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 이강주
- 어?
책상 위에 축 늘어져 엎드려있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은혜가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수학이 프린트 걷은 거 가져오래
- 아....
계속해서 늘어져있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은혜는
그래도 반응이 없자 휙 돌아 제 자리로 가버렸다
교무실에 질문하러 갔다가 수학선생님께 한 소리 들은 모양인데
내가 들어야할 말을 대신 전하게 됐으니 짜증이 난 것도 이해는 갔지만....
그렇지만 수학 프린트라고 하면....
나는 그때까지 오른쪽으로 고정하고 있던 고개를 반대로 돌려 뉘었다
먼 산을 보고 있던 그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공기,에 약간 섭섭해지려고 했다
이렇게 엎어져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수학 프린트는 회장이 걷기로 한 거였는데 그는 어째서 안했을까
생각해보니 보충 수업이 다시 시작한 뒤 그가 교실 앞에 나와
숙제를 내라던가 공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느리거나 타이밍을 잊는 일은 간혹 있었어도 그렇게 아예 안해버리는 일은 없었는데
나는 그에게 가서 수학 프린트를 걷어야한다고 말해줘야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야, 수학 프린트 안 낸 사람 누구야! 빨리 내! 이번 시간까지 안 내면 숙제 안냈다고 수학한테 말한다?
- 이강주 넌 왜 그렇게 야박하냐
- 나 냈는데 고회장한테
- 다음 시간까지 하자 나 까먹었어
내 말에 웅성웅성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힐끔 바라본 그는 내가 일으킨 바람에도 영향받지 않은 듯 여전히 멍한 채였다
그에게 난 고작 이정도인데, 나는 왜 그때 말해버렸을까
창피해져서 혼자 고개를 휙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그렇게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채주길 바라면서
=
- 고남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수도 없이 불렀던 그의 이름이 마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의 낯선 단어인 듯
혀 끝에서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하게 굴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내 목에 걸려있던 그 말을 토해버렸다
- 좋아해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침묵에 간질간질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혼자 흠칫 놀랐다
그때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 ...넌,...
그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몇번이나 입을 뗐다 다물었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조금 움츠러들었다
- 나한테 넌 친구야 흥수 같은
마침내 그가 문장을 완성했다
거.절.당했다.
머리 속에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창피함과 낙심에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 그럼, 친구지, 그래서 좋아한다니까, 친구.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환하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해보였다
손을 움찔거리다 결국 도로 주머니에 찔러넣고 살짝 고개 숙이는 걸 보면서
나는 괜찮다는 듯 가볍게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고마워 친구 데려다줘서, 학교에서 보자
무너지는 내 마음이 너무 급해서 얼른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한발짝 폴짝 물러서서 마구 손을 흔들었다
- 다 왔어, 들어가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 망설이다가 그저 물러섰다
말없이 선 그를 외면하고 나는 돌아섰다
말하지 말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의 곤란한 눈만 내내 맴돌았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교실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내내 피해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피하기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인사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
드르륵 탁,
수학 프린트로 내고 나와 교무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네가 서 있었다
교무실 앞 창가에 기대서 있던 너는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대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이미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망신만 당했는데
그만큼이나 너도 불편했다
억울한 마음에 내게 말을 걸려는 너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너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 이강주
네가 날 불렀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 이강주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지만 네게 금새 따라잡혔다
네가 다급하게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널 뚫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마치 블로킹이라도 하는 듯 내 길을 차단했다
- .. 하아.. 뭔데
비켜줄 것 같지 않으니 대체 왜 이러는지 들어나보자 싶어서
한숨을 쉬며 이유를 묻자 너는 오히려 당황한 듯 보였다
빤히 널 올려다보자 넌 잠시 망설이다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한번만, 더 기회를 주라
- ... 응?
- 고남순, 병신이라 지 마음을 지가 잘 몰라 그러니까,
아직도 그 소리인가, 넌 눈치도 없냐! 싶어 발끈해서 널 쳐다봤다
넌 간절하게 날 보고 있었다
마치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움찔했지만 오기가 생겨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 ... 싫은데... 나 썩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네 눈이 순식간에 암흑에 휩싸인 듯 깊어졌다
세상의 모든 절망이 네게 다가선 것처럼
그 눈을 마주하자 속으로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뚱한 얼굴을 유지했다
나를 보던 네가 갑자기 내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내 손이라도 부여잡을 듯 간절하게 말했다
- 딱 한번만 더, 그녀석은 손을 잡고 끌어주지 않으면 못 움직이니까, 부탁한다
깊게 허리 숙여 부탁하는 너는, 왜 그랬을까 내게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고개 숙인 네게 이유를 묻는 대신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별로
분명 나의 말은 부정이었는데
고개를 든 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희망이라도 발견한 듯이 조금 밝아졌다
- 부탁할게
정중하고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어째서?
