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side)
"윤진아, 저쪽 테이블 좀"
"예에"
후다닥 쟁반을 들고 뛰다시피 가서 빈 그릇과 남은 음식들을 정리한다
술병을 치우고 있는데 둘째 고모가 또 부른다
"윤진아, 안쪽에 소주 좀 갖다드리라"
"예에"
가리키는 쪽을 보니 이미 아까 소주 댓병이 나갔던 테이블이다
남의 상가에 술 마시러 온건가...
이미 얼큰히 취한 것처럼 보이는 무리들을 향해 속으로 눈을 흘기면서 소주 세 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쟁반에 담는다
소주를 나르고 돌아오니 둘째 고모가 손짓한다
"윤진아, 이리 와서 좀 쉬어야, 니 아직 점심도 안 먹지 않았냐?"
"아녀요, 아직 괜찮은디"
쉬라고 한다고 냉큼 앉기엔 손님이 너무 많다
사촌언니들이며 고모들까지 총동원되어서 움직여도 잠시도 쉴 틈 없이 음식이 나가고 치우고를 반복하고 있는데
저 혼자 자리에 앉아 있기도 민망하다
혼자 서울에 올라가 생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은 친척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인데,
잘못하면 괜히 책만 잡힌다는 생각에 고개를 젓는다
해태의 말이 맞았다
할아버지 장례 때는 윤진은 너무 어렸던지라 미처 몰랐는데, 상갓집에는 할 일이 무궁무진했다
시기가 딱 주말이라 손이 많지 않겠다, 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던 어른들 말씀이 무색하게
토요일 저녁부터 밀어닥치기 시작한 문상객들은, 일부는 심지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상가에서 함께 밤을 새는 바람에
식당에 대기하고 있던 여자 사촌들과는 내내 반쯤 깨어서 교대로 그 시중을 들어야했다
마침내 새벽이 오고 조금 잠잠해졌나 싶었는데 점심이 다가올 때쯤부터 또다시 손님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 상주들은 내내 빈소에서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윤진을 비롯한 여자 상주들은 쉴틈없이 손님 접대를 해야했다
상가에 손님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라고,
썰렁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지만.
맞벌이인 윤진의 부모님의 회사 동료, 친구분들도 많이 오셨고 두 분 고모네나 작은 아버지 댁의 손님도 꽤나 있었지만
지금 몰려드는 이 사람들의 절반은 윤진의 큰아버지댁 손님이었다
평범하게 여수에 직장인이나 주부로 살고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지역 유지인 큰아버지는
차기 여수 국회의원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라 평소에도 줄 한번 대보려고 드나드는 뜨내기들이 '겁나게' 많았고
덕분에 이런 큰 집안행사에 눈도장 찍으러 온 인사들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중이다
이중에 과연 할머니를 직접 알고 문상 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쉴새없이 움직이며 시중을 들다가도 잠깐 벽에 기대 쉬는 찰나가 오면
계속해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는 가득한 무리들 중 정말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몇일까
우리 할머니 참 외로우시겠다, 북적북적한데 아무도 기억해주진 않아서,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아가씨, 여그 홍어 무침 좀 더 갖다주쇼잉"
"예에"
절 언제 봤다고 아가씨,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것까지 일일이 신경쓰면, 제 성질대로 하면, 못 견딘다
일단은 부엌에 담아 쌓아놓은 홍어무침과 힐끗 체크한 테이블에 비어있던 멸치조림 접시를 챙겨 내간다
"필요한거 있으믄 부르셔요"
접시를 내려놓으며 싹싹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둘째 고모가 문쪽에서 저를 급하게 손짓으로 부른다
하도 다급해보이는 부름이어서 쟁반을 손에 든 채로 다가가니 묘한 표정으로 윤진에게 묻는다
"누구여?"
"예?"
다짜고짜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방금 멸치 조림을 내갔던 테이블을 돌아본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들 뿐이다, 어째서 누구냐고 묻는 걸까
어리둥절한 윤진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답답한 듯 다시 묻는다
"아니 그쪽 말고 저쪽, 지금 들어간 저 청년 누구냥게"
청년....?
