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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이와 해태가 대부분 등장하고 다른 애들이 짧게 등장하지만,
아직은 모두 그냥 하숙집 친구인, 1994년 6월 어느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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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7일 전산학개론 기말고사일 오후]
초여름 햇살이 제법 따갑다
백양로를 도도도 뛰어나오다가 정문 앞에서 잠깐 멈춘다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펴고 다시 확인한다
《 시험 끝나고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보자 》
전산학개론 시험 직전 마지막으로 정리 노트를 보느라 분주한 제 책상에
불쑥 들어온 손이 붙이고 간 쪽지다
무슨 말이냐고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시험이 시작해버렸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와보니 쪽지의 주인은 언제 나갔는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한번 쪽지를 확인하고 일단 정문 앞 건널목을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버스정류장 뒤쪽 가로수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타박타박 걸어가서 툭하고 건드리니 그제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그리고 찌뿌둥한 듯 어깨를 한번 돌리고는 시계를 확인한다
"아따, 몇시냐 이게, 니 시방까지 시험 본겨? 진짜 마지막까지 썼구만
나는 당최 쓸 말이 없던디, 대체 이 시간까지 뭘 쓰고 있었단가?"
시험 3시간을 꽉 채우고 나온 건 사실이지만,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
내가 시험을 오래 본 게 아니라...
"...니가 아는 게 없었것지."
"근가"
헤헤 웃는 걸 빤히 보다 결국 먼저 묻는다
"근데, 무슨 일이여,"
"얼래? 오늘 같이 가기로 했잖어"
무슨 말인가 싶다
약간 멍청해진 표정을 보고 해태가 다시 설명한다
"엄니 생신 말이다, 선물 사러 가기로 했잖어 오늘 시험 끝나고"
그제야 주말에 오갔던 대화가 기억난다
영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던 하숙집 어머니가 온천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에
2층 거실에 모여있던 하숙생들끼리 무슨 일 있는 것인지 걱정하다
그나마 하숙생 중에 가장 가까워보이는 쓰레기에게 물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더랬다
결과적으로야 그저 어머님이 기운이 좀 없으신거라는 정도의 도움이 안되는 정보만 받았지만
그때 스치듯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어무이 곧 생신이신데 저래 안 좋으시가, 그때까지 괜찮아지실란가 모르겠다"
라는 말을 놓치지 않은 해태가
정확한 날짜를 기억 못하는 쓰레기를 들들 볶아 지난해 수첩을 뒤지게 해서 날짜를 알아낸 뒤
그래도 선물이라도 사야되지 않겠냐고 주동했던 게 지난 일요일.
그리고 걷은 돈으로 선물을 사러가자고 했던 게, 그래 오늘이었다.
"근디, 워째 니 혼자냐?"
"워메, 어째 나가 혼자단가, 니 시방 여 있잖어"
"근게, 왜 니랑 나랑 둘이냔 말이다"
선물을 사기로 모의했던 건 신촌하숙을 아예 임시 거처로 삼은 듯한 칠봉을 포함 하숙생 5명 전체였는데
어째서 지금 이 버스정류장에는 해태와 자신만 서있는 건지 모르겠다
"니랑 나 말고 누가 또 있단가?"
윤진의 질문에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해태가 미간을 찌푸린다
"빙그레는?"
"갸는 의대 아녀, 의대는 시험 기간이 요상하더만, 지금 수업 중이제"
"그라믄 칠봉이는?"
"갸는 오늘 일본 갔고, 어제 니도 안 들었냐."
아....
"나증이야 딸인께 처음부터 안 끼웠고, 또 누구? 누구 궁금혀? 삼천포?"
반갑지 않은 이름을 듣자 윤진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됐으야, 어디로 갈건디?"
"종로, 거기에 금붙이 가게 겁나 많드만"
"... 버스 번호는 알어?"
"11번일겨, 아 저기 오네"
버스 번호를 확인한 해태가 냉큼 뛰어가 버스를 잡는다
뒤따른 윤진이 요금을 내고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자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섰던 해태가 손짓을 해서 부른다
나란히 앉아야하는 빈 자리를 확인하고 윤진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자 해태가 더 크게 손짓한다
"어이, 여 자리 있는디 정대..."
채 해태의 말이 맺기도 전에 빛의 속도로 날아온 윤진이 손을 한껏 위로 뻗어 낚아채듯 해태의 입을 막아버린다
"조용히 혀라 뒤지고 싶냐"
나지막히 협박하는데 갑자기 출발한 버스에 휘청한다
한 손으로 천장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던 해태가
나머지 한 손으로 휘청이는 윤진을 안쪽 자리로 밀어넣는다
"같은 데 가믄서 굳이 따로 앉아 갈 게 뭐다냐, 어차피 같이 내릴 것인디"
싱글싱글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 해태를 모르는 척 바깥 창문만 본다
보통 때라면 한마디쯤은 더 걸었을텐데 의외로 잠잠해진 해태는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쉰다
그 소리에 힐끔 옆을 쳐다본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얼굴이 방금 전 저를 밀어넣을 때와 달리
세상 괴로움 다 짊어진 표정이라 조금 신경 쓰인다
삐삐라면 보나마나 여자친구와의 일일 거고
저 녀석이 여자친구에게 지지리도 못하는 상등신인 것도 익히 알고 있고
그러니 지금도 멍청한 이유로 또 틀어졌을테고
몇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에게 더 말하기도 피곤하지만,
그래도 역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해태가 먼저 지친 목소리로 묻는다
"친구야, 대체 이건 뭔 일일까."
"...뭐가 말여"
"...나는 대체 어째야할지를 모르겄다"
".. 그러니께, 또 니가 뭘 잘못혔겄지."
"아니랑게, 무슨 일이나 있었고 이라믄 차라리 다행이게, 이번엔 진짜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당게"
여전히 100% 해태의 잘못일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표정으로 보니 좀 마음이 약해진다
"아무 일도 없는디, 뭐가 문제여 대체"
"아무 일도 없는 거시 문제지,
하루에도 열두번씩 울리던 게 내 삐삐 아니냐, 근데 이게 딱 멈췄당게?
이봐라 시험 보고 나왔는데도 메세지가 하나도 없잖여,
지금 왔어도 벌써 몇통이 왔어야 정상인디, 이럴 리가 없어
이게 오늘만 이런 것이 아니여, 벌써 3일째랑게, 나가 지금 미치것냐 안 미치것냐?
당췌 뭔일이냐 이거슨?"
얘기만 들어도 찌릿하고 흐르는 이 불길한 예감을 이 등신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가만히 보자니
그래도 아직 이정도 정보만 듣고 확인 사살은 너무하겠지 싶다
"그라고, 딴 거 또 뭐 이상한 건 없었는가?"
"없어야, 전이랑 똑같당게, 하루에 한 번 전화하면 꼬박꼬박 잘 받고, 말도 잘 혀
아 무신 여름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에 힘이 좀 없기는 했었는디 물어보니 괜찮다고 혔고"
이... 등신같은 머시매 좀 보소...
"...임박이구마잉, 이번에야말로"
조용히 읊조리는 윤진의 말에 해태가 놀라 펄쩍 뛴다
"니는 뭔 그리 불길한 소리를 당연하게 해쌌냐,
지난번에 느그들이 말한대로 전화도 혔고 선물도 보냈당게, 문제없다고 했으야"
하아....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버스 옆자리에 앉아서
신촌서 종로까지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가게 되었는지
오늘의 일정을 점지했을 신이 원망스럽다
".... 염병... 이 등신아 나가 몇 번을 말한대, 전화나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랑게
마음, 니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나가 그리 말을 혔는데도 못 알아쳐먹고, 이라고 지랄을 한다 아주 지랄을 해
니 그 머리로 대체 대학은 어찌 들어온것이여? 시험봐서 들어온거 아니제? 잔디 깔았냐?"
