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in-paris




(Y's side) 





[1994년 10월] 



똑.똑.똑.똑. 



규칙적으로 도마를 두드리는 칼질 소리가 들린다 
치익, 하고 국 끓어오르는 소리에 칼을 내려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를 돌아본 어머니가 식탁 쪽을 바라보고 묻는다 


"윤진아, 니 진짜 그래 무도 되겠나? 쪼매만 있으면 제육볶음 볶을긴데 이거 해가 밥 더 무라" 


아직 채 차려지지 않은 밥상에 마른 반찬과 김치를 놓고 밥을 먹고 있던 윤진이 고개를 살며시 젓는다 


"아녀라, 충분혀요" 


아무리 봐도 충분하지 않게 밥알을 셀 기세로 깨작거리는 윤진을 안쓰럽게 본다 


"니, 그래 묵고 댕기가 공부가 되나? 공부도 체력이라 안하나 
 만날 새벽같이 도서관 가믄서, 점심, 저녁은 제대로 묵고 있는기제?" 


고개만 끄덕이는 게 더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마음이 쓰인다 
누구는 저렇게 없는 기운에 공부한다고 아침부터 나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지금 일어나기는커녕 정신도 못 차렸을게다 


"니 이래 안 묵고 댕기는거 아시믄 느그 어무이가 걱정하실긴데, 좀 더 무라. 
 그나저나 다같이 시험기간 아이가? 어째 만날 니만 도서관에 가노, 우리 나정이캉 도서관 근처도 안오제?" 


나정이... 도서관.... 본 적 없.... 다고 말하면 안되겠지 싶어 멈칫 망설이는데 
제대로 눈도 못 뜨고 부스스한 머리에 허리를 한 손으로 버티고 나정이 느릿하게 부엌에 들어선다 


"엄마, 와, 내 뭐, 내 찾았나"? 

하품을 하며 긁적긁적하는 나정에게 타이밍이 좋지 않다고 눈짓을 주지만 
나정은 아직 반쯤 눈을 감은 상태라 윤진의 다급한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 나정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어머니가 확하고 어깨를 후려갈긴다 


"아! 아침부터 뭔데!" 
"뭐긴 뭐고, 윤진이는 만날 이래 새벽같이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데 니는 만날 술이나 묵고 댕기고 
 니 등록금은 어데 땅파서 나오는 줄 아나?! 어? 니 학교서 도서관 근처는 가나" 


잠이 확 달아난다 
윤진이 짧게 고개를 흔들, 납작 엎드리라고 눈짓을 준다 
나정은 뚱한 표정으로 대꾸없이 식탁에 부스스 앉는다 


'니는 와' 
'나가 뭣을' 


너는 왜 아침부터 도서관엘 가서 사람을 괴롭게 하느냐고 눈짓을 주자 
내가 뭘 어쨌기에 그러느냐며 윤진이 입술을 삐죽한다 
둘이 그러고 있는 줄은 모르고 달궈진 후라이팬에 제육볶음 양념한 것 약간을 후딱 볶은 어머니가 
접시에 담아 윤진이 앞에 내려놓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는다 


"윤진아, 이거 해가 밥 쪼매만 더 묵고 가라, 무야 기운 내서 공부도 하제, 
 나정이 니 씻지도 않고 식탁에 앉지 말라캤제" 
"아 씻을기다, 씻을기야" 


휙휙 손을 내젓기만 할뿐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이는 나정을 못마땅히 내려다보다, 다급하게 짝, 하고 박수를 친다 


"맞다, 아-들이 깨워달라 캤는데, 늦은거 아인가 모르겠네, 나정아 국 좀 봐래이" 
"응, 응" 


후다닥 2층 으로 올라가는 기척이 사라지자 가만히 윤진이 깨작이며 밥을 먹는 걸 바라보던 나정이 나직하게 말한다 


"윤진이 니, 좀 적당히 해라, 니랑 비교되가 몬살겠다. 무슨 기운이 그래 남아 도노 니는" 
"... 공부를 기운으로 하는가, 애정을 하는기제 니는 나의 사정을 다 알면서 또 그라냐, 니도 이 상황이믄 새벽부터 책 파고 있을 거구먼" 


