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Y's side) 






[1994년 9월 30일, 정기전 1일차] 




탕.탕.탕.탕. 


결코 친절하지 않은 쿵쾅거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온 방 안에 울린다 


으음.. 


쿵쿵 소리에 머리가 뎅뎅뎅. 하고 울린다 
꼭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것 같다 
눈꺼풀조차 들어올리기 어렵다 
강력접착제로 붙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대기만 할 뿐 떠지질 않는다 



"정대만, 일나라! 내는 분명히 깨웠다!" 



문 밖에서 퉁명스런 통보가 들린다 



저 목소리는 삼천포. 

나를 부른 호칭은 정대만. 

나는. 

그렇다면 지금. 



겨우 한쪽 팔을 들어올려 이불 밖으로 뺀다 
뒤척,하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아주 천천히 꼼지락 꼼지락 움직여서 팔과 다리를 모아 쪼그리고 앉는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면서 개구리처럼 단번에 모았던 팔과 다리를 펼쳐서 이불을 박차고 벗어난다 
덮고 있던 이불을 뒤쪽으로 밀쳐내고도 여전히 눈이 떠지지 않아서 멍하니 이불 위에 앉아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에이씨.. 


머리를 흔들었더니 또 뇌가 뎅뎅뎅 울린다 
잠깐 이마를 부여잡고 온갖 인상을 쓰면서 꼭꼭 관자놀이를 누른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뜬다 


익숙한 제 방 풍경이 들어온다 
창으로 햇볕이 쏟아져들어오는 걸 보니 이미 아침도 한참인가보다 
어제 입었던 옷이 가지런히 접혀서 책상 의자에 걸려있고 가방 끈이 책상 위에 흘러내려와있다 


아야.. 


무의식중에 간지러워 발꿈치를 건드렸다가 예상치 못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린다 
아직 덜깬 눈을 비비며 돌아보니 오른쪽 발뒤꿈치에 큰 밴드가 붙어있다 





어디서 어떻게 다쳤길래 이걸 붙이고 있는 건지 
아직도 찡하고 울리는 왼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체육대회 
장기자랑 

아 그래 

장기자랑 




'가스나, 가만히 좀 있어봐라' 


한시간 넘게 인형이 된 것처럼 빈 강의실에 갖혀서 나정과 진주가 들이대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찰싹,하고 맞아가면서 화장을 받고 있노라니 
아무리 하겠다고 스스로 수락한 건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허지 않냐?' 
'진주 니도 좀 그래 보이제' 


게다가 심히 손이 서툰 이 전형적인 공대 여자 두 명에게 마치 캔버스인양 제 얼굴을 맡기고 있으려니 
어린애한테 불을 맡긴 것처럼 어찌나 불안하던지. 
집에 있는 화장품을 몽땅 털어온 것처럼 제 앞 책상 위에 늘어놓고는 
이것저것 발랐다가 이건 아닌 것 같다며 물수건으로 박박 닦았다가 하기를 몇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마침내 허락을 받아 내 거울을 볼 수 있었다 


'느그 둘 다 디지고 싶냐' 
'.... 이상하제, 아무래도' 


지난 한시간 동안 제 얼굴이 무슨 스케치북이라도 된 듯이 갖고 논 결과물이 이건가 싶어서 거울을 쥐고 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윤진의 피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 나정이 슬쩍 뒤로 몸을 빼면서 웅얼거렸다 


하아 


이것들이나 저나 오십보 백보, 더 말을 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서 
그저 아무 말없이 일어나 화장실에서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돌아온 뒤 
제 눈치만 보고 있는 나정과 진주 앞에 놓인 거울을 집어 들어 나정에게 내밀었다 


'들어봐라' 


순순히 윤진의 눈높이에 맞춰 들고 있는 거울에 비춰보면서 
서툰 손길로 일단 얇게 기초 화장을 하고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팔레트를 열었다 

.... 정말 쓸 색이 하나도 없구만. 


고민에 빠진 윤진을 힐끔 보고 나정이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그기.. 오빠야가 사온기라.. 센스라고는 약에 쓸라해도 찾기 어려븐 인간 아이가. 내도 오늘 처음 들고 나왔다' 


자신의 얼굴이 왜 그렇게 얼룩덜룩했는지 알 것 같다 
나정도 최선을 다했으리라.... 

