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H] 


그곳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면 그 끝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의 자리에서 세 개쯤 떨어진 뒷자리에 앉았던 나는 
나른한 오후면 언제나 한번은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너를 발견하곤 했다 
모두가 고개를 문제집이나 교과서를 올려놓은 책상 위에 틀어박고 보물이라도 발견하려는 듯 필사적인 그 오후마다 
너는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럴 때의 너는 마치 그런 치열한 세계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다른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로 봄볕이 쏟아지는 벤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넌, 

어떻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할 거라고 믿었을까 

나는 그게 더 의아했다 

그는 정말 몰랐을까 
너는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눈치채지 않았다고 

나조차 몇번이나 발견한 그 순간들을. 





그와 나는 친구였다 
아니 형제였다 

아니, 분신이었다 

그가 사라진 인생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없던 지난 몇년간은 내게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그를 증오했다 
그러나 그리움이 더 컸다 
죽도록 미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없이 살아간다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 
한마디 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차리는 사람 
그리고 아무 말 없이도 그를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 

그는 내게 형제였고 
가족이었고 
거울에 비친 것 처럼 나와 똑닮은, 
그는 내 자신이었다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익숙한 공기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와 함께 있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를 용서했다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가 지나왔을 시간과 내가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며 바보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그때를 지나왔다 
...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둘 다 같은 어둠을 공유했다 
그 어둠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가야할지 몰랐다 
아니, 빠져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있는 한 그 어둠도 따스했다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전보다 더 투명해져갔다 

- 학교 그만 두고 뭐했냐? 
- 그냥... 뭐... 잤어 

내가 그렇게 죽지 못해 애쓰고 다니는 동안 넌 뭘했나 싶어 던진 질문에 
그는 그저 어제 먹은 저녁 식단 이야기하듯 덤덤히 대답했다 
그 말을 그때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 뭐 할거냐 이제 
-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2학년 마지막 날 옥상에서 나눴던 대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미래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나 또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게 문제,였다고 할 수는 없다 
나를 불안하게 했던 건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한 그의 태도. 

어째서였을까 우리가 함께 있게 된 후로 더 공허해진 것은 
그의 텅빈 눈을 마주하게 되면, 덜컥. 겁이 났다 
거리가 생겼다거나 어색해졌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형제 이상으로 친밀했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금새 훅하고, 사라져버릴 것처럼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개 영혼이 없는 것처럼 앉아 있는 그가 반응하는 건 오직 나의 말 뿐. 
무엇을 하자던가 무엇을 하라던가 하는 말에 거절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가 그랬다면 나 또한 그에게 그러했을 텐데 
그게 아직도 그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그 일 때문인 것 같아서 
그가 아직도 그 일에 묶인 채인 것 같아서 
나는 가끔 화가 나기도 했다 

이곳에 그를 묶어두고 있는 건, 아주 가느다란 끈 
차라리 내가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만나지 못한 나 때문에라도 이 세계를 살아가려고 했을까 
그 죄책감 때문에라도 더 이 생에 애착을 가졌을까 

그러다 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을 때면 
나는 일부러 그를 불러내어 엉뚱한 일들을 하곤 했다 
중학교 시절에나 했던 말도 안되고 목표도 없는 장난을 치거나 
목적 없고 무의미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 미친 듯이 서로 웃을 때에야 
그가 그곳에 나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과거로 돌아가야만 비로소 웃을 수 있었던 우리는, 그게 과거에 매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란 걸 몰랐다 


그때, 네가 나타났다 

너는 교실의 중심 같은 존재였다 
떠들썩한 사건에는 언제나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부산했고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언제나 시끄러웠다 
맨 뒷자리의 우리와 너 사이에는 백만광년쯤의 거리가 있었다 

그가 내 주위를 맴돌고 아직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때 
내게 다가와 그가 들고 있던 내 가방을 던지면서 날 나무라는 널 보고 
이건 무슨 황당한 오지랖인가 싶기도 하고 
어지간해서 나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던 몇년을 지나 
이렇게 똑바로 내 눈을 보면서 쨍쨍거리는 게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너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밀한 관계가 되는 일 같은 건 없었지만 
세계로부터 고립된 듯이 우리 둘의 공간에 존재하던 나는 
교실안에 있다보면 인지할 수 밖에 없는, 
때때로 거부하는 침묵마저 침범하는 
통통 튀어다니는 공 같은 네가 불편했다 

무슨 애가 저렇게 말이 많고 시끄러울까 
단순하게 감상을 요약하자면 그랬다 

누가 될지 얽히면 참 피곤하겠다, 라고도 생각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널 발견하기 이전의 나는. 

식곤증이 찾아와 검은 것은 활자요 흰 것은 종이이려니 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잠을 깨려고 고개를 비틀다 우연히 발견한 너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인지할 수 있을만큼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약간 멍한 표정, 응시하는 눈빛, 금새라도 포로록 날아가버릴 듯 긴장하고 있는 몸새 
그건 이전에 보아왔던 너와 달랐다 
그를 바라보는 네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제 할 일에 집중하는 오후의 자습시간 
짧게 네가 고개를 들면, 볼 수 있었다 
나는 때로 일부러 네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기도 했다 

왜인지 나는 그 순간을 몰래, 바라보는 걸 즐겼다 
그건 마치 내내 갖힌 벽의 틈새에 눈을 대고 기다렸다 순식간에 반짝,하는 섬광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도 그랬음에 틀림없다 

네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면 
그때껏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살며시 눈을 뜨고 
이미 사라진 네 눈빛을 따라 네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또한 
나는 몇번인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너와 그는 정말 몰랐을까 
서로의 꼭지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꼭 삼각형을 그리듯 다른 꼭지점에 그걸 지켜보는 내가 있었다는 걸 


