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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그곳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그려넣은 듯이 앉은 그를 처음 본 인상이 어떠했는가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고남순, 이라는 그의 이름을 제대로 인지한 것은 
처음 한 공간에 있게 된 것으로부터 일년 넘게 지난 2학년 때였다 
그때까지 그는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가물한 동급생이었다 

그는 마치 화분에 담긴 식물이나 그 자리에 늘 놓여 있어서 인지하지 못하는 가구처럼 조용히 학교를 오갔다 
등교를 빼먹은 적은 없지만 결석을 한다고 해서 쉽게 알아차릴 존재감도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는 선생들에게마저 주목도 지적도 받지 않았다 
마치 공기같은 그가 교실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건 없었다 

그는 그저 거기 있었다 
마치 얇은 막이 그를 일상에서 분리시켜놓은 것처럼 그의 주변으로는 더 희박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때로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는 오후, 
식곤증으로 졸음이 밀려오는 지루한 순간에 문득 고개를 돌리면 
빛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그래서 그를 발견해내지 않으면 
세상은 그를 배제하고도 자유로이 굴러갔다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도 사춘기의 끓어오르는 에너지는 억눌러지지 않아서 
늘 교실은 떠들썩 시끄러웠고 분주하게 사건이 벌어졌다 
매일이 즐겁고 매일이 고통스러웠다 

대외적으로야 단순하고 오지랖 넓은, 남자애나 다름없다고 통하고 있었어도 
그래도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여자애였다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나이. 
둔하니까 그렇지,라고 착각하겠지만 사실 오지랖이 넓다는 건 예민함의 또다른 이름이다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불편해지거나 누군가 한명이라도 배제되는 걸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손이 닿는 한 모든 사람을 안으로 들여놓으려고 했다 
그게 때로는 내 한계를 넘는 일이라고 해도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고 해도 
아무도 소외되지 않도록 

그런 걸 남들은 오지랖이 넓다고 불렀다 

그때는 그런 천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반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이강주. 
그게 나였다, 그땐. 

유난히 분위기에 민감한 내가 일년 넘게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어쩌면, 그게 그가 얼마나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는가에 대한 반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인지한 건 영우 때문이었다 
조금 느리고 많이 착한, 영우 
영우를 괴롭히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까 
그정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 내 마음 한구석을 늘 괴롭혔다 
사람 좋은 척, 성격 좋은 척 하는 나의 한계는 겨우 여기까지 

내가 나선다고 달라지지 않을거잖아, 라고 합리화하는 비겁한 스스로가 진저리났다 
정작 나서서 말리지도 못할 거면서 나의 안테나 한쪽은 늘 영우를 향해 뻗어있었다 
제발 오늘은 별일 없기만을 

그래서,였다 그를 발견한 건 

괴롭힘이 심해질 때 말없이 대신 나서거나 영우를 다독이는 그가 자주 시야에 들어왔다 

저런, 애가 있었던가? 

그 존재를 몰랐다는 것에 당황했다 
대체 어떤 애이길래 아무렇지도 않게 나서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존재감을 지우는지 그때 알았다 

- 고남순, 알아? 

점심을 먹다말고 하경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경은 그런 애가 있었냐는 듯이 나를 오히려 빤히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좁은 세상에 사는 하경에게 물어본 내가 어리석은 거였지만 
그때의 난, 하경에게 물어보고 싶을 만큼 궁금했고 
하경 외에는 묻지 못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때로 그를 관찰,했다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남자애들과도 그다지 교류가 없어보이는 그는 늘 나른하거나 귀찮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훅하고 꺼질 것처럼 희미해지곤 했다 
그건 위태로움과는 거리가 먼, 그저 존재가 닳고 있는 자연스런 현상의 결과처럼 보였다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것처럼 에너지를 뿜어내는 시절에 
그만은 안으로 안으로 뭉쳐지다 결국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중력을 잃은 위성처럼 교실 외곽에서 자신의 궤도를 돌던 그는 2학기가 되고 교실의 중심으로 끌려들어왔다 
장난스럽게 시작된 회장 투표에, 나도 한 표 더했다 
조금 궁금했다 목소리는 어떨지, 회장이 된 그는 어떤 표정일지 
억지로라도 앞에 서고 남들에게 참견해야하는 자리에서 그는 다른 얼굴을 보여줄지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그날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부회장을 맡은 하경은 자주 그가 제대로 일하지 않아서 귀찮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하경의 불평을 흘려들으며 또 그를 찾아보곤 했다 
그는 늘, 자신의 세계에 오롯이 있었다 
언제나. 미묘한 무표정을 하고 





그 완벽해보였던 막이 깨지기 시작한 건, 그래, 박흥수가 전학온 후부터였다 

- 들었어? 고회장 일진이었대 
- 일짱이었다던데? 
- 아냐, 박흥수가 일짱인데 고회장 괴롭혀서 그거 피해서 도망온건데 다시 딱 걸린거래 
- 어쩐지 고회장이 셔틀하는 거 처음 봤다 했어 


수근수근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교실은 온통 그와 박흥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온갖 소문에 반 전체가 들썩여도 그는 마치 저와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했다 

여전히 수업시간에는 멍하니 창밖이나 허공을 바라보다 쉬는 시간이면 박흥수 근처를 맴돌았다 
박흥수가 아무리 그를 멸시하고 억지를 부려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고요하지는 않았다 
미세하게 감지되는 그 불안감이 나는 불안했다 


- 야, 너 고회장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말란 말이야 니 껀 니가 직접 들어 

