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의 개별 에피소드의 연속, 당신은 나의 것,은 마지막 편의 제목.
= Episode 1. =
- 맛있니?
다정한 목소리로 묻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다
찬경은 피식 웃는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은 제 앞에 놓인 캔에 정신없이 머리를 박고 있는 길고양이는
공터 모퉁이에 고양이 먹이나 맑은 물을 놓고 가던 버릇 때문에 만났다
보통은 사람을 경계하고 제가 사라진 후에야 고양이들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전부터 저를 보고 있었던 건지 그날 따라 배가 고팠는지 캔을 뜯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처음엔 그래도 경계를 해서 보기만 하고 다가오진 않더니 조금씩 그 거리가 좁혀져서 이젠 제 앞에서도 먹게 되었다
어쩌면 이미 사람의 손을 탄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만약 버려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아직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고양이를 보며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상처라던가 결핍에 민감했다
제가 결핍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때문일까
불안정한 눈빛을 단번에 읽어내버리는 재능 때문에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천성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까지도 가만히 다가가 길들이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렇게 이경과 경민을 만났다
그게 사랑이었는지 동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이 불안한 눈빛을 한 여자가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날 밤 불안한 눈으로 저를 보는 이경을 본 순간, 둘이 아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경이 그렇게 솔직하게 두려움을 드러내는 걸, 몇년을 알고 지내면서 처음 보았다
아직도 멀었구나 사람을 아는 건
조금 반성했다 이경은 늘 가볍고 발랄하다고만 생각했으니까
갸르릉거리며 이제 물을 홀짝 핥는 고양이를 보다 오늘 결혼식을 떠올린 찬경은 피식 웃는다
들어선 저를 보고 반색을 하며 두 손을 탈탈 잡고 흔들더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굳이 저가 직접 모시고 가야겠다며 신랑 자리를 비우고 신부 대기실로 간 이경이 외쳤다
- 야 찬경이형 오셨어
곱게 앉아 미소짓고 있던 경민이 수줍게 웃었다
- 오셨어요 감사해요 찬경씨
- 축하해요 이경이 잘 부탁해요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신부 곁에 있겠단 건지 자리를 뜨지 않던 이경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넌 아직도 찬경씨가 뭐냐?
- 뭐가?
퉁명스런 이경의 말에 경민도 빈정상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 이제 엄연히 아주버님이지 너 아직도 형한테 마음 있는 거 아냐?
- 말 다했어?
- 그런 거면 포기해라 물 건너 갔어 너 나랑 결혼이야 오늘
- 됐거든 그만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 둘 거 거든
- 이게 진짜, 그만 두긴 뭘 그만둬
- 누가 진짜 그만 둔대? 니가 자꾸 트집 잡으니까 하는 말 아냐
- 야 누가 트집을 잡아
파르르 떠는 이경과 경민의 사이에서 끼어들 틈을 찾고 있던 찬경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저기, 내 의견도 좀 반영해주지? 난 경민씨랑 만날 생각, 전에도 지금도 없는데
- 아, 형 그게 아니라...
- ... 저랑 안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시죠 지금...?
미안한 듯 이내 수그러드는 둘은 타닥, 불꽃튀는 속도만큼 금새 꺼지는 것도 닮았다
- 니네는 둘이 똑같아서 잘 살겠다
진심이 실린 찬경의 말에 동시에 기분 나빠하는 것까지 비슷해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결혼식은 당사자인 둘 답지 않게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사회를 보던 지훈이 행진 직전 신랑인 이경에게 경민을 올리고 팔굽혀펴기 열번을 하라고 짓궃게 시키는 바람에
이경이 성질을 못 참고 순간 야, 하고 버럭 소리지르려고 하자
경민이 이경의 표정이 구겨지는 걸 발견하고 바로 드레스 자락을 사락 움직여 아마도 치마 아래 하이힐로 이경의 발을 지그시 눌렀고
이경이 소리를 지르는 대신 작은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구기는 걸
신랑이 언제 팔굽혀펴기를 하려나 하고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모든 하객들이 발견하고 동시에 작게 웃음이 퍼진 걸 제외하면
신부가 살짝 눈물 글썽이기도 하고 그걸 본 신랑이 당황해서 눈물 닦아주기도 하는 경건하고 평범한 여느 결혼식과 같았다
- 그런 애들도 결혼을 한단 말이지
물을 핥으며 갸르릉거리는 고양이에게 살짝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간지르며 말한다
배가 불러 긴장을 풀었는지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손길을 받아들인다
한번 더 쓰다듬고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제 손길이 사라지자 고양이는 이내 자취를 감춘다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살아남아라
찬경은 속으로 당부하며 휴대폰을 꺼낸다
[형 고마워요! 다녀와서 식사 같이 해요]
이경의 문자가 도착했다
잘 살아라, 행복하게
= Episode 2. =
- 자,
빨대까지 톡 꽂아서 주는 야쿠르트를 내키지 않은 듯 받아든다
저에게 하나를 건네고는 아무렇지 않게 본인 야쿠르트를 쪽쪽 빨고 있는 남순을 바라본다
주니까 먹긴 먹는데...