불만섞인 윤진의 대꾸에 멍하니 있던 나정이 그제야 생각난 듯 짝, 하고 박수를 치더니 씨익 웃는다 


"맞다, 니 장학금 안 타믄 여수 집에 내리가야한다켔제" 


뭐 정확하게는 장학금이 아니라... 학점 4.0이지만... 
그게 그거지 싶어서 윤진은 고개를 끄덕한다 


"하기사, 팬의 애정으로야 뭔 일이든 몬하겠노, 이해한다, 깜빡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애교섞인 허스키한 나정의 목소리에 둘이 눈을 마주치고 슬쩍 웃고 만다 
그래도 이 신촌 하숙에 태지 오빠를 향한 애정을 - 비록 영역을 다르지만 -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라믄 내도 상민이 오빠야에 대한 애정으로 오늘은 도서관이나 가보까, 도서관에 자리 많나?" 


이유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평소보단 꽉 차는디 오전에는 한두시간 메뚜기 뛰면 금시 자리 날겨, 
 글고 담주가 시험기간인디, 인자 니도 도서관에 좀 보일 때가 되얐지 싶다 나의 생각에도" 
"맞나, 그럼 씻고 가봐야겠네" 


윤진의 핀잔을 흘려듣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나정이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맞다, 윤진아 니 어제 해태 만났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예상치 못한 이름에 막 입속에 베어 물었던 밥이 튀어나올 뻔 했다 
대체 여기서 그 이름이 왜 튀어나오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정을 바라본다 


"어제 니 나가고 아침에 니 찾길래, 도서관 갔다고 말해줬는데, 못 만났나?" 


.... 못 만났다 

아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 
안 만나고 싶다 


중간고사 공부를 위해서 도서관행,이라는 좋은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서서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다가 밤 늦게나 돌아왔지만 
일부러 1학기 때보다 더 빨리 나가서 더 늦게 들어오게 된 건 조금은, 10%쯤? 아니 절반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도 있다 

.... 미쳤냐, 싶긴 하지만 


그렇지만. 


자꾸 제 목에 감겨 있던 팔이라던지 
위에서 들려오던, 그래서 다르게 들리던 목소리라던지 
어쩐지 끌어안겨 있는 것 같던 느낌이라던지 
하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 뒷 머리에 두근두근 느껴지던 심장 박동이라던지 


으악, 사라져! 사라져! 



갑자기 고개를 휙휙 젓는 윤진을 나정이 황당하게 바라본다 



하여간 뭐 그런 게 자꾸 생각나는데 어쩌란 말인가 
속이 자꾸 울렁거리고 얼굴이 이상해지는데 
이런 상태로 본인까지 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는 듯 잠깐 심호흡을 한 윤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흔든다 


"아니, 못 만났으" 

뭔가 매우 어색하지만.. 일단 나정은 고개를 끄덕인다 


"맞나? 이상하네, 니 급하게 찾던데" 
"... 필요하믄 삐삐 치것지" 
"... 하기사" 


여러가지로 납득이 가진 않지만 일단 윤진이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고로 
씻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식탁을 짚고 일어선다 


"아, 맞다" 


멍한 목소리로 나정이 중얼 한다 
그 말에 윤진은 또 가슴이 철렁한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의 나정은 어째 시한폭탄같다 
저에게만 안겨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간 떨리게 하는 

'또 뭐가 맞냐아, 나정아 나 머리 복잡항게, 제발 좀 가서 씻어야! 암것도 생각하지 말고!'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소리치는데 
당연히 들리지 않는 나정이 윤진을 내려다 본다 


"해태가 말했나?" 


또 그 이름. 