학교가 파한 뒤 교문 앞에서 박흥수의 가방을 들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다짜고짜 다가가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박흥수에게 던진 건 
내가 몰랐던 그의 불안감이 전이되었기 때문이었을게다 
무덤덤하게, 원래 그래야했다는 것처럼, 박흥수의 곁에 있는 그에게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늘 보아왔던 그 완벽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왜인지, 불만스러웠다 

내가 집어던지다시피 안긴 가방을 박흥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그는 비웃음을 남기고 먼저 걸어가버린 박흥수를 따라가버렸다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한번 보지도 않은 그의 표정은 그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심함, 그리고 귀찮음 
그는 내 관심을 귀찮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도 참견하지도 못했다 


마치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박흥수 외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럴수록 소문은 더 크게 부풀려졌다 
급기야 학교 폭력에 관한 설문이 돌려지고, 
소문을 믿은 동급생들이 모두 박흥수를 지목했던 그 주의 어느 날이었다 


- 나쁜 놈은, 고남순이다 

오후였을거다 
아니 아침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옆 창문에서 빛이 쏟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 빛에 싸인 사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문장을 덤덤하게 읽었다 

그가 마지막 문장을 마치고도 한참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감히 그를 바라보거나 고개 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왜 였을까 
나는 그때 무슨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을까 
빛에 싸인 채 우뚝 서서 박흥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귀찮음이나, 나른함이나, 무표정이 아닌 
눈시울이 붉어진 그를 목.격.했.다. 

담담했던 목소리와 완전히 배치되는 격렬한 감정을 그의 얼굴에서 읽은 첫, 순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 후로도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 소문이 오래가기엔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기억하는 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건가 싶은 일들이 
원래 그땐 그래야하는 것처럼 연이어 벌어졌다 

그리고, 그는 어느샌가 박흥수와 형제처럼 붙어다녔다 
그다지 학교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제시간에 등교해서 
무심하고 표정없는 얼굴로 교실에 내내 앉아 있다가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자리를 지키다 느릿한 걸음으로 하교하는 
꼭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이 신기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어째서 저런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후로 그는, 아주 가끔, 희미한 미소를 띄우기도 했다 

파란만장했던 2학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또다시 그와 한반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벽에 걸어놓은 정물화처럼 2학년 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때때로 고개를 돌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거기에 있는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고 있자면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아서 
내가 방금까지 무엇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주위의 다른 아이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 그가 아주 가끔 웃기도 한다는 걸, 
저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어쩌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같은 반으로 이미 1년을 보내며 별별 일을 다 겪은 나 외에는 아마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이젠 모든 걸 다 이뤘다는 듯이, 
때때로 그가 사라져버릴 것처럼 가벼워진다는 것도 
그런 위태로운 순간을 몇번이나 목격한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고회장, 회람 걷어오래 

퉁명스런 나의 말에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동자가 맑은 걸 보면 졸고 있었던 것 같진 않은데. 


3학년이 되어도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회장에 또다시 그의 이름이 불렸고 
같은 반으로 배정받았던 길은혜가 부회장을 하겠다고 손을 드는 걸 보고 
투덜거리긴 해도 할일은 하던 하경과 달리 점수 때문에 하는 게 분명한 은혜가 맡게 되면 
그가 얼마나 피곤해질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말았다 

도와줘야지 라고 생각한 건 이번에도 나의 오산이었다 
여전히 나는 그의 평온한 일상을 깨는 귀찮은 존재일 뿐인가 싶었다 
왜인지 부회장이라는 직함하에서는 회장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외에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바로 지금처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느슨한 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 니가 안하니까 내가 선생님한테 불려가잖아, 내가 이런 거까지 챙겨야 돼? 회장은 너잖아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오히려 화를 내버렸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낸 것이 더 민망해서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선 나를 보고 
그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았어, 내가 걷을테니까 

무심하게 그가 나를 지나 교탁으로 걸어가는 걸 돌아보지도 못했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처럼 잠시 섰다가 바보같은 스스로를 속으로 욕하면서 돌아서는데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스쳤다 
박흥수가 티내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라도 멍하니 있던 스스로를 들킨 건가 싶어 당혹한 마음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애써 감추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 끝 계단참 위쪽에 걸터앉아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 바보냐? 

언제 왔는지 박흥수가 계단에 앉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아까 멍해진 나를 본 건가 싶어 당황스럽고 
그걸 굳이 따라와 뭐라고 하는 건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외면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박흥수가 말했다 

- 그렇게 하면 저 새끼는 절대 몰라, 괜히 고남순이냐 

대꾸하지 않고 지나쳐버리려는데 
중얼거리는 말이 내 귀에 천둥보다 크게 들렸다 

- 너 고남순 좋아하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도 그 눈만은 진지했다 
살짝 비웃는 듯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 내가 도와줄까? 

말하며 씩, 웃었다 
일 년 넘게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박흥수가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정면으로 얼굴을 본 게 처음인 것 같았다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고남순도 웃으면 이렇게 갑자기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순진해보이려나 

나는 잠시 상황에 맞지 않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 도와줄게, 

빛이 들지 않는 창 아래 계단참에 서서, 말했다 
그때까지, 내겐 고남순의 친구, 였던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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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빠서, 가만히 이야기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어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채 써서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냔들이 있을 것 같아서 후다닥 쪄봤어 
프롤로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나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다음엔 이번만큼 텀이 길진 않을거야, 그러지 않게 하려고 해 
재미없을지도 몰라 이 이야기는, 그것도 미리 미안해 기대한 냔들이 있었다면... 

읽어줘서 고마워 냔들아, 늘 기다린다고 말해주는 것도.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