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side)
=
"죄송합니다!"
탁, 탁, 탁, 탁, 탁,
중간고사가 끝난 금요일 저녁의 신촌은 공기 반, 사람 반에 가깝다
가히 사람이 흘러다닌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신촌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누군가에게 부딪혀 꾸벅하고 인사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뛴다
'니 이번에도 안오믄 직이삔다, 강촌이 먼데도 아이고 기차 한번만 타믄 된다 아이가
시험 끝나는 대로 냉큼 역으로 뛰가라, 후발대 신촌역서 기다리고 있다카이
니 시험 6시에 끝난다 캤으니 여섯시 반까지는 올 수 있제? 니 올 거라고 기다맀다가 델고 오라고 말해놨다.
그라니까 늦지 말고 가래이, 씰데없이 안 나타나고 이카믄 집에 가서 죽는데이. 좀 있다 보자'
나정의 삐삐 메세지가 귓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는 일부러 만든 거겠지만 그래도 꽤나 위협적이었다
1학기 엠티에는 자연스럽게 빠졌지만 그동안 동기들이랑 꽤 친해지기도 했고
이제 2학년 올라가면 엠티 같이 가기 어렵다는 선배들 이야기도 있었고 해서 안그래도 2학기 엠티는 참석할 생각이었다
다만,
6시.
6시는 시험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걸 나정은 왜 몰랐을까
아니다 애초에 친구들과 떨어져 쓸데없이 무려 연희관씩이나 올라가서 들어야하는 교양 수업을 신청한 제 잘못이다
그렇다고 한들 설마 중간고사 시험을 대형 강의실을 잡기 힘들다면서 시험기간 마지막날 저녁으로 잡을 거란 걸
그래서 엠티 출발 시간에 정확히 겹칠거란 걸 어떻게 알았겠느냔 말이다
허겁지겁 뛰어가면서 손목 시계를 확인한다
벌써 7시 50분.
7시 반에 시험지를 내고 나와서 단숨에 백양로를 내달려서 여기까지 뛰어왔지만 어느새 8시가 다 되어버렸다
설마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못 간다고 연락을 해야 하나
일단 뛰고는 있지만 머릿 속이 복잡하다
이제야 저 멀리 신촌역 광장이 보인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뒤로 하고 어느새 사람들 없이 한산한 역 안으로 뛰어든다
출발하려는지 창 너머로 흔들흔들한 기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급한 마음에 창 쪽으로 달려가 텅빈 플랫폼을 확인한다
저 열차에 타버렸거나 이미 출발했거나 아니면..
어쩌지,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잘근,하고 씹는다
일단 나정에게 삐삐라도 쳐야겠다는 생각에 공중전화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린다
그때 꽤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왜 안된대요."
"학생, 지금 몇번째 바꾸는 건지 알아?"
"기차 출발 안 혔고, 사람이 아직 안 왔고, 그랴서 다음 열차로 바꾼다는디 뭐가 문제여요. 여그 규정도 써있구만."
"벌써 몇번째야, 탈 시간으로 사라니까 자꾸 바꾸지 말고."
"아니 사람이 언제 올 줄 알고 딱 그 시간으로 산대요, 사람 오면 탈텐게 좀 바꿔주쇼잉."
발매창구에 서서 실갱이를 하고 있는 해태를 발견한다
저 녀석은 저기서 뭘 하는 건지, 그렇다면 후발대인 다른 애들은 다들 어딜 간건가 하고 두리번거린다
결국 원하는 걸 얻어냈는지 창구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해태가 윤진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아야 왔냐. 시험 참 겁나 늦게 끝났구만."
"... 니가 후발대여?"
"아니믄 나가 여그 왜 있겄냐."
하기사...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혼자 남아 있었다고 하니 어쩐지 멋쩍어진다
얼마나 기다렸냐 라고 물어봐야하는 걸까, 아니면 어째서 혼자 있느냐고 물어봐야하는 건지,
그보다 강촌까지 가는 기차에서 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직은 해태를 마주하는 것이 불편한데, 하고 잠시 망설인다
말없는 윤진을 세워두고는 한산한 대합실을 휘 돌아본 해태가 묻는다
"니 저녁 먹었냐?"
"...아니."