아까는 만났냐더니만 이번엔 말했냔다 

성나정은 거두절미 하는 저노무 급한 성질머리를 고쳐야한다 
아니 국어공부를 새로 해야하는 건가 


"뭘 말이여?" 
"소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단호하게 대답하는데 
그게 아직도 유효한 거였냐고 묻지도 못했다 


",,, 지가 마시고 싶어서 마신거를 나가 왜 갸 소원을 들어줘야 한당가, 
 나가 시킨 것도 아니요 부탁을 헌 것도 아닌디" 
"윤진아" 

진지한 표정으로 나정이 저를 내려다본다 
오늘 아침 가장 단호한 얼굴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조금 움찔 한다 
저를 빤히 바라보던 나정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라믄 안돼, 암만 니가 말을 안 한 거를 해태가 알아서 마신기라 해도 그건 아이제 
 니 그 날 그 술 다 마셨으면 그 다음날 움직이지도 몬했을기라 
 기억 안 나나, 다음날 아침에 천포랑 해태랑 쌍으로 술병 난 거" 


... 당연히 기억 안 난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내내 새벽같이 도서관에 가서 내내 틀어박혀있었으니까 
아무도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없었고 그러니 알고 있을리가 없다 
아니... 좀 미안 하긴 한데.. 근데.. 그래도 소원은 좀.... 


"하여간에"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는 윤진에게 나정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해태가 소원 말하면 그기 뭐였는지 내한테 좀 말해도" 





일단, 소원 자체를 들어볼 생각이 없지만 그걸 들었다쳐도 왜 나정에게 말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윤진을 향해 그제야 나정이 멋쩍게 웃는다 


"암만 뭐냐고 물어봐도 절대로 말을 안해준다 아이가, 
 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라는지 궁금해 죽겠다 
 난중에 해태가 소원 말하는 대로 꼭 내한테 말해도, 알겠제?" 



.... 뭐 그렇게 대단한 걸까 싶지만. 


.... 말을 한다고 한들 들어줄 생각도 없지만 


.... 근데 그걸 왜 말 안하고 있는지, 이렇게나 궁금해할정도면 나정이 보통 괴롭힌 게 아닐텐데, 


.... 뭐길래 말을 안하는지는 좀 궁금... 하지만... 


"말허믄, 들어보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제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나정에게 내키지 않은 듯 말해준다 
도로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 숟가락을 뜨는데 2층에 올라갔던 어머니가 내려온다 


"일났드나" 
"깨우긴 했는데 모르겠네, 해태가 오늘 꼭 일찍 깨워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래?" 


나정의 눈이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얼른 만나서 꼭 듣고 저에게 말해달라는 거겠지 
분명한 의미까지 말없이 전달되지만 모르는 척 얼른 숟가락을 놓고 일어선다 

얼른, 

마주치기 전에. 












아후. 



목이 뻐근한 것 같다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천천히 한바퀴 돌린다 
도서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한다 


3시 15분.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약 2시간 정도 움직이지 않았다 
글씨가 빼곡히 적힌 노트를 휘릭 넘겨본다 
아직 연습문제의 2/3밖에 풀지 못했는데 오늘 내로 다 풀수 있을까 모르겠다 

.... 끝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한다 
역시 당분을 좀 섭취할 때가 되었다 싶어서 지갑을 꺼내들고 열람실을 빠져나온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인 시험기간이어서 그런지 도서관 복도가 꽤 붐빈다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도서관 바깥 매점으로 간다 


"딸기우유 하나요" 


매점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딸기우유 팩과 빨대를 받아들고 계산한다 
그리고 빨대를 팩에 꽂아넣고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이, 윤진아"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윤진은 멈칫 그 자리에 서서 천천히 비어있는 손을 들어 귀를 톡톡 두드려본다 

잘못 들었겄지, 암만. 


"어이, 정대만이, 어디 가냐" 


다시 걸어가려고 하는데 좀전의 그 목소리가 뒷머리를 확, 잡아챈다 
아니 그보다 저렇게 저를 부를 사람은..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길 헛되이 바라면서 휙하고 돌아본다 
매점 옆에 있는 통나무 벤치에 앉아 싱글거리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이 딱 마주친다 



오. 마이. 갓.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만다 
당장이라도 모르는 척 돌아서고 싶은데 이미 눈이 마주친 이후라 그러기도 어렵게 되었다 
계속 싱글거리면서 저에게 손을 흔들어 부르는 해태를 향해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심정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여서 뭣하냐?" 
"워메, 학생이 도서관서 공부를 허지 뭣을 허것냐" 


도무지 진실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태도다 
이런 녀석 때문에 내내 울렁거리고 속이 속이 아니어서 도망다녔다는게 짜증난다 

아무래도 내가 잠깐 미쳤었나봐! 