"아따, 이 가시내 말하는 것 좀 보소, 말이면 다냐"
"안 그러게 생겼냐 시방. 못 알아쳐먹는 것도 작작 좀 혀라 제발"
버스에서 큰 소리를 낼 수도 없고
한껏 목소리를 낮춘채 씩씩거리며 한참 눈싸움을 하다
해태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한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제 나가 안 챙긴 게 뭐가 있당가
하루에 한번 꼬박꼬박 걱정 말라고 안부전화 넣어
일주일에 한번 어찌사는가 알린다고 학보 보내 편지 써
서울서 지 좋아하는 거 나오믄 일등으로 사서 보내
더이상 뭘 어찌케 챙긴대, 나 같이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혀"
해태의 말을 꾹 참고 끝까지 들은 윤진은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 구제불능이구만"
"뭐여?"
"이제는 더 뭐라 하기도 답답혀서 딱 한번만 더 말할라니 똑바로 들어라잉.
긍게 니가 뭘 한 게 중요하잖타고 몇 번을 말하냐 대체
나야 니랑 한 집 사니 니가 과팅을 하는지 락카페를 댕기는지 모르고 싶어도 알지마는
순천 있는 니 여자친구가 서울서 니가 뭣하고 쳐싸돌아댕기는지 알 게 뭐대?
같은 여자로서 이런 말 속상허지만, 니가 바람이 나도 알 방법이 없제,
나가 니 여자친구헌티 연락을 넣겄는가, 대체 어째 알 길이 있겄는가 말여"
눈을 끔뻑이며 윤진의 말을 듣던 해태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멍청한 목소리로 묻는다
"... 혹시 니가 말혔냐?"
윤진의 주먹이 확,하고 올라가려다 부들부들 떨면서 도로 내려간다
"디지고 싶냐?"
"근디 그럼 왜 저러는 거시여 대체"
"하이고 ... 귀찮아 죽겄네... 마음이라고 마음"
"근게, 대체 그 마음이 뭐단 말여"
윤진은 순진하다 못해 이제 멍청해보이기까지 하는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똘망똘망 저를 쳐다보는 해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결국 해태가 스스로 깨닫는 걸 기대하기를 포기한다
".... 니 말여, 니가 하루에 한번 전화 넣고,일주일에 한번 편지 보내고, 서울서 선물 사보내면
그걸로 다 되어부렸다.. 생각한 거 아녀?"
"어?"
"이정도믄 됐다, 이만큼 했응게 충분허지, 이리 생각한 거 아니냔 말이다."
"...."
윤진의 말에 머리를 한대 얹어맞은 것처럼 멍해진 해태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해태를 보고 다시금 한숨을 내쉰 윤진이 조목조목 설명한다
"여자들은 딱 안당게, 니가 뭔 맘으로 그라는지 딱 보기만 해도 알어야.
그딴 식으로 하는 거는 의무지, 더이상 애정이 아니란 말이여
니가 암만 전화 넣고 선물 보내고 쌩 난리를 쳐도
이걸로 됐겠지, 하는 게 보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이 말이여
아파서 목소리가 안 좋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등신이 세상에 어딨대?
괜찮다고 혀서 아 그란가,하고 지나가믄 그게 모르는 사람이랑 뭐가 다르냔 말여
무슨 일 치루듯이 그라믄 니 여자친구가 암만 착혀도 그걸 견딜 수 있을리가 없제
옆에서 보는 나도 열불이 나는구먼"
".... 그런거냐"
"... 등신, 니가 지금 여서 왜 연락이 없는가, 고민하는 것 부터가 잘못된거여
글케 급하믄 연락을 먼저 혔겄지 아니믄 지금 순천을 내려가고 있든가"
윤진의 말에 충격받은 듯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멍하니 몸을 맡기고 흔들리던 해태는
몇 정거장이나 침묵속에 지나친 후에야 겨우 묻는다
"... 나가 어쩌면 좋겄냐"
남의 연애사 따위 헤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싶고
이미 충분히 힌트도 줄만큼 줬다 싶지만,
"...니는 어쩌고 싶은디, 헤어질 맘 있는겨?"
"... 그런 거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응게 나는 여적지."
이런 맥아리 없는 대답 이라니
뒷통수를 한대 후려갈겨주고 싶지만 꾹 참는다
"그라믄 좀 적극적으로, 잉? 적극적으로 말을 허라고
니 입 있고 목소리 나오고 사지 멀쩡헌디 그걸 뭐 그리 아깝다고 아끼고 쌌냐
징후가 보이믄 바로 해결해야하는 거제, 그리 밍기적거리다간 큰일난다 니"
"...그런가"
솔직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이미 늦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긴 하지만.
풀죽은 해태를 보니 차마 거기까진 말 못하겠다
"일단 말이라도 혀봐, 헤어지기 싫으면 니 쪽에서 매달리는 거 말고 방법 있간?"
힘없니 고개를 끄덕인 해태가 새삼스럽게 부스스 웃는다
"아따, 근디 니 말 허삐 잘하는구마잉,
첨에 나는 니가 한 문장 이상은 말 못하는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당게
대체 그동안 말 하고 싶어서 어찌 참았당가, 대단허다"
그제야 오늘 좀 수다스러웠나 싶어서 모르는 척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뭐 요즘엔 그래도 꽤 말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새삼 변명하기도 뭐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 뒷통수를 보고 있던 해태가 피식 웃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 근디 니는 삼천포랑은 대체 언제 풀 것이여?"
"... 그 이름 꺼내지도 말어야,"
"... 고만 풀지 그르냐, 갸도 충분히 당했응게, 이자"
"나가 당한 거에 비교하믄 그건 새발의 피여,
글고 어찌 피해자가 사과를 해야하는가, 엄연히 가해자가 따로 있는디"
"그게 글키는 하다마는..."
"시방 니 같은 방 쓴다고 편들라는 것이면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어야, 나 확 내려버릴 것잉게"
나즈막히 으르렁거리듯 위협하는 윤진의 말에
기세에 몰린 해태는 잠시 침묵한다
"... 나가 니 말대로 여자 맴은 당최 모른다마는"
"....."
"삼천포랑은 한이불 덮은지 넉달이나 지났잖냐"
해태가 또다시 삼천포의 이야기를 꺼내자
윤진은 정류장도 확인하지 않고 내리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의자에서 튕겨져 나가려는 윤진을 팔을 뻗어 차단한 해태는
씩씩거리는 윤진의 팔을 조심스레 끌어 당겨 다시 자리에 앉힌다
"잠깐만 좀 들어주라, 여가 어딘줄 알고 내리려고 그르냐 가시내 성격하고는 참말로"
"...."
해태의 긴 다리가 나갈 길을 막고 있는 통에
윤진은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확 돌려버린다
"나가 지내봉게, 아가 눈치도 없고 씰데없이 고집도 쎄고, 예민하고 그라기는 해도 본성이 못된 놈은 아니여,"
".. 하고 싶은 말이 뭐여"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부하는 티를 팍팍 내는 윤진의 질문에,
해태가 조금 포기한 듯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그냥 쬐깐한 틈만 주라 이거제,
아가 순진혀서 조금만 잘해주면 금새 풀린당게, 시방은 고집 땜시 강짜 부리는 건게로"
"... 누가 잘못 혔는디, 누가! 지가 잘못하고 사과도 받고, 아주 잘나셨네"
"나도 알제, 삼천포가 백번 잘못 혔지, 암만.
그란디 갸가 니한테 사과를 할래도 틈이 있어야 하지 않겄냐
이대로 4년을 쭉 지낼 수는 없잔여"
"나가 왜 그 사정까지 챙겨줘야 되는겨? 잘못한 놈이 썽을 내는디?"