먹을 시간이 있었을리 없다
시험 마지막 날이라 어제도 밤을 샌 참이다
아침부터 피치 올리느라 하루종일 거의 먹은 게 없었단 걸 깨닫자 그제야 배가 고픈 단계를 지나서 배가 살짝 쓰라려오는 것 같다
공복이 계속 되니 배고픔도 느껴지질 않고 긴장이 풀려서 머리가 지끈,한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는 윤진을 내려다보던 해태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기차 시간 남았응게, 매점서 뭐 좀 사서 타자. 가는 동안 기차서 먹으면 되겠네."
휘적휘적 매점 쪽으로 걸어가려는 해태의 옷자락을 얼결에 붙든다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아주 살짝 잡았을 뿐인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해태가 의아하게 묻는다
윤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귀찮다는 듯 대답한다
"나 차에서는 암것도 안 먹어야."
"에?"
제법 진지하게 말한 건데 한번에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에이 진짜.. 이런 얘기까지..
어릴 적 학교 수학여행이니, 소풍이니 하여간 흔들리는 것만 타면 해야했던 고생이 떠올라서 얼굴을 찡그리고 만다
그래서 아예 차나 기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걸로 해왔다
고작 이런 이유로 그렇게까지 하는게 조금 부끄럽기도 해서 그저 안 먹겠다, 라고 까칠하게 말하는 걸로 대체했는데
지금 저를 의아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이 녀석은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당장 매점으로 가서
억지로라도 빈 속으로 다니면 안된다고 뭔가를 사서 먹일 기세다
"나 멀미 심하게 혀서 차 타믄 암것도 안 먹는당게. 니꺼만 사믄 되야"
윤진의 대답을 듣고 심각하게 윤진을 내려다보던 해태는 이내 벽에 걸린 시계와 시간표를 바라본다
"니 오늘 밥 먹긴 혔냐?"
윤진은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머릿속으로 뭔가 세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 아침에 엄니가 챙겨주신거 말고, 점심이나 저녁이나 간식이나 뭐 하여간 먹은 게 있긴 혀?"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제가 제 밥 먹는데 알아서 몇끼 걸렀기로서니 왜 이렇게 죄지은 기분인지 모르겠다
잔뜩 심각한 눈을 마주하니 오늘 한 끼라도 먹었어야 하나 싶어진다
그래도 시험 준비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하이간에 니는 진짜..."
괜히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윤진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쉰 해태는 다시 발매 창구로 걸어간다
"아, 진짜, 학생 왜 이래?"
"막차로 바꿔 달라니께요 다시 읊어드려요? 여그 취소와 반환 규정에 따르면..."
"알았어, 알았어, 두 장이지? 반환 수수료는 별도야"
뭔가의 실갱이 후 티켓을 들고 돌아온 해태가 말한다
"가자."
"어?"
대체 어딜 가자는 건지 먼저 역 밖으로 발을 내딛는 해태의 뒷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진다
두어발짝쯤 걸어가던 해태는 윤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그제야 돌아본다
윤진이 따라나서는게 당연하다는 듯 따라오지 않는 걸 의아해하는 표정에 윤진은 또 당황한다
"기차 안 타고 어디 가냐?"
윤진은 간신히 해태가 나가려던 반대방향인 플랫폼을 가리킨다
"아아 밥 먹고,"
밥?
예상치 못한 말에 잠깐 멍해진다
저절로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하고 기울어진다
윤진을 보고 있던 해태의 고개도 같은 방향으로 스윽 넘어간다
그리고는 참으로 간단하게 덧붙인다
"니 차 타믄 암것도 못 먹는 담서, 여그서 먹고 출발하는 거는 괜찮지?"
"그렇긴 헌디, 지금 가도 늦은 거 아녀? 도착해서 먹으면 되야, 지금 꼭 안 먹어도 되는디 나는"
굳이 저 때문에 먹고 가겠다는 거면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 싶어서,
게다가 둘이 밥을 먹다니 대체 그런 상황에는 처하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 이상하지 않게 돌려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해태가 못마땅하게 잠깐 인상을 쓰더니 쯧쯧, 하고 고개를 흔든다
"아야, 니가 엠티를 안 가봐서 그러는가 본디 지금 이 시간에 강촌 도착해서 방에 들어가믄 술멕이기가 한창일 것이여
먹을 거 따우는 이미 고기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데 나의 손모가지를 걸 것구먼,
그라니께 저녁도 안 먹고 빈 속으로 가는 거슨 자살 행위다 이거제"
그.. 그런가?