잠깐 망설이다가 파우더를 두드리고 붉은 계열 섀도로 간단히 볼터치 정도만 
그리고 정말 한참 한참 고민한 뒤에 그나마 핑크계열에 가까운 립스틱만 얇게 발랐다 


'윤진이, 니 화장 해본 적 있나?' 


나정이 감탄하듯 묻는 말에 귀찮다는 듯 대답한다 


'가끔, 대기실 들어갈라믄 필요한 때도 있으니께' 


그렇게 해본 건 한두번, 뿐이었지만 격하게 공감하는 나정의 반응에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기술이 모자라 요즘 스타일로는 할 수 없지만 이정도면 됐겠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정이 쓸어담듯이 화장품을 가방에 집어넣는 걸 기다렸다가 함께 운동장으로 나서자니 
벌써부터 그저께 나정에게 질질 끌려서 동대문 시장에서 산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왔다 
불편한 듯 다리를 터는 윤진을 보고 나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괘않나?' 
'.. 새 신이니 별 수 있겠는가, 참어야제' 


오히려 그보다는 통 신지 않았던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과연 이걸 신고 제대로 뛸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싶어서 구두 앞 코로 땅을 두번 톡톡 두드렸다 
발야구 시합이 거의 마무리된 어수선한 운동장 구석에 앉아 있던 해태에게 
나정이 다다다 달려가서 폴짝 목을 졸랐다 


'아야, 나정아 놓고 말해라 놓고' 
'준비는 다 하고 이라고 있는기가, 니가 우리과 대표라매' 
'나야 아까 끝났제, 근디, 으찌 니 혼자냐' 


뒤에 서있는 저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나정에게 의아하게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탁, 탁, 탁, 걸어가 구두 뒷축으로 냅다 멍청한 등판을 차주었다 


퍽. 


앞으로 고꾸라질뻔 하고 나서야 제 쪽으로 돌아본 해태는 
맞고 나서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한참 멍청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언제 시작한다냐' 


퉁명스럽게 묻자 그제야 빠르게 변하는 표정이 볼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못 알아본 것만도 그런데 
저렇게 못볼거라도 본 것처럼 황당해하는 얼굴이라니 
저를 빤히 보는 걸 모르는 척 하고 나정 옆에 앉아버렸다 
힐끔힐끔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그냥 확 일어나서 안하겠다고 나가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참아왔는지 떠올리고 꾹 참았다 

무대는, 뭐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해태의 춤사위도 그동안 락카페 다닌 돈 아깝지 않게 볼만했고 
무대 아래의 환호성, 특히나 몇안되는 고대 여학생들 포함 가시내들의 열광적인 비명 소리 덕분에 
(아, 그 중에 가장 큰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나정이었던 건 제외하고도) 
구두 때문에 두번인가 삐긋하긴 했어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었다 

나름 긴장했던지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자 스탠드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이어진 축구 시합을 위해서 냉큼 옷갈아입으러 사라진 해태를 대신해서 
이름도 모르는 선배들과 동기들의 인사치레를 받아내느라 꽤나 피곤했었고 
그리고 시합이 끝난 뒤 술을 마셨고 


그리고 



술을 마셨는데. 



음. 



지난주 예비 모임 때 저와 대작하다 뻗었다는 이름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고대 남자애들이 몰려와서 
술잔을 건네기에 이것은 2차전인가! 하는 긴장감으로 거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마셨던 것까진 
띄엄띄엄하지만 기억나는데 


아, 


해태가 집에 가자고 했던 것 같고 


그래 무사히 일어나서 인사도 했는데 


그 언저리의 어딘가에서부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으음. 