대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윤진의 차가운 말에
난감한 듯 몇 번 이마께를 긁적긁적한 해태가
큼, 하고 멋쩍게 짧은 헛기침을 한다
"나는 이 집이 좋구만, 서울 어무이, 아부지도 좋고
쓰레기 형님도 좋고, 나정이도 그레도, 삼천포도, 글고 니도 좋아야
같이 지내게 되서 참으로 좋다, 나는 참말로 운도 좋다 만날 생각한당게"
"...."
"긍게 말여, 한번만 니가 틈 좀 보여주라,
나는 니도 천포도 모두 잘 지냈으면 좋겠은게"
대답 없이 창밖만 내다보는 윤진의 뒤통수를 보다
역시 괜한 소리를 했나싶어 아까만큼 깊은 한숨을 쉬고 만다.
"이번 정류장은 종로 3가, 종로3가 입니다."
마침 흘러나온 안내방송을 듣고 후다닥 팔을 뻗어 벨을 누른다
해태의 움직임을 힐끔 보고 윤진도 해태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다
"어디로 가야 되냐?"
버스 정류장 건너편 거리에 펼쳐진 귀금속 가게 행렬에 압도된 듯
잠깐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보던 두사람은 일단 길을 건넌다
"저그, 가보까?"
거리에 늘어선 상점 중에 모퉁이에 바로 보이는 가장 큰 규모의 상점을 가리키며 묻는다
슬쩍 바깥 진열장을 확인한 윤진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젓더니 성큼성큼 걸어간다
당황해서 뒤따라오는 해태를 확인도 않고
진열장에 놓여있는 보석들만 보면서 몇개 상점을 지나쳐 쭉 걸어가더니
한 상점 안으로 쏙하고 들어가버린다
"..말이나 하고 가든가, 같이 사러 온 건디 어찌 그리 혼자 가냐"
부랴부랴 따라들어온 상점에서
어느새 진열장 앞에 서서 점원에게 이것저것 꺼내달라며 가리키고 있는
윤진의 뒤에 붙어서 작게 속삭이자 귀찮다는 듯 슬쩍 한 발 떨어진다
"조용히 좀 허고 있어봐라 헷갈링게"
진심으로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에 멋쩍게 물러선다
점원이 꺼내준 물건을 이리 저리 끼어보고 빛에 비춰보고 하던 윤진이 손짓으로 해태를 부른다
"이거 어떠냐"
"... 내 의견이 무슨 소용 있단가"
"그래서, 어떠냐고"
좀전에 비키라고 한게 서운해서 입술을 삐죽이며 슬쩍 고개만 들이민다
왼손가락에 끼우고 들어 보여주는 반지가 윤진의 손에는 너무 크고 무거워보인다
게다가 금가락지라면서 검정 물결 무늬라니,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슬쩍 제 손에 끼고 있는 가느다란 금반지를 보고 만다
"너무 어두운 거 아녀?"
과하지 않느냐는 말 대신 겨우 골라서 의견을 냈는데
제 말은 뒷등으로도 안 듣는 듯 도로 반지를 낀 손을 내리더니 퉁명스럽게 묻는다
"... 그럼 니는 뭐가 좋은디?"
윤진의 말에 스윽하고 진열장을 살펴보다가
단정한 모양의 금가락지 하나를 가리킨다
"... 저거 좋구만 심플하고"
해태가 고른 반지를 본 윤진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 어무이 드릴 거람서, 니 시방 커플링 고르냐, 하여튼 안목하고는"
그럼 애초에 왜 물어봤냐! 싶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한발 물러선다
"이걸로 허자, 이게 젤 난 거 같구만"
좀전에 저에게 보여준 반지를 결국 집어들어 보여준다
니 맘대로 해라 싶어서 퉁명스런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 친구분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윤진에게서 반지를 받아든 점원이 생글거리며 말한다
"여자친구 아녀라!"
"그런 거 아닌데요"
동시에 버럭, 부정하고 나니
어째서 니가 기분이 나쁘냐, 싶어 서로 노려본다
난처한 듯 둘을 바라보던 점원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반지를 집어든다
"이렇게 단번에 알아보는 분은 잘 없는데,
요즘 이 디자인이 인기거든요. 서태지와 아이들 아시죠? 서태지씨도 끼고 나왔던 반지예요"
허허.
그러면 그렇지, 암만.
그냥 고를리가 없지, 어째 그 이름이 안나오는가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간 볼을 붉힌 윤진에다, 그 뒤에 서서 안 들리게 입모양으로만 잔뜩 궁시렁거리는 해태를 보며
자신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걸까 당황한 점원이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애쓴다
"젊은 분들도 그렇지만, 이게 심플하면서도 여기저기 매치하기도 좋고 화려하게 포인트도 되고 그래서
어머님들도 많이 골라가세요. 잘 고르신거예요."
암만해도 그런 이유로 고른 것 같지 않다는게 문제지만
그래도 점원이 잘 산 거라고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영 이상하진 않겠구나 생각한다
재빠르게 반지를 포장해서 내민 상자를 받아든 윤진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한다
응? 하고 고개를 갸우뚱 되묻자 인상을 쓰면서 입모양으로 '계산'하고 말한다
아!
주말에 걷은 돈을 제가 갖고 있던 걸 잊었다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자
윤진은 벌써 상점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어깨에 맨 배낭 끈을 풀썩 고쳐메고 후다닥 따라잡고 보니 버스정류장 방향이 아니다
"어디 가냐?"
해태의 질문에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인다
"카드 써야제"
"잉?"
하아...
윤진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줘야하느냐는 듯 한숨 쉰다
"선물만 달랑 드리믄 그게 뭔 의미가 있냐,
마음을 전해야한당게 당췌 알아듣질 못하는구만
일단 카드 사서 니가 대표로 한번 써봐야, 나가 봐줄 터이니"
뭔가, 분명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미묘한 기분은,
말로는 못 이긴다 했던 삼천포의 푸념이 떠오른다
하여간에 우리 집은 여자들이 너무 강하당게
잠깐 망설인 새 이미 멀어진 윤진을 뒤따라 뛴다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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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9일 오전]
"암만해도 다시 써야제?"
후다닥 밥을 먹어치우고
2층에서 제일 넓은 해태와 삼천포 방에 모여 앉은
네 명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인다
'느그 엄마한테나 그래라!'
나정의 강렬한 타박을 듣고 나니
그간 철없이 굴었던 것도 죄송스럽고
《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늘 감사드립니다. 》
라는 이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문구로는
도저히 그걸 다 갚을 수 없다는데 전원이 동의했지만
막상 새로 쓰려고 하니
빈 종이가 허허벌판보다 더 넓어보여서
누구도 선뜻 펜을 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숨막히는 몇분이 흐르다
결국 해태가 펜을 덥석 집어든다
"어머니 설겆이 하시는 동안 후딱 써서 갖다놔야 한게,
일단 나가 쓸터이니 이상한거 있으면 말혀"
부담에서 벗어난 세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 어머니 생일 축하드립니다! 》
생각보다 고운 글씨로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간다
사각이며 써지는 글을 따라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이던 삼천포가 조용히 웅얼거린다
"철없이 굴어가 죄송타고 좀 써라"
"그려"
가만히 위에서 부터 글을 다시 읽어보던 빙그레가
하유... 하고 한숨 쉬며 덧붙인다
"엄니도 안 참으시고 우리 막 패부리셔도 되는데 말여,
우리한테는 집에 계신 엄니나 마찬가진건디"
중얼거리는 말들을 허투루 듣지 않고
후다닥 정리해서 써내려가던 해태가
혼자 피식 웃더니 줄을 바꿔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 윤진이가 골라서 약간 다크할 수도 있지만 서태지도 하는 거라니깐 한번 믿어보려구요. 》
"디지고 싶냐, 니"
확 붉어진 얼굴로 험악하게 으르렁 거리는 윤진을 모른 척
쓰려던 문장을 완성한 해태가 평범하게 묻는다
"니도 엄니께 하고 싶은 말 있을 거 아녀, 안할겨?"