아리송한 표정으로 답을 못하고 고모를 바라보자 눈짓으로 빈소 쪽을 가리킨다
내내 서빙하느라 빈소 쪽은 아침에 혼자 할머니 인사,한다고 들어갔던 이후로 한번 돌아보지도 못했다
고모의 시선을 따라 빈소 쪽을 돌아본다
어.
검정 양복에 흰 셔츠, 검정 넥타이의 상복 차림을 하고 늘 목숨처럼 사수하고 다니던 곱슬 머리를 차분히 가라앉혀 내린 해태가
막 문상을 마쳤는지 빈소에서 나오다가 윤진과 눈이 마주친다
놀라서 약간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는 윤진에게 싱긋 웃으려다가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금새 표정을 굳히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목례한다
얼결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받은 윤진도 당황해서 손에 여전히 쟁반을 든 채로 두 손 모아 허리를 굽혀 맞절한다
"친구냐?"
호기심 가득한 고모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예에, 윤진이 친구여요 안녕하셔요"
윤진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해태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붙임성 있어 보이는 해태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는지 아래 위로 살피며 보던 고모가 후다닥 뛰어가더니
부엌에서 음식 중이던 윤진의 어머니를 불러온다
"언니, 나와보쇼잉, 윤진이 친구 왔네요"
사촌들도 움직이다 말고 그 소리에 해태와 서 있는 저를 힐끔거린다
생각보다 커지는 상황에 당황한 윤진이 안절부절 못하다가 이 상황이 어색할 또 다른 한 사람을 올려다본다
정작 그 장본인은 별다르지 않은 듯 태연하다
부엌에서 음식하던 손을 대강 앞치마에 닦으면서 나오는 윤진의 어머니를 본 해태는
윤진과 또렷한 이목구비는 고대로인데 윤진보다 큰 키, 호리호리한 몸,
대체 저 유전자의 어디까지만 윤진이 받은 건가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는다
그러고 보니 방금 빈소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 젊은이는 누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남자 상주들은 하나같이 키가 작은 편이었다
해태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모르고 윤진의 어머니는 반갑게 다가온다
"윤진이 친구여라?"
"아이고 엄니 말씀낮추셔요, 인사가 늦었네요 지 서울서 윤진이랑"
"우리 과 친구여, 하숙집서도 같이 지내고"
해태가 말을 맺기 전에 냉큼 가로채서 윤진이 짧게 소개해버린다
그거 외에 딱히 할말이 없긴 하다만 뭘 그렇게 냉정하게 끊냐 싶어 쳐다보니 윤진이 불안한 듯 눈치 보고 있는 건 제 쪽이 아니라 어머니 쪽이다
"그래도 이렇게 먼 데까지 와주고, 고생혔네, 미안해서 어쩐대"
"아녀라 지가 집이 순천이라, 고향 내려온 김에 들렸어라"
어제 함께 내려왔다는 사실은 없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해태를 힐끔 올려다본다
윤진의 어머니는 흐뭇하게 해태를 보다가 묻는다
"우리 윤진이랑 친한가? 자가 서울서 생활은 잘 하고 있는갑네, 와주는 친구도 다 있고, 윤진이 서울서 잘하고 있당가? 까칠허진 않어?"
"... 엄마"
어머니의 말에 윤진이 풀쩍 놀라 쓱하고 귓속말로 제지한다
그런 윤진을 보던 해태는 고개를 숙이고 프스스 웃는다
"윤진이 서울서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아요 엄니, 공부도 잘허고 딱 부러지고 당차고, 저희과 에이스랑게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되어요."
없는 소리까지 할 건 없는데!
넌 또 대체 왜 그러냐, 하고 얼굴을 찌푸리자 해태는 그저 싱긋 웃어보인다
"그리고 지랑도 친허고요, 친구 일인디 당연히 와봐야지요 윤진이가 할머니랑 각별허기도 혔고"
해태의 마지막 말에 윤진과 어머니 표정이 동시에 미묘하게 흔들린다
뜬금없는 어색한 침묵에 해태가 조금 당황한다
잠깐 갸웃한 윤진의 어머니가 살짝 웃더니 해태에게 손짓한다
"들어와서 점심 먹고 가요, 아직 식사 전이지라? 윤진이 니도 같이 먹어야"
어머니가 해태의 팔을 잡고 안쪽으로 끈다
먼저 휙하고 식당을 돌아본 해태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아녀라, 엄니 지 식사 안혀도 되는디, 집에 가서 먹어도 되어요"
"그래도 상가 와서 아무 것도 안 먹고 가는 것도 예의가 아녀"
"... 예... 글킨 헌디..."
