 핸드백을 챙긴다
- 저 그럼 먼저 가볼께요
먼저 일어나 나가버린 경민을 보며
황당한 이경이 어리둥절해서 그저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있자
찬경이 이경의 등을 훅 밀어버린다
- 얼른 나가라 여자분 기다리신다
형... 그렇게 복화술로 말해도 다 들려요...
이경은 그제야 꼭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축 쳐진 채 경민을 따라 나선다
계단을 내려와보니 경민은 건물 앞에 서있다
저를 기다린 것인지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게 옆에 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게 불편해서 죽을 것 같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저를 콕 집어 나오라고 한 걸까
머리가 복잡해진 이경은 습관적으로 뒷주머니에 꽂아둔 담배갑을 꺼내 탁탁 친다
그제야 경민은 경멸스런 눈으로 올려다본다
아차.
이경은 반사적으로 담배갑을 뒤로 숨겼다가
아니지 이제 와서 내가 담배를 피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도로 꺼낸다
보란 듯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이경을
그럼 그렇지 라는 듯 보던 경민은 가방을 고쳐멘다
- 됐지? 각자 갈 길 가자
저 할 말만 하고 또각또각 걸어가버리는 경민의 뒷모습을 보며
이경은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내려버린다
됐긴 뭐가 됐다는 거야 대체
한 마디도 못한 게 억울하다
저 기집애는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냐
한 모금도 채 피우지 못한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끄고 이경은 도로 차로 향한다
오늘 날씨 좋다고 누가 그랬냐
일진 더럽게 사납네 진짜
=
- 잘 들어갔냐? 별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머리가 복잡해서 집에 바로 들어와 한숨 자고 일어나니 그때야 찬경이 전화를 걸어왔다
- 네 뭐, 잘 들어왔어요
- 경민씨는 잘 들어갔고?
잘 들어갔는지 어쩐지 저가 어찌 알리.. 뭐 잘 들어갔겠지
- 네 뭐.
퉁명스런 이경의 대답에 찬경이 우물거리다 뜬금없이 묻는다
- 경민씨 어땠냐? 마음에 드냐?
마음에 들리가! 그런 못된 기집애 따위!
- 그저 그랬어요 왜요?
그쪽에서 설마 저를 마음에 들었다고 했을리는 없고 그게 왜 궁금한가 싶다
아니다 저를 괴롭히려고 마음에 든다고 했을지도...
- 아니 너 마음에 안 들었으면 내가 연락 해볼까 하고
찬경이 쑥쓰러운 듯 말한다
안돼!
이 착한 형이! 그런 마녀같은 기집애 한테!
- 형, 걔 완전 싸가지 없어요 성격도 나쁘고 막말도 얼마나 서슴없이 하는지
완전 제멋대로에 구속 장난 없고 날카롭고
- 너 경민씨 원래 아는 사이야?
차마 옛 여친이라고는 못하겠다
- 아니 뭐.. 몰라도 그냥.. 딱 봐도 그래 보이더만..
이경이 말을 흐리자 찬경은 웃으면서 받는다
- 내가 보기엔 딱 봐도 여성스럽고 유하던데 너 데리고 나가는거 보니까 강단도 있고
여자가 그렇게 결단력도 있고 그러면 멋있지 난 좋더라야
내가 마음에 들어서 데리고 나간 게 아니거든요....
형....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 하여간 별로예요 난 비추
- 야 내가 좋으면 됐지 그럼 나 연락한다? 너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라?
- 형! 찬경이형!
파하하 웃으며 끊어버리는 게.. 자기가 무슨 램프의 요정이라도 되는 줄 아나
평소에도 둔해서 유쾌한 찬경이 갑자기 짜증난다
말릴 때 좀 들으라니까 진짜!
걔 외모지상주의야! 괜히 나랑 사귄 게 아니라고! 형 들이대면 바로 까여!
=
금요일은 평소의 두 배로 바쁜 것 같다
하필 남순이 은행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바람에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느라 정호는 이미 짜증이 났고
정호 달래랴 홀에서 기다리는 손님들 마음 풀어주랴 서빙하랴
이경은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나는 정말 훌륭한 서버야 자부심을 가져야지
팔이 떨어져라 라면을 나르면서 스스로 격려한다
하지만 저는 자가발전으로 버틴다 쳐도
남순이 곧 오지 않으면 안에서 라면을 끓이면서 동시에 요리도 하고 있는 정호는 폭발하지 싶다
이제나 저제나 남순이 오나 힐끔힐끔 문 쪽을 바라보며 주문을 받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린다
부랴부랴 주문을 받고
캐셔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보니 02 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다
혹시 남순이 은행에서 무슨 일 생겼나 핸드폰이라도 잃어버린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한참 말이 없다
바빠죽겠는 시간에 이게 무슨 장난 전화인가 싶어
번호 남았으니 복수는 좀 있다 해주마 하고 끊으려는데
그제야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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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투경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쓸게 없을거 같단 댓글은 왜 달았는지 ㅠ 그것도 오늘 아침에 ㅠ
커플링 네 개 째 쓰고 있자니 나냔이 다중 인격이거나 정신분열이 올 거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러나 정호*나리를 쓰고 나서 뭔가 엄청 소동극 스러운 걸 쓰고 싶어! 라고 생각하던 중에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떠오르고 말았다는 거 ㅠ
투경 답게 어디로 튈지는 솔직히 말하면 전혀 모르겠어
평소엔 그래도 3~4화 까지는 이야기를 짜놓고 쓰는데 이번엔.. 진짜 막.. 썼거든;;
우선은 여기까지 쓰고 도망간다며 ㅠ
아, 이것도 그건 너.의 확장판! 그래서 라면가게가 등장하고 인물들의 사정이나 상황도 그대로
(사실 좀 꼬였을거야; 네번째 커플링을 하다보니 딱 맞추기 어렵네; 처음부터 좀 잘 맞춰쓸걸 싶지만 이제와 바꿀 수 없으니 뭐;;)
단, 얘네는 지금 스물 일곱의 세계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마음에 들길 바래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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