글에 집중하는 듯 고개 들지 않고 던지는 말에
찔린 듯 잠깐 입술을 깨물다 윤진이 조용히 덧붙인다
"내방에 암때나 들어오셔도 된다고 혀, 죄송허다고"
"오케이"
일필휘지로 날려서 편지를 완성한 해태가
급하게 편지와 반지 상자를 챙긴다
"후딱 내려가자잉, 그레 니가 망 좀 봐라"
++
[1994년 6월 11일 새벽]
펜을 놓고 쭉, 하고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편다
책상 가득 널려있는 전공 책이며 복사한 참고 도서들
몇번이나 수정하느라 빨간 펜으로 그은 레포트 초안들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기말고사의 마지막 레포트를 끝내버리고 주말을 맞으려고 했던게
결국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피곤과 모자란 잠 때문에 뻐근한 어깨를 몇번 돌리다가
찬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싶어 부스스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한다
헉.
깜깜한 어둠 속에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형체를 발견하고
소리도 못 낼만큼 놀라서 번쩍 뒤로 물러선다
2층 거실의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형체를
바깥 가로등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불빛에 찬찬히 살펴보니 사람인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형체를 가만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파 옆에 놓인 스탠드 불을 켠다
그제야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불빛에 놀란 듯 고개를 든다
"여서, 뭐하냐"
"... 어... 친구, 나왔는가, 여직 안자고 뭐했냐"
"니야말로 집에 안 갔냐, 오늘 시험 끝나자마자 순천 간담서"
윤진의 말에 해태가 힘없이 웃는다
그러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도로 웅크리고 만다
그때야 탁자위에 놓인 큰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거시 뭐냐?"
"...."
아무 대답없는 걸 보니 괜한 관심인가 싶어
무슨 일인지 더 물어보려다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나, 물마실 건디, 니도 갖다주랴?"
퉁명스런 윤진의 말에 고개를 든 해태는
그제야 초점을 맞추고 윤진을 보다 머뭇거린다
"친구야, 나, 어쩌냐."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 싶다
모르는 척 해버릴까 하다가 머뭇 다가와서 옆에 앉는다
"뭐가 말여"
"....나 진짜 헤어질라는 갑다"
한숨을 푹 쉰 해태가 가만히 상자 뚜껑을 열어보여준다
"이거, 헤어지잔 소리 맞제?"
슬쩍 고개를 들어 상자 안을 살펴본다
인형이며 쿠션, 저도 해태가 사서 부치는 걸 본 적 있는 푸른 하늘 CD와
갖가지 작은 선물들, 편지, 액자.
아마도 해태와 여자친구의 시간이 가득할 상자.
"... 이것만 온겨?"
"....."
"전화는 해봤고?"
"... 귀신같이 안 받대.. 어제까진 암일도 없는 양 받더만... 오늘 나가 이걸 받았는지 어째 알았는지
암만 전화하고 삐삐쳐도 연락이 안되어야"
후우.
왜 윤진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해태가 푸념처럼 중얼중얼하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어찌 그리 독하당가, 이래 보내기만 하믄 끝이래? 나는 워쩌라고,
전화 한번 받아주는게 그리 어려운가, 잉? 니 좀 말해봐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뭐가 그리 어려운겨, 니도 말이다 삼천포 한번 봐주는게 그리 어렵냐
여자들은 어째 그래 하나같이 독한겨 대체"
가만히 듣고 있던 윤진의 미간이 꿈틀한다
그리고는 쭈구리고 있는 해태의 등짝을 후려갈긴다
- 퍽.
"염병, 지랄하고 자빠졌네"
"왜 이러냐!"
앞으로 고꾸라지고 불꽃이 보일 정도로 센 충격에
맞은 자리를 만지면서 윤진을 올려다본다
"거서 갸 이름이 대체 왜 나온당가 글고,
니가 지금 한 게 뭐 있다고 이렇게 쭈그리고 있는 거여
최소한 왜 헤어지는지는 직접 들어야할 거 아녀,
니가 무슨 생각인지 말도 못해보고 그냥 포기할겨?
나가 니가 상 등신인줄은 진즉에 알았다면 이정도로 끈기없는 놈인 줄은 몰랐당게
이딴 놈을 삼년이나 좋다고 만난 니 여자친구가 불쌍타 불쌍혀 어?!"
갑작스런 욕설에 버럭 화를 내려던 해태가
멈칫하고 윤진의 말을 곱씹다가 단조로이 묻는다
"전화도 안 받는당게, 내려갔는데 안 만나주면 어쩌냐 괜히 찌질한거 같고 그렇잖여,"
"...등신아 니가 지금 자존심 챙길 상황이여?
글고 연예인을 좋아하다가 그만둬도 헤어지는 예의란 게 있는 법이여,
니는 지금 그 가시내랑 삼년을 만났담서, 헤어지잔다고, 연락 안 받는다고, 아 네 그럽시다. 냉큼 그럴겨?
최소한 그 시간에 대한 예의라도 지켜야할 거 아녀,
할 말은 다 해보고 무릎은 꿇어보고 매달려보고 그러고도 헤어지든가 말든가"
무엇을 겹쳐 보았는지 씨근거리기 시작하는 윤진을 물끄러미 보던 해태는
천천히 앞에 놓인 뚜껑을 닫고 상자를 두 손에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지금 순천 갈랑게,
아침에 엄니한티 말씀 좀 잘 드려주라"
제가 말을 퍼붓기는 했지만
정말로 단번에 순천에 내려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윤진은
조금 놀라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 글고 나가 니 말 들어줬응게, 니도 내 부탁 한번 생각해주고."
무슨 말인가,하고 윤진이 저도 모르게 갸우뚱하자 턱 끝으로 제 방문을 가리킨다
그 방에 자고 있을 삼천포를 떠올린 윤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도 니 말 듣고 지금 틈새 찾아 바늘 꽂으러 강께, 니도 바늘 꽂힐 틈 좀 줘야"
대답없이 뚱해있는 윤진을 보다 힘없이 웃고는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내려간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않고 앉아 있던 윤진은 잠시 후에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 옆의 스탠드를 보고 섰다가 불을 끈다
확,하고 다시 2층에 어둠이 덮친다
어쩐지 마음이 답답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도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 물 마시고 정신 차려야겠다.
아침이 밝기 전에 어서.
==================
아따 길다.....;;;;; 읽느라 고생 많았어~
안그래도 전라도 사투리랑은 거리가 먼데;; 이상해도 이해해줘 ㅠㅠ
윤진이는 평생 전라도 사투리 쓰겠지? ㅠㅠ
그냥 해태가 편지를 쓰고 윤진이가 반지를 골랐고 편지 쓸 때 윤진이가 옆에 있었다길래
어머 둘이 같이 반지 사러갔나봐~ 하고 쓰기 시작한 뒷이야기였는데...
축구 경기 볼때 삼천포가 윤진을 깨우는 걸 보니 약간은 풀린 것 같고
해태도 그 상자를 받고 나서 그저 그렇게 포기하진 않았을 거 같아서
윤진이는 한번은 해태에게 제대로 왜 니가 잘못 했는지 말해줬을 거 같고
해태도 한번은 삼천포랑 화해해달라고 윤진이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다 넣고 나니 너무 길어졌네;;
난해하지만 그래도 읽어주는 냔들, 댓글 달아주는 냔들 늘 고마워~
7화 예고 보고나니 대체 언제 금요일이 오는 건지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다 ㅠ_ㅠ
떡밥도 없으니 비루한 팬이 할 수 있는 건 상플밖에 없네 ㅠㅠ
=
윤진이와 해태가 대부분 등장하고 다른 애들이 짧게 등장하지만,
아직은 모두 그냥 하숙집 친구인, 1994년 6월 어느 날들.
