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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 side)
삐빅, 삐빅, 삐빅,
잔인하도록 기계적인 알람음이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방에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한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두 형체 중 하나가 이불 밖으로 겨우 손만 꺼내서 더듬더듬 머리맡을 짚어보다가
손에서 되도록 멀리 놓아둔 시계를 마침내 발견해서 끌어당긴다
삐빅, 삐 -
뚝 하고 알람 소리가 멈춘다
알람 버튼을 누르고도 한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시계를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린다
"읏차."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불 속에 머리를 폭 박고 멈춰있던 손의 주인이 벌떡,하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 토요일이다.. 더 자자..."
벌떡 일어나며 이불을 차버린 탓에 제가 덮고 있던 쪽까지 날아가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며 삼천포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이불 위에서 잠깐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은 해태는 끙차 하고 몸을 뒤로 젖혀 기지개를 편 뒤에 다시 시계의 시간을 확인한다
7시.
겨우 시간만 확인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배시시 하고 웃음이 난다
못 먹어도 고,라는 심정으로 용기내서 말해본 건데 윤진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의외로 짧게 고민하고 승낙했다
물론, 두 가지 조건이 붙긴 했지만.
하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밖에서 만나자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건전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
대체 저를 어떻게 보고 그런 조건을 내걸었는지, 어째 사람을 그래 띄엄띄엄 보냐고 마땅히 화를 냈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저도 참 대책없는 인간인지 그저 윤진이 수락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걸 기회를 주지 않는 윤진을 만나려고 일부러 엠티 후발대를 자처해서 남기를 잘했다, 생각한다
나정이 말했던 6시 반을 지나 7시까지 나타나지 않은 윤진을 기다리다가
'이노무 가시내는 대체 약속을 지킬 줄 모른당게,
나가 혼자 기다렸다가 오믄 데리고 갈텐게, 고기 떨어지기 전에 먼저 가야,"
투덜거리면서 후발대마저 먼저 보내고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윤진과 둘이 대화할 기회는 없었을테고
며칠 째 가방에 넣어다니던 선물도 전하지 못했을테고
오늘 만나기로 하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쭉,하고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책상 앞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걷자 아침 햇살이 쏟아져들어온다
아따, 날씨 좋-다.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확인하자 기분이 썩, 좋아진다
아까부터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흥얼하면서 까딱까딱 하늘을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고 방을 나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1층 욕실로 향하다가 부엌에서 아침 준비중인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주말인데 너무 일찍 일어난 저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이다
"벌서로 일어났나, 오늘 토요일인데, 더 자지"
"약속이 있어서요"
윤진이랑요! 윤진이랑요!
속으로 말하고 싶어 마구 아우성치는 걸 간신히 눌러참는다
말은 못하고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해태를 보고 뭐 좋은 일 있는갑다, 하고 만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나, 언능 씻고 나온나 밥은 묵고 나가야제"
"예에"
여전히 감출 수 없는 흥분감에 몸이 살짝 들썩거린다
평소보다 좀더 오래 씻고 나온 해태는 방으로 돌아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로션을 바르고
어제 꺼내놨던 옷을 챙겨 입은 후에 공들여 머리를 만지기 시작한다
"... 알고 있니 빠빠바 니가 없는 빠빠바..."
이상한 음정을 흥얼흥얼거리며 거울 속에 비친 머리 가닥을 정리하는 해태의 목소리가 거슬린 듯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삼천포가 잔뜩 짜증난 목소리로 묻는다
"니 아침부터 미칫나 뭐하는 짓이고"
"뭐가 말이냐"
"아침부터 뭘 잘못 뭇길래 안하던 노래를 부르고 그라는기고, 니 때문에 시끄러버가 잘 수가 없다"
"아침부텀 찡그리고 있는 니가 이상혀야, 봐라 날씨도 이래 좋은디"
싱글싱글 웃으면서 창 밖을 가리키는 해태를 벙찐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삼천포는
저 자슥이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도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짜증을 내면서 이불을 뒤집어쓴 삼천포에게마저 생글생글 웃음이 샌다
세상의 무엇도 지금의 이 들뜬 기분을 망칠 수는 없을 것 같다
"..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서 머리를 매만진다
꽤나 공들여 만진 후에야 마침내 마음에 드는 모양새가 잡힌다
빗과 스프레이를 내려놓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해본다
흠.