머리를 부스스 헝큰다 
모르겠다 뭐 집에 제대로 잘 왔으니까 지금 제 방에 이불까지 펴고 자고 있었던 거겠지 


끙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기지개를 쭉 펴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가 다 된 시간. 
늦었다고 해서 설마 아침을 주지 않으시진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 내려가 밥을 청하는 것도 죄송한 일이다 


윤진은 부스스 방을 걸어나와 화장실에서 대강 씻고 1층으로 내려간다 


"윤진이 일어났나, 어서 와서 앉아라, 아침 무야제" 


반기는 어머니 목소리에 꾸벅 인사를 하고 천천히 빈 자리에 가서 앉는다 


"어제 술 많이 뭇나? 북어국이다 어여 무라" 


제 앞에 놓이는 국그릇은 여전히 크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집의 식사 스케일에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놓인 빈그릇을 끌어당긴 윤진은 밥을 덜고 국물을 쏟아서 차곡차곡 만다 


"윤진아, 그만도 못 묵나, 니 그래가 오늘 가겠나? 하루종일 응원해야한다믄서?" 


걱정스럽게 묻는 어머니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 깊게 숙인다 
윤진을 포함해서 식탁에 앉아 있는 나정, 삼천포, 빙그레가 싹 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묵묵히 북어국에 고개를 쳐박고 있는 걸 보던 아버지가 
탁, 하고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하여간에 요즘 대학생들은 등록금 내놓고 뭐하는지 모르겠당게, 만날천날 술이나 퍼먹고 댕기고" 
"아빠! 연고전 모리나 연고전, 학교 행사다 행사" 
"술 퍼먹고 아침에 부모가 끓여주는 해장국이나 먹는 것이 학교 행사여? 아주 대단허다 대단혀" 
"어차피 내일이믄 끝난다 그라고 바로 시험 기간이다 노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이고 니가 시험기간이라고 술을 안 쳐먹고 다니것다 아주" 
"글킨 글치" 
"뭐가 그렇지여! 이 가시내! 하이고 조상님 어디서 이런 술주정뱅이가 났당가요" 
"다 아빠 닮아가 그런다 아이가!" 

"고마해라, 아들 밥 묵다가 체하긋다" 


이것들 싹 다 고향집에 전화를 넣어버려야겠다고 궁시렁 협박하는 아버지의 말을 자른 어머니 덕에 
아버지의 말에 한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를 하는 나정의 대화가 끊어진다 


달캉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해태 니, 어데 갔다왔나" 


부엌에서 내다본 어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쪼까 볼일이 있어가지고" 


헤헤 웃으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계단을 올라갔다가 
잠시 조용해진 뒤 다시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해태야 잠깐 이리 온나" 
"네" 


가방을 메고 한 손에 과 깃발을 들고 있는 해태가 어정어정 부엌으로 걸어들어오자 
싱크대 한쪽에서 뭔가 들어 안긴다 


"아나, 이거 가져가라" 
".. 아니.. 엄니.. 이게 뭐대요?" 


별 것 아니겠거니 하고 받았다가 생각보다 상당한 무게에 놀랐는지 해태가 말을 더듬는다 


"칠봉이 좋아하는 걸로 간식 쪼매 쌌다, 아침에 출출할긴데 무라 캐라, 모자라지나 않을란지 모리겠네" 
".... 하이고 엄니.. 이거면 구단 전체 먹이고도 남것는디요" 
"글나, 한창 때 아이가. 금새 묵는다. 모자라는거 보다야 낫제, 
 니도 좀 묵고, 아이고 입이 여럿인데 좀 더 쌀 걸 그랬는갑다," 


뭔가 더 챙기려는 듯 움직이는 어머니의 움직임에 기겁을 하고 놀란 해태가 얼른 말린다 

"엄니, 충분할거 같응게 걱정마셔라, 확실히 전달할텐께로" 
"맞나, 그럼 부탁한데이" 


암만해도 보통의 무게는 아닌 듯 한 손으로 휘청,하고 들어보는 해태를 
나정이 북어국을 먹다말고 올려다본다 


"니 자리 잘 맡아래이, 전망 딱 좋은 데로, 알제?" 


해태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한다 


"걱정일랑 붙들어매랑게, 나가 해태 출범 원년 때부터 팬이여 방학 때마다 광주 구장을 얼맨치 오갔는지 아는가." 
"맞나" 

나정의 대답에 움찔,한 해태는 살짝 눈을 굴리더니 말을 잇는다 


"딱 명당 잡아 놓고 있을텐게 늦지 말고 오기나 혀. 경기는 제대로 봐야제. 칠봉이가 선발 아니냐. 
 ... 니 선발이 뭔지는 아는가?" 