=
[1994년 6월 7일 전산학개론 기말고사일 오후]
초여름 햇살이 제법 따갑다
백양로를 도도도 뛰어나오다가 정문 앞에서 잠깐 멈춘다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펴고 다시 확인한다
《 시험 끝나고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보자 》
전산학개론 시험 직전 마지막으로 정리 노트를 보느라 분주한 제 책상에
불쑥 들어온 손이 붙이고 간 쪽지다
무슨 말이냐고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시험이 시작해버렸고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와보니 쪽지의 주인은 언제 나갔는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시 한번 쪽지를 확인하고 일단 정문 앞 건널목을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버스정류장 뒤쪽 가로수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다
타박타박 걸어가서 툭하고 건드리니 그제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그리고 찌뿌둥한 듯 어깨를 한번 돌리고는 시계를 확인한다
"아따, 몇시냐 이게, 니 시방까지 시험 본겨? 진짜 마지막까지 썼구만
나는 당최 쓸 말이 없던디, 대체 이 시간까지 뭘 쓰고 있었단가?"
시험 3시간을 꽉 채우고 나온 건 사실이지만,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
내가 시험을 오래 본 게 아니라...
"...니가 아는 게 없었것지."
"근가"
헤헤 웃는 걸 빤히 보다 결국 먼저 묻는다
"근데, 무슨 일이여,"
"얼래? 오늘 같이 가기로 했잖어"
무슨 말인가 싶다
약간 멍청해진 표정을 보고 해태가 다시 설명한다
"엄니 생신 말이다, 선물 사러 가기로 했잖어 오늘 시험 끝나고"
그제야 주말에 오갔던 대화가 기억난다
영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던 하숙집 어머니가 온천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에
2층 거실에 모여있던 하숙생들끼리 무슨 일 있는 것인지 걱정하다
그나마 하숙생 중에 가장 가까워보이는 쓰레기에게 물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더랬다
결과적으로야 그저 어머님이 기운이 좀 없으신거라는 정도의 도움이 안되는 정보만 받았지만
그때 스치듯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어무이 곧 생신이신데 저래 안 좋으시가, 그때까지 괜찮아지실란가 모르겠다"
라는 말을 놓치지 않은 해태가
정확한 날짜를 기억 못하는 쓰레기를 들들 볶아 지난해 수첩을 뒤지게 해서 날짜를 알아낸 뒤
그래도 선물이라도 사야되지 않겠냐고 주동했던 게 지난 일요일.
그리고 걷은 돈으로 선물을 사러가자고 했던 게, 그래 오늘이었다.
"근디, 워째 니 혼자냐?"
"워메, 어째 나가 혼자단가, 니 시방 여 있잖어"
"근게, 왜 니랑 나랑 둘이냔 말이다"
선물을 사기로 모의했던 건 신촌하숙을 아예 임시 거처로 삼은 듯한 칠봉을 포함 하숙생 5명 전체였는데
어째서 지금 이 버스정류장에는 해태와 자신만 서있는 건지 모르겠다
"니랑 나 말고 누가 또 있단가?"
윤진의 질문에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해태가 미간을 찌푸린다
"빙그레는?"
"갸는 의대 아녀, 의대는 시험 기간이 요상하더만, 지금 수업 중이제"
"그라믄 칠봉이는?"
"갸는 오늘 일본 갔고, 어제 니도 안 들었냐."
아....
"나증이야 딸인께 처음부터 안 끼웠고, 또 누구? 누구 궁금혀? 삼천포?"
반갑지 않은 이름을 듣자 윤진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됐으야, 어디로 갈건디?"
"종로, 거기에 금붙이 가게 겁나 많드만"
"... 버스 번호는 알어?"
"11번일겨, 아 저기 오네"
버스 번호를 확인한 해태가 냉큼 뛰어가 버스를 잡는다
뒤따른 윤진이 요금을 내고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자 뒤쪽에 자리를 잡고 섰던 해태가 손짓을 해서 부른다
나란히 앉아야하는 빈 자리를 확인하고 윤진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자 해태가 더 크게 손짓한다
"어이, 여 자리 있는디 정대..."
채 해태의 말이 맺기도 전에 빛의 속도로 날아온 윤진이 손을 한껏 위로 뻗어 낚아채듯 해태의 입을 막아버린다
"조용히 혀라 뒤지고 싶냐"
나지막히 협박하는데 갑자기 출발한 버스에 휘청한다
한 손으로 천장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던 해태가
나머지 한 손으로 휘청이는 윤진을 안쪽 자리로 밀어넣는다
"같은 데 가믄서 굳이 따로 앉아 갈 게 뭐다냐, 어차피 같이 내릴 것인디"
싱글싱글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 해태를 모르는 척 바깥 창문만 본다
보통 때라면 한마디쯤은 더 걸었을텐데 의외로 잠잠해진 해태는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내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쉰다
그 소리에 힐끔 옆을 쳐다본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얼굴이 방금 전 저를 밀어넣을 때와 달리
세상 괴로움 다 짊어진 표정이라 조금 신경 쓰인다
삐삐라면 보나마나 여자친구와의 일일 거고
저 녀석이 여자친구에게 지지리도 못하는 상등신인 것도 익히 알고 있고
그러니 지금도 멍청한 이유로 또 틀어졌을테고
몇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에게 더 말하기도 피곤하지만,
그래도 역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해태가 먼저 지친 목소리로 묻는다
"친구야, 대체 이건 뭔 일일까."
"...뭐가 말여"
"...나는 대체 어째야할지를 모르겄다"
".. 그러니께, 또 니가 뭘 잘못혔겄지."
"아니랑게, 무슨 일이나 있었고 이라믄 차라리 다행이게, 이번엔 진짜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당게"
여전히 100% 해태의 잘못일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표정으로 보니 좀 마음이 약해진다
"아무 일도 없는디, 뭐가 문제여 대체"
"아무 일도 없는 거시 문제지,
하루에도 열두번씩 울리던 게 내 삐삐 아니냐, 근데 이게 딱 멈췄당게?
이봐라 시험 보고 나왔는데도 메세지가 하나도 없잖여,
지금 왔어도 벌써 몇통이 왔어야 정상인디, 이럴 리가 없어
이게 오늘만 이런 것이 아니여, 벌써 3일째랑게, 나가 지금 미치것냐 안 미치것냐?
당췌 뭔일이냐 이거슨?"
얘기만 들어도 찌릿하고 흐르는 이 불길한 예감을 이 등신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가만히 보자니
그래도 아직 이정도 정보만 듣고 확인 사살은 너무하겠지 싶다
"그라고, 딴 거 또 뭐 이상한 건 없었는가?"
"없어야, 전이랑 똑같당게, 하루에 한 번 전화하면 꼬박꼬박 잘 받고, 말도 잘 혀
아 무신 여름 감기에 걸렸는지 목소리에 힘이 좀 없기는 했었는디 물어보니 괜찮다고 혔고"
이... 등신같은 머시매 좀 보소...
"...임박이구마잉, 이번에야말로"
조용히 읊조리는 윤진의 말에 해태가 놀라 펄쩍 뛴다
"니는 뭔 그리 불길한 소리를 당연하게 해쌌냐,
지난번에 느그들이 말한대로 전화도 혔고 선물도 보냈당게, 문제없다고 했으야"
하아....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버스 옆자리에 앉아서
신촌서 종로까지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가게 되었는지
오늘의 일정을 점지했을 신이 원망스럽다
".... 염병... 이 등신아 나가 몇 번을 말한대, 전화나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랑게
마음, 니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나가 그리 말을 혔는데도 못 알아쳐먹고, 이라고 지랄을 한다 아주 지랄을 해
니 그 머리로 대체 대학은 어찌 들어온것이여? 시험봐서 들어온거 아니제? 잔디 깔았냐?"