어쩜 이렇게 야쿠르트를 좋아하는지
남순은 뭘 먹기만 하면 후식으로 꼭 야쿠르트를 챙겼다
심지어 야쿠르트 같은 건 후식으로 주지 않는 식당에서 식사라도 할라치면
나와서 꼭 편의점에 들러 야쿠르트를 한줄 사서 지수에게 하나, 그리고 제가 나머지를 모두 먹곤 했다
라면가게에서 꼭 라면 먹고 나면 야쿠르트를 하나씩 챙겨주길래 별 걸 다 서비스로 주네, 했는데
그냥 서비스가 아니라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 거였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야쿠르트를 좋아하는 건지
그것도 꼭 다섯 개에 천원짜리 이 작은 걸로만
- 이게 그렇게 맛있어요? 야쿠르트?
지수가 묻는다
- 달잖아
남순은 어느새 첫번째 야쿠르트 병을 버리고 두번째 병에 빨대를 꽂으면서 말한다
지수는 할말을 잃는다
서른 넷 먹은 남자가... 달아서 야쿠르트를 달고 산다는 이 말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라면 가게 밖에서 만나게 된 남순은, 예상 외의 면모를 보이곤 했다
예를 들자면 야쿠르트
예를 들자면 과묵한 줄로만 알았는데 굉장한 장난꾸러기에 깐족거림을 장착하고 있다는 점
예를 들자면 어딘가에 새로운 라면이 등장했다고 하면 꼭 먹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뜬금없는 집착
서른 넷이 되도 남자는 다 애야 애 -_- 란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언젠가 식사를 끝내고 산책 중에 발견한 꽃을 보고 제가 예쁘다, 하고 다가서자
뒤에서 뜬금없이 나직하게 시를 읊던 음성 같은 것
조금 놀라 돌아보는 깜빡이는 제 눈에 쑥쓰러운 듯 눈을 피하며 대답하던 모습
- 고등학교 때 벌칙이었거든 지각하면 시 외우는 거
순식간에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보이던 얼굴
말없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다른 세계 왕자님 같았다가
옆집 아저씨 같았다가
금새라도 떠나버릴 것 같았다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제 옆으로 성큼 다가설 때면
뭔가 농락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는 계속해서 고남순이라는 행성 근처를 맴돌고 있는 위성 같았다
결정적인 말은 듣지 못하면서도 희망을 버릴 수가 없어서
아주 가끔의 가만히 저를 보는 눈을 보면 어쩌면 하는 가능성을 자꾸 그러쥐게 되어서
계속 맴돌고만 있는 제 자신이 갑자기 억울해진다
손에 쥐고 있던 야쿠르트 빨대를 물고 중얼거린다
- 순 애기 입맛이면서... 누구더러 꼬맹이래 진짜
그런 지수를 보던 남순의 눈이 약간 가늘어진다
저를 관통해 뭔가 재는 듯한 그 눈,
지수는 모르는 척 눈을 아래로 하고 떨리는 마음을 숨겨버린다
- 꼬맹아, 다 크면 아저씨랑 결혼할래?
에....?
갑작스런 남순의 말에 지수가 물고 있던 빨대를 툭 떨어트린다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덜컹 심장이 내려앉은 것처럼 당황한 지수를 보다
남순이 피식 웃으며 세번째 야쿠르트병에 빨대를 꽂는다
- 우리 아가야, 이제 말도 못하는구나... 어쩌나.. 크려면 한참 남았네..
목소리에 장난기가 역력하다
또 놀리는 건가 싶어 기분이 상한다
오늘은 안 당하려고 했는데.... 매번 이렇게 장난으로 말만..
대체 내가 언제까지 어린애로만 보인다는 건지
지수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 ... 아저씨, 아가랑 결혼한다고 그러면 아청법에 걸려요... 은팔찌 철컹철컹, 몰라요?
고개 돌려 저를 외면한 지수를 보는 남순의 표정이 그때야 진지해진다
네게 언제쯤 진심을 말할 수 있을까
넌 언제쯤 진심을 알아차려줄까
네가 먼저일까, 내가 먼저일까
나는 이제 기다리기 어려워졌는데
이제 널 그만, 갖고 싶어졌는데
말하는 대신 지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다
- 그러니까, 얼른 커라 아저씨 나이 더 먹기 전에. 너 기다리다 할아버지 되겠다
= Episode 3. 당신은 나의 것 =
[하경 & 지훈 23세]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청계천을 따라 걷는다
햇살은 따스한데 물가라 그런지 문득 분 바람이 아직 차다
하경은 봄이라고 입은 원피스 아래 드러난 다리에 찬 공기가 닿자 살짝 바르르 떤다
- 추워?