멍하니 바라보는 나정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잠깐 생각하던 나정이 대답한다 


"선발대 후발대.. 뭐 그런 거가? 야구는 1회, 2회 이래 세는 거 아이가" 
".... 칠봉이가 1회부터 던진다고. 하여간 친구야, 니도 관심 좀 가져봐라, 설마 칠봉이가 투수인 건 알제?" 


민망했는지 나정이 숟가락을 든 손으로 휘적휘적 어서 가버리라고 손을 흔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해태가 문득 생각난 듯 어머니께 말한다 


"참, 엄니 세탁기 옆에 젖은 빨래 하나 있는디, 그거 그냥 세탁기 돌리셔도 되지 싶네요" 
"빨래? 니 뭐 빨았나?" 
"아... 양말이 좀 많이 더러워져가지고, 일단 손으로 한번 빨긴 했는데 
 암만 해도 세탁기에 한 번 더 돌려야하지 싶어요" 
"야야, 니가 와 빨래를 하고 그라노, 순천 너거 어무이가 니 손에 물 묻힌거 아시믄 내가 뵐 염치가 없다" 
"아녀요, 너무 더러워져서, 지가 한번 해볼라 했는데 암만해도 잘 안되네요" 

헤헤 웃는 해태의 등을 대견한 듯 툭툭 두드려준다 

"맞나, 그래도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라 알긋제?" 
"네 엄니" 
"근데 니 안 나가봐도 되나, 일찍 나가야 한다메" 
"아, 가야겄네요" 


주섬주섬 내려놨던 깃발을 집어들어 왼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음식을 싼 보따리를 손에 들더니 
불룩 튀어나와있던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그때껏 깨작거리면서 밥을 만 북어국을 뒤적거리고 있던 윤진 앞에 내려놓는다 


탁,소리를 내며 등장한 딸기 우유 팩을 보고 뭔가 싶어 고개를 든다 
정작 우유곽을 내려놓은 주인인 해태는 윤진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이 태연히 얼굴을 비껴 
옆에 놓인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반찬을 하나 집어먹는다 


"내는?" 


윤진이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건너편에 앉아서 국을 마시다 말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정이 불만스럽게 묻는다 


"니는 이거 먹으면 술이 더 올라오는 거 아녀?" 


반찬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해태가 대답하자 나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사...." 
"거봐라, 얼른 국이나 마셔잉," 


순순히 국그릇에 고개를 박는 나정을 보고 힐끔 한번 윤진을 내려다본 해태는 
젓가락을 내려놓은 손으로 슬쩍 딸기 우유를 윤진 쪽으로 밀어놓는다 
그리고 재빨리 짐을 챙겨 나선다 


"얼른 씻고 와야, 자리 맡아놓는 것도 한계가 있응게" 
"오이야, 좀 있다 보자" 


해태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 윤진은 천천히 딸기 우유를 집어든다 


"니 진짜 그거 먹으면 술 마신 거 풀리나?" 
"뭐... 그라제..." 


신기한 듯 묻는 나정에게 대답을 한다 


"맞나, 이야, 신기하네, 나는 느끼해서 속 울렁거릴거 같은데" 
"자 좀 이상한 거 하루이틀이가," 


저를 두고 나정과 삼천포가 대화하는 걸 흘려들으면서 조심스럽게 딸기 우유 팩에 빨대를 꽂는다 
한모금. 쪽하고 빨아들이자 차갑고 달콤한 기운이 몸에 퍼진다 

아주 차갑고 
아주 달콤한 기분이. 