"아따, 이 가시내 말하는 것 좀 보소, 말이면 다냐"
"안 그러게 생겼냐 시방. 못 알아쳐먹는 것도 작작 좀 혀라 제발"
버스에서 큰 소리를 낼 수도 없고
한껏 목소리를 낮춘채 씩씩거리며 한참 눈싸움을 하다
해태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한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제 나가 안 챙긴 게 뭐가 있당가
하루에 한번 꼬박꼬박 걱정 말라고 안부전화 넣어
일주일에 한번 어찌사는가 알린다고 학보 보내 편지 써
서울서 지 좋아하는 거 나오믄 일등으로 사서 보내
더이상 뭘 어찌케 챙긴대, 나 같이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혀"
해태의 말을 꾹 참고 끝까지 들은 윤진은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 구제불능이구만"
"뭐여?"
"이제는 더 뭐라 하기도 답답혀서 딱 한번만 더 말할라니 똑바로 들어라잉.
긍게 니가 뭘 한 게 중요하잖타고 몇 번을 말하냐 대체
나야 니랑 한 집 사니 니가 과팅을 하는지 락카페를 댕기는지 모르고 싶어도 알지마는
순천 있는 니 여자친구가 서울서 니가 뭣하고 쳐싸돌아댕기는지 알 게 뭐대?
같은 여자로서 이런 말 속상허지만, 니가 바람이 나도 알 방법이 없제,
나가 니 여자친구헌티 연락을 넣겄는가, 대체 어째 알 길이 있겄는가 말여"
눈을 끔뻑이며 윤진의 말을 듣던 해태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멍청한 목소리로 묻는다
"... 혹시 니가 말혔냐?"
윤진의 주먹이 확,하고 올라가려다 부들부들 떨면서 도로 내려간다
"디지고 싶냐?"
"근디 그럼 왜 저러는 거시여 대체"
"하이고 ... 귀찮아 죽겄네... 마음이라고 마음"
"근게, 대체 그 마음이 뭐단 말여"
윤진은 순진하다 못해 이제 멍청해보이기까지 하는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똘망똘망 저를 쳐다보는 해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결국 해태가 스스로 깨닫는 걸 기대하기를 포기한다
".... 니 말여, 니가 하루에 한번 전화 넣고,일주일에 한번 편지 보내고, 서울서 선물 사보내면
그걸로 다 되어부렸다.. 생각한 거 아녀?"
"어?"
"이정도믄 됐다, 이만큼 했응게 충분허지, 이리 생각한 거 아니냔 말이다."
"...."
윤진의 말에 머리를 한대 얹어맞은 것처럼 멍해진 해태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해태를 보고 다시금 한숨을 내쉰 윤진이 조목조목 설명한다
"여자들은 딱 안당게, 니가 뭔 맘으로 그라는지 딱 보기만 해도 알어야.
그딴 식으로 하는 거는 의무지, 더이상 애정이 아니란 말이여
니가 암만 전화 넣고 선물 보내고 쌩 난리를 쳐도
이걸로 됐겠지, 하는 게 보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이 말이여
아파서 목소리가 안 좋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등신이 세상에 어딨대?
괜찮다고 혀서 아 그란가,하고 지나가믄 그게 모르는 사람이랑 뭐가 다르냔 말여
무슨 일 치루듯이 그라믄 니 여자친구가 암만 착혀도 그걸 견딜 수 있을리가 없제
옆에서 보는 나도 열불이 나는구먼"
".... 그런거냐"
"... 등신, 니가 지금 여서 왜 연락이 없는가, 고민하는 것 부터가 잘못된거여
글케 급하믄 연락을 먼저 혔겄지 아니믄 지금 순천을 내려가고 있든가"
윤진의 말에 충격받은 듯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멍하니 몸을 맡기고 흔들리던 해태는
몇 정거장이나 침묵속에 지나친 후에야 겨우 묻는다
"... 나가 어쩌면 좋겄냐"
남의 연애사 따위 헤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싶고
이미 충분히 힌트도 줄만큼 줬다 싶지만,
"...니는 어쩌고 싶은디, 헤어질 맘 있는겨?"
"... 그런 거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응게 나는 여적지."
이런 맥아리 없는 대답 이라니
뒷통수를 한대 후려갈겨주고 싶지만 꾹 참는다
"그라믄 좀 적극적으로, 잉? 적극적으로 말을 허라고
니 입 있고 목소리 나오고 사지 멀쩡헌디 그걸 뭐 그리 아깝다고 아끼고 쌌냐
징후가 보이믄 바로 해결해야하는 거제, 그리 밍기적거리다간 큰일난다 니"
"...그런가"
솔직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이미 늦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긴 하지만.
풀죽은 해태를 보니 차마 거기까진 말 못하겠다
"일단 말이라도 혀봐, 헤어지기 싫으면 니 쪽에서 매달리는 거 말고 방법 있간?"
힘없니 고개를 끄덕인 해태가 새삼스럽게 부스스 웃는다
"아따, 근디 니 말 허삐 잘하는구마잉,
첨에 나는 니가 한 문장 이상은 말 못하는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당게
대체 그동안 말 하고 싶어서 어찌 참았당가, 대단허다"
그제야 오늘 좀 수다스러웠나 싶어서 모르는 척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뭐 요즘엔 그래도 꽤 말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새삼 변명하기도 뭐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런 뒷통수를 보고 있던 해태가 피식 웃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 근디 니는 삼천포랑은 대체 언제 풀 것이여?"
"... 그 이름 꺼내지도 말어야,"
"... 고만 풀지 그르냐, 갸도 충분히 당했응게, 이자"
"나가 당한 거에 비교하믄 그건 새발의 피여,
글고 어찌 피해자가 사과를 해야하는가, 엄연히 가해자가 따로 있는디"
"그게 글키는 하다마는..."
"시방 니 같은 방 쓴다고 편들라는 것이면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말어야, 나 확 내려버릴 것잉게"
나즈막히 으르렁거리듯 위협하는 윤진의 말에
기세에 몰린 해태는 잠시 침묵한다
"... 나가 니 말대로 여자 맴은 당최 모른다마는"
"....."
"삼천포랑은 한이불 덮은지 넉달이나 지났잖냐"
해태가 또다시 삼천포의 이야기를 꺼내자
윤진은 정류장도 확인하지 않고 내리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의자에서 튕겨져 나가려는 윤진을 팔을 뻗어 차단한 해태는
씩씩거리는 윤진의 팔을 조심스레 끌어 당겨 다시 자리에 앉힌다
"잠깐만 좀 들어주라, 여가 어딘줄 알고 내리려고 그르냐 가시내 성격하고는 참말로"
"...."
해태의 긴 다리가 나갈 길을 막고 있는 통에
윤진은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확 돌려버린다
"나가 지내봉게, 아가 눈치도 없고 씰데없이 고집도 쎄고, 예민하고 그라기는 해도 본성이 못된 놈은 아니여,"
".. 하고 싶은 말이 뭐여"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부하는 티를 팍팍 내는 윤진의 질문에,
해태가 조금 포기한 듯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그냥 쬐깐한 틈만 주라 이거제,
아가 순진혀서 조금만 잘해주면 금새 풀린당게, 시방은 고집 땜시 강짜 부리는 건게로"
"... 누가 잘못 혔는디, 누가! 지가 잘못하고 사과도 받고, 아주 잘나셨네"
"나도 알제, 삼천포가 백번 잘못 혔지, 암만.
그란디 갸가 니한테 사과를 할래도 틈이 있어야 하지 않겄냐
이대로 4년을 쭉 지낼 수는 없잔여"
"나가 왜 그 사정까지 챙겨줘야 되는겨? 잘못한 놈이 썽을 내는디?"