- 아, 아니
제 옆에 한걸음쯤 떨어져 걷던 지훈이 묻는다
아직 입을 때가 아닌 얇은 옷을 입은 게 이유인 것 같아서 고개 젓는다
- 입을래?
지훈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건넨다
- 입어, 추운데
하경이 멈칫 하자 다시 한 번 권한다
점퍼를 내민 지훈을 망설이며 보다 하경은 결국 옷을 받아 입는다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옷이라 아직 체온이 남았다
지훈의 옷에서 옅은 담배냄새가 난다
평소엔, 담배를 피우는구나 - 생각한다
저를 만날 땐 피우지 않아서, 가끔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발견하고 혹시 피우나 짐작만 했었다
체취와 섞인 엷은 담배냄새가 낯설다
하경은 무심결에 지훈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왼쪽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뭔가가 잡힌다
손을 주머니에 넣은 하경을 발견한 지훈이 당황한 듯 본다
-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남의 주머니를 더듬다니 하지 말아야할 일을 했다 싶어 급히 손을 빼고 사과한다
지훈은 당황한 얼굴로 망설이다가 다가와 주머니에서 그 무언가를 꺼낸다
- 이거
- ?
저에게 쑥 내미는 비닐 주머니를 보고 하경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붉은 리본으로 묶인 투명한 비닐 주머니 안에 옅은 초록색 테두리에
중앙에 작게 하트가 그려진 손톱만한 크기의 사탕들이 들어 있다
- 이미 지났지만, 사탕주는 날이었다며, 그냥. 그동안 고마워서. 그땐 바빠서 못 봤으니까
지훈이 시선을 피하며 서툴게 말한다
하경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건네든다
- 요즘 공부하니까 이런 거 못 받았을거잖아, 그래도 친구끼리 이런 건 챙겨야지 싶어서 그냥 지나가다가,
- ... 잘 먹을게
한참을 아무 말 없던 하경이 두 손으로 사탕을 꼭 쥐고 있는 걸 보고 지훈은 이내 안심한다
하경은 어쩐지 이 사탕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잘 지내라]
대학 진학 후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의미로 바쁜 일상에 잊고 지냈던 지훈이
갑작스런 문자를 보냈을 때 저는 일찍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 문자를 발견하고도 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다, 얼마 후 연락을 했을 때는 이미 휴대폰 서비스가 중단된 후였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해지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남순과 연락이 닿던 강주에게 넌지시 지훈의 소식을 물었고 그렇게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딱히 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은 문자, 무시해버려도 그만인데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제 주변에서 처음으로 동갑내기가 입대했다는 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며칠을 망설이다 하경은 육군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지훈의 주소를 알아냈고
<나는 잘 지내> 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부칠 때까지도 한참 고민했다 심지어는 봉투 색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그저그런 편지 봉투는 말고 그렇지만 너무 어둡거나 튀는 것도 말고 평범한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것 같은,
우리는 아직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내 부쳐버리고 답장이 올 때까지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절 이상하다고 생각할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마침내 도착한 지훈의 답장은
조금 악필이긴 했지만 성실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제 편지에 조금 놀라면서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교류가 지훈이 제대한 뒤로도 오늘까지 이어졌다
지훈은 고등학교 시절 저를 놀래켰던 예상보다 깊은 열정과 집중력으로
공부가 아닌 문학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편지의 문장들은 서툴고 가끔 맞춤법이 틀리곤 하긴 했지만
저는 단어와 문장으로 이해했던 그 이야기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마치 그걸 몸으로 살아내는 것처럼 소화해서
저에게 들려주거나, 좋은 문장들을 적어 보내곤 했다
남자들끼리 다녔고 여자들과의 친분은 그닥 없던 지훈은
제대 후 처음 하경을 직접 만났을 때 도무지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썩 남자와 둘이 있는 게 편했던 건 아니라서 한참 정적이 흐르기도 몇번이었다
그렇게 어색했는데도 종종 지훈과 만났던 건 그런 가운데서도 서툴게 설명하는
지훈의 열정과 고민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 처음으로 질문해왔을 때, 그때처럼
떨리고 겁먹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의지에 찬 그 눈.
