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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와 삼천포와 윤진이가 등장하지만, 딱히 어느 쪽으로도 커플링을 할 수는 없는,
어느 봄날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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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대 무'역'학과 미팅 날 오전]
흔... 들
흔..... 들
흔
들
작게 앞뒤로 오가기를 반복하던 고개가 반동을 못 이기고 뒤쪽으로 크게 훅,하고 꺾인다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 한 걸 반사적인 균형감각으로 겨우 막은 대신
순간 목이 꺾인 탓이 컥,소리를 내며 깨어난다
제가 생각해도 상당히 큰 소리가 났다
제풀에 놀라 몸을 움츠리고 만다
졸다가 깬 바람에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는데 시간이 걸린다
주춤주춤 오른쪽을 바라보자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곁눈으로 힐끔 보고는
도로 사각이며 칠판의 내용을 필기하는 삼천포가 눈에 들어온다
아아.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 건지 깨닫는다
그 이름도 찬란한, 전산학개론.
컴퓨터라면 베네치아나 하고 도형이나 짜는 줄 알았지
그래서 재미있을거라고 단정짓고 입학 지원했건만
대체 지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한 이상 전공 필수 수업이니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과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주면 좋으련만
뒷자리에 앉아서 앞쪽을 바라보자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칠판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좀전의 자신처럼 고개를 흔들어가며 졸거나
집중못하고 만지작 거리는 것 같은 뒷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은 수업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듣는다는 소문은 절반은 진실, 절반은 거짓이었는데
물론 선택해서 들을 수는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전공과목을 포함, 영어나 국어 같은 교양까지 필수 수업이 많은 신입생은
아무래도 과 전체가 한 과목을 수강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지금 이 전산학 개론 수업을 수강중인 저 뒷모습의 대부분은
자신이 지난주 월요일 개강부터 매일 계속된 신입생 환영회와 온갖 미팅 자리에서 산전수전을 함께하고 있는 동기들이었다
그땐 서울내기인 저 녀석들이나 저나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얘들은 이게 다 이해가 되는 건가.
그래도 나름 순천에서는 뭐든 첫째로 받아들이고 첫째로 잘했던 자신인데
어쩐지 혼자 못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별로다
으으 지겨워
작게 기지개를 펴려다 칠판에 필기를 끝내고 돌아본 교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펴다만 기지개를 접어 고대로 몸을 웅크려 고개를 책상 위에 고정하고 눈동자만 움직여 교수님 눈치를 본다
다행히 그냥 넘어가실 모양인지 칠판의 필기 내용을 두드리시며 뭔가 한창 설명 중이다
살짝 오른쪽 팔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한다
11시 30분.
시간을 확인하자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온다
보통은 강의 계획서만 나눠주고 교재 설명 후에 끝나는 1학년의 첫 강의 부터
나갈 진도가 많아 한학기 시간이 모자라니 잠깐 수업하겠다고 하시고는 결국 11시 30분에 마치시더니만
오늘은 11시 30분이 되었는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3학점 짜리 수업이라도 그렇지
설마 3시간을 채우실 생각인가.
졸립고 하품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아침 9시 1교시 부터 쉬는 시간도 없이 연속으로 3시간이나 하다니.
오늘 미팅이라고 일부러 입고 나온 자켓이 슬슬 불편해져온다
서울은 순천보다 겨울이 오래 가고 3월이어도 춥다길래
일부러 스웨터도 따숩게 챙겨입고 자켓까지 걸치고 나온 건데
사람이 가득한 강의실에 꼼짝 못하고 앉아 있다 보니 어째 더운 것도 같고 꼭 끼는 것도 같다
교수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눈에 띄지 않게 팔을 몇번 폈다 굽혔다를 반복한다
움직임을 느꼈는지 오른 쪽에 앉아 있던 삼천포가 귀찮다는 듯이 힐끗 눈치를 준다
머시매가 예민하기는.
속으로 투덜투덜거리면서
아무래도 답답해서 안되겠는 자켓을 벗으려고
삼천포의 눈에 띄지 않게 왼쪽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튼다
어라?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영 어색한 게 눈에 걸린다
자신이 앉아 있던 왼쪽 뒷줄의 문 바로 앞자리,
그러니까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비어 있어서
삼천포 옆에 앉을 것인가 저 자리에 앉을 것인가 막판까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부모님께서 비싼 등록금 들여 보내주신 대학인데 수업 듣는 시늉이라도 내야지 싶어서
포기했던 그 자리에 작고 까만 생물체가 꼼지락거리고 있다
뭐여 저건.