곤란해하는 해태를 올려다보다 윤진이 작게 어머니에게 속삭인다
"엄니, 지금 자리가 없소"
처음 본 딸의 '남자'인 친구가 신기했는지 내내 해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윤진의 어머니는
그제야 식당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미안했는지 두리번거린다
"아이고, 그래도 그냥 보내는 기 예의가 아닌디"
"손이 많아 다행이네요, 지는 진짜 괜찮당게요"
"그래도, 윤진아, 니 음료수라도 좀 가져와라."
"지 진짜 신경 안 쓰셔도 되는디요, 죄송하게"
어머니와 사소한 실갱이를 하고 있는 새 윤진이 조르르 냉장고 쪽으로 달려간다
막상 음료수를 가득 쟁여놓은 냉장고를 열었는데 해태가 뭘 마시는지 모르겠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이런 게 좋겠지 싶어서 박카스 한 병과 커피 캔 하나를 꺼낸다
양손에 음료수를 들고 돌아가자 어머니가 해태와 윤진을 밖으로 밀어낸다
"나가서 친구 배웅허고 와야, 이거 꼭 마시고 가요, 이렇게 보내서 정말 미안하고"
"아녀요 엄니, 지가 괜히 와서 폐만 끼치고 가는 거 같아서.."
"윤진이 친구들이랑 다음에 놀러와요, 맛있는 거 제대로 대접해줄텐게"
"예에,"
대체 어머니가 또 무슨 소리를 할지, 해태는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 윤진은 안절부절 못하는데
해태는 넉살좋게 윤진의 어머니 뿐 아니라 저를 힐끔거리며 보고 있던 둘째 고모를 비롯해서
한쪽에서 수근거리던 사촌들에게까지 꾸벅하고 허리 숙여 인사한 뒤에야 비로소 구두를 꺼내 신는다
하여간, 머시매.
품이 넓은 녀석이란 건, 이미 알만큼 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속없게 보일 정도로 누구에게나 싱글거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덕분에 독한 가시내 서울 올라가서 잘 사나 모르겠다,고 수군거리던 집안 어른들의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잘 지내고 있고 저런 성격 좋아보이는 친구랑도 알고 지낸다고 괜찮다고 할 수 있을테니,
해태가 딱 어른들이 좋아할만한 단정한 차림으로 문상 와 준 게 고마워진다
한 발 먼저 걸어나가서 장례식장 밖에 앉을 만한 자리를 찾는다
뒤따라온 해태가 곤란한 듯 웅얼거린다
"나 진짜 괜찮은디, 그냥 가도"
"... 니 그냥 보내믄 나가 엄니헌테 뭔 소리 들을지 모른 게 따라오기나 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병원 주차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조금 멀지만 한갓진 벤치를 발견한다
"저리 가자"
두 손에 음료수병을 든 채 신고 나온 큰 슬리퍼를 탁탁 끌고 먼저 걸어간다
뒤에서 따라와야할 구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돌아보자 뒷걸음질 치고 있던 해태와 눈이 마주친다
뭐냐? 하고 살짝 찡그리고 바라보자 훠이,하고 손짓한다
"금새 따라갈텐게, 먼저 가있어"
후다닥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에 뭘 두고 왔나? 갸우뚱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먼저 벤치에 가 앉는다
10월 중순 여수의 오후는 아직 따뜻하다
아침이면 벌써 입김이 보일 듯 차가워진 서울을 떠올리고 남쪽나라는 남쪽이구나, 한다
멍하니 하늘을 보다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살에 스르르 눈을 감는다
어제 오후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니느라 잊고 있었던 생각들이
스물스물 미뤄뒀던 머리 한구석에서 흘러나와 고요한 주변과 다르게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하아.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고 만다
"많이 피곤허제?"
