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낯설다. 

무표정한 얼굴이, 사실은 당황하고 있다는 걸 안다 
무심한 듯 보이는 눈길로 천천히 거울 속의 여자를 관찰한다 
몸을 이리저리 돌리자 자신을 따라 같이 움직인다 


어색해... 


저도 모르게 가늘게 눈을 찌푸린다 
이렇게 밝은 색의 옷을 마지막으로 입어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 여름 교복이었나 아마. 

자취를 시작하면서 
가끔 입는 흰 티셔츠나 그것보다도 더 가끔 입는 흰색 스키니진을 빼고는 
줄곧 무채색이나 짙은 색 옷만 입어왔다 
'작업'이 많은 특성 상 먼지나 때타지 않는 옷이 우선이었다 
자주 빨래할 시간도 없고 그런 것 일일이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니 

저 거울 속의 낯선 여자가 입고 있는 것 같은 옷은, 
만들어서 남에게 입혀본 적은 있되 
스스로를 위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는 종류의 것이다 


조심스럽게 치마 자락을 주름을 따라 쓸어본다 
화이트에 가까운 파스텔톤의 밀크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은 보드라운 감촉 
손짓에 따라 살랑하고 흔들리는 통에 
순간 제 마음까지 살짝 흔들려버린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야.. 


고개를 흔들며 도로 탈의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 나나야! 안돼! 

하....? 

돌아보니 큰 눈을 깜빡거리며 두 손을 꼭 모은 세이가 
저를 간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아까는 안 입어 보겠다는 걸 억지로 억지로 들려서 입어 보라고 탈의실로 밀어넣더니만.. 
이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버리고 싶은데 또 왜 이러나.. 


- 그거 벗게? 
- ....왜 

쪼르르 다가오더니 나나를 중심으로 뱅그르 돈다 

- 좋다, 딱 좋아, 역시 내가 생각했던대로야 
- ... 뭐가 

혼자 만족스러운 듯 중얼중얼하면서 
제 주변을 정신 없이 빙빙 도는 걸 지켜보다가 결국 먼저 묻는다 

- 나나야 

묻는 말에는 대답도 없이 세이가 나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확, 하고 얼굴을 나나 앞에 들이댄다 
큰 눈이 글썽글썽하는 것이 무섭다 
서슬에 놀라 멈칫 뒤로 물러설 뻔 한다 

- 나나야 

다시 한번 세이가 제 이름을 부른다 

- ...뭐야 말해 
- 이거 하자. 
- 어? 
- 이거 해, 이거 진짜 예뻐. 이거 꼭 사야 돼 너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옷을 입을 일이 어디 있다고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이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간절하게 두 손을 꼭 붙든 채로 
나나의 팔을 마구 끌고 다시 거울 앞에 세운다 

- 봐봐, 너 지금 진짜 예뻐. 


예... 쁘 다고? 
이게... 그런가...? 

다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소녀도 여자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 서 있는 듯 보이는 모습 
손질하기 거추장스러워서 내버려둔 까만 생머리에 
자신이 언젠가 입혔던 플로라의 데뷔곡 의상이랑 비슷한 크림색 원피스가 
평소에 자신에게 있으리라곤 한번도 생각 못했던 
얼핏 보면 약하고 부드러운 면을 드러내서 스스로 낯설다 

나나보다 몇 배나 더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랑스럽게 나나의 모습을 함께 거울로 보던 세이가 
다시 한번 꼭,꼭 눌러가며 말한다 

- 니네 누구니? 걔.. 아리? 걔보다 니가 백배는 더 예뻐 진짜루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나나가 그제야 세이를 바라본다 

- ... 아리?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 세이의 표정이 구겨진다 

- ... 무슨 일이야? 
- ... 별 거 아냐 

입술을 삐죽이며 토라진 표정의 세이를 보자 좀 귀엽다 



... 이거였구나 한국까지 와서 우리 집으로 온 이유 



- 나나야! 
- ... 민세이 
- 오랜만이야! 

그날 밤 생글거리면서 포르르 뛰어온 세이는 성큼 나나의 팔짱부터 꼈다 
반사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든 나나가 슬며시 팔을 풀었다 

- 여기서 뭐해 
- 어어? 나 일년만에 보는 건데 안 보고 싶었어? 
- ... 별로 

윤설찬이랑 같이 지내더니 애가.. 안 부리던 끼를 부린다.. 

