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해태와 삼천포와 윤진이가 (그리고 칠봉이가) 등장하지만, 

아직은 어느 쪽으로도 커플링을 할 수는 없는, 1994년 4월 1일. 




[강의 中] 




"컴퓨터 시스템은 많은 양의 데이터를 갖고 숫자, 문자, 기호 형태의 데이터에 대한 계산, 관리 등의 자료처리를 수행한다, 

 이때 컴퓨터에 의해서 수행되는 작업을 Information processing 즉, 정보 처리라고 하며,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컴퓨터를 EDPS, 또는 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이라고 부른다." 



열린 창문으로 아직은 조금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어온다 

바람에 따라 여유로운 재잘거림이 섞여 들린다 

이야기의 내용은 들리지 않는 낮고 높은 소리가 섞인 목소리들이 

이즈음이면 이미 반쯤 졸고 있는 강의실을 휘돌아 사라진다 


무심히 한쪽 귀를 톡 쳐서 저 여유로운 목소리들을 털어낸다 

대신 단조롭게 반복되고 있는 교수님의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빠른 속도로 받아쓴다 


책상위에 펼쳐진 노트는 두 권, 

하나는 속기에 가까운 녹취를 위한 노트, 빠른 글씨가 흘림체로 가득하고 

다른 한 권은 색색의 볼펜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내용도 나중에 정리해서 옮겨질 거다 



"... 그라니께 수업이 끝나면 바로 가는겨" 

"... 알았다, 근데 밥은?" 

"니는 지금 그게 중요허냐" 



속닥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받아쓰고 있던 노트에서 시선을 든다 

서로를 향해 약간 기울여 맞닿기 직전인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나마나 놀러갈 궁리를 하고 있는 거겠지. 


눈 앞의 2인조와 한 집에 살고 있긴 하지만 말을 섞어본 적은 거의 없다 

식사 시간 식탁에서 마주치는 정도가 전부. 

가끔 2층 거실에서 하숙집 딸인 나정과 왁자지껄한 수다가 벌어지는 것도 같았지만 

그 자리에 자신이 나가본 적은 없다, 그보다 급한 일은 훨씬 많았으니까. 

바깥 세상에 도통 관심없는 윤진이 그래도 저 2인조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편인건 모두 

수다스럽기 그지 없는 저 둘이 짧은 식사 시간에 마저 투닥투닥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아서였다 

어지간히 말이 많은 둘 덕에 그저 옆에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원하지 않은 정보를 알아버렸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붉은 단풍색 점퍼 차림은 소위, 삼천포. 

사람 셋은 단숨에 맨손으로 제압하게 생겨놓고는 정작 가끔 하숙집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꺼리는 듯 멈칫거려서 약간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 겁낼 만한 건 하나도 없게, 털털하게 생긴 얼굴인 주제에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가끔 들으면 참으로 예민하고 피곤한 스타일이다 싶은 녀석. 


그리고, 

그 옆에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소위, 해태. 


.... 사실 저 녀석이 더 피곤하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영역을 침범해들어와버린다 

그것도 넉살 좋게, 그래서 멈칫하는 상대가 나쁜 것처럼, 본인은 편하고 남은 불편하게.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어제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기도 했고 식욕도 없어서 아침을 거를 생각이었는데 

제 방문을 두드리며 정대만이, 나와서 밥먹어라, 어쩌고 소리쳤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제 밥을 그렇게 챙겼다고, 

아침마다 하숙집 아저씨께 끌려나와 밥먹는 것도 곤욕인데 오늘은 너까지 난리냐 싶어서 한 소리 해주려고 방문을 벌컥 열자 

비스듬히 제 방문 앞에 기대있다가 제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는 먼저 휙 내려가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한 숟가락만 떠라' 

잠 모자란 기색이 역력했던 나정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밥이고 자시고 한마디 해줬을텐데. 