아예 책상을 파고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커튼처럼 내려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까만 머리와 둥글게 말린 어깨, 조그만 몸집,
그리고 대체 뭘하고 있는지 머리 커튼 사이로 힐끗힐끗 보이는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 눈에 익다
분명... 어디서... 아!
대체 왜 저 정체불명의 생물체가 낯설지 않은 건지 0.5초간 생각하다가
그제야 며칠전 아침 하숙집 식탁에서 저런 비슷한 형체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하숙집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그집 딸인(세상에 어째 저래 성깔있는 여자애가 있나 싶게 까랑까랑한, 그나저나 그건 정말 디스크의 증상인가?) 나정이랑
너희 셋이 모두 같은 과.라고 하실 때 자신 옆에 앉아 있던 까맣고 조그만 여자아이...
에.... 그러니까....
정대만.
쿡.
자신이 불렀던 호칭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삼킨다
다시 슬쩍 고개를 돌려 여전히 책상에 틀어박은 모습을 보자니
까만 머리에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감색 스웨터까지 저렇게 까맣게 입기도 힘들겄다 싶은 차림이
어째 슬램덩크의 까만 교복을 입고 단발 머리를 고수했던 정대만의 축소판 같아 보인다
역시 자신이 별명 하나는 귀신 같이 붙였단 생각이 든다
"아야"
옆자리의 삼천포를 작게 부른다
분명 자신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어깨 한쪽이 움찔하고 미세하게 움직였는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예의 그 새침한 표정을 하고 칠판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걸 보니
하, 하고 헛웃음이 난다
느 시방 사람 시피봤냐.
"아야, 삼천포야"
일부러 조금 전보다 약간 큰 목소리로 다시 부른다
삼천포가 홱하고 정색한 표정으로 돌아보더니
입술을 -ㅅ- 하고 꾹 다문 채 노려보다가 필기하고 있던 노트 뒷장에 급히 휘갈겨 내민다
[왜!]
아구, 이 아그 귀엽구만.
촌놈 티 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어디로 봐도 촌놈티 풀풀 나는 삼천포는
밖에서 자신의 별명을 부르는 걸 질색하는 탓이다
뚱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는 삼천포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배시시 웃어준다
"보이냐, 자 진짜 우리 과다야"
뒤쪽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한번 주더니
귀찮다는 듯 휙 써갈긴다
[몰랐냐]
"듣기야했지만서도 수업에서 보는 건 처음이니께 그랬제
어째 그래 눈에 안 띄었을까이
그래봤자 우리 과에 가시내가 싯닛 뿐인디,"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자 귀찮다는 듯 한쪽 얼굴을 찡그린 삼천포가
훅훅 뭔가 써서 내밀고는 도로 칠판을 바라본다
[수업 듣자]
괜히 저 새침한 얼굴을 괴롭혀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뭐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라고 거참.
"아야"
다시 말을 걸자 홱하고 고개를 돌려 째려보는 것이
찬바람 불기가 엄동설한보다 더하다
"근디 자 어디서 왔다냐
전번에 보니 전라도 말 허삐 잘하던디"
입을 꾹 다문 채 삐죽거리는 -ㅅ- 표정으로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삼천포는
싱글싱글 웃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뭔가 써서 노트를 내민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라믄 쪼까 섭하재, 그래도 한 집 사는디"
삼천포의 펜 끝이 부르르 떨린다
[그럼 니가 물어보든가]
"그라도 될랑가, 말이 억수로 익숙하단 말이제
으찌 어머니는 우리는 삼천포, 해태 이리 하심서 자는 이름을 부르시는겨 심들구로.
근디 자 어째 싸나워 보이지 않더냐 지난번에 욕도 하빡 잘하더만. 씰데없이 건딘다고 디지는거 아닌가 "
중얼중얼 말을 잇자 삼천포가 부르르 몸을 떤다
"쫌! 몰라! 모른다고!"
결국 폭발한 삼천포가 약간 언성을 높이고 만다
마침 다음 페이지를 위해 교수님의 말이 멈췄던 탓에
그저 넘어갈 수도 있었던 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들린다
"거기, 뭐냐?"
당황한 삼천포가 고개를 푹 숙인다
대신 삼천포의 버럭질에 약간 당황한 탓에 멈칫 했던 자신에게
교수님 포함 오십여명의 눈길이 후다닥 날아와 꽂힌다
힐끔 오른쪽 눈치를 보니 얼굴이 시뻘개진 삼천포가 바르르 떨고 있다
하이고.. 사내가 저래 속이 째깐해서 워따 쓴다냐.