분명 지난번 엠티를 못 갔으니 대체 엠티라는 게 어떤 스케줄과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모르긴 하지만
평소 나정이나 다른 애들 먹성을 생각하면 아침에 스쳐지나가듯이 들었던 삼겹살 같은 건
굽자마자 동이 났을 거라는 예상도 어긋나진 않을 게다
술 한번 먹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주당들 얼굴을 떠올리자니
해태의 말대로 도착하자마자 빈 속에 술부터 들이부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머뭇거리고 선 윤진을 힐끗 다시 본 해태는 툭, 툭, 걸어오더니 휙하고 윤진의 커다란 잠바 끝을 잡아챈다
기습적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휘청한 윤진이 놀라 반사적으로 버티자 쯧,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팔을 놓아주고는 한 발 물러서 손짓한다
"아 뭣하냐, 언능 가서 저녁 먹고 와야 막차 탄당게. 언능 나와야 언능."
=
"아, 여기네."
해태가 들고 있던 차표를 들고 번호를 확인해가다가 자리를 발견하고는
한 발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윤진에게 손짓한다
"니 들어가서 앉아라 나가 바깥쪽에 앉을텐게, 창 밖 보믄 멀미 좀 덜하담서"
그렇긴 하다
그나마 창가에 앉아서 멀리 시선을 두고 있으면 흔들리는 느낌이 덜 오기도 하고 창문을 열어서 바람을 쐴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기차에서는 그건 무리긴 하지만, 어쨌든 그동안은 그래서 늘 창가 쪽에 앉는 걸 고집해왔다
눈동자만 도르르 위쪽으로 들어 제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해태를 슬쩍 본다
고맙다고 해야하려나, 생각하다 그냥 눈을 아래로 깔고 쓱, 안쪽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나, 이것도 붙이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섬주섬 가방 안쪽에 넣어둔 워크맨을 꺼내고 있는데
제 옆자리에 앉은 해태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건넨다
분홍색의 붙이는 멀미약.
밥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굳이 약국에 들렀다 오겠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이걸 사려고 갔던 건가 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또 콘돔 사러 갔다 왔냐?' 하고 놀린게 약간 미안하기도 하고
일부러 생각해서 사온 걸 받자니 조금, 고마워지지만
"...이런 건 차 타기 몇 시간 전에 붙여야하는 거 모르냐 지금 붙이면 소용 없어야"
퉁명스럽게 대답해버린다
"글냐, 몰랐구만, 그라믄 낼 아침에 올 때 붙이든가"
고맙다는 말 대신 짜증을 냈는데도 언제나의 제 페이스 대로 배시시 웃어버린다
그 얼굴을 보니 또 괜히 한마디 더 해버릴 것 같아서 그냥 순순히 멀미약을 받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다가도 짜증이 났다가 또 금새 가라앉았다가 안절부절을 못했다가 자꾸 그래서
혹시나 옆에 있는 해태가 그런 자신을 알아차리기라도 할까봐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또다시 더 신경이 곤두서고 만다
잠이 모자라서 그런가...
어제 시험 때문에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혹시라도 버럭,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더이상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손에 들고 있던 멀미약을 가방 앞주머니에 집어넣고 꺼내뒀던 워크맨의 이어폰을 낀다
워크맨 플레이 버튼을 눌러 음악이 흐르기 직전에 해태가 뭔가 얼핏 저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걸 못 들은 척 창 밖을 바라본다
이미 밖은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져서 차창에 마치 유리처럼 안쪽의 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저를 부를까 말까 망설이는 듯 제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해태의 눈이
어쩐지 정면으로 제 시선과 마주친 것 같은 느낌에 순간 심장이 두근,해버린다
저 녀석은 대체 눈이 왜 저래.
꼭 내가 무슨 빚이라도 진 것처럼.