무엇보다, 대체 왜 저를 '정대만'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덕분에 '싫다'라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하숙집에서 자신의 호칭은 '정대만'으로 정해져버렸다 

농담이었는지, 스스로는 재치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즐거우면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저런 무신경함이 싫다 

싱긋거리는 저 여유로운 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자신은 안간힘을 써서 버티고 있는 서울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강 사는 꼴이 보기 싫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푹 빠져지냈지만 용납받았던 건 여수여고에서는 늘 성적 상위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서울로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지만 

아니 대학에 합격하고도 여자애 혼자 무슨 서울이냐며 은근한 반대에 부딪혔다 

게다가 고교시절까지는 용납되던 서태지에 대한 애정은 서울 상경 반대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통제할 수 없는 서울에 가면 과연 제대로 생활은 하겠느냐 

심지어는 서태지 집에 가서 사는 거 아니냐,는 말도 안되지만 부모님은 흔히 할 수 있는 과대망상에 이르렀고 

합격증을 받아놓고도 실갱이를 한참이나 한 후 


일정 수준의 학점 - 그게 거의 장학금 수령 기준에 필적하는 점수란 걸 그땐 몰랐는데 - 을 유지하되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바로 여수 소환, 

이라는 조건에 동의하고 나서야 겨우 서울행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부모님 걱정은 한치도 어긋남이 없어서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연희동에 가서 살다시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수 소환 조건은 어기지 않으려고 강의 시간에는 고3으로 돌아간 듯이 집중하고 

연희동 가서 앉아 있기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누구는 이렇게 필사적이고 

누구는 저렇게 대강 살아도 해피하고 


흥. 


흐트러짐없이 고정된 머리를 쓸어넘기는 유유자적한 뒷통수를 째려보고 

다시 잠깐 놓친 수업을 따라잡는다 


  

"컴퓨터는 사람이 사용하는 자연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계산하라, 출력하라와 같은 명령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게는 너무 어렵고" 



- 자연어 : 계산하라, 출력하라, 인간의 언어 

- 기계어 : 컴퓨터 - 명령어 



사각이며 노트에 빠르게 받아쓰고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작게 듣고 싶지 않은 단어를 말한다 


"야, 정대만이" 


울컥, 짜증이 난다 


이제는 하다하다 수업시간에까지 저렇게 부르다니 

자신에게는 엄연히 이름이 있는데, 대체 저를 뭐로 보는 건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싶어서 모르는 척, 못 들은 척 하고 있는데 

무신경한 건지 제 위주인건지 대답 없는 저에게 묻는다 


"너 스프레이 있냐" 



허.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 '마지막 축제'에 간다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다가 

막차를 놓쳐 집에 못 내려가서 발칵 집안이 뒤집힌 후에 단발로 뎅겅 잘리고 

겨우 이정도나 길러온 머리를 보고 스프레이 있냐, 같은 소리가 하고 싶을까 

어쩜 저렇게 제 위주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째릿,하고 노려보고 만다 



"디지고 싶냐" 



그동안 쌓였던 것까지 싹 다 몰아서 나직하게 속삭여주자 

당황한 듯 금새 고개를 돌려버린다 

중얼중얼 삼천포와 주고 받는 말이 어쩔 수 없이 들린다 



"야 니가 좀 물어봐야" 

"으응 싫다 무섭다" 

  


머시매들이 저렇게 약해빠져서 어따 쓴다냐 

애초에 저럴거면 건들지를 말든가 

우습기 그지 없다 


역시 세상엔, 태지 오빠 밖에 제대로된 남자가 없는가보다 

오늘은 연희동에 태지 오빠, 나타나줄랑가. 











[강의 後] 




『소리쳐 주던 예쁘게 웃었던 아름다운 너희들의 모습이 좋았어 』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소리나지 않게 흥얼거리면서 

책장 정중앙 칸의 한켠에 고이 모셔둔 스크랩북을 꺼내 넘겨본다 

여느 때와 같이 하교길에 들린 연희동에서는 별다른 수확은 없었고 

곧 앨범이 나올거라는 소문만 무성한데 도무지 추가로 공개되는 소식은 없어서 

이젠 자다가 누가 툭 건들기만해도 쉼없이 부를 수 있을만치 외워버린 

1집과 2집 앨범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 외에는 낙이 없다 



하아. 