"죄송합니다. 교수님. 지가 소리가 좀 크게 내부렸네요"
배시시 웃으면서 두 손 모아 사죄하는 시늉을 하자
이미 다른 강의 시간에도 몇번이나 졸던 걸 목격했던 학우들 사이에 풉, 하는 웃음 소리가 번지고 만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꺼랑게요."
우렁차게 덧붙이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교수님마저 피식 웃어버린다
"패기 만만한 건 좋다만 수업 들어왔으면 공부는 좀 해야되지 않겠냐?"
"죄송합니다!"
"됐다, 자 다들 집중하고, 43페이지."
잠깐의 해프닝으로 지나간 듯 이내 강의실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이제 더 딴 짓은 못하겠고 저도 수업을 좀 듣긴 해야겠는데 대체 저 43페이지가 어딘지 모르겠다
옆자리의 삼천포 자리에 놓인 책을 좀 건너보려고 하니
무슨 국민학생 기말고사 시험 보듯이 두 팔로 책을 한껏 가린 채다
책을 사긴 사야겠는데 그냥 사자니 돈이 아깝고...
저 책 빌려서 제본이나 뜨면 딱 좋겠구만...쩝.
지난주에 제본 뜨게 책 좀 빌려달라고 말 한번 꺼냈다가
무슨 가보를 빌려달라고나 한 듯이 펄펄 뛰던 삼천포 생각이 나서
입맛을 다시고 무심히 주변을 둘러본다
하야....
방금 전 강의실을 휩쓸고 지나간, 그래서 아직도 조금은 웃음기가 감도는 강의실 안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몇분전과 동일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꼼지락 거리고 있는 예의 그 까만 덩어리, 소위 정대만.의 모습을 발견한다
잠깐, 그렇지만 스쳐지났다고 하기엔 꽤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껏 본 거라곤 저 치렁치렁 늘어진 까만 머리와 늘 뭉치처럼 보이는 커다란 옷 뿐이란 걸 깨닫는다
대체 저 아래서 뭘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진다
그리고 저 커튼처럼 가린 머리카락 안에는 어떤 얼굴이 있는지도.
이름이... 에... 그러니까...
하숙집 어머니가 식탁에서 밥을 더 먹으라며 불렀던 이름을 겨우 기억 한 구석에서 찾아낸다
윤진.
그러고 보니 어느날인가 하숙집 아버지께 번쩍 들려서 "윤진아 너 오늘도 밥 안 먹으면 확 죽여불랑게"라고 욕 먹으며
식탁 앞으로 질질 끌려가던게 생각난다
콩알만한게 밥도 엄청시리 안 먹는다고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아니 저는 밥이 맛있어서 살이 포동포동 찌던데, 저러니 사람이 희미해보이는게다
그냥 쓱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도 될만큼 쪼그만한 덩치에 밥까지 안 먹으니 오죽하랴
그런데 저 쪼만한 체구에 욕은 얼마나 잘하던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섬뜩해진다
작은 체구와 걸죽한 욕 사이, 어느 쪽이 진짜 인건지 헷갈린다
이름은 이쁘고만, 어째 저리 어둡다냐. 꼭 어디 갖힌 아처럼.
여전히 고개를 들 기미가 없는 윤진에게 한번 더 시선을 주고 다시 앞을 바라본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수업을 끝낼 생각은 없으신 것 같다
그제야 접어뒀던 노트를 펼치고 일단 이해가 되진 않지만 칠판에 쓰여진 글씨를 받아적어본다
까만 건 칠판이요 흰 색은 글씨라.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서 노트를 채워나간다
오늘은 꼭 삼천포의 책을 빌려서 제본을 해야겠다
숙대 무용학과와의 미팅도 억수로 이쁜 아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 두 가지만 이루면 오늘 할 일은 다 한 것 같을텐데.
나,의 인생은 활짝 핀 거나 다름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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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태는 윤진이가 그저 궁금한 정도고 윤진이는 세상에 관심없는 어느날의 이야기.
아무것도 진행된 바 없는 럽라인지라 대체 이게 어느 커플?에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커플링 이름도 없지만 그래도 2화를 복습하다보니 이런 씬도 있으면 어떨까 싶어서 후다닥.
그나저나 나냔은 전라도랑은 거리가 멀어서.....해태의 사투리가 영 이상할까봐 걱정걱정.
일단은 응답 기준으로 이래저래 줏어들은 걸로 써봤는데;;
가볍게 쓴거니 그냥 재미나게 봐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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