새삼스럽게 해태의 눈빛이 애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는데 지금 새삼 눈빛이 다르긴 하네,라고 깨닫고 보니,
그래, 해태에게 목맸다는 여자들이 숱한 것도 이해는 된다
뭔지 몰라도 아마 심심하니 얘기나 하고 가자고 하는 요청 이상은 아닌 말을 하려고 저를 부를까 말까 망설이는, 유리에 비친 눈빛조차 저런데,
제대로 된 말을 하려고 정면으로 바라보면 어지간한 여자면 흔들리지 않을까.
어지간한 여자.
몇이나 만났으려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르르 고개를 짧게 흔든다
별 생각이 다든다 진짜,
정신 차리고 다시 한번 바라본 차창에 비친 해태는 그새 포기했는지 무릎에 올려놓은 제 가방을 뒤적뒤적하고 있다
머시매가 끈기 없기는,
이게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괜히 허전해져서 삐죽 입술을 내밀고는 가방을 끌어안는다
덜컹,
하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컹철컹하는 규칙적인 흔들림을 느끼면서 가만히 창밖을, 어쩌면 창에 비친 그림을 바라본다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태지 오빠의 목소리에 기차의 흔들림에 맞춰 마음이 함께 흔들려버린다
두근,
두근,
하는 심장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서서히
=
추워....
어쩐지 공기가 찬 것 같다
바르르 순간 몸이 떨린다
뺨에 닿은 따스한 느낌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부비적, 한다
"아야, 윤진아, 인나야, 다 왔어"
누군가 살며시 어깨를 흔들면서 제 이름을 부른다
으음..
몸이 너무 무겁다
겨우겨우 실눈을 게슴츠레 하게 뜬다
"인났냐? 이제 우리 내려야혀, 정신 차려야"
반쯤 눈을 뜨고 겨우 올려다보자
걱정스러운 표정 반, 웃음을 꾹 참고 있는 표정 반이 섞인 묘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해태와 눈이 마주친다
헉!
정신이 번쩍 들어 화들짝 몸을 일으킨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고 멍청하게 있는 저와 달리
태연하게 조금 전까지 제가 베고 있던 어깨의 구겨진 주름을 쓱, 하고 문질러 편 해태는
무릎에 올려둔 가방을 메고 일어선다
"가자, 내려야혀 이제"
창밖을 내다보다 서서히 플랫폼에 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깜깜한 바깥, 여기가 어딘가 생각하다 돌아보니 이미 해태는 객차의 절반쯤 걸어간 뒤다
일단 저도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들고 조르르 따라간다
깜깜한 어둠에 역과 역 앞 슈퍼만 불을 밝힌 동네로 나선다
성큼성큼 걸어서 2차선도 안 될 것 같은 도로를 건너 슈퍼 앞 공중전화로 간 해태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예, 연대 컴공과, 예, 두명이요, 예 역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는지 아직 길 건너에서 두리번 하고 있는 저에게 후다닥 건너온다
그러고는 역 앞에 있는 난간에 느긋하게 기대선다
"뭐여?"
대체 왜 여기 서서 아무것도 안하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가로등만 켜져있는 어두운 거리에 서있는게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는데
태연하게 윤진을 바라본 해태는 제 옆을 툭툭 친다
"안가냐?"
"이리 와서 기다리믄 민박집에서 나오실거구만, 여그서 걸어서 못 가 이 밤중엔"
주변에 인가의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으니 걸어서는 못가는 곳이란 말이 납득이 된다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윤진도 난간에 기대선다
뒤로 기대서 말도 없이 뭘 그렇게 보고 있나, 하고 고개를 드니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는 별이 가득한 하늘이 보인다
화아.
여수 집에서야 익숙하게 늘 봤던 풍경이지만, 서울 생활 하면서 통 별을 볼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까만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윤진은 순간 넋을 잃고 입까지 벌린 채 헤 - 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샌가 하늘을 보던 눈을 돌려 그런 윤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해태의 얼굴에 살며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내내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서 기차에선 한마디 말도 못 걸게 하더니만
꾸벅꾸벅 졸다가 어린애처럼 무방비하게 저에게 기대서 잠들어버려서 한시간 넘게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그리고는 또 지금은 저렇게 해맑게 감탄하는 표정이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얼굴이 저 조그만 조윤진 안에 숨어 있는 걸까
아예 턱을 괴고 감탄하듯 윤진을 바라보던 해태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윤진에게 내민다
"아나"
"?"