해태의 목소리가 들려서 눈을 뜬다
어느새 다녀왔는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태의 표정이 영 안쓰럽게 본다
괜한 오기에 고개를 한번 젓는다
"괜찮어, 어른들이 힘들지 나야 뭐"
"... 가시내 오기부리기는"
웅얼하는 대답에 정곡을 찔린 것 같으면서도 니가 뭘 그렇게 잘 아냐, 싶어진다
뚱한 표정으로 외면하는 윤진에게 비닐봉지를 내밀고는 해태는 옆자리에 앉는다
"아나"
"뭐여"
"니 아직 식사 못했담서, 당분이라도 섭취허라고"
주섬주섬 열어본 비닐봉지 안에 곱게 자리한 딸기 우유와 빨대를 확인하고 풋, 하고 웃음이 터져버린다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했나 모르겠다
참 알 수 없는 머시매다, 하는 생각에 반쯤 웃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해태를 돌아본다
"왜"
딸기우유를 보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 저를 보자 머쓱해졌는지 해태가 묻는다
"... 고마워서"
"..."
"... 아따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니가 철드는 걸 다보고, 이 누나 걱정 되서 사왔냐"
"... 가시내, 니가 뭔 누나냐 니는 9월생 나는 6월생, 엄연히 나가 오빠랑게,
야 3개월이믄 나가 니보다 더 먹은 밥그릇수가 무려 90끼, 아니지 270끼여"
그놈의 오빠는,
펄쩍 뛰는 것도 그만, 고맙고 귀엽다
한마디쯤 더 해야겠지만, 윤진은 그저 피식 웃으면서 우유곽에 빨대를 꽂는다
조용히 빨대를 쪽쪽 빠는 윤진을 가만히 보다 슬그머니 벤치에 기댄 해태가 유독 파란 하늘을 올려보다 말고 툭, 던진다
"윤진아"
"응?"
"평소에도 머리 좀 묶고 다녀야, 니 오늘 겁나게 이쁘다"
딸기 우유에 꽂은 빨대를 물고 있던 입술이 아니 윤진의 모든 동작이 그대로 멈춘다
말한 건 저 녀석이고 들은 건 저인데 어째서인지 제가 창피해져서 차마 눈을 들지 못하고 도르르 굴려서 슬리퍼 끝만 바라본다
손녀들까지 상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그저 검정색으로 맞추라고만 해서
검정 블라우스에 윤진에게는 무릎 약간 넘는 기장으로 내려오는 엄마 치마를 빌려입었다
상주가 그렇게 너풀거리며 다니면 안된다고 한소리 들을까봐 머리는 검정 끈 하나로 질끈 올려묶고
상주를 나타내는 흰색 리본을 머리에 꽂은 건 오전 입관식이 끝난 뒤.
원래도 파리한 인상이라 검정 옷을 입으면 더 아파보인다는 말은 여러번 들었지만
오로지 실용성 때문에, 괜한 말 듣기 싫어서 묶어올린 머리를 보고 예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머시매, 이 상황에서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고맙다고 한번 해줬다고 바로 기어오르냐,
겨우 한마디에 엉켜버린 머리 속을 정리해보려고 말도 안되는 핀잔들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저절로 볼이 부풀어올라서 괜히 큰 소리를 내며 빨대를 쭉,하고 빨아올린다
어쩐지 드러난 목덜미 근처가 간질간질해오는 것 같아서 흘러내린 머리도 없는데 괜히 귀 뒤로 머리를 한번 넘긴다
저절로 하나로 묶인 머리채가 달랑, 하고 흔들린다
가만히 보고 있던 해태가 훗,하고 웃는다
"... 발인은, 내일이여?"
"... 내일 새벽에,"
"서울은 언제 올라가냐"
"... 장지 갔다가 올라가야제, 수업도 있고 헌게.. 오래는 못 있고"
"... 잘 먹어야 버티니께, 틈틈이 식사는 꼭 혀. 아까 본께 사람도 많더만 많이 바쁘것다"
괜한 걱정이다 싶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니는, 서울 언제 가냐? 시방 순천서 온겨?"
"아, 나야 인자 집에 들렀다 올라가야제."