"농구는?" 
"졌단다" 
"맞나?" 
"의대는 농구 보러 갔단다, 아까 빙그레가 끝나고 넘어와서 말해주대" 
"역시 농구 응원을 갔어야 했다, 내가 응원을 안 가가 진기라" 
"그래도 야구는 이깄응게, 칠봉이도 오늘 마음 편하것어" 


정기전 야구 경기는 연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경기 전 컨디션은 어떤거 같냐고 일찍 덕아웃에 음식을 들고 다녀온 해태에게 물었을 때만 해도 
평소랑 비슷하다던디, 정도의 심심한 대답을 들었는데 

막상 마운드에 오른 칠봉은 
도저히 평소와 비슷한 수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아니 그게 평소에도 늘 그래와서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칠봉은. 또다른 완봉승을 거뒀으니까 


야구 경기의 승리를 미처 만끽하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펼쳐진 농구 경기는 거의 20점차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하는 나정을 보다 뒤쪽으로 슬쩍 빠져 벽에 기댄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모양이다 
야구장까지 오는 지하철에서 앉아서 졸아서 그나마 기운이 좀 돌아온 줄 알았고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동안은 솔직히 칠봉이 매우 잘던진다는 정도만 알았지 
(그건 야구를 전혀 몰라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어서) 
나머지 경기는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응원전이 치열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지쳐있는 줄 몰랐다 


"기차놀이는 어디서 한다냐?" 
"신촌 아니냐?" 
"올해는 안암이라던데?" 
"안암에 뭐 먹을 데나 있나?" 


시끌시끌 떠드는 동기들을 뒤로 하고 잠깐 어질해서 벽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저는 일단 집으로 가야겠단 생각을 한다 
내일도 아침부터 또다시 정기전 응원이 있다던데 
그거까지 빼먹지 않으려면 기차놀이고 자시고 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오늘까지 술을 마셨다간 도저히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게다 


"괜찮냐?"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뜬다 
어느새 빠져나왔는지 해태가 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다 


"... 괜찮어" 


아마도 계속된 응원 탓에 목을 많이 써서 그런지 괜히 목소리가 좀 잠긴 채 나온다 
제가 한 말과 달리 전혀 안 괜찮게 들린다, 라고 생각한다 
해태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찌푸린다 


"집에 가서 쉬어야하는 거 아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윤진은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해태가 윤진의 어깨를 툭 두드린다 


"잠깐 여그 있어봐야" 


어디 갈 힘도 없는데 
새삼스럽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짝 고갯짓을 한다 
아직도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동기들 사이로 돌아간 해태가 
누군가 찾는 것 같더니 기태에게 뭐라뭐라 말을 하기 시작하는게 보인다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멍하니 보고 있는데 누군가 윤진의 어깨를 툭 친다 


"어? 조윤진?" 


이건 또 뭔가 싶어서 귀찮아하며 고개를 든다 


"이야, 니네 과도 응원 왔냐?" 
"야구? 농구?" 
"농구는 우리가 이긴 거 알지?"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한데 가물가물한 남자애 셋이 조로록 반갑다는 듯 윤진을 둘러싼다 
대체 왜 저에게 저렇게 친근한 척을 하는 건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 한다 


"니네도 기차놀이 가냐?" 
"안암으로 갈거지?" 
"야, 오늘은 승부 봐야지, 너 어제 그렇게 가버린 거 무승부야" 


그제야 기억이 난다 

원호. 영호. 산호. 

호자 돌림으로 끝난다고 새끼호랑이 삼인방이라고 소개했던 고대 컴공과 94학번들, 
그리고 윤진에게 이겨보겠다고 어제 덤벼왔던 술상대. 

술,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윤진은 저도 모르게 멈칫 기대고 있던 벽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선다 


"니네 설마 신촌으로 가냐?" 
"아, 니네 과 다 여기 모여있구나" 
"야 근데 우리 애들은 어디 갔냐?" 
"여기 파란 색만 드글드글하다, 그쪽 빨강 보여?" 


아따 머시매들이 말 참 허벌나게 많네 


성격대로라면 벌써 늬들이 무슨 상관이냐며 한마디 쏘아붙였을텐데 
그래도 같은 과 친구도 아니고.. 정기전이 끝나면 다시 볼 사이도 아니며.. 
연대 컴공의 이미지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끝까지 꾹 눌러 참는다 
슬쩍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뒷걸음질 딱 두발짝 디뎠는데 눈도 밝은 호랑이 새끼가 고새 그걸 알아챈다 


"야, 어디 가냐?" 
"도망가는 거 아니지?" 
"오늘은 자존심 걸고 승부 봐야지" 
"걱정마 안암엔 술 많아" 


흐으윽 진짜! 