연희동에서 허탕치고 돌아와 앉은 저녁 식탁에서 

이건 꼭 다 먹으라는 나정의 말 때문에 조금 무리해서 먹었더니 영 속이 더부룩하다 

사실 아예 처음부터 덜어놓고 먹거나 남겼어도 그만인데 

어째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보이던 나정이 어머님이 안 계신 대신 차린 밥이라 해서 거절하지 못했다 

조금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살짝 두드린다 

꾹 막힌 게 영 내려가질 않는다 



『함께 기뻐하고 모두 다같이 웃고 서로를 걱정했던 우리들만의 옛 추억들』 


타박타박 답답한 명치께를 누르면서 

이미 외워버린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고 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이어폰의 노래 밖에서 섞여 들린다 



똑.똑.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쉬었다가 다시 들리기를 반복하는 소리에 이어폰을 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고 있다 

꼼짝않고 앉아서 언제까지 계속 되나 가만히 듣고 있다 



"자냐?" 



익숙한, 조금 다른 목소리에 도로 이어폰을 끼려다 멈칫 한다 

모르는 척 해야하나 잠깐 망설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카세트를 내려놓고 

다시 일정하게 두드렸다 멈추는 방문을 연다 



"뭐냐" 



안의 소리를 들으려는 듯 문에 약간 기대있던 해태가 문이 열리자 화들짝 뒤로 물러선다 

한심하다는 듯 해태를 올려다보자 윤진의 눈빛에 우물쩡하던 해태가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낸다 



"내려와 통닭 먹어야, 어무이가 사오셨당게" 



겨우 그 얘긴가 싶어 뚱하니 보다 문고리를 도로 쥔다 



"됐어" 



문을 닫으려는데 해태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닫히려는 문을 막아 버티고 선 해태를 올려다본다 

한참을 올라가야 겨우 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얼굴에 닿는다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이다 



"뭐여" 

"니 혹시..." 



혹시 뭐? 



인상을 잔뜩 쓰고 삐딱하게 노려보자 

정말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기까지 한다 



"니 혹시... 혹시 말이다" 



아 뭔데. 



"....니 혹시... 나한테 화났냐?" 


"하?" 



한참 망설이는 걸 기다리다가 지쳤다 싶을 때쯤 

우물쭈물 건네는 말에 맥이 탁 풀려 어이없는 외마디를 내뱉고 만다 



"아니... 어째... 나가 말을 걸어도 피하는갑다 싶고 

 나가.. 뭐 잘못혔냐 지금도 나 때문에 불편혀서 안 내려온다고 허는 건감" 



이건... 뭐라고 불러야할까... 

말을 안 받아주면 화가 났다고 받아들이는 건 

세상의 모든 일이 제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줘야하나 

아니면 자기 탓인가 생각해보는 걸 보면 심성은 착하고만 생각해야하나 


한쪽 눈을 찌푸리고 가만히 올려다본다 



"나가 니한테 화가 왜 난디"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 싶어서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톡 쏘는 질문에 잠깐 멋쩍은 듯 고개를 한번 꺾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기... 혹시.. 나가 니를.... 정대만이라고" 



거슬리는 단어가 기어이 등장하고 말았다 

그래! 너 때문에 모든 식구들이 날 정대만이라고 부른다, 좋냐?! 



확하고 째려보자 움찔하면서도 혹시나 윤진이 문을 닫아버릴까 싶었는지 물러서진 않는다 



"..아야.. 싫으면 말을 허지..." 



그게 좋은 사람이 어딨냐! 

너 바보데? 그렇게 생각이 안 돌아가냐? 

가시내 한테 머시매 이름을 붙이는데 좋아할 년이 세상에 어딨대!? 



"... 죽고 잡냐" 

"... 가시내.. 말 독한 거 보소" 

"뭐라?" 

"아...긍게.. 나가 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당게... 니가 원체 말이 없은께.. 안 어색하고 좋잖여 

 그라고 니도 나 해태라고 부르면 되잖냐" 



내가 왜 널 그렇게 불러야하는데! 

애초에 니가 말 안 붙였으면 되는 거잖아 

네 그런 서슴없음이 싫다고! 

별명을 붙여서까지 말을 걸려고 하는 쓸데없는 세심함이 싫어!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를 홱 돌리고 

도로 문을 닫으려고 힘을 주자 굳이 문을 다시 붙든다 

남자애가 버티고 선 문을 뺏기엔 힘이 좀 모자란다... 


쯧. 



"... 할 말 더 남은겨?' 