시답잖다는 듯 그냥 돌아서려고 하는 윤진에게 해태가 제 옆자리를 톡톡 치고 손짓 한다 


"뭐여" 
"앉아봐야" 
"나가 거그는 왜" 
"니 지금 쉬러 나온 거 아니냐, 서있지 말고 앉으라고." 


.... 틀린 말은 아니다 
뭔가 .. 뭔가 말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 하지만 
저렇게 반짝반짝 올려다보는데 니 옆에 앉기는 싫다, 라고 거절하기도 뭣하고.. 

윤진은 잠깐 망설이다 영 내키지 않는 듯이 옆자리에 걸터앉는다 
윤진이 자리에 앉자 해태가 옆자리에 놔뒀던 쌍쌍바의 포장을 뜯더니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듯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쌍쌍바를 가르기 시작한다 


니... 뭐하냐... 


갑자기 뭐하는 짓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고심했던 보람도 없이 결국 똑같은 크기로 나누는데 실패한다 
잠깐 두 개의 쌍쌍바를 양 손에 들고 고민하던 해태가 큰 쪽을 쑥,하고 내민다 

"아나" 


이건 또 뭐여....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답지 않게 또 배시시 웃는다 


"먹어야," 
"....니나 많이 먹어" 
"야, 사람 성의를 생각혀서라도 좀 받어라, 니는 어째 그래 만날 까칠허냐" 


이미 손에 쥐고 있는 딸기 우유도 있고 쌍쌍바라니 땡기지 않아서 그런건데 굉장한 부탁이라도 거절한 듯이 칭얼거린다 
아니 그보다 내가 까칠한데 니가 뭐 보태준거 있냐?! 


내민 손을 모른 척하고 뚱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재촉한다 


"니가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이믄 나도 흐름을 내 쪽으로 가져오는 송태섭이랑게, 팔 떨어지겄다 언능 받어야" 


....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또 그렇게 배시시 웃는다 
.... 어휴 진짜.... 


"작은 걸로 줘야, 나는 단 거 이미 충분히 먹었응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더 듣느니 그냥 먹고 말겠다 싶어 반대쪽 작은 조각을 향해 손을 뻗는다 
윤진의 손에 쥐어진 딸기우유를 보더니 그제야 순순히 작은 쪽을 내민다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딱히 별다른 대화는 없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가을 답게 파랗다,라고 생각한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소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다 
캠퍼스의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음악처럼 들려오고 
부웅하고 짜장면 배달을 가는지 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가 그 음악을 깨트린다 


하아, 가을이네.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금새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한 손에 쥐고 
딸기 우유 빨대를 쪽쪽 빨면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윤진을 
벤치 뒤쪽에 기댄 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해태가 말한다 


"날씨 좋-다" 
"... 그르네" 


의외로 순순히 나온 윤진의 대답을 잠깐 음미하던 해태가 싱긋 웃는다 


"아따 근디 니는 하루종일 저런 감옥 같은디 갖혀서 안 피곤허냐 
 밖에 날씨가 이러코롬 좋은디, 해도 안 보이는 열람실에 하루종일 앉아서" 


... 그러면 그렇지 니가 무슨 공부를.. 


"공부를 환경으로 한당가, 허야 항게 허지. 날씨가 뭔 상관이고 해가 뭔 핑계여 
 등록금 보내주시는 느그 엄니 생각을 혀봐라 만날 스페이스나 싸돌아 댕기고 싶은가" 


한심스러워하는 티를 감추지 않고 타박하는데, 
해태는 싱긋 웃기만 할 뿐 평소처럼 버럭 하질 않는다 


"화아... 역시, 인정. 나가 니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당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저를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절 놀리는게 분명하다 


"근디, 니 독헌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 참 칼이구마잉 
 시계도 아니고 어찌 만날 이 시간에 딱 맞춰서 매점에 내려오는가, 
 몸에서 이제 내려가야혀요. 하고 알려주나?" 


응? 


아무래도 그만 말을 섞고 올라가야지, 라고 생각해서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를 다 마신 빈 우유곽에 집어넣던 윤진이 그대로 멈춘다 

뭔가 지금 굉장히 마음에 걸리는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반쯤 얼어버린 채 저를 보는 윤진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보던 해태가 스윽, 하고 기대고 있던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좀전에 한 말은 없었던 일인 양 태연하게 다른 말을 한다 


"근디, 니 나헌티 할 말 있지 않냐?" 