마치 포위당한 것처럼 사방에서 달려드는 말 때문에 
안그래도 흔들리는 머릿속이 더 아파지려고 한다 
체면이고 이미지고 뭐고 간에 한대 확 갈겨버릴까 하고 주먹을 꼭 쥐는데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훅,하고 잡아채 확하고 끌어당긴다 



"어이 정대만이 여기서 뭐하냐" 


헤드락을 걸듯이 뒤에서 한 팔로 제 목을 끌어당긴 사람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여기서 뭐하기는, 니가 여기 있으라면서! 


대답하고 싶지만 그다지 팔이 꽉 조인 것 같지도 않은데 숨이 턱 막혀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윤진의 목에 팔을 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긴 채 
해태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제야 알아차린 듯이 새끼호랑이들을 부른다 


"어이, 원호! 느그들도 여그 응원 왔냐?" 
"어! 니네는 어딨었냐?" 
"우리는 야구, 우리가 이긴 건 알제?" 
"운이 좋았네, 농구는 우리가 이겼는데" 
"뭐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앙게로" 


제 머리 위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니 왜인지 
꼭 피가 몰리는 것처럼 얼굴에 열이 나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새액 하고 몰아쉬는 소리가 난다 
이상한 기분에 어째야할지 모르겠어서 윤진은 푹하고 고개를 숙여 머리로 얼굴을 가려버린다 
그런 윤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던 해태는 끝까지 여유작약하게 인사를 나눈다 


"안암으로 오는 거지?" 
"글씨, 지금 얘기 중이던디, 느그 과대랑도 얘기하지 않았겄냐" 
"하여간 오늘은 승부다?" 
"그랴, 그럼 좀 있다 보드라고" 


고개 숙인 시야 안에 있던 운동화 세 켤레가 저쪽으로 사라진 후에야 
해태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윤진을 놓아준다 


"괜찮냐?" 


대답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선 윤진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그러니까 그새 무슨 일이 더 생긴건가 싶어서 
해태가 조심스레 허리를 굽혀 묻는다 


괜찮냐면. 


윤진은 생각한다 


좀전까진 그저 머리가 조금 아프고 힘이 없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숨을 쉬기 어렵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 같고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그러니까 이건 다, 


"괜찮냐니까" 


너 때문이잖아! 


울컥해서 고개 숙인 제 시야 안에 들어와있는 해태가 신은 운동화를 있는 힘껏 콱,하고 밟아 버린다 


"억!" 


꽤나 큰 비명을 지르면서 해태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에 놀라 해태와 윤진을 돌아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해태에게 씩씩거리며 버럭 한다 


"나가, 그리 부르지 말라고 혔냐 안혔냐" 


해태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뜬다 
제가 말하고도 억지스럽단 생각에 그냥 확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어가버린다 


"아야, 윤진아, 화났냐? 나가 그게 그랄라고 그런 게 아니고" 


뒤에서 졸졸 좇아오면서 변명하는 해태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차마 걸음을 멈추거나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너 때문이잖아. 

지금 내가 이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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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결과 94년 연고전의 야구 경기는 0:7로 고려대 승리... 가 역사의 진실이지만, 
차마 칠봉이를 패전투수로 만들 수 없었던 나냔은 역사를 왜곡하기로 함... 칠봉아 화이팅 ㅠㅠ 

정말로 '윤진이가 황혜영 코스프레 하는 걸 보고 싶어'로 시작한 '딸기우유'에서 
그래도 왜 윤진이가 하겠다고 했는지는 설명해야겠지? 라고 생각해서 '딸기우유 H-side'를 쓰고 나서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왜 이걸 1, 2편에서 계속되는 걸로 바꾼 3편을 쓰고 있는가.... ㅋ 

냔들 때문이야 냔들!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고, 그리고 다음 편을 요구해준 냔들 때문이라고! 고마워 ㅎㅎㅎㅎ 