눈이 마주치자 저를 뚫어지게 보다 슬쩍 시선을 피한다 

늘 목소리도 크고 청산유수인 것처럼 굴더니 

저렇게 우물쭈물 배배 꼬기도 할 줄 아나 싶다 



"..... 그리 싫었는가, 여자아들은 그런 거 싫어한단거 몰랐구만, 

 나 때문에 불편한거면 미안헌게 마음 풀고, 나와서 좀 먹어야. 나가 이제 다시는 그리 안 부를랑게" 



... 사실 뭐 그거 때문에 마음 상했던 건 아닌데 

그래서 안 먹는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저녁 많이 먹어서 배도 부르고 

굳이 나가서 북적거리는데 앉아 있기도 귀찮고 

그냥, 그런 건데. 



".... 니 내 이름은 아냐?" 

"윤진이 아녀 조윤진이." 



너무 쉽게 흘러나오는 이름에 오히려 질문한 쪽이 당황한다 

예상치 못하게 호출당한 이름이 제 것인데도 낯설다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친해지고 싶어서' 부른 호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는듯 쉽게 이름을 말하고는 다음 말을 기다리던 해태가 

빤히 올려다보기만 하는 윤진의 침묵을 못참고 결국 먼저 부른다 



"아부지가 일부러 사오신건데 나와서 거들기라도 해야 안 쓰겄냐, 내려가자고, 친구" 



그러고는 그제야 멋쩍은 듯 슬쩍 문에서 물러선다 

자유로워진 문을 닫으려고 쥐고 있던 손잡이에 살짝 힘을 줬다가, 


음... 



도로 힘을 풀어 놓는다 



"길목 막고 섰으면 어찌 내려 가라는겨? 안 비키냐" 



손을 휘젓자 후다닥 문에서 비켜선다 

벽에 딱 붙어서 눈치보는 해태를 힐끔 한번 올려다보고 고개를 절레 젓고는 먼저 성큼 1층으로 향한다 

뒤쪽으로 사사락 따라붙는 걸음 소리가 들리지만 돌아보진 않는다 

제 표정이 어떨지 그리고 뒤쪽의 표정이 어떨지 모르겠어서, 

혹시나 웃고 있을까봐 

혹시나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까봐 



그래 뭐, 정대만이라고 부르진 않았으니까, 

오늘은 봐준다. 






++ 





"코치님은?"

"먼저 무라카시든데. 나증이는?"

"몸 안 좋다고, 방에 들어갔어"

"그래? 그럼 다 내려온기제?"

"어... 윤진이는 부르러갔고, 형님은 곧 오실거고"

"그럼 먼저 묵고 있으까?"

".... 잠깐만."


동그랗게 눈 뜨고 있는 삼천포에게 손짓하고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선다

치킨을 향해 이미 손을 반쯤 뻗었던 빙그레가

일어서는 칠봉을 보고 고개를 살짝 젓더니 손가락을 만지작 하고 만다

미안한 듯 한번 돌아보고 슬쩍 웃어준 칠봉은

살며시 안방 문으로 다가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내 퉁명스런 대답이 들린다


"누구데"


대답을 듣고서야 칠봉은 살짝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어둑어둑한 방에는 이미 이불이 깔려있고

평소의 활기차고 다정한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채로 누웠다

옆에 앉아 토닥이고 있던 성코치가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어쩐지 열어서는 안될 문을 연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해야할 것 같은 말을 꺼낸다


"저...통닭 같이 안드세요?"



자신의 뜬금없는 말에 잠깐 침묵하던 아주머니가 기운 없이 대답한다



"됐다, 우리 마이 무따, 너거나 마이 무라. 오늘 아줌마가 밥도 몬 챙기 주가 미안타."



생기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약간 콧날이 시큰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힘들어하시면서 정식 하숙생도 아닌 저의 밥을 걱정하시다니... 

마음 한 켠이 몽글해진다

칠봉은 드러내지 않고 싱긋 웃으며 밝게 대답한다



"아휴... 아니예요 저희 오늘 디게 잘 먹었어요. 나정이가 얼마나 잘 챙겨줬는데요."


"어마 우리 딸래미가? 아따 철들었네잉."