대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윤진의 차가운 말에
난감한 듯 몇 번 이마께를 긁적긁적한 해태가
큼, 하고 멋쩍게 짧은 헛기침을 한다
"나는 이 집이 좋구만, 서울 어무이, 아부지도 좋고
쓰레기 형님도 좋고, 나정이도 그레도, 삼천포도, 글고 니도 좋아야
같이 지내게 되서 참으로 좋다, 나는 참말로 운도 좋다 만날 생각한당게"
"...."
"긍게 말여, 한번만 니가 틈 좀 보여주라,
나는 니도 천포도 모두 잘 지냈으면 좋겠은게"
대답 없이 창밖만 내다보는 윤진의 뒤통수를 보다
역시 괜한 소리를 했나싶어 아까만큼 깊은 한숨을 쉬고 만다.
"이번 정류장은 종로 3가, 종로3가 입니다."
마침 흘러나온 안내방송을 듣고 후다닥 팔을 뻗어 벨을 누른다
해태의 움직임을 힐끔 보고 윤진도 해태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다
"어디로 가야 되냐?"
버스 정류장 건너편 거리에 펼쳐진 귀금속 가게 행렬에 압도된 듯
잠깐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보던 두사람은 일단 길을 건넌다
"저그, 가보까?"
거리에 늘어선 상점 중에 모퉁이에 바로 보이는 가장 큰 규모의 상점을 가리키며 묻는다
슬쩍 바깥 진열장을 확인한 윤진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젓더니 성큼성큼 걸어간다
당황해서 뒤따라오는 해태를 확인도 않고
진열장에 놓여있는 보석들만 보면서 몇개 상점을 지나쳐 쭉 걸어가더니
한 상점 안으로 쏙하고 들어가버린다
"..말이나 하고 가든가, 같이 사러 온 건디 어찌 그리 혼자 가냐"
부랴부랴 따라들어온 상점에서
어느새 진열장 앞에 서서 점원에게 이것저것 꺼내달라며 가리키고 있는
윤진의 뒤에 붙어서 작게 속삭이자 귀찮다는 듯 슬쩍 한 발 떨어진다
"조용히 좀 허고 있어봐라 헷갈링게"
진심으로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에 멋쩍게 물러선다
점원이 꺼내준 물건을 이리 저리 끼어보고 빛에 비춰보고 하던 윤진이 손짓으로 해태를 부른다
"이거 어떠냐"
"... 내 의견이 무슨 소용 있단가"
"그래서, 어떠냐고"
좀전에 비키라고 한게 서운해서 입술을 삐죽이며 슬쩍 고개만 들이민다
왼손가락에 끼우고 들어 보여주는 반지가 윤진의 손에는 너무 크고 무거워보인다
게다가 금가락지라면서 검정 물결 무늬라니,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슬쩍 제 손에 끼고 있는 가느다란 금반지를 보고 만다
"너무 어두운 거 아녀?"
과하지 않느냐는 말 대신 겨우 골라서 의견을 냈는데
제 말은 뒷등으로도 안 듣는 듯 도로 반지를 낀 손을 내리더니 퉁명스럽게 묻는다
"... 그럼 니는 뭐가 좋은디?"
윤진의 말에 스윽하고 진열장을 살펴보다가
단정한 모양의 금가락지 하나를 가리킨다
"... 저거 좋구만 심플하고"
해태가 고른 반지를 본 윤진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 어무이 드릴 거람서, 니 시방 커플링 고르냐, 하여튼 안목하고는"
그럼 애초에 왜 물어봤냐! 싶다
하여간 여자들이란!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한발 물러선다
"이걸로 허자, 이게 젤 난 거 같구만"
좀전에 저에게 보여준 반지를 결국 집어들어 보여준다
니 맘대로 해라 싶어서 퉁명스런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 친구분이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윤진에게서 반지를 받아든 점원이 생글거리며 말한다
"여자친구 아녀라!"
"그런 거 아닌데요"
동시에 버럭, 부정하고 나니
어째서 니가 기분이 나쁘냐, 싶어 서로 노려본다
난처한 듯 둘을 바라보던 점원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반지를 집어든다
"이렇게 단번에 알아보는 분은 잘 없는데,
요즘 이 디자인이 인기거든요. 서태지와 아이들 아시죠? 서태지씨도 끼고 나왔던 반지예요"
허허.
그러면 그렇지, 암만.
그냥 고를리가 없지, 어째 그 이름이 안나오는가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간 볼을 붉힌 윤진에다, 그 뒤에 서서 안 들리게 입모양으로만 잔뜩 궁시렁거리는 해태를 보며
자신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걸까 당황한 점원이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애쓴다
"젊은 분들도 그렇지만, 이게 심플하면서도 여기저기 매치하기도 좋고 화려하게 포인트도 되고 그래서
어머님들도 많이 골라가세요. 잘 고르신거예요."
암만해도 그런 이유로 고른 것 같지 않다는게 문제지만
그래도 점원이 잘 산 거라고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영 이상하진 않겠구나 생각한다
재빠르게 반지를 포장해서 내민 상자를 받아든 윤진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한다
응? 하고 고개를 갸우뚱 되묻자 인상을 쓰면서 입모양으로 '계산'하고 말한다
아!
주말에 걷은 돈을 제가 갖고 있던 걸 잊었다
주섬주섬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자
윤진은 벌써 상점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어깨에 맨 배낭 끈을 풀썩 고쳐메고 후다닥 따라잡고 보니 버스정류장 방향이 아니다
"어디 가냐?"
해태의 질문에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인다
"카드 써야제"
"잉?"
하아...
윤진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줘야하느냐는 듯 한숨 쉰다
"선물만 달랑 드리믄 그게 뭔 의미가 있냐,
마음을 전해야한당게 당췌 알아듣질 못하는구만
일단 카드 사서 니가 대표로 한번 써봐야, 나가 봐줄 터이니"
뭔가, 분명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미묘한 기분은,
말로는 못 이긴다 했던 삼천포의 푸념이 떠오른다
하여간에 우리 집은 여자들이 너무 강하당게
잠깐 망설인 새 이미 멀어진 윤진을 뒤따라 뛴다
"같이 가."
+
[1994년 6월 9일 오전]
"암만해도 다시 써야제?"
후다닥 밥을 먹어치우고
2층에서 제일 넓은 해태와 삼천포 방에 모여 앉은
네 명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인다
'느그 엄마한테나 그래라!'
나정의 강렬한 타박을 듣고 나니
그간 철없이 굴었던 것도 죄송스럽고
《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늘 감사드립니다. 》
라는 이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문구로는
도저히 그걸 다 갚을 수 없다는데 전원이 동의했지만
막상 새로 쓰려고 하니
빈 종이가 허허벌판보다 더 넓어보여서
누구도 선뜻 펜을 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숨막히는 몇분이 흐르다
결국 해태가 펜을 덥석 집어든다
"어머니 설겆이 하시는 동안 후딱 써서 갖다놔야 한게,
일단 나가 쓸터이니 이상한거 있으면 말혀"
부담에서 벗어난 세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 어머니 생일 축하드립니다! 》
생각보다 고운 글씨로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간다
사각이며 써지는 글을 따라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이던 삼천포가 조용히 웅얼거린다
"철없이 굴어가 죄송타고 좀 써라"
"그려"
가만히 위에서 부터 글을 다시 읽어보던 빙그레가
하유... 하고 한숨 쉬며 덧붙인다
"엄니도 안 참으시고 우리 막 패부리셔도 되는데 말여,
우리한테는 집에 계신 엄니나 마찬가진건디"
중얼거리는 말들을 허투루 듣지 않고
후다닥 정리해서 써내려가던 해태가
혼자 피식 웃더니 줄을 바꿔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 윤진이가 골라서 약간 다크할 수도 있지만 서태지도 하는 거라니깐 한번 믿어보려구요. 》
"디지고 싶냐, 니"
확 붉어진 얼굴로 험악하게 으르렁 거리는 윤진을 모른 척
쓰려던 문장을 완성한 해태가 평범하게 묻는다
"니도 엄니께 하고 싶은 말 있을 거 아녀, 안할겨?"