이리저리 돌아봐도 거울 속에 비친 녀석은 꽤 괜찮은 것 같다
자꾸 비식비식 웃어서 약간 어설퍼보이는 걸 빼면 이만하면 어떤 서울 머시매들과 대봐도 낫지 않은가
그래, 자신감을 갖자.
혼자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며 불끈 주먹을 쥐고 다짐한다
계속된 노랫소리에 짜증을 내려고 이불 밖으로 머리를 꺼냈던 삼천포는
그런 해태의 원맨쇼를 보다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도로 머리를 박아버린다
아그야, 니도 내 상황 되봐라
저를 이제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삼천포에게 속으로만 대꾸해주고
조금 있다 입고 나갈 자켓과 지갑, 가방을 의자 위에 챙겨 올려놓은 뒤
지금이라도 혼자 쉬라고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 식탁으로 향한다
"하이고 엄니 오늘도 푸짐허네요"
"맞나, 오늘은 딴 반찬 별 거 안하고 간단하게 한긴데"
"대체 어느 집에서 간단히 아침부터 갈비가 나온대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버리네요"
"자꾸 말만 하지 말고 얼른 앉아라, 단디 무야 하루도 잘 보낸데이"
"야아"
그릇 가득 쌓인 갈빗대가 압도적이다
늘 생각하는 그 이상의 식탁이 기다리고 있는 신촌하숙은 아침 메뉴를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다이나믹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이야, 윤진아 얼른 앉아라, 식기 전에 무야 마싯데이"
국을 한 숟갈 뜨고 있는데 들어온 윤진이 아침 인사를 하다 말고 이미 식사 중인 해태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이런 아침에 보니 새삼스럽게 반갑기도 하고, 오늘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안 그래도 들떴던 마음이 훅,하고 날아오르는 바람에
수저를 든 채로 반갑게 눈짓하자 눈웃음치는 해태의 말없는 인사에 움찔,한 윤진은
불안하게 밥을 푸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슬쩍 눈치 보고는 새초롬하게 건너편에 앉는다
가시내, 새침한 것도 겁나 이뻐야
눈을 내리깔고 못되게 구는 것까지 예뻐보이다니 중증은 중증이다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고 '들킨다'라는 느낌으로 모른 척하는 윤진도 귀엽고 해서 또 배시시 하고 웃어버린다
"해태, 마이 무라, 맛은 괘얂나? 안 짜나?"
"딱 좋은디요, 어째 엄니 요리는 날마다 더 맛있어진당가요"
"맞나, 그라믄 저녁 때도 한번 더 하까?"
해태의 칭찬에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어머니의 질문에 아까부터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깨작거리고 있는 윤진을 슬쩍 본다
"지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못 먹을 거 같은디, 담에 또 해주셔요"
해태의 대답에 고개 숙이고 있던 윤진이 놀란 듯 움찔,한다
동요하는 정수리를 보고 씩,웃는다
"맞나, 근데 니 아침에도 약속 있다하지 않았나, 저녁에도 또 약속 있나 바쁘네 우리 해태"
"아, 아침에 있는 약속이 그때까지 갈 거 같아서요"
"맞나, 누구 만나는데, 좋은데 가나?"