칠봉의 대답에 성코치가 신기하다는 듯 말한다

칠봉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역시 나정도 오늘 하루종일 이상했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여느 때와 같으면서도 보통 때와 달리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저녁 식사 때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지만

굳이 뭐라고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밥 먹으라고 여러 번 권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 보아온 나정에게 그런 건 어울리지 않는데.

아니 이 신촌 하숙 전체는 그런 어두움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일까.


하루종일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서로가 말하지 않는 위태로움

그러니까 아주 어릴 적 살얼음판 위를 조심스레 걷고 있는 것 같았던 그날처럼,

집안 가득 어둠이 덮고 있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굳은 아빠의 얼굴과 차가운 엄마의 얼굴 사이에서 웃어야했던 그때처럼,



언제 처음 그걸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꼭 묻는 말

엄마는 뭐하시니,

아빠는 뭐하시니,

어디에 계시니

이런 질문들에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저는 아빠랑 살아요.

엄마는 가끔 만나요.


그런 대답을 꺼내는 순간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는 단숨에 어색해지고 말았다

이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때부터 늘 그랬다

자신이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누가 잘못했던 것도 아닌데

그저 그 일은 벌어졌을 뿐인데


그렇게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꼭 자신이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만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어색했고 그렇다고 죄지은 것처럼 어색해지는 것도 싫었다


누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해버리는 버릇이 생긴건 그런 불편한 분위기를 몇번이나 겪고 난 뒤였다

자신이 웃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해버리면 더이상은 다시 묻지 않았다

최소한 그 주제를 조심스럽게 피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정면 돌파하는게 편하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어차피 엄마는 저 안 온 것도 모르실 거예요, 라고 허세부리는 저에게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야단쳤다

엄마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별 소리 말고 어서 가서 삐삐치고 오라고 

굳이 전화카드를 쥐어주며 억지로 공중전화 박스로 내몰았다


우리 부모님 이혼 하셨거든, 그래서 지금 여기서 난 죽때리고 있는 거지, 라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언제나처럼, 기대했던 대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대신에 

그저 바나나나 돈까스를 먹어본 것과 비슷한 말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신기하다 받아들여준 것도

이상하게 이 집에서는 그게 당연한 것 같았다


허세나 가장 같은 건 다 필요없이 툭,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는데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이 집 식구들은 살며시 스며들듯 넘어와주었는데


칠봉은 자신이 지금 경계선 밖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엄마와 아빠의 이혼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아 뭣하냐 얼른 가서 닭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머뭇거리고 선 저에게 타박하는 성코치의 말에

헤헤 웃으며 대답하고 문을 닫으려다 멈칫 한다



주제넘는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만에 마산을 다녀오시느라 차를 오래 타서 힘들어 그러시는 거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동안 이 집에 드나들면서 느꼈던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슬픔이 느껴져서 칠봉은 어쩐지 한마디라도 거들고 싶어진다

그게 무슨 쓸데없는 말이라고 해도 기운내시라는 마음을 담아서 한마디쯤은 하고 싶어서,



"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도로 문을 빼꼼히 열고 새삼스레 인사를 한다

누워있던 어머니와 성코치의 의아한 눈과 마주치자 기껏 마음 먹었던 결심이 흔들리려고 한다

칠봉은 몇번인가 마른 입술을 떼었다 삼키다 겨우 어색하게 목소리를 낸다


"어머이..... 어..무이..?.. 어머이.."


제가 들어도 어색한 말투에 누워계시던 어머니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돈다

무겁게 짓눌린 것 같던 공기가 약간 가벼워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해드릴게 이것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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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들이 각 캐릭터의 이야기를 잘 풀어줄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미 지나가버린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설명해주진 않겠지..

칠봉이나 윤진이나 살짝 살짝 보이는 표정이나 말투만으로도 아가들이 어떤 마음일까 생각나고 그래서...

다시 나오지 않을 이야기니까 상상해서 한번 써봤어.. 뭔가 사족스럽네 흐음...

그래도 읽어준 냔들 고마워 ㅠㅠ 흑 ㅠㅠ 

퀄리티가 좀더 좋아져야하는데.. 그러기엔 애들 떡밥이 너무 없었다고 변명할래...



하아 이제 하루만 지나면 금요일이다!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