갑자기 쑥,하고 내민 손바닥만한 상자를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해태를 바라본다
막상 호기롭게 내밀고 나자 쑥쓰러워졌는지 윤진이 받지 않은 상자를 손에 쥐고 내민채로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반대쪽 손으로 긁적긁적 옆머리를 긁는다
"니가 나헌티 말혔어야 하는 거"
잔뜩 경계하면서 해태를 살피다가 아무래도 거둘 생각이 없어보이는 상자를 받아든다
한번 더 힐끔 눈치를 보고 포장이 된 상자를 연다
윤진의 동작이 잠깐 멈춘다
"니가 그게 소원이람서, 정기전 장기자랑 해주는 대신에"
그래 그랬다 분명
그때 저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걸 보고 아아 그걸 달라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나서는 최근에 이것저것 머리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서 잊어버렸는데
아니 사실은 해태와 관련된 일이라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조금이라도 연관된 것들은 다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어떻게 알았지?
놀랍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해서 상자에 있는 CDP를 꺼낼 생각도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제 눈치를 계속 살피고 있던 해태가 무표정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실망한 듯 살짝 눈빛이 흐려진다
멍하게 올려다보고 막막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교차된지 몇 초, 해태는 조금 씁쓸하게 웃는다
"... 아니어도 받아놔야, 나가 그때 고마워서 주는 거라고 생각허고"
슬쩍 돌리는 시선에 베인 듯한 얕은 상처를 읽는다
어째서이지, 생각하면서 제 손에 쥐어진 상자를 내려다본다
보랏빛 금속 재질의 둥근 CDP...
손끝에 닿는 느낌이 차갑다
마치 조금 전에 새로 꺼낸 것처럼.
새로.
새 것인가 설마.
실망한 듯 발끝으로 톡톡 땅을 차고 있는 해태를 힐끔 바라본다
아무리 오늘 예민해져있다고는 해도 할말은, 하는 게 맞다
".. 고마워야"
고요한 밤에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멈칫,한 해태의 얼굴이 이내 조금 밝아진다
"마음에 드냐"
"... 뭐... 쓸만은 허겠네"
퉁명스런 대답에 피식, 웃는다
말은 그리 했어도 귀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살살 쓰다듬어 보고 있는 윤진의 기색을 살핀다
"윤진아"
"왜"
물건에 정신 팔려있을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차갑게 대꾸하는 것이 생각대로는 아닌가보다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나가 니 소원 들어줬잖냐"
".... 그렇다 치고"
".... 그럼 내 소원도... 들어줄랑가?"
동그란 모래 같은 것이 목 사이에서 미끄덩거리는 것처럼 까칠하다
평소의 저답지 않게 몇번인가 더듬거리다 겨우 꺼낸 말에 윤진은 대답이 없이 가만히 상자 끝만 바라본다
어후, 그냥 물어보지 말걸 그랬나
후회가 막심해질 때쯤 윤진이 거의 들리지 않는 낮고 거칠한 목소리로 내키지 않는 듯 대답한다
"... 소원이 뭔디?"
"... 들어줄라는가"
"... 들어보고."
영 안 들어주지는 않을 것 같다
희망에 약간 들떠버린다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마주치지 않는 윤진 쪽을 바라보고 씩 웃는다
"다음주 토요일에, 시간 좀 내주라."
"...."
"나의 소원은 그것이여, 다음주 토요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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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쓰려니 헷갈려서 일단 딸기우유를 마무리해야겠다는 목표로 달려보고 있...
사실 딸기우유는 거의 에피도 다 짜놨는데;; 그래서 배경음악으로 쓰려고 했던 음악도 에피별로 다 있었는데... 그랬는데...
지난주에 여행스케치의 운명,이 포만 배경으로 나와서 얼마나 당황했는지-_-; 역시 얼른 써버렸어야했어;;
하여간 이전과 조금 다른, 약간 오락가락하는 퀄릿의 딸기우유 입니다 -
본편과 다르게 가고 있으니까..그냥 재미나게 읽어주시길.. 늘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냔들 감사 ㅠㅠ 덕분에 열심히 쓰고 있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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