글에 집중하는 듯 고개 들지 않고 던지는 말에
찔린 듯 잠깐 입술을 깨물다 윤진이 조용히 덧붙인다
"내방에 암때나 들어오셔도 된다고 혀, 죄송허다고"
"오케이"
일필휘지로 날려서 편지를 완성한 해태가
급하게 편지와 반지 상자를 챙긴다
"후딱 내려가자잉, 그레 니가 망 좀 봐라"
++
[1994년 6월 11일 새벽]
펜을 놓고 쭉, 하고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편다
책상 가득 널려있는 전공 책이며 복사한 참고 도서들
몇번이나 수정하느라 빨간 펜으로 그은 레포트 초안들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기말고사의 마지막 레포트를 끝내버리고 주말을 맞으려고 했던게
결국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피곤과 모자란 잠 때문에 뻐근한 어깨를 몇번 돌리다가
찬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싶어 부스스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한다
헉.
깜깜한 어둠 속에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형체를 발견하고
소리도 못 낼만큼 놀라서 번쩍 뒤로 물러선다
2층 거실의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형체를
바깥 가로등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불빛에 찬찬히 살펴보니 사람인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형체를 가만히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파 옆에 놓인 스탠드 불을 켠다
그제야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불빛에 놀란 듯 고개를 든다
"여서, 뭐하냐"
"... 어... 친구, 나왔는가, 여직 안자고 뭐했냐"
"니야말로 집에 안 갔냐, 오늘 시험 끝나자마자 순천 간담서"
윤진의 말에 해태가 힘없이 웃는다
그러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도로 웅크리고 만다
그때야 탁자위에 놓인 큰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거시 뭐냐?"
"...."
아무 대답없는 걸 보니 괜한 관심인가 싶어
무슨 일인지 더 물어보려다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나, 물마실 건디, 니도 갖다주랴?"
퉁명스런 윤진의 말에 고개를 든 해태는
그제야 초점을 맞추고 윤진을 보다 머뭇거린다
"친구야, 나, 어쩌냐."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귀찮은 일에 휘말렸구나 싶다
모르는 척 해버릴까 하다가 머뭇 다가와서 옆에 앉는다
"뭐가 말여"
"....나 진짜 헤어질라는 갑다"
한숨을 푹 쉰 해태가 가만히 상자 뚜껑을 열어보여준다
"이거, 헤어지잔 소리 맞제?"
슬쩍 고개를 들어 상자 안을 살펴본다
인형이며 쿠션, 저도 해태가 사서 부치는 걸 본 적 있는 푸른 하늘 CD와
갖가지 작은 선물들, 편지, 액자.
아마도 해태와 여자친구의 시간이 가득할 상자.
"... 이것만 온겨?"
"....."
"전화는 해봤고?"
"... 귀신같이 안 받대.. 어제까진 암일도 없는 양 받더만... 오늘 나가 이걸 받았는지 어째 알았는지
암만 전화하고 삐삐쳐도 연락이 안되어야"
후우.
왜 윤진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해태가 푸념처럼 중얼중얼하기 시작한다
"여자들은 어찌 그리 독하당가, 이래 보내기만 하믄 끝이래? 나는 워쩌라고,
전화 한번 받아주는게 그리 어려운가, 잉? 니 좀 말해봐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뭐가 그리 어려운겨, 니도 말이다 삼천포 한번 봐주는게 그리 어렵냐
여자들은 어째 그래 하나같이 독한겨 대체"
가만히 듣고 있던 윤진의 미간이 꿈틀한다
그리고는 쭈구리고 있는 해태의 등짝을 후려갈긴다
- 퍽.
"염병, 지랄하고 자빠졌네"
"왜 이러냐!"
앞으로 고꾸라지고 불꽃이 보일 정도로 센 충격에
맞은 자리를 만지면서 윤진을 올려다본다
"거서 갸 이름이 대체 왜 나온당가 글고,
니가 지금 한 게 뭐 있다고 이렇게 쭈그리고 있는 거여
최소한 왜 헤어지는지는 직접 들어야할 거 아녀,
니가 무슨 생각인지 말도 못해보고 그냥 포기할겨?
나가 니가 상 등신인줄은 진즉에 알았다면 이정도로 끈기없는 놈인 줄은 몰랐당게
이딴 놈을 삼년이나 좋다고 만난 니 여자친구가 불쌍타 불쌍혀 어?!"
갑작스런 욕설에 버럭 화를 내려던 해태가
멈칫하고 윤진의 말을 곱씹다가 단조로이 묻는다
"전화도 안 받는당게, 내려갔는데 안 만나주면 어쩌냐 괜히 찌질한거 같고 그렇잖여,"
"...등신아 니가 지금 자존심 챙길 상황이여?
글고 연예인을 좋아하다가 그만둬도 헤어지는 예의란 게 있는 법이여,
니는 지금 그 가시내랑 삼년을 만났담서, 헤어지잔다고, 연락 안 받는다고, 아 네 그럽시다. 냉큼 그럴겨?
최소한 그 시간에 대한 예의라도 지켜야할 거 아녀,
할 말은 다 해보고 무릎은 꿇어보고 매달려보고 그러고도 헤어지든가 말든가"
무엇을 겹쳐 보았는지 씨근거리기 시작하는 윤진을 물끄러미 보던 해태는
천천히 앞에 놓인 뚜껑을 닫고 상자를 두 손에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 지금 순천 갈랑게,
아침에 엄니한티 말씀 좀 잘 드려주라"
제가 말을 퍼붓기는 했지만
정말로 단번에 순천에 내려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윤진은
조금 놀라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 글고 나가 니 말 들어줬응게, 니도 내 부탁 한번 생각해주고."
무슨 말인가,하고 윤진이 저도 모르게 갸우뚱하자 턱 끝으로 제 방문을 가리킨다
그 방에 자고 있을 삼천포를 떠올린 윤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도 니 말 듣고 지금 틈새 찾아 바늘 꽂으러 강께, 니도 바늘 꽂힐 틈 좀 줘야"
대답없이 뚱해있는 윤진을 보다 힘없이 웃고는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내려간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않고 앉아 있던 윤진은 잠시 후에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 옆의 스탠드를 보고 섰다가 불을 끈다
확,하고 다시 2층에 어둠이 덮친다
어쩐지 마음이 답답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도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 물 마시고 정신 차려야겠다.
아침이 밝기 전에 어서.
==================
아따 길다.....;;;;; 읽느라 고생 많았어~
안그래도 전라도 사투리랑은 거리가 먼데;; 이상해도 이해해줘 ㅠㅠ
윤진이는 평생 전라도 사투리 쓰겠지? ㅠㅠ
그냥 해태가 편지를 쓰고 윤진이가 반지를 골랐고 편지 쓸 때 윤진이가 옆에 있었다길래
어머 둘이 같이 반지 사러갔나봐~ 하고 쓰기 시작한 뒷이야기였는데...
축구 경기 볼때 삼천포가 윤진을 깨우는 걸 보니 약간은 풀린 것 같고
해태도 그 상자를 받고 나서 그저 그렇게 포기하진 않았을 거 같아서
윤진이는 한번은 해태에게 제대로 왜 니가 잘못 했는지 말해줬을 거 같고
해태도 한번은 삼천포랑 화해해달라고 윤진이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다 넣고 나니 너무 길어졌네;;
난해하지만 그래도 읽어주는 냔들, 댓글 달아주는 냔들 늘 고마워~
7화 예고 보고나니 대체 언제 금요일이 오는 건지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다 ㅠ_ㅠ
떡밥도 없으니 비루한 팬이 할 수 있는 건 상플밖에 없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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