"그래야지요, 좋은데 가야지요"
대화가 진행되는 걸 들으면서 제 앞에 숙인 정수리가 조금씩 흔들린다
아아 저렇게 반응이 매번 아주 세밀하게 드러나버리니 아무래도 이렇게 사소하게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다
훗훗,하고 속으로 웃는다
따르릉 -
하는 전화 소리에 어머니가 거실로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
"예에, 안녕하세요, 예에, 잠시만요, 윤진아 전화왔다 나와봐라"
무슨 전화인지 짧게 대답한 어머니가 윤진을 부른다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윤진이 그제야 바스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간다
"받아봐라, 집이다"
어머니가 건네는 전화기를 받은 윤진이 작게 대답한다
"예에, 지요, 예"
한동안 윤진은 전화기를 붙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뭔 소리요"
마침내 터져나온 소리가 심상치 않다
대체 무슨 전화인가 싶어서 슬쩍 바깥을 건너다본다
말이 없는 윤진의 얼굴이 단계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서서히 창백해진다
"알 것어라"
가만히 듣기만 하던 윤진이 짧게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하얗게 질린 무표정한 얼굴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바들바들하고 떨린다
잠깐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전화기 옆 소파를 짚고 섰던 윤진은 유령처럼 둥둥 떠있는 걸음새로 계단을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친 게 분명한 잠바를 입고 가방을 메고 내려온다
"윤진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쪽으로 가버리는 윤진의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해태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재빨리 뒤따라나간다
후다닥 문을 열고 나가자 윤진은 이제 막 현관 계단을 내려서려는 참이다
"아야"
휘청거리면서 계단에 발을 내딛는 윤진을 불러 세운다
"어디 가냐"
"....."
해태의 질문에 멍하니 잠시 허공도 아닌 먼 곳을 바라보던 윤진은 그제야 아아, 너도 있었지 참... 하는 듯이 올려다본다
그러고도 한참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쥐어짜낸 듯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 아... 미안허다... 오늘... 나... 가봐야할데가 있어서.... 약속은 다으..."
겨우 더듬거리면서 잇던 말을 채 맺지도 못할 만큼 넋이 나간 윤진은 억지로 말을 잇다 말고 멍하니 도로 몸을 돌린다
살짝 대고 있던 해태의 손이 툭,하고 떨어진다
방금까지 대답하고 있던 것쯤은 금새 잊은 것처럼 혼이 나간 듯 보이는 뒷모습,
약속이야 일이 있으면 다음에 다시 잡아도 그만이고
저에게 그걸 막을 권리 같은 건 없지만
뒤에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서서 위태롭게 계단 아래로 내려서는 윤진의 뒷모습을 아쉽게 보다가
제대로 꿰어신지도 못한 윤진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끈이 풀린 건 둘째치고 얼마나 급하게 뛰어나왔으면,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한쪽 신은 아예 신다가 만 상태로 끌고 있으면서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이 가시내 진짜..
못마땅하게 인상을 한번 질끈하고 탁탁 계단을 뛰어내려가 윤진 앞을 가로막고 선다
장애물을 인지하고 멈칫 옆으로 피하려는 윤진을 꽉,하고 멈추게 한다
"있어봐야"
무릎을 굽혀 앉아서 헐겁게 타닥거리고 있는 왼쪽 운동화를 제대로 신겨주고 끈을 졸라맨다
제가 신을 어떻게 신고 있었는지, 지금 갑자기 해태가 왜 저를 멈춰세웠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윤진은 그저 멍하게 서있기만 한다
마지막으로 신발끈을 두 번 꼭 묶어서 풀리지 않게 하고 일어선 해태가 윤진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한다
정신이라곤 사라져버린 것 같은 눈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꼭꼭 힘주어 말한다
"여그서 잠깐만 기다려야, 가지 말고, 알았제?"
알아들은 건지 어떤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계단참에 윤진을 세워두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올라가 챙겨두었던 지갑과 잠바를 챙긴다
갑자기 뛰어들어온 해태의 기척에 놀라 이불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삼천포에게
미처 설명할 틈도 없이 도로 뛰어나온다
"엄니 지 나가요"
큰 소리로 식탁 쪽을 향해 말을 하고 얼른 현관을 빠져나온다
다행히 아직 윤진은 아까 두고 들어간 그 대로 멍하니 넋나간 사람처럼 꼼짝 않고 서 있다
"가자"
"어?"
해태가 윤진의 앞에 서서 부르자 그제야 깨어난 것처럼
방금 전 자신이 기다리라고 했던 말은 기억도 못하는 양
네가 왜 여기 서있고 나는 왜 여기 서있는 건가, 하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니 어디 가야한담서, 어디 가는디?"
"...혼자 갈 수 있..."