그렇게 너는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단단히 막힌 창문의 틈새로 새어들어 어둠을 깨고, 
제가 거기 있다는 걸 강렬히 존재를 알리는 빛처럼 

나는 간절히 원했다 
네가, 그를 구원해주기를 
네 빛으로 그를 어둠에서 꺼내주기를 

그래서 그가 이곳에 머물게 된다면, 
그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곧 내가 바라던 일 

우리의 어둠이 끝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네게, 희미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 니가 안하니까 내가 선생님께 불려가잖아 

또다 

넌 어째서 그 앞에만 서면 그렇게 딱딱하고 퉁명스러워지는 걸까 
네가 그럴수록 그는 더 움츠러들텐데 
조금만 손을 내밀어주면 그가 움직일지도 모르는데 
몰래 바라볼 때는 그렇게 부드러운 얼굴이 되면서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거의 폭력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는 너와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마도 나만 알아볼 수 있을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는 듯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널 스쳐지나갔다 

그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일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을 란 것까지도. 
다만 마음에 걸린 건 
그가 지나가버린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네 뒷모습이었다 

평소보다 길게 바라보는 바람에 시선을 돌릴 타이밍을 놓쳤다 
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황급히 아닌 척 고개를 돌렸지만 너는 이미 눈치챈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을 빠져나간 후였다 

어쩜 그런 것에만 그렇게 빠른지 
스스로의 마음이나 그의 마음에는 둔하기 그지 없으면서 

나도 모르게 너의 뒤를 따라 나섰다 
너는 계단참 위쪽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째서 넌 그렇게 서툴었을까 

- 바보냐 

무심히 툭 던진 말에 놀랐는지 너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감정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네 얼굴을, 나는 처음 마주했다 
나를 발견하고는 몇번이나 표정이 바뀌던 너는 벌떡 일어났다 

나는 또 왜 그렇게 서툴었을까 

- 그 새끼는 그렇게 하면 몰라, 괜히 고남순이냐 

겨우 꺼낸 말이 그거였다니 

- 너 고남순 좋아하잖아 

너는 네 마음이 들킨 것에 당황했는지 황당하게 날 보다가 
곧 나를 외면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무심코 말했다 

- 내가 도와줄까? 

그제야 날 돌아보는 너의 눈이 커졌다 
의아한 듯 물음 가득한 눈에 피식 웃음이 났다 
부스스, 네 머리를 헤집어놓고 싶어졌다 

대신 한번 더 말했다 

- 도와줄께 

네가, 그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께. 





- 나 좀. 
- 어 

그가 내게 짧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너는 속이 타는 듯 한숨을 쉬며 손부채질을 했다 
조금 전에 책을 건네다 그와 손이 닿은 이후에 
내내 고개를 문제집에 틀어박고 있더니 그때까지도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게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네가 뾰족 눈을 세우고 말했다 

- 왜 

그와 함께 있는 너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내내 의식하고 움직이는 게 자꾸만 눈에 띄었다 
너는 알고 있었을까 
네가 그때 얼마나 뻣뻣하게 굳어있었고 
그와 대화할 때면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가 작아졌는지 
우리는 이미 2년째 한반이었고,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대체 그의 어떤 것이 널 그렇게 달라지게 했을까 

계속해서 날 노려보는 네게 나는 가만히 고개 저어 보였다 
그가 없을 때, 아니 그가 있을 때 조차 넌 내게 
그에게 하지 못하는 모든 말을 담았다가 내게 쏟아내는 것처럼 툴툴대며 못되게 굴었으니까 
굳이 또다른 갈굴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이강주와 고남순의 공통 고리를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말했던 거긴 하지만 
대체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다니 이번엔 뭔 미친 짓을 하려고 그러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 
다른 의도 없이 공부,하려고 그러는 거다.란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공부를 정.말.로.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내, 
진심으로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질문을 하면 매번, 넌 의외라는 듯 놀라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알고 있는 내용이면 짐짓 정선생님처럼 잔뜩 위엄을 부리며 설명하고 
모르는 문제 앞에서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사람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너는 왜 내겐 유독 퉁명스러웠을까 
네 마음을 알고 있는 내게 민망함을 감추려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더 질문거리를 찾아와 널 괴롭히곤 했다 
네 표정이 바뀌는 걸 지켜보는 게,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대답없이 가만히 너를 보는 내게 너는 다시 불만스럽게 물었다 

- 왜? 

그렇게 아무것도 숨기지 못했으면서 
어째서 그에게만은 잡히지 않을 새처럼 주위를 맴돌기만 했는지 

- 영화, 보러 가자 

네 눈이 또다시 커졌다 
넌 왜 내게는 매번 놀랐던 걸까 
내 말이 매번 그렇게 불편하고 예상치 못했을까 

- 고남순, 좋아하니까 그런 거, 같이 가자고 해. 

잠시 굳어있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네 머리를 한번 훅, 흐트러놓고 싶어지는 걸 참았다 

넌 웃는 편이 예쁘고 그와 함께 있을 땐 더 수줍게 웃었으니까 
지겨울 정도로 이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 굴었던 그는 
적어도 너와 함께 있을 때 희미하게 땅으로 내려앉곤 했으니까 

그는 지독하게 자신의 마음을 숨겼고 
그걸 알아차리기엔 넌 너무 둔했지만, 

나는 그 둘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너와 그를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 

읽어주고 기다려준 냔들 고마워. 모자라지만, 즐거이 읽어주길 바래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