그걸 보면 어쩐지 자신이 도와줘야만 할 것 같은, 어떻게든 기운을 붇돋아줘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경은 제 옆에서 먼 곳을 보며 말하고 있는 지훈을 본다
주머니 속의 사탕이 다시 바스락하고 손에 걸린다
사탕,
이건 그저 다정한 것 뿐일까
제 감정이 우정인지 조금 더 특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저에게 미래를 털어놓으면서도 늘 한발짝 떨어져있는 지훈의 마음도
저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는 건지 조금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에게 보여주는 서툰 배려와 다정한 몸짓 같은 건 그저 누구에게나, 하는 친절인 걸까
하경은 묻고 싶어진다
- 이런 걸 할거야
나란히 걷던 지훈이 한발 먼저 내딛더니 빙글 몸을 돌려 저를 보고 선다
질문하는 하경의 얼굴을 잠시 보던 지훈이 결심한 듯 진지해진다
그리고 하경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시선을 멀리 고정하고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슬쩍 들어올린다
- 저 창에서 새어나오는 저 빛은 뭐지?
돌변한 지훈의 표정과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인 지훈이 제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저를 보고 있는데 저를 보고 있지 않다
- 저쪽은 동쪽, 그렇다면 줄리엣은 태양이로구나
솟아라 아름다운 태양아 시샘하는 달을 없애라
달의 시녀인 그대가 달보다 훨씬 아리땁구나
그가 부르는 이름은 줄리엣
그렇다면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로미오의 대사
이 긴 대사를 언제 저렇게 외웠을까
아니 이 공간이 언제 이렇게 바뀌었을까
여긴 그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오후의 청계천변
우리는 점심을 먹고 봄볕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던 것 뿐인데
너의 눈빛에, 너의 표정에, 너의 대사에
마치 나는 지금 발코니 위에 선 것처럼, 우리가 마치 베로나의 무대 위인 것처럼
지훈과 저 사이에 다른 공기가 흐른다
- 그대는 내 님, 그대는 내 사랑! 아 이 마음을 그대가 알아주었으면!
... 아, 그녀가 입을 여네, 왜 말이 없을까
상관없어 저 눈이 말을 하는 걸. 내가 대답을 해야지
먼 곳을 헤매던 지훈의 눈이 방황하다 하경을 찾아온다
열에 들뜬 눈과 마주치자 심장이 멎어버릴 듯 덜컹 한다
- 다시 한번 말해봐요, 빛나는 천사여
크고 느릿한 동작으로 그림을 그리듯 손을 내민다
팔을 뻗은 자유로운 몸이 금새라도 날아갈 것 같다
독백이 끝났는데도 지훈은 한동안 그대로 멈춰있다
정적이 흐른다
아주 가끔 위쪽으로 지나가는 차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내 세상 아래로 내려앉은 듯 팔을 내리고
평소같이 조금 차분하고 어색한 얼굴로 돌아온다
- 이걸, 하려고. 어이없지 연극이라니.
쑥쓰럽게 웃는 지훈은 그러나, 이미 확고한 의지로 미래를 결정한 듯 보인다
하경은 잠시 멈췄던 심장이 이제는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하는 걸 느낀다
기대와 긴장이 가득한 채 지훈이 제 대답을 기다린다
하경은 약간 울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막힐 것도 같은 기분으로 천천히 고개 저어 보인다
- 아니, 어이없지 않아. 난 좋아
하경의 마음에 조금 전의 지훈이 들어와버렸다
시간이 이전과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로미오.
그대의 이름은 어째서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잊으시고 그 이름을 버리세요
당신과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이 몸을 가지세요
나의 로미오,
그대가 나를 줄리엣이라 불러주는 그날에,
내 마음은 당신의 것.
이미 그대는 나의 전부.
당신은 나의 것.
===================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하기 어려웠던 에피들을 한꺼번에 썼어,
찬경이의 이야기는 직후에 등장시키고 싶었는데, 따로 떼어내서 쓰기 뭐해서 못썼고
(그땐 파견 중인 런던 시내에서 만난 고양이 얘기였는데)
하경이의 이야기는 사실 그건 너 중간 쯤에 나왔어야 했는데, 흐름이 애매해서 못 넣었었어
그렇게 치자면 그저 지나간 에피 들이 몇개 더 있지만, 하경이의 이 이야기는 꼭 쓰고 싶더라..
언제 처음 마음을 주었는지, 말이야. 몇번이나 끄적거리다 결국 마지막에야 쓰네
중간에 등장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들은 조금 바꿨어 입에 붙는대로, 문장도 전문이 아니라 따다썼고
봄은, 이미 마음에 왔는데 날은 아직도 차네.
감기 조심해 냔들아,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머니까
+ 조금 뒤늦은 덧붙임이지만, 지수의 모델,이라고 하면 스무살~다섯 무렵의 정선생님(나라짱), 그 나이 즈음의 한지민씨, 같은 동글동글하고 귀염상들을 생각하고 썼어..각자의 상상 속에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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