바람 앞 촛불처럼 눈이 깜빡깜빡하고 정신이 돌아왔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더듬거리면서 대답을 하다가 또 금새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윤진을 보다 해태는 한숨을 쉰다
"아야, 니 지금 혼자 못 다녀야. 니 신도 제대로 못 신으믄서 그라고 다니다간 사고나기 딱 좋어
어디 가는디, 말을 허믄 나가 그 앞까지 데려다 줄텐게"
해태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듯 멍하니 있던 윤진은 이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윤진아"
어깨를 찍어누르듯 꼭 붙들고 이름을 부른다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윤진의 시선을 끈질기게 찾아간다
"정신차려야. 니 어디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다간 니가 먼저 사고 당하겄다"
겨우 눈을 맞춰낸다
꺼져있던 불이 살아날 듯 말듯 반짝,하고 흔들린다
간신히 붙든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똑바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라니께 나랑 같이 가자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따라서 해보라는 듯이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흔들릴 듯 하던 윤진이 부르르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젓는다
"괜찮어 혼자 갈 수 있어"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멀쩡한 듯이 대답한다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어깨를 붙들고 있는 해태의 손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혼자 걸어가기 시작한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뒷모습이 자신은 아마도 모르겠지만 사정없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저 고집쟁이, 걱정이 되서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아쉬운 사람이 붙드는 수 밖에
해태는 귀찮은 듯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윤진을 따라잡는다
"니 잊었나본디"
"어?"
좀전에 떼어놨다고 생각했던 해태가 어느새 다시 쓱,하고 옆에 등장하자
윤진이 놀라고 반쯤은 지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오늘 니 하루는 내꺼여'
"그건.."
갑작스런 말에 윤진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멍하게 정신이 나가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렇게라도 반응하는 게 낫겠다고 해태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라니께 니가 어디를 가든가 나가 따라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거여"
"......"
해태를 올려다보는 눈이 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막막해진다
"어디 가냐, 말혀 어차피 갈 거 행선지는 알고 가자"
"... 여수"
한참, 오랫동안 해태를 기다리게한 침묵 후에 겨우 대답하는 윤진의 말끝이 흐려진다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왔는지 겨우 눌러참느라 대답만 하고 바로 숙여버린 목덜미가 파르르 떨린다
아후... 고집쟁이 가시내
그냥 속시원히 말해버리면 좋겠구만 끝까지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일로 가느냐,라고는 묻지 못하겠다
여수,라고 행선지라도 알려준게 어디냐 싶어서 해태는 한숨을 푹 쉬고 윤진을 부른다
"가자, 일단 터미널로 가면 되제?"
멍하니 올려다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지금 이 순간도 불빛이 깜빡,하고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걸을 수는 있을까, 걱정이 되지만 제가 먼저 한발 떼어놓자 따라오는 윤진은 조금 비틀하긴 해도 걷고 있다
정신 없으면서도 멀쩡해보이는 재주는 술 먹을 때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해태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쪽 신경은 혹시라도 모를 윤진에게 매달아놓고 한쪽 눈으로 거리의 택시를 탐색한다
"택시!"
금새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택시 문을 열고 손짓한다
"언능 타라"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 하다가 엄하게 내려다보자 윤진은 그저 힘없이 택시 뒷자리에 올라탄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가시내다, 생각하면서 앞자리에 탄다
"고속버스터미널이요, 강남"
=
"윤진아"
멍하니 앉아 있는 윤진을 살짝 흔든다
거의 꺼질락말락하던 불씨가 훅,하고 돌아온다
저를 부른 것이 해태인 것을 깨닫고 또다시 네가 왜 여기 있느냐,라는 의아한 얼굴이 된다
신촌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여수까지 내려오는 몇시간 동안 저런 표정을 벌써 몇번 마주했는지 모른다
하아... 대체 무슨 일이래 정말.
"여그 맞냐?"