누구를 향한, 무엇에의,인지 모를 질문이 마음 속에 퐁퐁 샘솟았다
그런 나를 한번 더 보고 너는 더이상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어쩐지 불안정한 마음에
뛰다시피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막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일까
네 말대로
정말 그는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한번 더 내밀어주기를 기다렸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날 모든 수업을 내내 멍하니 보냈던 기억이 난다
=
하지만, 그러고도 며칠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학교를 오갔을 뿐이고
너도 더이상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는 그저 거기 있었다
느릿하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논술 모의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에 그가 있었다
텅빈 교실에 남아 예의 자신의 자리에 기댄 채
뭔가 넘기고 있던 그는 문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애써 눈을 피하며 목례만 까닥하고
내 자리로 다가가 두고갔던 참고서를 서랍에서 꺼내 가방에 챙겼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내게 그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그땐 그가 내 길을 막고 섰다
나는 또다시 위를 올려다봐야했다
- 집에, 갈거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심각하게 물었다
무시해버려야지 생각했는데 그 심각한 표정과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 ... 그런데?
- ... 데려다줄까?
웃음을 억지로 참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가 예의 그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가방을 어깨에 맸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십여분 남짓이 천리길인 것처럼 멀고
눈깜짝할 새인 것처럼 짧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내내 네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던,
그가 내 손을 기다리고 있을거라던
그 말이 머리 속에서 몇번이나 떠오르고 지워지고 했다
갑작스럽게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가 내민 손일까,
그것이 그의 기회일까
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도 떠올렸다
네가 그에게 다시 한번 가보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너의 부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대체 네가 그래야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희망을 줬다 빼앗는, 날 괴롭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해도
대체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번 고백해보라고, 그 기회가 갈거라고 떠밀어주는게 날 괴롭히는 걸까
무엇보다 내게 고개 숙여 부탁했던, 너의 간절한 눈빛이 그 생각을 지웠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그의 마음일까
혼란 속에 아무 말도 없이 걷다 결국 집 앞까지 와버렸다
멍하니 걷고 있던 내가 지나치려하자 한뼘쯤 떨어져 걷던 그가 먼저 멈춰섰다
그때서야 나도 아파트 정문을 확인했다
- 아...
뭔가 말을 해야할 것 같아서 그대로 들어가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고마워, 라고 해야할까
왜 그랬어, 라고 물어봐야할까
손바닥에 식은 땀이 나서 나도 모르게 치마자락에 손을 문질렀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에 비껴선 그도 망설이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
둘 다 말없이 그저 서로를 바라보다 말다 했다
결국,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내가 먼저 말해버리고 말았다
- 토요일에,
긴장해서 이상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내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윈 들리지 않았다는 듯 날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만날래? 영화, 또 봐도 되고, 둘이.
내 말이 어둠을 따라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눈부신 듯 그 흔적들을 따라 헤매다가... 웃었다
그가 그런 미소를 짓는 걸 처음 봤다
나는 순식간에 어두웠던 세상을 밝혀버리는 그 미소에
용기를 다시 한 번 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말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 그럼, 12시쯤 볼까?
그가 잠시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 ... 안돼?
불안한 마음으로 묻자 그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 토요일 아침에 부탁받은 알바가 있어서,
- 그럼 늦게 보면 되지 2시는 되지?
그의 빛이 꺼질 듯 흔들려서 나는 급히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 그래 그럼, 가
내가 손을 흔들자 그가 천천히 내게 한 발 다가왔다
이렇게 뛰다가는 심장이 튀어나와버리는게 아닐까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내게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을 들어 머리를 보스스, 흔들어놓았다
- 이쁘다, 너
팡, 팡, 팡
머리 속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멍하니 바라보는 내 머리를 몇번인가 더 쓰다듬은 그는 아쉬운 듯 천천히 손을 떼고 살짝 물러섰다
- 들어가,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나를 보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나는 마구 소리 지르며 뛰고 싶은 걸 꾹 참고 얌전히 손을 흔들어주고 뒤돌아섰다
그때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 강주야,
- 응?
돌아보자 그가 다시 날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그 웃음에 나는 넋을 잃었다
- 그날 보자
응.
나는 크게 고개 끄덕였다
꼭 갈게
날아서라도 갈게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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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 써버리고 싶은데, 진도가 안나가네, 누가 내 머리속의 이야기들을 읽고 써줬으면 좋겠어..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냔들 고마워
이번 이야기는, 별도의 댓글이나 설명을 하지 않으리라 처음부터 생각해서 핏백 잘 못하지만
그래도 냔들의 댓글을 읽으며 기운내고 기분 전환도 해
늘, 부족한 글 좋아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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