- 나나야 저기 있지 
- ... 말해 
- 나 재워줘 

이게 목적이었던 건가... 
보통은 한국에 들어오면 본인 집이나 친척집이나 가는 거 아니었나 
생각하다 보니 세이의 가족이 모두 한국에 없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세이의 가족이 있는 뉴질랜드에 설찬이 따라간 거였는데.. 

- 윤설찬은. 
- .... 몰라 

설찬의 이름을 꺼내자 더이상 말을 않겠다는 듯 얼굴이 굳어버렸다 

또 싸운건가... 

나나는 한숨을 폭 쉬면서 세이가 땅바닥에 내려놓고 그때까지 깔고 앉아 있던 걸로 추정되는 가방을 들었다 

- 일단 들어가자 
- 응! 좀 있으면 은하도 올거야, 맥주 사오라 그랬어! 

집에 들어가서 천천히 사정을 물어봐야겠다 생각했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잡지 못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대체 아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중간에서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툴툴거리는 걸 보면.... 


- ... 민세이... 질투도 해? 
- 아 아니야! 무슨!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애써 뭔가 변명하려고 어버버하는 세이를 보고 
피식 웃으며 도로 거울 속 자신을 본다 

조금 전보다 익숙해진 것도 같다 
세이 말대로 어울리는 것도 같고 
가만히 어깨선을 맞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본다 

그런 나나를 보던 세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나나야, 넌 없어? 
- 응?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돌린다 

- 그렇게 막 떨리고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랑 얽히면 싫고 막 그런 사람, 있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를 본다 
뭔가 중요한 질문인가 보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누구에게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기를 망설이지 않는,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용감하고 강해지는 건 세이. 

일단 한 번 믿게 된 사람은 늘 똑바로 바라보는 맑은 눈과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나서는 무모함 
원하면 주저없이 손을 잡아주는 솔직함 

그 솔직함에, 그 용기에, 구원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포기했던 거야 그땐. 

바보. 

나나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 얽히면 싫은 사람.... 
근데 그 얽힌 사람이 너인거 같은데 민세이. 
... 그래도 내가 널 싫어할 수는 없잖아 


- 글쎄 

대답을 회피한다 
뭔가 더 묻고 싶은 걸 참는 표정으로 조금 더 나나의 옆모습을 빤히 보던 세이는 
이내 푸르르 풀리더니 그때야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마구 뒤진다 

- 나나야! 그 옷 내가 사줄께! 
- 어?... 아니야 나 별로 
- 나 니네 집에 얹혀 지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니가 나랑 놀아준거니까 내가 살게! 

세이가 집에 얹혀 지내는 것도 맞고 
오늘 꼭 쇼핑을 같이 가자고 해서 
플로라 활동도 끝난 김에 그간 밀린 휴일 근무 좀 찾아 쓰자 싶어 휴가를 낸 것도 맞는데 
맞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세이는 이미 포르르 계산대로 달려가 재빨리 결제 카드를 내밀어버린다 
그리고 조금 걱정스런 표정인 나나에게 자랑스럽게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린다 

- 나 어제 저작권료 들어왔지이~ 

종종 MIN이라는 필명으로 설찬의 앨범에 작사가로 참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러니 저작권료를 받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 ... 나 이거 입을 일도 없는데 
- 진짜 그거 예쁘단 말이야 데이트 할 때 입구 가! 
- .... 그런 거 없어... 
- 그럼 회사 갈 때라도 입든가! 

절대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세이가 강하게 못박는다 

회사야말로 이런 거 입고 갈 일이 어디 있다고..... 
나나는 한숨을 쉬며 한 발 물러서서 다시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본다 


그런가. 
....괜찮은가. 



문득, 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껏 한 손에서 떼어놓지 못했던 휴대폰을, 
무의미할 걸 알면서 다시 확인해본다 

... 여전히 연락은 없다 


지금 그는 아마도 공연 리허설 중. 

아마, 바쁘겠지만 
그래서이겠지만....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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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쓰려고 했던 8편의 절반,뿐이지만 
그동안 약간 바빠서 - 시간을 꽤 끌어버린 것 같아서 일단 반이라도 올리고 가... 
나머지 절반은 얼른 또 쪄오도록 할게 .. 

그리고... 지난편의 세이는... '쿵!' 하고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등장만하고 뚝..-_-;; 어설프게 낚아서 미안; 
나나랑 세이는 좋은 친구였을 것 같아 아마도. 그래서 나나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고.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