택시가 정차해 서있는 밖을 가리킨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본 윤진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인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한숨을 쉬고는 먼저 내려 윤진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기사에게 택시비를 지불하고 돌아선다
또다시 윤진은 멍하게 그저 서있는 채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내내 차라리 울어버리거나 화를 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었다
그런 윤진은 처음이라서 해태는 겁이 났다
고속 버스 안에서도 내내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보던 윤진의 눈은 공허하게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았고
꼭 쥐고 있는 주먹은 담담하게마저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계속해서 미세하게 떨렸다
분명 제 옆에 앉아 있는 게 맞는데도 이렇게 흔들리다가 훅,하고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해태는 윤진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괜찮을거여, 아무 일도 없을 거랑게,'
의미없는 말을 몇번인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윤진이 너무 불안해보여서
적어도 자신이 옆에 앉아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았으면 해서
저 꺼지기 직전인 불에 닿기를 바라면서 한 말에 윤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몇번인가 발작하듯 튀어오르던 윤진을 안정시키려고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감싸 잡았을 때
밀쳐내지 않고 이내 잠잠해진 것만으로 자신이 따라온 것이 영 의미없지는 않았다,고 위안했다
"... 여기는 무슨 일이냐? 인자 어디로 가야하는겨?"
내린 곳은 병원, 여수에서 제일 큰 병원이라고 했다
누가 편찮으신 건지, 윤진이 저렇게까지 동요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결국 묻고 만다
가만히 말을 고르듯 몇번 마른 침을 삼킨 윤진이 어렵게 고개를 돌려 병원의 한 쪽 구석을 가리킨다
"... 할머니... "
윤진이 가리킨 끝에 있는 '장례식장'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해태는 잠깐 침묵한다
아무래도 윤진을 앞까지데려다줬으면 좋겠지만,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있는 제 차림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든다
한마디를 꺼낸 것만으로 힘들었는지 깊게 몇번이나 심호흡 하고 선 윤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차분하게 묻는다
"윤진아"
"...?"
"인자 혼자 갈 수 있것냐?"
그제야 윤진은 해태가 서울에서부터 자신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인자 정신이 좀 들어?"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황망하게 올려다보는 윤진을 보다 후.. 하고 웃는다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린 걸 보니 안도해서인지 웃음이 나와버린다
해태의 질문에 윤진은 고개를 끄덕인다
"... 할머님이믄... 니가 할 일이 많겄다... 정신 차려야"
서울에 올라가기 전 치뤘던 제 할아버지 장례를 떠올리고 해태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 말에 '해야할 일'을 떠올린 윤진의 얼굴이 조금씩 또렷해진다
평소의 '조윤진'답게 무표정한 똘똘이 눈이 돌아온 걸 보고 해태는 다시 가만히 웃는다
"들어가봐야"
"어... 니는"
제 등을 떠미는 해태를 당황해서 돌아본다
"나가 같이 들어가서 뭘 한당가,"
장례식장에 같이 들어가자는 말도 이상하긴 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기도 미안하다
망설이는 윤진에게 차분하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등을 민다
"언능, 들어가, 밥 꼭 챙겨먹고, 인자부터는 체력전일 것이여"
의미를 모를 말을 덧붙이는 해태가 떠미는 대로 걸음을 뗀다
몇번인가 돌아보는데도 그때마다 그 자리에 선 해태는 그저 손을 휙휙 저어 어서 가라고 할 뿐이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 넌 어떻게 할거냐고 묻지 못했는데
=
해태가 아침에 머리를 만지며 불렀던 노래는 이것 ↓↓↓↓↓↓↓↓↓↓
W.H.I.T.E. 의 요즈음 난.
===================
사실상 8-1에 해당되는 내용이지만,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_-;; 일단 반쪽부터 올려..
다음주 토요일.에 기대했던 냔들 미안. ㅋ 이런 내용이 등장할 줄은 몰랐을텐데;;;
하아.... 읽어주는 냔들, 특히나 댓글로 기다렸다고, 공감해주는 냔들 고마워 ㅠㅠ
본편에서는 완전 가능성 하나도 없는 태만에 너무 미련 남은 것처럼 미련하게 구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ㅠㅠ
그리고 여사친한테 소라 까주면서도 그렇게 다정한 녀석이 진짜 마음먹고 다정하게 굴었으면 어떤 여자가 안 넘어갔겠냐고! 어! 이노무 제작진들아 ㅠㅠ 주변에 보면 무뚝뚝한 센스제로인 친구들도 썸타기 시작하면 엄청엄청(사람이 바뀐 것처럼) 다정하게 굴길래, 해태도 한번 다정의 끝을 갈 것처럼 써보고 있... 품도 넓고 남자답기도 한 해태는 지금 윤진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입니다.... 느껴지려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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