".... 미안허다 괜히"
"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게 허냐, 순천서 여수가 어디 멀기나 허믄 또 모르겄다, 한시간이믄 오는 덴디 나가 안 올 사람이여?"
"... 서울서 괜히 내려왔잖여"
"야, 엄니가 나 말도 없이 내려왔다고 허삐 좋아허시드라, 니가 나를 암만 헛물 취급혀도 나가 또 집에서는 귀한 아들이랑게"
헛물이라니,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한 적이 있다고 저러나, 억울해져서 째릿하고 눈을 흘기자 해태가 빙긋 웃는다
"인자 좀 조윤진이 같네. 야 니 그렇게 말도 없고 기운 빠져있는거 안 어울려야,"
헛소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와버린다
피식거리는 윤진을 보던 해태가 멀리 하늘을 본다
"날씨 좋-네"
"... 그러게"
"... 느그 할머니는 좋은 날 가셨구만, 후손들 생각 많이 하셨는갑서"
"... 그런가"
주변엔 병원 뿐이라 탁트인 하늘을 보자니 울컥, 눌러놨던 감정이 올라올 것 같아서 윤진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고 만다
"할머니랑 친혔나보다"
윤진의 얼굴은 보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벤치에 기대 하늘만 보고 있던 해태가 무덤덤하게 묻는다
"... 아니"
침묵하던 윤진이 꾹, 눌려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 미워했어, 할머니"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간신히 고백한다
아주 오래 묻어뒀던 감정이 울컥,하고 튀어나올 것 같아서 윤진은 들고 있던 우유곽을 내려놓고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 억제한다
해태가 아직도 하늘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제 대답에 놀라 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제 말에 어째서,라던가, 그래서, 라던가 하는 말도 없이 조용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대답 안 했어도 그만인데, 그냥 응,하고 넘어갔어도 되는데... 그런데 울컥하고 치솟는 그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진다
윤진은 혀 끝에 맴도는 말을 억지로 꺼내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도로 닫아버린다
몇번이나 멈칫하고 망설이다가 제 몸을 으스러질 듯 안으면서 고개를 떨군다
"우리 집 맞벌이여서 나 어렸을 때 할머니 손에 자랐는디 말여, 할머니가 나를 얼매나 싫어하셨는지
툭하면 운다고 구박허고, 말대답한다고 뭐라 하고, 가시내라고, 아들 아니라고 뭐라 하고
가시내로 태어나서 똑똑하믄 뭣하냐, 동생 기 죽인다고 혼나고, 나가 할머니헌티 잘혔다, 이쁘다, 말 들어본 기억이 없으니께
그때 나가 고작 다섯살이나 되얐을까, 그 어린애헌티 뭐가 그래 맺히셔서 그러셨는가 몰라"
떠오른다
늘 인상쓰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
제가 너무너무 싫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
언제나 할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주눅 들어있던 그 집
첫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죄인이었던 엄마
할머니 앞에서는 바르르 떠는 저 때문에 먼저 울어버렸던 남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울면 언제나 혼나는 건 제 몫이었던 유년.
"나 할머니 싫어혔어, 정말, 너무너무 싫어서 어릴 때는 할머니 소리만 들어도 울어버릴 정도였응게,
나이 들고 학교 감서는 할머니 집 문턱 넘는 것도 싫어서 할머니랑 밥 먹은 게 아마 중학교 때 즈음이 마지막일 것이여,
공부한다고 핑계대고 한번도 안 갔거든 그 이후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할머니가 유해지셨다는 말을, 가끔 윤진이는 잘 지내냐며 공부가 힘들겠지만 보고 싶다, 하셨다는 말을 전해들었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자신은 본인의 의지로는 할머니를 다시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없어졌으면 했던 손녀, 정말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결심했었다
"근데 그거 아냐"
울컥하면서도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던 윤진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윤진은 숨을 한 번 삼킨다
"나가 서울 갈 때 말여, 가시내가 무슨 서울에 혼자 대학씩이나 가냐고,
얌전히 집 근처 대학이나 나와서 시집이나 가라고 온 집안이 반대혔는데
유일하게 인자 여자도 배워야 사는 시대라고, 보내라고 한 기 할머니였단다,"
윤진은 말없이 제 말을 들어주고 있는 해태를 보고 울먹거리는 얼굴로 어색하게 겨우 웃는다
"참, 이상허제?"