어? 


아직 좀전의 맘에 걸리는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바로 직구로 날아온 다른 질문에 그대로 멈춰버린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이 순간 복잡해져서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피하고 싶다 

근데, 내가 할 말이라니? 


"나가 니헌티 할 말이 뭐가 있당가" 
"아야, 잊어버린겨? 뭐여 나는 중요허게 생각하고 있었는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설마 사과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닐거고 
고맙다고 감사할 일이 있었을리도 없고 
해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은 잊어버릴만한 말이... 


그런 거라면... 


문득 아침에 들은 나정의 말이 떠오른다 


흑기사. 
다음날의 술병. 
소원. 


그런데 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니라 니가 나한테 해야할 말인 거 같은데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대답한다 


"소원 말이냐? 그거야 니가 사서 고생한거고, 나가 시킨 것도 아닌디 니 소원을 왜 들어준당가, 무효여 무효 그런거는" 


저를 보고 내내 싱글거리면 해태의 표정이 멈칫, 한다 
윤진은 괜히 속으로 뜨끔한다 


아니 뭐.. 다음날 아팠다니.. 좀 미안하긴 하지만.... 


살짝 켕기긴 하지만 모른 척 당당하게 해태를 바라본다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던 해태는 이내 도로, 조금 전보다 더 장난스럽게 씩 웃는다 


'아아, 그거 말여? 그려 그것도 있고." 


그것도 있고? 

해태의 대답을 들은 윤진의 눈이 저절로 커진다 


설마 잊고 있던 걸 깨닫게 해준건가?! 


제 무덤을 스스로 팠다는 생각에 윤진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진다 
내내 무표정한 평소 와 달리 제 말에 휘둘려서 시시각각 감정을 드러내고 마는 윤진이 재미있다는 듯 해태가 싱글거리며 빤히 바라본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도 감정이고 동요를 드러내는 것도 불편한데 
그걸 알아차리고 재미있어하기까지, 그걸 재미있어하고 있단 걸 감추지도 않는 태도가 불편해서 
퉁명스럽게 정색하고 묻는다 


"그럼, 그거 말고 뭐?" 
"니 나헌티 할 말 있는디, 진짜 기억 안나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냥 말을 속시원히 하면 좋겠건만 대체 무슨 말을 자신이 해야하길래 저렇게 빙빙 돌리기만 하는 건지 
아니 애초에 할 말이 있긴 했던 걸까? 
지금 놀리는 거 아니야?! 

의구심이 모이다 못해 폭발하려는 무렵 
제가 던져놓은 폭탄의 위력 같은 건 대체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게 해태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선다 


"나 갈텐게, 잘 생각해보고 생각나믄 말혀라 
 니가 말한 내 소원도 생각하고 있을텐게" 


어? 어? 어? 


부르지도 못하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윤진을 향해 씩 웃은 해태는 
매점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휙,하고 던져 골인 시키더니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는 여유롭게 도서관으로 사라져버린다 


뭔가 지금 심각한 정신적 유린이라도 당한 것 같은 충격에 빠진 윤진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도서관 입구 쪽을 바라보고 
그대로 두 손에 딸기 우유 곽을 꼭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고요하지만 
지금 윤진의 마음 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다 못해 무너지기 직전이다 

머리가 온통 복잡해져버렸다 
방금까지 풀다 나온 연습문제 같은 건 다 날아가버렸다 
엄마 생각하면 놀 생각이 드느냐고 일침을 날렸는데 
지금부터는 저야말로 공부,가 다시 될지 모르겠다 


뭔데! 
대체 뭐냐고 내가 해야할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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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이가 해야할 말은....해태는 들었지만 윤진이는 말한 기억이 없는... 
어제야 비로소 딸기우유와 본편의 분리가 어느정도 가능해져서.. 재개해봤어.. 
사건의 진전이 통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다시 딸기우유를 쓰기 시작했다는 거에 의의를 두려고 함.. 

비루한 글 기다려준 냔들^^ 읽어주는 냔들 고마워~늘~





Posted by april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