(그리고 어느 냔이 물어봤던 거 대답, 여기서 - 응 알아 mdp 심지어 나 갖고 있었는걸 파란 색 소니 mdp) 





[1994년 9월 29일 밤]





"정신 좀 차려봐야"



윤진에게는 너무 큰 해태의 운동화를 신은 탓에 세번쯤 크게 넘어질 뻔 하고

그러고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 큰 신발을 끌고 달리기를 하려는 듯 폴짝거리고

하여간 파란만장하게 겨우겨우 하숙집까지 오느라 제 발에 신발이 없다는 것도 잊을 정도다



차라리... 얌전하게 잤던 어제가 운이 좋았던 거구만.



손에 달랑거리며 들고 있던 윤진의 구두를 가지런히 현관에 내려놓고

드디어 에너지가 다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진을 흔들어깨운다



"응?"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여기가 어디냐는 듯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하아.... 하고 진심어린 한숨이 나온다



"올라갈 수 있겄냐?"



해태가 가리키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보더니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난 윤진은 휘적휘적 걸어서 계단 손잡이를 잡고 

도.도.도.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고개를 절레 젓고 아마도 흙이 가득 묻었을 양말을 벗어 손에 쥐고 

윤진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윤진아"



가방을 넣어주려고 반쯤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이불도 안 펴고 벽에 기댄 쪼그린 자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야, 일어나봐야, 윤진아"



귀찮다는 듯 흔드는 해태의 팔을 털어낸다



"어이 정대만이, 씻고 자야할 거 아녀, 얼른 인나"



정대만이란 말은 어떻게 용케 들었는지 부르르 고개를 털더니 부릅 눈을 뜬다



"어여 가서 씻고 와, 약통 갖고 올테니"



눈도 떴는데 설마 또 자진 않겠지 생각하고 

일단 1층에 내려와 찬장에서 언젠가 칠봉이가 꺼내쓰는 걸 봤던 구급상자를 겨우 찾아낸다

상자 안의 옥도정기와 대일 밴드를 가지고 2층에 올라오니

그래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윤진이 또 조금 전 같은 자세로 꼬박꼬박 졸고 있다



가시내...



곤란한 듯 옆머리를 긁적한 해태가 방 한 쪽에 쌓여 있던 요를 깔고 윤진을 흔들어 깨운다



"윤진아"

"응?"


게슴츠레 뜬 눈이 영 정신은 없어보인다만



"다리 펴봐"

"응?"



다리를 모으고 쪼그린 채니 아까 본 상처에 약을 바를 수가 없다

해태가 발 끝을 톡톡 두드리자 뭔가 이해가 안되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천천히 다리를 편다



나가 니땀시 별 짓을 다한다



발뒤꿈치에 어떻게 약을 바르라는 건지 대체 알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발을 돌려보라던가 하는 요구를 한다고 한들 제대로 들을 것 같질 않아서 

차라리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몸을 숙여 고개를 돌려 상처를 찾는다



가시내 독혀라 피 나기 직전이구만



빨갛게 벗겨진 살갗 위에 옥도정기를 바르자 따가웠는지 바르르 떤다

놓쳤다간 혹시라도 이불에 옥도정기를 흘릴까봐 조그만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꼭 쥐고 어설프게 대일밴드를 붙인다

그러고서야 다리를 놓아주자 쓰라린지 밴드 위로 긁적이려고 한다

얼른 상처로 향하는 윤진의 손을 막아 잡아채서는 질질 끌어다 이불 위에 눕힌다


뭔가 폭신한 걸 느꼈는지 윤진은 꼬물대면서 팔을 뻗어 베개를 찾는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여서 머리를 베개에 올리고는 옆으로 둥글게 구부린 상태로 눈을 감는다

그대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윤진에게 옆에 접혀있던 이불을 펴서 덮어주자 반사적으로 이불 끝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편안해 보이는 윤진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다 그새 가지런히 던져놓은 옷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온다


깜깜한 거실에 나와 마침내 혼자 서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오고 만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 많은 몰랐던 걸 알게 됐고

너무 많은 새로운 걸 보고 말았다



그러니 제발,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제 술 좀 그만 먹자, 정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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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