윤진의 말에 해태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그걸 본 윤진의 얼굴에서 간신히 매달려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울컥했는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본 윤진이, 몇번인가 침을 삼키고 나서야 진정된 목소리로 말한다
"난중에 그라더라, 나가 할머니랑 너무 닮아서, 대가 쎄믄 여자는 세상 살기 어렵다고 그렇게 마음 쓰여하셨다고,
나가 할머니 많이 닮긴 혔거든, 어릴 때 맡겨 자라서 그른가 말투 허며, 행동거지 같은 게 너무 비슷하단 말 많이 들어서
그게 너무너무 싫었는디, 근디 그르케 당신을 쏙 빼닮은 손녀가 당신처럼 험하게 인생 살까봐 내내 맘에 걸려하셨다는겨"
말을 하다말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몇번이나 머리를 쓸어올리다가
얼굴을 거칠게 비비는 윤진의 손을 옆에서 보고 있던 해태가 가만히 잡아 내린다
해태의 손 안에 갖혀있는 손이 계속해서 바르르 떨린다
윤진은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드러낸 채 뜨거운 숨을 토해내듯 고백한다
"근데 나가 그 얘기 듣고 어쨌는지 아냐, 추석에 내려와서도 바쁘다고 차례만 지내고 바로 서울 올라갔어야.
그때 우리 연고전헌다고 허삐 바빴잖냐, 나가 그거 준비해야헌다고, 여수 내려와서 하루만에 올라갔어 할머니 집에 들리지도 않고"
윤진의 눈에서 주룩, 하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동안 한번도 울지 않고 멀쩡하게 일을 해서, 역시 할머니랑 가깝지 않았다고, 역시 서울 간 가시내는 다르다고 사촌들이 수군거렸는데
내내 참았던 봉인이 풀려버리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나는, 할머니가 계속 거기 계실 줄 알았어야, 나가 언제든지 내려오믄, 내년 설이나, 아니면 가을이나 언제 집에 내려오면 그때 가서
오해혀서 미안하다, 할머니 고맙다, 미워했지만 사랑한다, 그런 말은 다음에,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혔는디..."
윤진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꺽꺽 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아무리 울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지 잡혀있던 손을 빼서 가슴을 치는 윤진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막막하게 보던 해태가 가만히 어깨를 끌어당겨 안는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그렇게 많이 누군가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울어본 건 처음인 것 같다
겨우 가슴팍을 내주었을 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서툰 그 품이 따뜻해서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너무 싫어져서 그래서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언제 할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할머니를 그렇게 차갑게 보냈으면서
지금 자신은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는 게, 그 온기에 위로 받고 있다는 게 싫어서,
그런 독하고 이기적인 스스로가 싫어서,
자꾸 눈물이 난다
"괜찮어야, 할머니도 니 맘 다 아실 거구만, 우리 윤진이 이쁘다, 이뻐 죽겠다, 허실거여, 괜찮어 니 잘못헌 거 없어야"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며 가슴으로 울려 들리는 말이 따뜻하다
그 말을 믿고 싶어진다
그 따뜻한 말을,
자신은 한번도 할머니에게 건네지 못했던 이 따뜻한 손길을
할머니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
=======================
어제 11편을 보고 하아.. 해태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선택적 시청을 하기로 했어-_-
나는 잔다르크 에피는 본 적이 없는 것이여. 쓰성님 얘기 들어주고 나정이 상담해주는 속깊고 다정한 해태만 본 것이여 나는 어제.
그래. 이왕 캐붕되기 시작헌거 한번 끝까지 가보자.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읽어주는 냔들 상냥한 댓글들 고마워야 ㅠㅠ
+ 할머니 이야기는 약간은 나냔의 이야기. 할머니 미안해요.
'reply - h&y > strawber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11 (0) | 2013.12.28 |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10 (0) | 2013.12.25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8 (0) | 2013.11.23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7 (0) | 2013.11.22 |
[응답하라1994][해태x윤진] 딸기우유. 6 (0) | 2013.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